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16자)

팔 할

지리산에 풀어 준 호랑이 · 하윤슬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올 무렵⁠, 호단은 지난봄 멧돼지 냄새가 가장 짙던 남쪽 비탈로 내려갔다⁠. 너덜겅을 건너고 서어나무 숲을 지나는 동안 코를 땅에 붙였다⁠. 바위틈마다 오래된 냄새가 있었다⁠. 비린 털 냄새⁠, 흙을 파헤친 냄새⁠, 새끼 멧돼지들이 서로 몸을 비비고 간 냄새⁠. 냄새는 전부 식어 있었다⁠. 비를 여러 번 맞고 해를 여러 번 받은 냄새였다⁠.

서어나무 숲 끝에서 철망이 나왔다⁠. 호단의 머리보다 높았고⁠, 좌우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녹 냄새와 쓴 쇠 냄새가 났다⁠. 철망 아래쪽 마름모 구멍마다 거친 털이 한 올씩 끼어 있었다⁠. 멧돼지 털이었다⁠. 호단은 철망을 따라 오래 걸었다⁠. 털이 낀 자리가 여러 군데였고⁠, 철망 밑을 파 들어간 자리도 있었다⁠. 파 들어간 자리마다 돌이 채워져 있었고⁠, 돌에서는 사람 손 냄새가 났다⁠.

호단은 뒷다리에 힘을 모았다가 철망을 넘었다⁠. 배가 무거워 착지할 때 앞발이 깊이 박혔다⁠. 철망 너머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봄 멧돼지들이 뒹굴던 진흙 구덩이가 말라 갈라져 있었다⁠.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오래된 피 냄새가 났고⁠, 피 냄새에 섞여 매캐한 냄새가 났다⁠. 코끝이 따끔한 냄새였다⁠. 호단은 구덩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가장자리에 오래 코를 대고 있었다⁠. 피 냄새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배 속에서 무언가 뒤척였다⁠. 호단은 몸을 돌려 능선 너머로 향했다⁠. 여름에 보아 둔 바위굴이 있었다⁠. 바람이 들지 않고 바닥이 마른 굴이었다⁠. 입구가 좁아 큰 짐승은 들어오지 못했고⁠, 안은 호단이 몸을 둥글게 말 만큼 넓었다⁠. 여름 내내 호단은 굴 앞을 지날 때마다 들어가 냄새를 남겼다⁠.

굴에 닿기 전에 땅이 울렸다⁠. 발밑에서 시작해 배로 올라오는 울림이었다⁠. 나뭇가지에서 새들이 한꺼번에 날았다⁠. 울림이 멎고 한참 뒤에 바람을 타고 가루 냄새가 넘어왔다⁠. 아까 진흙 구덩이에서 맡은 매캐한 냄새를 백 배로 짙게 한 냄새였다⁠. 호단은 엎드려 기다렸다가 다시 걸었다⁠.

굴 입구에 바위 조각이 쏟아져 있었다⁠. 머리를 들이밀자 안쪽 천장에서 흙이 부슬부슬 떨어졌다⁠. 호단이 남긴 냄새 위에 돌가루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호단은 앞발로 돌 하나를 긁어 보고⁠, 뒷걸음질로 나왔다⁠. 귀를 뒤로 눕힌 채 굴에서 멀어졌다⁠. 발밑이 다시 울리기 전에 멀리 가고 싶었다⁠.

해가 기울 때까지 호단은 먹을 것을 찾았다⁠. 썩은 참나무 밑동을 앞발로 헤집어 굼벵이를 핥았고⁠, 개울가 돌을 뒤집어 가재 두 마리를 씹었다⁠. 가재 껍데기가 이빨 사이에서 바스러졌다⁠. 배는 조금도 차지 않았다⁠. 고라니 한 마리가 개울 건너 덤불에서 고개를 들었다가⁠, 호단이 몸을 낮추기도 전에 짧게 울고 사라졌다⁠. 몸이 무거워진 뒤로 호단은 첫걸음이 늦었다⁠.

바람이 골짜기 아래에서 올라왔다⁠. 소 냄새가 실려 있었다⁠.

