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45자)

흑수곡

객잔을 지키는 고수 노부부 · 하청오

아묵은 아침에 국수 그릇을 빈 채로 들고 올라왔다⁠. 형이 국수를 다 먹었다⁠. 아묵은 빈 그릇을 부엌 탁자에 놓고 마님에게 자랑하려다⁠, 먼저 전할 말을 떠올렸다⁠.

“⁠마님⁠, 사부님이 말 전하래요⁠. 형한테 그릇 받으러 내려갔더니 사부님이 노를 젓다가 저를 불렀어요⁠.⁠”

마님이 유선을 썰다 말고 검을 멈췄다⁠.

“⁠뭐라더냐⁠?⁠”

“⁠흑수곡 사람들이 그러는데⁠, 산이 무너지기 전날 밤에 땅 밑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났대요⁠. 비가 그친 뒤였대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같은 간격으로요⁠. 사부님이 그러셨어요⁠. 천둥은 하늘에서 치지 땅에서 안 친다⁠. 마님은 아실 거라고요⁠.⁠”

마님은 검을 칼집에 꽂았다⁠. 유선 기름을 닦지 않고 꽂았다⁠.

“⁠영감이 또 뭐라더냐⁠?⁠”

“⁠그리고⁠, 반 줌이 맞았대요⁠.⁠”

“⁠뭐가⁠?⁠”

“⁠소금이요⁠. 어제 천막 사람들이 물을 덜 마셨대요⁠.⁠”

마님은 한참 아묵을 보다가 부엌 벽에 걸린 삿갓을 내렸다⁠.

“⁠먹보 끌고 와라⁠. 흑수곡 간다⁠.⁠”

먹보는 흑수곡 가는 길에 세 번 주저앉았다⁠. 마님을 태우고 첫 번째 고개를 넘자 주저앉았고⁠, 아묵이 콩을 주자 일어났다⁠. 두 번째 고개에서 다시 주저앉자 마님이 내려서 걸었다⁠. 세 번째 고개에서는 마님이 다시 타겠다고 했고⁠, 먹보는 마님을 한 번 보고 미리 주저앉았다⁠.

“⁠먹보가 마님만 보면 주저앉습니다⁠.⁠”

“⁠영감 노새라 그렇다⁠. 주인 닮아서 내 말을 안 듣는다⁠.⁠”

“⁠콩 주는 마님 노새라고 하셨잖아요⁠.⁠”

“⁠오늘부터는 영감 노새다⁠.⁠”

*

청매는 흑수곡 어귀에서 삿갓을 벗었다⁠. 골짜기 한쪽 비탈이 통째로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붉은 흙과 돌과 부러진 나무가 골짜기 바닥을 메웠다⁠. 흙더미 위로 지붕 하나가 비스듬히 솟아 있었다⁠. 기와가 반쯤 남은 지붕이었다⁠. 지붕 아래에 사람이 살던 집이 묻혀 있었다⁠. 흙더미 가장자리에 누군가 꽂아 둔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가지마다 흰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묻힌 사람들 자리였다⁠.

아묵이 흰 천 조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묵의 어머니는 열여섯 해 전에 열병으로 이 골짜기에서 죽었다⁠. 산이 무너지기 훨씬 전이었다⁠. 그래도 아묵은 흰 천 조각들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청매는 비탈을 올려다보았다⁠. 무너진 자리 위쪽⁠, 산허리에 새 길이 나 있었다⁠. 낙등에서 운령으로 넘어가는 새 소금 길이었다⁠. 길은 바위 벼랑을 깎아 냈다⁠. 깎인 바위 면이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청매는 비탈을 기어 올라갔다⁠. 허리가 소리를 질렀다⁠. 청매는 허리를 무시했다⁠.

바위 면에 구멍이 줄지어 뚫려 있었다⁠. 팔뚝 굵기⁠, 팔 길이 깊이⁠. 같은 간격으로 열두 개⁠. 구멍 가장자리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청매는 구멍 하나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뺐다⁠. 손끝에 검은 가루가 묻었다⁠. 냄새를 맡았다⁠. 유황 냄새였다⁠.

