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02자)

견본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서울역 승강장에는 저녁 일곱 시 대구행 무궁화호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매점 수레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순구는 7호차 앞에서 호두과자 봉지를 뜯고 있었다⁠. 왼손에는 은행 이름이 찍힌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가 두툼했다⁠.

“⁠니 와 왔노⁠? 배웅하러 왔나⁠?⁠”

“⁠봉투 뭐야⁠?⁠”

“⁠엄마 수술비⁠. 사백⁠. 회장님이 주셨다⁠. 회장님 지갑에서 나왔다⁠. 사내 예금 아이다⁠.⁠”

순구는 호두과자 하나를 용준에게 내밀었다⁠. 용준은 받지 않았다⁠. 순구는 내민 호두과자를 자기 입에 넣었다⁠.

“⁠회장님이 뭘 달라고 하셨어⁠?⁠”

“⁠아무것도⁠.⁠”

순구는 대답이 빨랐다⁠. 빨라서 이상했다⁠. 영업 십 년 동안 순구는 거래처가 값을 물으면 늘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진짜 아무것도⁠?⁠”

“⁠니 요새 어디 다니는지 물으시더라⁠. 대구 갔다 구미 갔다 안산 갔다⁠. 회장님은 다 아시더라⁠. 내가 말 안 해도⁠.⁠”

열차 출입문 옆에서 역무원이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순구는 봉투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용준을 오래 보았다⁠. 사무실에서 십 년 동안 본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았다⁠.

“⁠우곤아⁠. 하나만 묻자⁠.⁠”

“⁠응⁠.⁠”

“⁠니 진짜 우곤이 맞나⁠?⁠”

호루라기가 울렸다⁠. 용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면 순구는 알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면 기차가 떠나기 전에 다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 수술 끝나면 전화해⁠.⁠”

순구는 대답을 기다렸다가⁠, 대답이 안 오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끄덕임이 알았다는 뜻인지 됐다는 뜻인지 용준은 알 수 없었다⁠. 순구가 계단을 올라 객차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차창 너머에서 순구가 호두과자 봉지를 흔들었다⁠. 기차가 움직였다⁠.

*

구미 가는 밤 고속버스 맨 뒷자리에 막내가 먼저 앉아 있었다⁠. 정장 위에 점퍼를 걸치고 무릎에 서류 가방을 올려놓았다⁠. 용준이 통로에 서서 내려다보자 막내가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과장님⁠, 아니 차장님⁠. 김 상무님이 구미 가시면 따라가서 거들라고 하셨습니다⁠.⁠”

“⁠김 상무가⁠?⁠”

“⁠사실은 제가 가겠다고 했습니다⁠. 김 상무님은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준은 막내 옆에 앉았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올라가자 실내등이 꺼졌다⁠. 창밖으로 휴게소 불빛이 지나갔다⁠. 막내는 한참 창밖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차장님은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차장님 집은 아파트도 있고⁠, 사모님은 학원 나가시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시면 차장 대우로 금요일까지 가시는 거 아닙니까⁠?⁠”

용준은 대답을 고르다가 막내의 넥타이를 보았다⁠. 매듭이 엄지만 하게 뭉쳐 있었다⁠. 용준은 손을 뻗어 매듭을 풀었다⁠. 막내가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가만있어⁠.⁠”

어둠 속에서 용준은 막내의 넥타이를 다시 맸다⁠. 작은 고리를 만들고⁠, 넓은 끝을 두 번 감고⁠, 엄지로 누르지 않고 검지로 보조개를 하나 만들었다⁠. 서른 해 전에 편우곤이 버스 안에서 똑같이 해 준 매듭이었다⁠. 서른 해 전 버스 안의 편우곤은 매듭을 다 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고 금요일까지 가면⁠, 서른 해 뒤에 매일 아침 넥타이 맬 때마다 생각나⁠.⁠”

“⁠무엇이 생각납니까⁠?⁠”

“⁠모르는 척한 거⁠.⁠”

막내는 손끝으로 새 매듭을 만져 보았다⁠. 버스가 터널로 들어가자 엔진 소리가 커졌다⁠. 막내는 터널을 빠져나갈 때까지 매듭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구미 직포동은 야간조가 견본 한 필을 위해 직기 여덟 대를 따로 돌리고 있었다⁠. 하소례가 오후 내내 원사 창고를 뒤져 고밀도용 면사를 찾아냈고⁠, 경사를 직기에 거는 데만 네 시간을 썼다⁠. 이제 남은 일은 끊기지 않게 짜는 것이었다⁠.

용준은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직기 여덟 대 사이를 뛰었다⁠. 실이 끊기면 빨간 등이 켜졌고⁠, 빨간 등이 켜지면 뛰었다⁠. 이번 주에만 계단을 몇 번이나 두 칸씩 뛰었는지 셀 수 없었다⁠. 무릎은 끝까지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2027년이었다면 세 번째 빨간 등에서 주저앉았을 것이다⁠.