*

오후 세 시⁠, 육한담은 센터 검사실에서 검사판의 작은 홈 여덟 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벽에 담아 온 배설물을 녹여 걸러 낸 물이 홈마다 들어 있었다⁠. 몸 안에 임신 호르몬이 많을수록 홈의 색이 짙어졌다⁠. 봄에 같은 검사를 했을 때는 연한 노란색이었다⁠. 지금은 여덟 홈이 전부 진한 갈색이었다⁠.

한담은 장갑을 벗고 달력을 넘겼다⁠. 수호랑이 산솔의 신호가 뱀사골 위에서 끊긴 것이 8월 중순이었다⁠. 끊기기 열흘 전에 두 목걸이의 점이 사흘 동안 한 자리에 겹쳐 찍혔다⁠. 범의 배 속에서 새끼는 석 달 남짓 자란다⁠. 한담은 11월 세 번째 주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연필심이 뚝 부러졌다⁠.

“⁠선배⁠, 누나 엄마 돼요⁠?⁠”

준호가 문틀에 기대 초코바를 깠다⁠.

“⁠아마 셋째 주⁠. 늦으면 넷째 주⁠.⁠”

“⁠와⁠. 그럼 저 삼촌이에요⁠?⁠”

“⁠너 사람이야⁠.⁠”

“⁠알아요⁠. 그래도 삼촌 하고 싶어요⁠.⁠”

한담은 호단을 찍은 새벽 사진 한 장을 골라 연해주 재활센터의 연구원에게 보냈다⁠. 답장은 한 시간도 안 되어 왔다⁠. 「⁠옆구리 보니 새끼가 있군요⁠. 이 시기 암컷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굴입니다⁠. 우리는 겨울에 굴 근처로 사람을 보내지 않습니다⁠. 산솔은 아직 소식이 없나요⁠?⁠」 한담은 마지막 줄에 답을 쓰지 못하고 창을 닫았다⁠.

검사실 문이 열리고 센터장 표정훈이 들어왔다⁠. 짙은 남색 정장 위에 센터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장관이 오는 날을 앞두고 표정훈은 날마다 정장을 입었다⁠. 표정훈은 갈색 홈 여덟 개를 내려다보다가 안경을 벗었다⁠.

“⁠확실합니까⁠?⁠”

“⁠확실해요⁠.⁠”

표정훈이 웃었다⁠. 반년 동안 한담이 본 표정훈의 웃음 가운데 가장 컸다⁠.

“⁠지리산 첫 새끼네요⁠. 백 년 만입니다⁠. 반년 행사 때 장관님이 직접 발표하시게 하죠⁠.⁠”

“⁠발표는 안 돼요⁠, 센터장님⁠.⁠”

“⁠왜요⁠?⁠”

“⁠발표하면 사람들이 와요⁠. 카메라도 오고 드론도 오고요⁠. 호단은 지금 굴을 찾고 있어요⁠. 연해주 사람들은 이 시기에 굴 근처로 사람을 안 보낸대요⁠.⁠”

“⁠굴 위치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도 모르잖아요⁠.⁠” 표정훈은 안경을 다시 썼다⁠. “⁠육 선생⁠, 새벽에 송아지가 죽었어요⁠. 마을은 사살하라고 하고⁠, 군청 게시판에는 이장님이 사진을 올렸습니다⁠. 새끼 밴 범을 누가 쏘라고 하겠습니까⁠? 발표가 호단을 지킵니다⁠.⁠”

한담은 대답 대신 검사판의 갈색 홈을 보았다⁠. 표정훈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아서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

마당에서 경적이 길게 울렸다⁠.

*

센터 마당에 1톤 트럭 한 대가 비스듬히 멈춰 있었다⁠. 짐칸에 덮은 파란 방수포 밑으로 누런 다리 네 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운전석에서 칠구가 내렸고⁠, 조수석에서는 이장 주영길이 메가폰을 품에 안고 내렸다⁠.