“⁠마님⁠, 이거요⁠!⁠”

아묵이 흙더미 가장자리에서 나무 조각을 들고 있었다⁠. 상자 모서리였다⁠. 못이 박혀 있었고⁠, 판자 면에 낙인이 찍혀 있었다⁠. 소금 짐을 동여매는 매듭 모양이었다⁠. 청매는 같은 매듭을 며칠 전에 보았다⁠. 옥교의 비단 소매에 수놓여 있었다⁠.

“⁠사계 상단 표식이다⁠.⁠” 청매가 말했다⁠. “⁠화약 상자다⁠.⁠”

“⁠화약으로 산을 깎았어요⁠?⁠”

“⁠길을 내려고 바위를 깼다⁠. 비가 그친 뒤에⁠. 물 먹은 산비탈 위에서⁠.⁠”

아묵이 흙더미를 보았다⁠. 흰 천 조각들을 보았다⁠. 아묵은 나무 조각을 두 손으로 쥐었다⁠.

비탈 아래에서 발소리가 났다⁠. 푸른 옷이 여섯이었다⁠. 점창 호위들이 골짜기 어귀에서 검을 뽑으며 올라왔다⁠. 맨 앞에 손목에 붕대를 감은 녀석이 있었다⁠.

“⁠여기는 상단 공사터요⁠. 들어오면 안 되오⁠.⁠”

“⁠공사가 끝났는데 왜 지키오⁠?⁠” 청매가 물었다⁠.

“⁠행수님 명이오⁠. 그 조각 내려놓으시오⁠.⁠”

“⁠행수님이 무슨 명을 내렸는지 너희는 아느냐⁠?⁠”

“⁠묻지 말라셨소⁠.⁠”

청매는 웃었다⁠. 웃음이 목에서 걸려 나왔다⁠. 서른 해 전 청매도 묻지 않았다⁠.

*

아묵은 솥뚜껑 대신 먹보의 안장을 들었다⁠. 무언가는 들어야 했다⁠. 마님은 비탈 위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점창 호위 여섯이 비탈 아래에서 부채꼴로 퍼졌다⁠. 운롱봉의 진이었다⁠. 점창 검객 여섯이 아래에서 위로 찌르는 진이라고⁠, 마님이 언젠가 유선을 썰면서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아묵⁠, 내 등 뒤에 붙어라⁠.⁠”

“⁠사부님 자리 말씀입니까⁠?⁠”

“⁠영감 자리는 아무나 못 선다⁠. 너는 그냥 붙어라⁠.⁠”

아묵은 안장을 들고 마님 등 뒤에 붙었다⁠. 마님의 등은 사부님보다 좁았다⁠. 좁은 등이 단단했다⁠.

호위 여섯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마님은 비탈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섯 자루 검이 아래에서 위로 찔러 올라오는 순간⁠, 마님이 한 발을 뒤로 뺐다⁠. 발밑의 흙이 무너졌다⁠. 무너진 흙이 붉은 물결처럼 비탈을 타고 내려갔다⁠. 호위들의 발이 흙에 휩쓸렸다⁠. 셋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사양봉이다⁠.⁠” 마님이 말했다⁠. “⁠해 지는 봉우리⁠. 아래로 내려가는 걸음은 막지 말고 밀어 줘라⁠.⁠”

나머지 셋이 다시 올라왔다⁠. 마님은 검등으로 하나의 손목을⁠, 칼집으로 하나의 무릎을 쳤다⁠. 남은 하나가 마님의 등 뒤로 돌았다⁠. 아묵을 노렸다⁠. 아묵은 안장을 들어 막았다⁠. 칼이 안장 가죽에 박혔다⁠. 아묵이 안장을 비틀었다⁠. 사부님이 작대기를 비틀던 방향이었다⁠. 칼이 호위의 손에서 빠져나와 안장째 아묵의 손에 들렸다⁠.

호위들이 흙투성이로 비탈 아래로 물러났다⁠. 붕대 녀석이 마님을 올려다보았다⁠.

“⁠선배님은 누구시오⁠? 점창의 진을 어떻게 아시오⁠?⁠”

“⁠너희 사부한테 물어봐라⁠. 서른 해 전에 점창에서 이불 걷어차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마님이 검을 거두며 허리를 짚었다⁠. “⁠그리고 너희 행수한테 전해라⁠. 사저가 차 마시러 간다고⁠.⁠”

*

청매는 해가 질 무렵 사계 상단 객청에 들어갔다⁠. 신발에 붉은 흙이 묻어 있었다⁠. 옥교가 찻잔을 데우다 고개를 들었다⁠. 청매는 탁자 위에 나무 조각을 내려놓았다⁠. 낙인 찍힌 면이 위로 오게⁠.

