9화(5,504자)

이혼 도장 찍는 날, 서울 하늘에 균열 아홉 개가 열렸다

레벨 반씩 나눈 S급 이혼 부부헌터 · 남이랑

5월 7일 금요일 오전 열 시 오십팔 분⁠, 가사조정실 4의 탁자 위에 「⁠조정 합의서⁠」 두 장이 나란히 놓였다⁠. 하정임이 인주 뚜껑을 열려다 말고 서랍을 뒤졌다⁠. 인주가 말라 있었다⁠. 태호가 조끼 다섯 번째 주머니에서 새 인주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런 것도 들고 다니세요⁠?⁠”

“⁠시우 학교 서류에 도장 찍을 일이 많아서요⁠.⁠”

하정임은 인주와 태호를 번갈아 보다가 말없이 수첩에 적었다⁠. 현주가 고개를 빼고 보니 「⁠인주⁠」 두 글자였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오늘도 타이머는 안 돌립니다⁠.⁠”

현주는 도장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에 「⁠기현주⁠」 세 글자가 새겨진 나무 도장이었다⁠. 열두 해 전 혼인신고를 할 때 태호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현주가 인주에 도장을 눌렀다⁠. 붉은 인주가 글자 홈마다 배어들었다⁠. 도장이 종이로 내려가기 이 초 전이었다⁠.

세 사람의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울었다⁠. 재난 문자의 긴 경보음이었다⁠.

「⁠[서울시] 서울 곳곳 A급 균열 동시 발생 — 망원시장 · 홍대 앞 · 합정역 · 상암 경기장 · 여의도 협회 본부 앞 등 아홉 곳 · 인근 주민은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하십시오⁠」

창밖 북서쪽 하늘에서 보랏빛 금이 크게 벌어졌다⁠. 금 끝에서 가는 금들이 거미줄처럼 아홉 갈래로 뻗어 나갔다⁠. 가는 금은 서울 하늘 여기저기에서 멈추더니 하나씩 입을 벌렸다⁠.

하정임이 도장 든 현주의 손목을 가볍게 눌렀다⁠.

“⁠도장 잠깐 보류합니다⁠.⁠” 하정임은 일어나 캐비닛 문을 열었다⁠. 노란 협회 안전모가 들어 있었다⁠. 지난번 균열에서 돌려주지 않은 안전모였다⁠. “⁠저도 갑니다⁠. 아드님 학교가 망원동이죠⁠?⁠”

*

강변북로는 대피하는 차들로 막혀 있었다⁠. 태호의 SUV는 갓길로 달렸다⁠. 뒷자리 카시트 옆에 하정임이 안전모를 쓰고 앉아 손잡이를 꽉 쥐었다⁠. 현주는 조수석에서 칼끈을 고쳐 맸다⁠. 「⁠LV⁠.79⁠」 몸으로 메는 칼은 여전히 반 뼘 무거웠다⁠.

태호의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마포 담당에게 주는 협회 무전이었다⁠. 기태의 목소리였다⁠.

「⁠협회 상황실이다⁠. S급 열한 명 각 균열로 배정한다⁠. 변태호는 망원시장으로⁠. 기현주는 출동 정지 유지⁠.⁠」

“⁠회장님⁠, 변태호입니다⁠.⁠” 태호가 무전기를 들었다⁠. “⁠기현주는 제 보조 인원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보조 인원은 출입석 얘기다⁠.⁠」

“⁠통제선 단말도 S급이 손 같이 얹으면 열립니다⁠. 보조 인원은 등급을 안 묻습니다⁠. 회장님이 세 해 전에 만드신 규정이에요⁠.⁠”

무전이 한참 비었다⁠. 지직거리는 소리만 났다⁠.

「⁠…⁠…책임은 변태호가 진다⁠.⁠」

현주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시우였다⁠. 「⁠엄마 학교에서 망원 유수지 대피소로 왔어 기지 옆이야 이모도 왔어⁠」⁠. 이어서 한 통이 더 왔다⁠. 「⁠망원시장에 열린 거 칼국수집 골목이래⁠」⁠.

