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38자)

줄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아침 일곱 시 반⁠, 금채는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두 번 발랐다⁠. 처음 바른 것을 휴지로 지우고 한 번 더 발랐다⁠. 학원 상담 날에 바르는 색이었다⁠. 화장대 위에 사내 예금 통장과 편우곤의 도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롬이 학교 데려다줘⁠. 당신은 아홉 시까지 회사 가면 되잖아⁠.⁠”

“⁠같이 가요⁠. 학교 들렀다가⁠.⁠”

“⁠아니⁠. 나 혼자 가⁠. 당신 얼굴 보면 마음 약해져⁠. 우곤 씨 얼굴이라서⁠.⁠”

금채는 통장과 도장을 핸드백에 넣고 먼저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아롬은 새 운동화를 신고 앞장서서 걸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에 문방구가 두 개 있었고⁠, 아롬은 두 문방구 앞에서 다 멈췄다⁠.

“⁠아빠⁠, 학교 가는 길 몰라⁠? 왜 자꾸 나 따라와⁠?⁠”

“⁠아빠가 오늘 길을 좀 까먹었어⁠.⁠”

“⁠아빠 요새 다 까먹어⁠. 엄마가 아빠 바보 됐대⁠.⁠”

“⁠엄마가 그랬어⁠?⁠”

“⁠응⁠. 근데 착한 바보래⁠.⁠”

교문 앞에서 아롬은 손을 흔들고 뛰어 들어갔다⁠. 하얀 운동화 뒤축이 운동장 흙을 튀겼다⁠. 용준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 이십 분⁠. 상계동에서 을지로까지 지하철로 사십 분⁠. 용준은 역까지 뛰었다⁠. 뛰어도 숨이 넘어가지 않는 몸이 오늘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

본사 2층 자금부 앞 복도는 아홉 시 십 분에 이미 사람으로 막혀 있었다⁠. 자금부 사무실 벽에 뚫린 창구는 쇠창살이 달린 작은 창이었다⁠. 창살 너머에서 경리 직원이 고무 골무를 낀 손으로 전표를 넘겼다⁠. 창구 맨 앞에 금채가 서 있었다⁠. 금채 뒤로 작업복 위에 외투를 걸친 아주머니들이 줄을 이었다⁠. 안산 봉제반이었다⁠. 토요일 마당에서 떡을 받아 간 얼굴들이었다⁠.

“⁠회장님이 월요일에 와서 찾아가라 캤다 아이가⁠.⁠”

“⁠그래서 첫차 타고 왔다⁠. 떡은 반만 묵었다⁠.⁠”

아주머니들 뒤로 본사 직원들이 하나둘 붙었다⁠. 총무부 대리⁠, 기획실 여직원⁠, 영업1과 과장⁠. 줄은 복도 끝을 돌아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 벽에 사람들 말소리가 웅웅 울렸다⁠. 자금부 안에서 전화벨이 쉬지 않고 울렸다⁠. 대구 공장⁠, 구미 공장에서 오는 전화였다⁠. 자금부 김 상무가 수화기를 양쪽 귀에 하나씩 대고 있었다⁠.

“⁠네⁠, 네⁠, 아무 일도 없습니다⁠. 통장 정리하러 온 겁니다⁠.⁠” 김 상무의 짧은 머리 밑으로 땀이 한 줄 흘렀다⁠.

창구 안의 경리 직원이 금채의 통장을 받아 들고 김 상무를 돌아보았다⁠. 김 상무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저었다⁠. 경리 직원의 고무 골무 낀 손이 통장 위에서 멈췄다⁠.

“⁠사모님⁠, 출금은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금고 담당이 은행 갔다가 오는 중이라서요⁠.⁠”

“⁠기다릴게요⁠. 얼마든지⁠.⁠”

금채는 창구 턱에 팔꿈치를 올렸다⁠. 줄이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

용준이 계단을 뛰어올라 왔을 때 줄은 1층 로비까지 내려와 있었다⁠. 용준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는 얼굴들이 용준을 보았다⁠. 대책반장이었다⁠. 안산 아주머니 하나가 용준의 팔을 잡았다⁠.

“⁠반장님⁠, 우리 돈 있지예⁠? 있다 캐 주이소⁠.⁠”

용준은 대답하지 않고 창구 앞으로 갔다⁠. 금채가 고개만 돌려 용준을 보았다⁠. 둘 사이에 한 뼘이 남았다⁠.

“⁠사모님⁠.⁠”

“⁠나 여기 줄 서 있어요⁠. 새치기하지 마세요⁠.⁠”

“⁠제발⁠.⁠”

“⁠금고 담당이 은행 갔다 온대⁠. 오면 받을 거야⁠.⁠”

“⁠금고 담당은 안 옵니다⁠. 금고가 비어서요⁠.⁠”

용준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금채 바로 뒤의 아주머니는 들었다⁠. 아주머니의 눈이 커졌다⁠. 금채가 아주머니 얼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금채가 고르는 차례였다⁠. 금채가 큰 소리로 한마디만 하면 줄은 계단에서 정문까지 갈 것이었다⁠.