옥교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옥가락지가 탁자에 닿아 딱 소리를 냈다⁠.

“⁠흑수곡에 다녀오셨네요⁠.⁠”

“⁠바위에 구멍이 열두 개 있더라⁠. 같은 간격으로⁠.⁠”

옥교는 한참 나무 조각을 보았다⁠. 손을 뻗어 낙인을 엄지로 쓸었다⁠.

“⁠사고였어요⁠, 사저⁠.⁠” 옥교가 말했다⁠. “⁠장마가 끝났다길래 공사를 시켰어요⁠. 바위를 깨야 길이 났어요⁠. 화약 쓰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했어요⁠. 사흘 뒤에 비가 다시 왔어요⁠. 나는 그 비를 몰랐어요⁠. 산이 그렇게 물을 먹었는지 몰랐어요⁠.⁠”

“⁠알고 나서는⁠?⁠”

“⁠천총 나리가 산사태로 올렸어요⁠. 상단이 했다고 하면 새 길이 막혀요⁠. 대리부가 길을 막고⁠, 마방 이천이 일을 잃어요⁠. 흑수곡 사람들은 이미 묻혔고요⁠. 묻힌 사람을 살릴 수는 없지만 산 사람 이천은 살릴 수 있었어요⁠.⁠”

“⁠방칠의 삼백은⁠?⁠”

“⁠삼백은 내가 몰래 쌀을 보냈어요⁠. 이름 없이⁠.⁠” 옥교가 청매를 보았다⁠. “⁠사저⁠, 천막에 쌀자루 들어온 거 영감님이 보셨을 거예요⁠. 흑수곡 사람들은 관에서 보낸 줄 알아요⁠.⁠”

청매는 화운이 지고 간 쌀자루를 떠올렸다⁠. 천막에 원래 있던 보리 두 자루를 떠올렸다⁠. 보리 자루에 찍힌 매듭이 있었는지 청매는 보지 않았다⁠.

“⁠그 조각⁠, 저한테 주세요⁠.⁠” 옥교가 말했다⁠. “⁠방칠한테 가져가면 방칠은 상단을 쳐요⁠. 상단을 치면 관군이 삼백을 다 베어요⁠. 사저가 그 피를 묻히려고요⁠? 서른 해 전에는 모르고 묻히셨지만⁠, 이번에는 알고 묻히시는 거예요⁠.⁠”

청매는 나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저고리 소매에 넣었다⁠.

“⁠서른 해 전에 나는 묻지 않았다⁠.⁠” 청매가 말했다⁠. “⁠묻지 않아서 모르고 묻혔다⁠. 이번에는 묻겠다⁠. 방칠한테⁠, 영감한테⁠, 그 삼백한테⁠. 이 조각을 보고 어떻게 할 거냐고⁠.⁠”

“⁠사저⁠, 그건 묻는 게 아니라 불을 지르는 거예요⁠.⁠”

“⁠불은 네가 먼저 질렀다⁠. 바위 구멍 열두 개에⁠.⁠”

*

화운은 밤늦게 솥 앞에 앉아 있었다⁠. 방칠이 맞은편에 앉아 장작을 넣었다⁠. 둘은 저녁 내내 말이 없다가⁠, 불이 잦아들 무렵 방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나루가 탄 뒤에 나는 노강으로 갔소⁠. 얼굴이 이래서 아무도 배를 안 맡겼소⁠. 소금 짐을 졌소⁠. 낙등에서 흑수곡까지⁠, 흑수곡에서 노강까지⁠. 스무 해를 졌소⁠. 짐꾼들이 하나둘 내 밑으로 왔소⁠. 얼굴 덴 놈이 짐은 제일 많이 진다고⁠.⁠”

“⁠가면은 언제부터 썼느냐⁠?⁠”

“⁠아이들이 울어서⁠. 짐꾼들 애들이 내 얼굴 보고 울었소⁠. 본주 제삿날 가면을 하나 샀더니 그날부터 안 울었소⁠. 귀신 가면 쓰니까 덜 무섭다더이다⁠.⁠” 방칠이 가면 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웃기지요⁠?⁠”

“⁠웃기다⁠.⁠” 화운이 말했다⁠. 웃지는 않았다⁠.

