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74자)

본주 제삿날

객잔을 지키는 고수 노부부 · 하청오

아묵은 새벽에 장독대 뒤에서 객잔 뒷문 빗장을 오래 보았다⁠. 굵은 참나무 빗장이었다⁠. 뒷문을 열면 장독대 너머 대숲으로 오솔길이 이어졌다⁠. 오솔길은 대숲을 지나 능선을 타고 고개 서쪽으로 내려갔다⁠. 낙등에서 올라오는 새 소금 길과 고갯마루 아래 두 번째 굽이에서 만났다⁠. 사부님이 서른 해 전에 낸 길이었다⁠. 관군이 고갯마루를 지키면 이 길로 빠져나가려고 냈다고⁠, 아묵이 열 살 때 사부님이 말해 주었다⁠. 이후로 사부님은 이 길을 장작 하러 갈 때만 썼다⁠.

형은 어젯밤 개울가에서 아묵의 이름을 불렀다⁠. 열일곱 해 만이었다⁠. 이름을 부르고 나서 옛길을 물었다⁠. 아묵은 대답하지 못하고 올라왔다⁠. 형은 빈 그릇을 돌려주며 말했다⁠. 제삿날 해 질 녘에 뒷문 앞에 있겠다고⁠.

부엌에서 마님이 아묵을 불렀다⁠. 마님은 매화색 저고리를 새로 다려 입었다⁠. 은비녀를 꽂고⁠, 허리춤에 검을 찼다⁠. 탁자 위에 백자 찻잔 둘이 나란히 있었다⁠. 서른 해 동안 제삿날마다 쓴 잔이었다⁠. 한 잔은 입술 닿는 자리에 금이 가 있었다⁠. 사부님이 쓰는 잔이었다⁠.

“⁠아묵⁠, 이 잔 금 간 거 언제부터냐⁠?⁠”

“⁠제가 열두 살 때 떨어뜨렸습니다⁠. 사부님이 마님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님이 아시면 저를 혼내실 거라고요⁠.⁠”

“⁠영감이 혼났겠지⁠.⁠”

“⁠예⁠, 그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님이 금 간 잔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쓸다가 웃었다⁠. 아묵은 마님이 웃는 것을 며칠 만에 보았다⁠.

“⁠사부님 안 오시면요⁠?⁠”

“⁠그럼 한 잔은 내가 들고⁠, 한 잔은 본주가 들겠지⁠.⁠”

“⁠본주님도 잔을 드세요⁠?⁠”

“⁠서른 해 동안 우리 잔을 받아 줬으니⁠, 한 번쯤 들어 주겠지⁠.⁠”

마님은 찻잔 둘을 무명에 싸서 소매에 넣었다⁠. 문턱을 넘다가 돌아보았다⁠.

“⁠솥 불 꺼뜨리지 마라⁠. 오늘 밤에는 손님이 많을 거다⁠.⁠”

아묵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님이 아는지 모르는지 아묵은 알 수 없었다⁠.

*

청매는 본주묘 마당에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 제삿날에는 아낙들이 떡을 찌고 사내들이 술을 거르느라 마당이 어수선했다⁠. 오늘은 떡도 술도 뒷전이었다⁠. 사람들은 본주 상 앞에 반원으로 앉아 청매를 보았다⁠. 청매 혼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마님⁠, 영감님은요⁠?⁠” 콩비지 아낙이 물었다⁠.

“⁠오고 있소⁠.⁠”

“⁠어디서요⁠?⁠”

“⁠천막에서⁠.⁠”

마당에 웃음이 번졌다⁠. 대장간 사내가 무릎을 쳤다⁠. 청매는 본주 상 앞으로 걸어가 무명을 풀었다⁠. 찻잔 둘을 나무 받침에 나란히 놓았다⁠. 받침 가운데의 오목한 자국에 잔 굽이 딱 맞게 들어갔다⁠.

촌장 할멈이 낮은 의자에 앉아 지팡이를 무릎에 얹었다⁠. 할멈은 청매를 보고⁠, 금 간 잔을 보고⁠, 하늘을 보았다⁠.