“⁠검안서 끊어 주쇼⁠. 보상 받을라믄 센터 검안서가 있어야 헌다매⁠.⁠”

한담은 장갑을 다시 끼고 짐칸에 올랐다⁠. 방수포를 걷자 밤새 얼었다 녹은 송아지에서 비린 물이 흘렀다⁠. 목덜미 송곳니 자국 둘레를 줄자로 재고 사진을 찍고⁠, 허벅지 뜯긴 자리를 찍었다⁠. 칠구는 짐칸 옆에 팔짱을 끼고 한담의 손을 지켜보았다⁠. 준호는 검사실 창문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표정훈이 서류철을 들고 나왔다⁠. 정장 차림이 트럭 옆에서 어색했다⁠. 표정훈은 칠구에게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펼쳤다⁠.

“⁠어르신⁠, 먼저 위로 말씀 드립니다⁠. 야생동물 피해 보상은 송아지 시가의 팔 할까지 나옵니다⁠. 서류 심사에 두 달쯤 걸리고요⁠.⁠”

“⁠팔 할⁠.⁠” 칠구가 손가락을 꼽았다⁠. “⁠삼백팔십에 팔 할이믄 삼백 남짓이여⁠. 두 달이믄 조합 이자가 두 번 나가고⁠.⁠”

“⁠나머지는 저희 센터에서 따로 위로금으로⁠…⁠…⁠.⁠”

“⁠적선 받을라고 온 것 아니여⁠.⁠” 칠구는 서류를 받지 않았다⁠. “⁠범을 잡아가쇼⁠. 협약서에 다시 잡는다고 써 놨잖여⁠.⁠”

“⁠협약서에는 세 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 번⁠.⁠” 칠구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봄에 도장 찍을 적에 범이 마을까지 내려온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혔어⁠. 산이 넓어서 사람 사는 디는 안 온다 혔제⁠.⁠”

“⁠반년 동안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담의 손이 시료 봉지를 쥐고 있었다⁠. 봉지가 손안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칠구가 고개를 돌려 한담을 보았다⁠. 한담은 줄자를 감았다⁠. 감는 동안 눈을 들지 않았다⁠.

주영길이 메가폰을 입에 대려다 말고 그냥 말했다⁠.

“⁠센터장님⁠, 회관 보일러는 고맙게 잘 쓰고 있소⁠. 그건 그거고⁠, 마을 사람들이 밤에 무서워서 화장실을 못 간다요⁠. 우리 집 할멈은 요강을 다시 꺼냈어⁠.⁠”

“⁠이장님⁠, 요강 사진은 군청에 올리지 마세요⁠.⁠”

준호가 창문 뒤에서 말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는데 주영길만 웃었다⁠.

칠구는 검안서 한 장만 받아 접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운전석 문을 열다 말고 검사실 창문을 보았다⁠.

“⁠준호야⁠. 집에 가자⁠. 소 멕일 사람이 없다⁠.⁠”

창문 뒤에서 대답이 없었다⁠. 칠구는 한참 창문을 보다가 운전석에 올랐다⁠. 트럭이 마당을 빠져나가는 동안 짐칸 방수포가 바람에 들썩였고⁠, 누런 다리 네 개가 덜컹거렸다⁠.

*

센터장실 창으로 해가 기울었다⁠. 표정훈은 정장 윗도리를 의자에 걸고 장관 행사 순서지를 고치고 있었다⁠. 「⁠범 귀환 반년 · 장관님 말씀 · 첫 새끼 소식(⁠가칭⁠)⁠」⁠. 한담은 문을 닫고 책상 앞에 멈췄다⁠.

“⁠반년 동안 한 번도 안 내려왔다고 하셨어요⁠.⁠”

“⁠안 내려왔지요⁠. 피해가 처음이니까⁠.⁠”

“⁠9월에 열한 번이에요⁠. 경계 안에 열한 번 들어왔어요⁠.⁠”

표정훈은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순서지의 「⁠가칭⁠」에 줄을 긋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들어왔다가 나갔어요⁠. 한 번도 외양간에 안 갔고⁠, 다음 점은 매번 선 밖이었습니다⁠. 그걸 내려왔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육 선생도 알잖아요⁠. 봄에 이장님 도장 받는 데 석 달 걸렸어요⁠. 마을이 등을 돌리면 다음 범 두 마리는 연해주에서 못 데려옵니다⁠. 지리산 범 복원은 호단 한 마리로 끝납니다⁠.⁠”