“⁠형님은 서른 해 동안 뭘 했소⁠?⁠”

“⁠국수 삶았다⁠. 외상 줬다⁠. 마누라하고 싸웠다⁠.⁠”

“⁠그게 다요⁠?⁠”

“⁠그게 다다⁠. 그게 어렵더라⁠.⁠”

방칠이 장작 하나를 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불꽃이 가면의 붉은 눈썹을 비췄다⁠.

“⁠형님⁠, 나는 형님이 미웠던 적이 없소⁠. 서른 해 동안 형님이 어디서 잘 살고 있기를 바랐소⁠. 그래서 화가 나오⁠. 잘 살고 있더이다⁠. 원수 여자하고⁠.⁠”

화운은 대답 대신 국자 없는 손으로 솥을 쓸었다⁠. 솥 바닥에 눌은 죽이 손바닥에 묻었다⁠.

비탈 위에서 등불 하나가 내려왔다⁠. 등불 뒤에 삿갓 쓴 그림자와 노새와 젊은 그림자가 따라왔다⁠. 노새는 비탈 중간에서 또 주저앉았다⁠. 화운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청매가 솥 앞에 와서 나무 조각을 화운 앞에 놓았다⁠. 말없이⁠. 화운도 말없이 조각을 들어 낙인을 보았다⁠. 방칠이 장작을 내려놓았고⁠, 아탄이 천막에서 나왔고⁠, 천막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흑수곡 바위에 화약 구멍이 열두 개였소⁠.⁠” 청매가 방칠에게 말했다⁠. “⁠상단이 길을 내려고 터뜨렸소⁠. 사흘 뒤에 비가 왔소⁠. 천총이 산사태로 올렸소⁠. 행수가 내 앞에서 인정했소⁠.⁠”

천막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가 일었다⁠. 처음에는 낮게⁠, 점점 높게⁠. 한 아낙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방칠은 가면을 쓴 채 조각을 화운에게서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낙인을 눌렀다⁠. 나무가 부러질 것처럼 눌렀다⁠.

“⁠할멈은 왜 이걸 나한테 가져왔소⁠?⁠” 방칠이 물었다⁠. “⁠이걸 보면 내가 무엇을 할지 알 텐데⁠.⁠”

“⁠알아야 할 사람이 알아야 하니까⁠.⁠” 청매가 말했다⁠. “⁠당신이 부엌에 와서 한 말이오⁠.⁠”

방칠은 조각을 쥔 채 천막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방칠을 보고 있었다⁠. 우는 사람도⁠, 주먹을 쥔 사람도 있었다⁠.

“⁠제삿날 밤에 소금을 친다⁠.⁠” 방칠이 말했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화운과 청매가 다 들었다⁠. “⁠소금만 가져오려 했다⁠. 이제는 행렬을 끌고 오는 상단 사람들도 붙잡아 온다⁠. 행수가 제 사람을 찾으러 올 때까지⁠.⁠”

“⁠칠아⁠.⁠” 화운이 일어났다⁠.

“⁠형님은 모르는 척하시오⁠. 그게 형님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서요⁠.⁠”

화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청매가 화운을 보았다⁠. 화운의 손이 또 떨렸다⁠.

천막 사람들이 흩어진 뒤⁠, 아묵은 국수 그릇을 들고 개울가로 갔다⁠. 아탄이 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탄이 그릇을 받았다⁠. 먹지 않고 무릎에 올려놓았다⁠.

“⁠아묵⁠.⁠” 아탄이 처음으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객잔 뒤로 도는 옛길⁠, 너 알지⁠?⁠”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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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채율2026.11.01· 9화

    국수 그릇 들고 와서 자랑하려다 말 전하는 아묵이 너무 귀여워요. 사부님이 무슨 말을 전했어요?

    • 하청오작가2026.11.01

      흑수곡 이야기예요. 마님이 유선을 썰다 검을 멈춘 이유가 다음 장면에 바로 나옵니다.

흑수곡 · 객잔을 지키는 고수 노부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