“⁠해 지면이다⁠.⁠”

“⁠알고 있소⁠.⁠”

“⁠화리서는 내 품에 있다⁠. 해 지고 혼자면⁠, 본주 앞에서 태운다⁠. 태우면 갈라선 거고⁠, 땅은 마을 거다⁠.⁠”

“⁠알고 있소⁠.⁠”

해가 천천히 기울었다⁠. 청매는 본주 상 옆에 꼿꼿이 앉아 고갯길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떡을 먹기 시작했다⁠. 술을 걸렀다⁠. 이야기했다⁠. 소금 한 수레면 사계 서당에 보내고도 남는다⁠, 소금 두 수레면 사위 집 지붕을 갈겠다⁠. 사계에서 온 상단 심부름꾼 하나가 마당 구석에서 촌장 할멈에게 허리를 굽혔다가 물러났다⁠. 청매는 심부름꾼의 소매에 수놓인 매듭을 보았다⁠.

청매는 허리가 아팠다⁠. 꼿꼿이 앉아 있으니 더 아팠다⁠. 허리를 굽히면 마을 사람들이 진 줄 알 것이었다⁠. 청매는 허리를 펴고 있었다⁠. 서른 해 동안 화운이 옆에 앉아 있을 때는 허리가 아픈 줄 몰랐다⁠. 화운이 옆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서⁠, 대꾸하느라 허리 생각을 못 했다⁠.

해가 창산 봉우리에 닿았다⁠. 대장간 사내가 술잔을 들었다⁠.

“⁠자⁠, 이제 반 각 남았네⁠. 마님⁠, 섭섭하시겠지만 소금 한 수레 나오면 첫 국수는 우리가 사 드릴게요⁠. 운매객잔 말고 다른 데서⁠.⁠”

청매는 대장간 사내를 보았다⁠. 대장간 사내가 술잔을 내렸다⁠.

*

아묵은 해가 창산 봉우리에 닿기 전에 천막으로 뛰어 내려갔다⁠. 형과 사내들이 천막 어귀에서 칼과 작대기를 챙기고 있었다⁠. 형이 아묵을 보았다⁠. 아묵은 형을 지나쳐 솥 앞으로 갔다⁠.

사부님은 솥 앞에 앉아 있었다⁠. 노를 쥐고 있었다⁠. 솥에는 죽 대신 찻물이 끓고 있었다⁠. 찻잎이 물 위에서 돌았다⁠. 사부님은 노로 찻물을 젓지도 않고 그냥 보고 있었다⁠.

“⁠사부님⁠!⁠”

“⁠해가 아직 남았다⁠.⁠”

“⁠아니요⁠, 이제 없습니다⁠. 창산에 닿았습니다⁠. 마님이 거기서 혼자 앉아 계십니다⁠. 대장간 아저씨가 마님한테 다른 데서 국수 사 주겠대요⁠!⁠”

사부님의 노가 솥 가장자리에 딱 소리를 냈다⁠.

“⁠아묵⁠, 내 손 봐라⁠.⁠”

사부님이 노를 놓고 두 손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아묵은 사부님의 손을 보았다⁠. 국자를 쥐고 열일곱 해 동안 아묵에게 국수를 떠 준 손이었다⁠. 아묵이 열 살 때 장대질을 가르쳐 준 손이었다⁠.

“⁠잔을 들면 쏟는다⁠. 쏟으면 본주가 안 받는다⁠.⁠”

“⁠사부님은 맨날 그러십니다⁠!⁠” 아묵이 소리를 질렀다⁠. 아묵이 사부님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처음이었다⁠. 천막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맨날 남의 밥은 퍼 주시면서⁠, 마님 잔은 한 번도 같이 안 들어 주시잖아요⁠! 쏟을까 봐 안 들어 주시는 거면⁠, 그건 마님 망신 안 시키려는 게 아니고 사부님 망신 안 당하시려는 거잖아요⁠!⁠”

사부님이 아묵을 보았다⁠. 긴 눈썹 밑의 눈이 아묵을 오래 보았다⁠. 아묵은 숨이 찼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눈을 내리지 않았다⁠.