*

망원시장 골목 위 하늘에 보랏빛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에서 개만 한 메기 새끼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와 떡집 차양을 찢고 어묵 가게 진열대를 뒤엎었다⁠. 칼국수집 사장이 냄비 뚜껑을 방패처럼 들고 골목 입구에서 손님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헌터님⁠! 쑥떡 기계만 살려 줘요⁠!⁠”

협회 통제선 단말에 태호가 손을 얹었다⁠. 「⁠LV⁠.101 · S급⁠」⁠. 현주가 태호 손등 위에 손을 포갰다⁠. 「⁠보조 인원 1⁠」⁠. 현주의 손 아래에서 태호의 손등이 뜨거웠다⁠. 반은 원래 현주의 열이었다⁠.

태호가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하늘색 결계가 펼쳐졌다⁠. 레벨 81일 때는 사람 셋을 덮던 결계가 골목 하나를 통째로 덮었다⁠. 떡집 기계와 어묵 진열대와 칼국수집 간판이 하늘색 막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이 냄비 뚜껑을 내렸다⁠.

“⁠막타는 당신 거야⁠.⁠” 태호가 말했다⁠.

“⁠당신이 치면 더 빨라⁠.⁠”

“⁠당신 팔십 돼야 문 쳐⁠. 빨리 가⁠.⁠”

현주는 결계 안을 달렸다⁠. 메기 새끼들을 베고⁠, 차양 위로 뛰어올라 구멍 밑에 버티고 있던 우두머리의 아가미에 칼을 박았다⁠. 금빛 가루가 손등으로 들어왔다⁠. 「⁠LV⁠.79⁠」 숫자 밑의 가는 금빛 줄이 손톱만큼 차올랐다⁠.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하늘의 구멍이 지퍼를 올리듯 닫혔다⁠. A급 균열은 우두머리가 죽으면 닫혔다⁠.

칼국수집 사장이 냄비 뚜껑을 옆구리에 끼고 골목 끝에서 소리쳤다⁠. “⁠헌터님⁠! 마포는 닫지 말라니까요⁠! 아니⁠, 고마워요⁠! 아니⁠, 둘 다예요⁠!⁠”

봉재만의 드론이 골목 위로 날아왔다⁠. 재만은 기지 중계 천막에서 드론 넷을 동시에 띄우고 있었다⁠.

“⁠아아⁠, 망원시장 닫혔습니다⁠! 국내 1위가⁠…⁠… 결계만 칩니다⁠! 막타는 A급 아내분이 칩니다⁠!⁠”

「⁠1위가 결계만 침 ㄷㄷ⁠」

「⁠막타 양보 실화냐⁠」

「⁠A급인데 S급처럼 자르네⁠」

*

홍대 앞에서는 국내 5위 헌터가 먼저 와 있었다⁠. 대검을 든 젊은 남자였다⁠. 남자가 우두머리 머리 위로 뛰어오르는 순간 태호가 지팡이를 비틀었다⁠. 하늘색 막 한 장이 남자와 우두머리 사이에 쑥 끼어들었다⁠. 남자가 막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뭐 하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태호가 고개를 숙였다⁠. “⁠막타 예약석입니다⁠.⁠”

현주가 남자 머리 위를 넘어가 우두머리를 베었다⁠. 남자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하늘의 구멍이 닫히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금빛 줄이 또 조금 차올랐다⁠.

합정역 출구 계단에서는 현주의 머리 끈이 끊어졌다⁠. 머리카락이 눈을 덮는 순간 현주는 오른손을 등 뒤로 내밀었다⁠. 손바닥에 고무줄이 날아와 닿았다⁠. 보지 않고 받았다⁠. 현주가 머리를 묶는 사이 태호가 결계를 반 걸음 앞으로 밀어 주었다⁠. 묶고 나서 베었다⁠.

상암 경기장의 우두머리는 관중석 위를 헤엄쳤다⁠. 현주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 맨 꼭대기 난간에서 몸을 던졌다⁠. 경기장 전광판에 「⁠막타⁠」 글자가 떴다⁠. 경기장 관리인이 상황실 장난으로 띄운 것이었다⁠.

여의도 협회 본부 앞 균열은 다른 S급 셋이 이미 닫아 놓았다⁠. 태호의 SUV가 본부 앞을 지나갈 때 현주는 꼭대기층 회장실 창을 올려다보았다⁠. 창은 비어 있었다⁠. 라디오에서 국회 본청 앞이 대피 구역에 들어가 오후 두 시 법안 표결이 연기됐다는 소식이 나왔다⁠.