“⁠어르신한테 9월에 알렸으면 송아지를 밤에 우리 안에 넣으셨을 거예요⁠.⁠”

“⁠알렸으면 어르신은 봄부터 총을 꺼내셨을 겁니다⁠.⁠” 표정훈은 펜 끝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육 선생 메모는 받았어요⁠. 9월에⁠. 보고서에 무엇을 넣을지는 내가 정한다고 그때 말했고⁠, 육 선생은 알겠다고 했지요⁠.⁠”

한담은 대답하지 못했다⁠. 9월 스무날 저녁⁠, 한담은 메모 한 장을 센터장실 책상에 올려놓고 나왔다⁠. 「⁠근접 열한 번⁠. 마을 알림 필요⁠.⁠」 다음 날 표정훈이 알겠다고 했고⁠, 한담도 알겠다고 했다⁠. 다시 묻지 않았다⁠. 열한 번 모두 다음 점이 선 밖에 찍혔기 때문에⁠, 한담은 열두 번째도 그러리라 믿었다⁠.

“⁠발표는 내가 합니다⁠.⁠” 표정훈이 순서지를 접었다⁠. “⁠육 선생은 호단만 보세요⁠. 그게 육 선생 일이에요⁠.⁠”

*

밤 열 시⁠, 한담은 관사 책상에 지도를 펴 놓고 9월의 점들을 떠올렸다⁠. 노트북을 열면 기록이 나왔다⁠. 한담은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지도 위 무내골 둘레에 연필로 원을 그리고⁠, 외양간에서 개울까지 이어지는 짧은 선을 그었다⁠. 오늘 밤부터 외양간을 지키겠다고 새벽에 말한 사람은 한담이었다⁠. 표정훈은 밤샘 인력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장관 행사 준비로 사람이 모자랐다⁠.

책상 귀퉁이에 놓인 준호의 태블릿에서 단톡방 알림이 연달아 떴다⁠. 준호가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 두고 간 것이었다⁠.

「⁠주영길⁠: 아아 이장입니다⁠. 오늘 밤 개 풀어 놓지 마시오⁠. 범 선생 간식 됨⁠」

「⁠윗집 할매⁠: 우리 개는 묶어 놔도 짖는디 어쩌라고⁠」

「⁠주영길⁠: 짖게 두시오⁠. 짖는 개는 안 물어 감⁠. 아마도⁠」

「⁠방칠구⁠: 아마도는 빼라⁠」

한담은 태블릿을 뒤집어 놓았다⁠. 화면 불빛이 책상에 닿았다가 꺼졌다⁠.

준호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손에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얼굴이 하얬다⁠.

“⁠선배⁠.⁠”

준호는 화면을 한담 쪽으로 돌렸다⁠. 나미자의 문자였다⁠.

「⁠니 아부지 경찰서 가서 총 찾아왔다⁠. 멧돼지 잡는다고 서류 내고⁠. 외양간에 앉아 있다⁠. 밥도 안 묵고⁠.⁠」

한담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작업복 윗도리를 집었다⁠. 안테나는 두고⁠, 손전등과 폭음탄 두 개를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준호가 문간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선배⁠, 저도 가요⁠.⁠”

“⁠너는 여기서 점 봐⁠. 한 시간에 한 번⁠.⁠”

“⁠아부지가 총 들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여기 있어⁠.⁠”

준호는 비켜나며 초코바 하나를 한담의 조끼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폭음탄과 초코바가 부딪혔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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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가자리2026.11.01· 2화

    냄새가 전부 식어 있었다는 문장이 무서웠어요. 호단이가 왜 마을로 내려왔는지 알 것 같아요.

    • 하윤슬작가2026.11.01

      호단은 사람 말을 몰라도 산이 비었다는 건 코로 압니다. 철망에 낀 멧돼지 털 한 올이 이번 화의 답이에요.

팔 할 · 지리산에 풀어 준 호랑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