사부님이 일어났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사부님은 천막에서 낡은 주전자를 하나 집어 와 솥의 찻물을 노로 떠서 부었다⁠. 주전자 뚜껑을 덮고⁠,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천막 솥에서 끓인 차다⁠.⁠” 사부님이 말했다⁠. “⁠본주가 안 받으면⁠, 삼백이 끓인 차를 안 받는 거다⁠.⁠”

사부님은 주전자를 안고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걸음이 빨라지다가 비틀거리다가 다시 빨라졌다⁠. 아묵은 따라가려다 멈췄다⁠. 천막 어귀에서 형이 아묵을 보고 있었다⁠.

“⁠아묵⁠.⁠” 형이 말했다⁠. “⁠해 질 녘이다⁠.⁠”

아묵은 사부님의 등을 보았다⁠. 흰머리 매듭이 비탈을 따라 멀어졌다⁠. 아묵은 형을 보았다⁠. 형의 허리춤에서 산다화 주머니가 흔들렸다⁠. 열일곱 해 만에 형이 아묵의 이름을 불렀다⁠.

아묵은 형에게로 걸어갔다⁠.

*

청매는 마당 입구에서 거친 숨소리를 먼저 들었다⁠. 다음에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해가 창산 너머로 반쯤 넘어간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대장간 사내가 술잔을 떨어뜨렸다⁠.

화운이 마당 입구에 서 있었다⁠. 흰머리 매듭이 반쯤 풀렸고⁠, 짙은 갈색 옷 앞섶이 땀에 젖었다⁠. 두 손으로 주전자를 안고 있었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올랐다⁠.

“⁠늦었소⁠.⁠” 화운이 말했다⁠.

“⁠알고 있소⁠.⁠”

화운은 본주 상 앞으로 걸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비켜 주면서 다들 화운의 손을 보았다⁠. 주전자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청매는 받침 위의 찻잔 둘에 화운의 주전자로 차를 따랐다⁠. 청매가 따랐다⁠. 화운은 손이 떨려서 못 따랐다⁠. 찻물에서 천막 장작 연기 냄새가 났다⁠.

“⁠같이 드시오⁠.⁠” 촌장 할멈이 말했다⁠.

화운이 받침의 한쪽 끝을 잡았다⁠. 청매가 반대쪽 끝을 잡았다⁠. 받침이 기울었다⁠. 화운의 손이 떨려서 화운의 잔에서 찻물이 출렁였다⁠. 금 간 자리까지 찻물이 차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대장간 사내가 엉덩이를 들었다⁠.

청매가 받침을 놓았다⁠. 한 손을 받침에서 떼어 화운의 손등 위에 얹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화운에게 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화운의 옆에 서서 같은 곳을 보려고 돌렸다⁠. 청매의 어깨가 화운의 팔에 닿았다⁠. 청매의 등이 화운의 가슴에 반쯤 기댔다⁠. 화운의 떨림이 청매의 등으로 넘어왔다⁠. 청매의 등은 떨리지 않았다⁠. 떨림이 청매의 등에 닿아 잦아들었다⁠.

“⁠숨 쉬지 마시오⁠.⁠” 청매가 말했다⁠. “⁠등이 울리오⁠.⁠”

둘은 받침을 함께 들었다⁠. 함께 본주 상에 올려놓았다⁠. 찻물은 금 간 자리에서 출렁이다가 멈췄다⁠. 한 방울도 넘치지 않았다⁠.

마당이 조용했다⁠. 촌장 할멈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할멈이 품에서 화리서를 꺼내 보이고⁠, 도로 품에 넣었다⁠.

“⁠서른한 번째다⁠.⁠” 할멈이 말했다⁠. “⁠본주가 받았다⁠. 땅은 한 해 더 너희 거다⁠.⁠”

대장간 사내가 털썩 앉았다⁠. 콩비지 아낙이 떡을 내려놓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 사이로 소추 또래의 마을 아이 하나가 박수를 쳤다⁠. 아무도 따라 치지 않았다⁠. 아이는 혼자 끝까지 쳤다⁠.