*

오후 네 시⁠, 서교동 주택가 골목에서 다섯 번째 균열을 닫고 차에 오르는데 태호가 운전대에 이마를 기댔다⁠. 코에서 피가 한 줄 흘러 윗입술에 닿았다⁠. 결계를 친 지 다섯 시간이 넘었다⁠.

현주는 조끼 두 번째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태호 코밑에 댔다⁠. 어느 주머니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손이 먼저 갔다⁠.

“⁠인천 때랑 똑같네⁠.⁠”

“⁠그때보다 결계가 열 배는 커⁠.⁠” 태호가 휴지를 받아 눌렀다⁠.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1위 하기 힘들다⁠.⁠”

뒷자리에서 하정임이 안전모를 벗고 땀을 닦았다⁠. “⁠남편분⁠, 지금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나중에 몰아서 하겠습니다⁠.⁠”

“⁠그 말 두 번째예요⁠.⁠” 하정임은 안전모를 도로 썼다⁠. “⁠세 번째는 안 받아요⁠.⁠”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진성의 목소리였다⁠.

「⁠망원 유수지 상공에 여섯 번째⁠. 대피소 바로 위입니다⁠.⁠」

*

망원 유수지 체육공원 대피소는 기지에서 둑길 하나 건너편이었다⁠. 대피소 지붕 위 하늘에 보랏빛 구멍이 열려 있었다⁠. 구멍 아래 운동장에서 대피한 아이들과 상인들이 체육관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체육관 창 하나에 시우 얼굴이 붙어 있었다⁠. 핫도그 이모가 시우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태호가 운동장 한가운데 지팡이를 찍었다⁠. 결계가 체육관 지붕까지 덮었다⁠. 하늘색 막이 깜박였다⁠. 다섯 시간을 버틴 막이었다⁠. 구멍에서 우두머리가 내려왔다⁠. 지금까지 본 A급 우두머리 가운데 가장 컸다⁠. 등에 마포 우두머리처럼 마석이 박혀 있었다⁠.

우두머리가 입을 벌렸다⁠.

“⁠하나⁠.⁠” 태호가 말했다⁠.

현주는 돌아보지 않고 칼등을 뒤로 내밀었다⁠. 지팡이 끝에 닿았다⁠.

“⁠둘⁠.⁠”

“⁠김밥⁠.⁠”

체육관 창 안에서 시우의 입이 같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현주는 알았다⁠. 금빛 막이 하늘색 위로 씌워졌다⁠. 숨이 막에 부딪혀 운동장 바닥으로 흩어졌다⁠. 현주는 흩어지는 물보라를 밟고 뛰어올랐다⁠.

칼이 마석 바로 아래를 꿰뚫었다⁠. 금빛 가루가 쏟아졌다⁠. 현주의 손등이 타는 듯 뜨거워졌고⁠, 숫자 밑의 금빛 줄이 끝까지 차올랐다⁠. 줄이 손등을 한 바퀴 휘감고 사라지자 숫자가 바뀌었다⁠.

「⁠LV⁠.80 · S급⁠」

체육관 창이 한꺼번에 덜컹거렸다⁠. 시우가 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렸다⁠.

“⁠팔십⁠! 엄마 팔십⁠!⁠”

태호가 지팡이를 짚은 채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한 달 치를 하루에 잡았네⁠.⁠”

“⁠당신이 다 넘겨줬잖아⁠.⁠”

“⁠넘겨준 게 아니고 돌려준 거야⁠. 반은 원래 당신 거였으니까⁠.⁠” 태호는 코밑의 피를 손등으로 훔쳤다⁠. 손등에서 「⁠LV⁠.101⁠」이 떠올랐다 꺼졌다⁠. “⁠이제 문 칠 수 있지⁠?⁠”

*

마포 기지 출입석 앞에는 기태가 서 있었다⁠. 협회 상황실 천막에서 막 나온 얼굴이었다⁠. 손에 은색 열쇠 하나를 쥐고 있었다⁠. 출입석 표면에 붉은 글자가 떠 있었다⁠. 「⁠잠금 · 협회장⁠」⁠.

머리 위에서 마포 균열이 크게 숨을 쉬었다⁠. 벌어질 때마다 둑길 너머 망원시장 하늘에 새 금이 희미하게 그어졌다가 지워졌다⁠. 열 번째였다⁠.