용준은 금채가 입을 열기 전에 몸을 돌렸다⁠. 자금부 앞 복도에 놓인 철제 책상 위로 올라갔다⁠. 구두 밑에서 서류철이 미끄러졌다⁠. 복도의 얼굴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용준은 2027년에 서른 해 동안 수천 번 보고를 했다⁠. 사람들 앞에서 숫자를 말하는 법은 몸이 알았다⁠.

“⁠여러분⁠, 대책반장 편우곤입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오늘 아침 일곱 시에 제가 금고를 열어 봤습니다⁠. 사내 예금 칠억⁠, 다 있습니다⁠.⁠”

거짓말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자기 귀에 들렸다⁠.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그리고 회장님이 어젯밤 결정하셨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사내 예금을 그대로 두시는 분께는 연말 특별 이자를 얹어 드립니다⁠. 오늘 빼시는 분은 약정 이자만 나갑니다⁠. 회장님이 나라가 어려울 때 식구들 돈부터 불려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복도가 조용해졌다⁠. 다음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계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말 특별 이자가 얼마냐고⁠, 금요일이면 나흘이라고⁠, 나흘 기다리면 얼마냐고⁠.

“⁠반장님이 보증합니꺼⁠?⁠”

안산 아주머니가 물었다⁠. 용준은 책상 위에서 아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보증합니다⁠. 제 이름 걸고⁠.⁠”

편우곤의 이름이었다⁠.

아주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의 아주머니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회장님도 그라고⁠, 반장님도 그라믄⁠.⁠”

“⁠나흘이믄 버스비 빠지겠다⁠.⁠”

줄 끝에서부터 사람이 빠져나갔다⁠. 본사 직원들이 먼저 자리로 돌아갔고⁠, 아주머니들은 계단참에 모여 서서 의논하다가 하나둘 내려갔다⁠. 이십 분 뒤 창구 앞에는 금채 하나만 남았다⁠.

용준은 책상에서 내려왔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서른일곱 살의 무릎이 처음으로 후들거렸다⁠.

금채가 창구 쇠창살 너머의 경리 직원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출금 말고⁠, 통장 정리만 해 주세요⁠.⁠”

경리 직원이 통장을 기계에 넣었다⁠. 기계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숫자를 찍었다⁠. 천오백만 원 남짓⁠. 아무것도 빠지지 않은 숫자였다⁠. 금채는 통장을 받아 핸드백에 넣고 용준 앞을 지나갔다⁠. 멈추지 않고 말했다⁠.

“⁠우곤 씨 얼굴로 거짓말하지 마⁠. 우곤 씨는 거짓말을 못 해서 승진이 맨날 늦었어⁠.⁠”

금채의 구두 소리가 계단으로 내려갔다⁠. 용준은 구두 소리가 끝날 때까지 책상 모서리를 놓지 못했다⁠.

*

비상계단 문을 열자 담배 연기가 확 끼쳤다⁠. 순구가 계단참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밤새 고속버스를 탄 얼굴이었다⁠. 발밑에 꽁초가 셋 있었다⁠.

“⁠다 봤다⁠.⁠”

“⁠순구야⁠.⁠”

“⁠책상 위에서 하는 거 다 봤다⁠. 금고 열어 봤다꼬⁠? 연말 특별 이자⁠? 니 언제부터 그래 말을 잘했노⁠?⁠”

순구가 일어났다⁠. 키가 용준보다 반 뼘 작았는데 계단 한 칸 위에 서니 눈높이가 같았다⁠.

“⁠니 지금 회장이랑 똑같다⁠.⁠”

용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토요일 원단 창고에서 들은 말을 오늘 책상 위에서 그대로 했다⁠. 문을 열어 놓으면 아무도 안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내 엄마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수술한다⁠. 니가 방금 저 아지매들한테 금요일에 이자 얹어 준다 캤제⁠. 내도 금요일까지 기다리믄 이자 받나⁠? 그라믄 내 엄마는 금요일까지 허리 붙들고 누워 있나⁠?⁠”

“⁠내가 구해 줄게⁠. 오늘 안에⁠.⁠”

“⁠니가 무슨 돈으로⁠? 니 돈 천오백도 저 금고에 있다메⁠. 아이⁠, 없다메⁠. 금채 씨가 창구에서 통장 정리만 하는 거 봤다⁠. 돈이 있으믄 금채 씨가 그냥 가겠나⁠?⁠”

순구는 마지막 꽁초를 비벼 끄고 계단 위를 보았다⁠. 4층이었다⁠.