*

화운은 본주묘 돌계단에 앉아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웠다⁠. 손은 아직도 조금 떨렸다⁠. 마을 사람들은 떡과 술을 챙겨 하나둘 돌아갔다⁠. 상단 심부름꾼은 제일 먼저 사라졌다⁠. 청매가 찻잔 둘을 무명에 싸서 소매에 넣고 화운 옆에 앉았다⁠. 한 칸 떨어져서⁠.

“⁠영감 차에서 연기 냄새가 났소⁠.⁠”

“⁠천막 장작이 생솔이라 그렇소⁠.⁠”

“⁠본주가 연기 냄새 나는 차를 받았소⁠.⁠”

“⁠본주도 서른 해 동안 우리 차만 마셔서 질렸을 거요⁠.⁠”

청매가 콧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웃음이었다⁠. 화운은 옆을 보지 않고도 알았다⁠.

“⁠영감⁠, 이제 어디로 가오⁠?⁠”

“⁠천막으로⁠.⁠”

청매의 콧소리가 멎었다⁠.

“⁠칠이가 오늘 밤 소금 행렬을 친다고 했소⁠.⁠” 화운이 말했다⁠. “⁠삼백이 다 들었소⁠. 나도 들었소⁠. 모르는 척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칠이가 그랬소⁠. 칠이 말이 맞았소⁠. 서른 해 동안 나는 모르는 척을 잘했소⁠. 금사방이 소금을 어디서 빼돌리는지도⁠, 임자가 왜 배를 아래로만 모는지도⁠.⁠” 화운이 일어났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오늘은 모르는 척 안 하겠소⁠. 칠이를 막으러 가오⁠.⁠”

“⁠혼자⁠?⁠”

“⁠칠이는 나한테 칼을 안 겨누오⁠.⁠”

“⁠칠이 사람들은 영감을 모르오⁠. 관군도 영감을 모르오⁠.⁠” 청매도 일어났다⁠. 허리를 짚었다⁠. “⁠같이 가오⁠.⁠”

“⁠임자 허리는⁠?⁠”

“⁠영감 손은⁠?⁠”

둘은 서로를 보았다⁠. 해가 넘어간 하늘에 노을이 붉었다⁠. 고갯마루 객잔의 부엌 연기가 노을 속으로 올라갔다⁠. 연기 너머 능선에서 불빛 하나가 대숲을 따라 움직였다⁠. 등불이었다⁠. 객잔 뒤 옛길이었다⁠.

화운이 불빛을 보았다⁠. 청매도 보았다⁠.

“⁠저 길을 아는 사람은 우리 둘하고⁠…⁠.⁠” 청매가 말을 멈췄다⁠.

화운은 대답하지 않고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청매가 한 걸음 앞에서 걸었다⁠. 등을 보이며⁠.

*

아묵은 해가 넘어가던 무렵 객잔 뒷문 빗장을 들어 올렸다⁠. 참나무 빗장이 무거웠다⁠. 형과 사내 열이 장독대 뒤에서 기다렸다⁠. 다들 칼과 작대기를 들었다⁠. 가면을 쓴 방칠이 맨 뒤에 있었다⁠.

빗장이 빠졌다⁠. 뒷문이 삐걱 열렸다⁠. 대숲에서 바람이 내려와 장독 뚜껑들을 울렸다⁠.

“⁠이 길로 능선을 타면 두 번째 굽이 위로 나옵니다⁠.⁠” 아묵이 말했다⁠. “⁠행렬이 굽이를 돌 때 위에서 내려다보입니다⁠. 사부님이 서른 해 전에 낸 길입니다⁠. 관군을 피하려고요⁠.⁠”

“⁠너는 여기까지만 해⁠.⁠” 형이 말했다⁠. “⁠돌아가⁠.⁠”

“⁠저도 갑니다⁠. 길이 두 번 갈라집니다⁠. 밤에는 모르십니다⁠.⁠”

형이 아묵을 보았다⁠. 방칠이 가면 구멍으로 아묵을 보았다⁠. 방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묵은 등불을 들고 대숲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솥이 끓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마님 말대로였다⁠. 오늘 밤 손님이 많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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