“⁠열쇠 주세요⁠, 회장님⁠.⁠”

“⁠못 줍니다⁠.⁠” 기태는 열쇠를 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 저걸 닫으면 내일 아침 지하철 두 노선이 멈춥니다⁠. 기지 사람 사백 명이 일당을 잃고⁠, 시장 손님이 끊깁니다⁠. 오늘 아홉 개는 닫았어요⁠. 다음 아홉 개는 법이 막습니다⁠. 표결은 미뤄졌지만 다음 주엔 됩니다⁠.⁠”

“⁠다음 아홉 개가 내년에 와요⁠. 그다음 해엔 또 와요⁠. 보고서에 회장님이 그렇게 받아 적으셨잖아요⁠.⁠”

“⁠그래서 레벨을 모아야 합니다⁠. S급 다섯을 새로 만들면⁠…⁠…⁠.⁠”

“⁠회장님⁠.⁠” 태호가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코밑에 마른 핏자국이 있었다⁠. “⁠오늘 아홉 개 중에 다른 S급 열 명이 셋 닫았어요⁠. 우리 둘이 여섯 닫았고요⁠.⁠”

기태가 태호를 보았다⁠. 지팡이 끝의 하늘색이 깜박였다가 다시 켜졌다⁠.

“⁠결계 몇 시간째예요⁠?⁠”

“⁠여섯 시간이요⁠.⁠”

기태는 열쇠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굳은살이 열쇠 머리에 눌려 하얬다⁠.

“⁠나는 마흔 해 동안 두 시간을 못 넘겼어요⁠.⁠” 기태가 말했다⁠.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선배가 막타를 칠 때까지 두 시간⁠. 그 두 시간을 넘기면 결계가 깨졌어요⁠.⁠”

마포 균열이 다시 벌어졌다⁠. 이번에는 금이 지워지지 않았다⁠. 대피소 체육관 지붕 위 하늘에 가는 보랏빛 선이 그어진 채 남았다⁠. 체육관 창에 붙은 아이들 얼굴이 보였다⁠. 기태도 보았다⁠.

기태는 오래 보지 않았다⁠. 출입석에 열쇠를 꽂고 돌렸다⁠. 붉은 「⁠잠금⁠」이 꺼졌다⁠.

“⁠들어가세요⁠.⁠” 기태가 열쇠를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닫으면 서울 불 끈 사람은 내가 됩니다⁠. 그건 내가 지죠⁠.⁠”

기태는 상황실 천막 옆에 세워 둔 협회 차량의 트렁크를 열었다⁠. 안에서 오래된 지팡이 하나를 꺼냈다⁠. 끝이 뿌옇게 바랜 결계사 지팡이였다⁠. 기태는 지팡이를 짚고 대피소로 가는 둑길을 걸어갔다⁠. 체육관 지붕 위의 가는 선 아래에 서서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낡은 하늘색 막이 체육관을 덮었다⁠. 작고 얇았지만 깨지지 않았다⁠.

현주가 출입석에 손바닥을 얹었다⁠. 「⁠LV⁠.80 · S급 · 출입 허가⁠」⁠. 태호가 옆에 손을 얹었다⁠. 「⁠LV⁠.101 · S급 · 출입 허가⁠」⁠.

둑길 위에서 하정임이 서류 봉투를 흔들며 뛰어 내려왔다⁠. 안전모가 비뚜름하게 돌아가 있었다⁠.

“⁠도장은요⁠? 도장⁠!⁠”

“⁠나와서요⁠!⁠” 현주와 태호가 동시에 소리쳤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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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차승객2026.11.06· 9화

    여섯 시간 동안 결계만 치면서 막타를 전부 넘기는 태호라니요. 도장 찍기 직전에 균열 아홉 개가 열리는 것도 억울한데, 국내 1위 남편의 보조 인원으로 들어가는 현주 얼굴이 계속 떠올라요.

    • 남이랑작가2026.11.06

      태호가 열두 해 동안 해 온 일을 처음으로 현주가 바로 뒤에서 본 날이에요. 염기태 회장과 마주 선 장면은 마지막 화에서 이어집니다.

이혼 도장 찍는 날, 서울 하늘에 균열 아홉 개가 열렸다 · 레벨 반씩 나눈 S급 이혼 부부헌터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