“⁠회장님이 여덟 시 반에 오라 캤는데⁠, 줄 구경하느라 늦었다⁠. 회장님은 떡이라도 주더라⁠. 니는 말만 준다⁠.⁠”

순구가 계단을 올라갔다⁠. 용준은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

*

2층 복도로 돌아오자 막내가 철제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용준이 올라갔던 책상이었다⁠. 막내는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철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과장님⁠, 방금 하신 말씀 진짜입니까⁠? 연말 특별 이자⁠.⁠”

“⁠아니⁠.⁠”

막내가 서류철을 쥔 채 멈췄다⁠. 용준은 막내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막내는 서른 해 뒤의 용준이 어떻게 사는지 아직 몰랐다⁠. 거짓말을 한 번 할 때마다 서른 해 뒤에 무엇을 갚는지도 몰랐다⁠.

“⁠그럼 금고는요⁠?⁠”

“⁠비었어⁠.⁠”

막내는 서류철을 책상 위에 반듯하게 쌓았다⁠. 손이 떨렸는데 모서리는 정확히 맞췄다⁠.

“⁠알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막내는 서류철을 들고 계단으로 갔다⁠. 계단참에 남아 있던 안산 아주머니 둘에게 다가가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아주머니들이 막내 팔짱을 끼었다⁠.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지켰다⁠.

*

영업2과 전화기가 용준을 찾았다⁠. 구미 공장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직기 소리가 먼저 오고 하소례의 큰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반장⁠, 본사에 줄 섰다메⁠? 우리 반 아지매들이 전화통 붙들고 난리다⁠. 니가 책상 위에 올라가서 이자 준다 캤다꼬⁠?⁠”

“⁠소문이 빠르네요⁠.⁠”

“⁠소문이 직기보다 빠르다⁠. 니 말 맞나⁠?⁠”

“⁠반장님한테는 거짓말 안 하겠습니다⁠. 이자는 없습니다⁠. 금고도 비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직기 소리만 한참 들렸다⁠. 쉭⁠, 탁⁠, 쉭⁠, 탁⁠. 하소례가 숨을 내쉬었다⁠.

“⁠그라믄 니가 말한 미국 주문은⁠?⁠”

“⁠수요일까지 견본 한 필입니다⁠. 그 견본이 있어야 돈 나올 구멍이 하나 생깁니다⁠.⁠”

“⁠수요일⁠? 오늘이 월요일이다⁠. 원사 준비하고 경사 걸고 하믄 오늘 밤부터 꼬박 짜야 된다⁠. 야간조 아지매들 잠 못 잔다⁠.⁠”

“⁠압니다⁠.⁠”

“⁠니는 아는 게 많아서 탈이다⁠.⁠”

하소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낮게 덧붙였다⁠.

“⁠오늘 밤에 구미 온나⁠. 견본은 짠다⁠. 니 넥타이 걸고 짠다⁠. 대신 우리 반 아지매들 예금 얘기는 니 입으로 다시는 거짓말하지 마라⁠. 우리 반은 우리가 알아서 지킨다⁠.⁠”

전화가 끊겼다⁠. 용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서류 가방에 그레이슨 소장의 명함을 챙겼다⁠. 명함 뒤에 소장이 볼펜으로 적어 준 글씨가 있었다⁠. 「⁠Wed⁠. sample + financial statements⁠」 견본은 하소례가 짠다⁠. 재무제표는 아무도 짤 수 없었다⁠.

*

계단 위에서 박수 소리가 났다⁠. 짝⁠, 짝⁠, 짝⁠. 느리고 큰 박수였다⁠. 탁재황이 3층 계단참 난간에 기대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반장⁠, 잘했다⁠. 나보다 낫다⁠. 연말 특별 이자는 생각도 못 했네⁠.⁠”

탁재황이 계단을 내려와 용준 앞으로 왔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통을 꺼내 용준 손에 쥐여 주었다⁠. 새 명함이었다⁠. 잉크 냄새가 났다⁠. 「⁠탁산섬유주식회사 자금 대책반장 차장 대우 편우곤⁠」

“⁠오백 장 찍었다⁠. 차장 대우다⁠. 월급은 다음 달부터 오른다⁠.⁠”

“⁠다음 달에 회사가 있으면요⁠.⁠”

“⁠있게 해야지⁠. 네가 오늘 있게 했다⁠. 금요일 이자는 네가 말했으니까 네가 구해 와라⁠.⁠”

탁재황은 웃었다⁠. 웃음이 귀까지 갔다⁠.

“⁠이제 너도 같은 배다⁠, 차장⁠.⁠”

탁재황은 계단을 올라갔다⁠. 4층 복도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망설이다가 한 번 더⁠, 똑⁠. 회장실 앞에 서 있을 사람이 누구인지 용준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 인삼 사탕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 탁재황의 느린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곽 대리 왔나⁠. 들어와라⁠. 어머니 얘기부터 하자⁠.⁠”

문이 닫혔다⁠. 용준은 손바닥 위의 명함 통을 내려다보았다⁠. 오백 장의 편우곤이 차장 대우가 되어 있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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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경훈2026.11.01· 9화

    립스틱을 지웠다가 다시 바르는 금채 씨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학원 상담 날 바르는 색이라니요.

    • 노범우작가2026.11.01

      금채 씨에게 은행 가는 날은 싸우러 가는 날이에요. 그래서 상담 날의 색을 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