새벽 한 시가 넘자 아주머니들이 졸음을 쫓으려고 노래를 불렀다⁠. 직기 소리가 박자였다⁠. 쉭⁠, 탁⁠, 쉭⁠, 탁에 맞춰 누가 트로트 첫 소절을 꺾었고⁠, 옆 직기에서 다음 소절을 받았다⁠. 젊은 직공이 박수를 쳤다⁠.

“⁠반장님도 한 곡 하이소⁠!⁠”

“⁠나는 노래방 가면 마이크를 남한테 줘⁠.⁠”

“⁠본사 차장님이 그라믄 안 되지예⁠. 차장 대우 명함 받았다메⁠.⁠”

명함 소문까지 구미에 와 있었다⁠. 용준은 하는 수 없이 서른 해 전 회식 때마다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1997년에 막 나온 노래였는데⁠, 2027년의 노래방에서는 옛날 노래 묶음에 들어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따라 불렀다⁠. 하소례만 따라 부르지 않고 직기 사이를 걸으며 귀를 기울였다⁠.

“⁠반장⁠, 노래는 못하는데 박자는 맞네⁠.⁠”

“⁠직기 박자에 맞췄습니다⁠.⁠”

“⁠그라니까⁠. 사람 박자는 안 맞는데 기계 박자는 맞는 사람이다⁠, 니는⁠.⁠”

*

새벽 네 시⁠, 끊김이 잦아졌다⁠. 다섯 대에서 빨간 등이 번갈아 켜졌다⁠. 실이 이유 없이 툭툭 끊겼다⁠. 하소례가 끊긴 실 끝을 손가락에 감아 보더니 혀를 찼다⁠.

“⁠실이 마른다⁠. 밤에 난로를 너무 땠다⁠.⁠”

용준은 천장의 가습 노즐을 올려다보았다⁠. 1997년의 직포동에는 가습기가 두 대뿐이었고⁠, 둘 다 공장 반대편 끝에 있었다⁠. 용준은 탈의실로 뛰어가 걸레 양동이 두 개에 물을 받아 왔다⁠. 직기 여덟 대 사이 바닥에 물을 뿌렸다⁠. 젊은 직공에게 난로 두 대를 끄게 했다⁠.

“⁠반장님⁠, 추운데예⁠.⁠”

“⁠실이 추운 걸 좋아해⁠. 사람은 점퍼 입어⁠.⁠”

바닥에서 물이 증발하자 공기가 눅눅해졌다⁠. 이십 분 뒤 빨간 등이 하나씩 꺼졌다⁠. 쉭⁠, 탁⁠, 쉭⁠, 탁⁠. 여덟 대가 다시 한 박자로 맞물렸다⁠. 하소례가 걸레 양동이를 발로 툭 찼다⁠.

“⁠이거는 어디서 배웠노⁠?⁠”

“⁠어디서 배웠다고 하면 반장님이 믿으실까요⁠?⁠”

“⁠안 믿는다⁠. 그래도 물은 잘 뿌렸다⁠.⁠”

아침 여섯 시에 견본 한 필이 직기에서 내려왔다⁠. 하소례가 가위로 끝을 잘라 형광등에 비춰 보았다⁠. 실 사이로 빛이 새지 않았다⁠. 하소례는 원단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풀 냄새와 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됐다⁠.⁠”

한마디였다⁠. 직포반 아주머니들이 박수를 쳤다⁠. 누가 보온병에서 믹스커피를 따라 돌렸다⁠. 용준은 커피를 받아 들고 직기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주저앉았다⁠. 견본은 나왔다⁠. 재무제표는 여전히 아무도 짤 수 없었다⁠.

*

아침밥은 기숙사 식당의 콩나물국이었다⁠. 막내는 원사 자루 더미 위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하소례에게 발등을 밟히고 일어났다⁠. 머리에 하얀 실먼지가 소복이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막내를 보고 웃었다⁠.

“⁠본사 막내가 머리에 눈 맞았네⁠.⁠”

“⁠총각⁠, 니 장가 안 갔제⁠? 우리 막내 동서가 노처녀라⁠.⁠”

“⁠그 동서 분⁠, 차장님한테도 소개하셨다면서요⁠? 소문이 본사까지 왔습니다⁠.⁠”

“⁠차장님은 장가갔다메⁠. 니는 안 갔고⁠.⁠”

식당이 웃음으로 시끄러워졌다⁠. 막내는 귀까지 빨개져서 콩나물국에 얼굴을 묻었다⁠. 용준은 국을 떠먹으며 스물여덟 살의 자기가 놀림받는 것을 처음으로 맞은편에서 보았다⁠. 생각보다 귀여웠다⁠.

열일곱 번 직기를 맡은 젊은 직공이 식판을 들고 용준 옆에 앉았다⁠. 김천에 어머니가 산다는 스물한 살이었다⁠.

“⁠차장님⁠, 지 사내 예금이 이백 있습니더⁠. 어젯밤에 본사 줄 섰다는 얘기 듣고 잠을 못 잤습니더⁠. 지는 금요일까지 기다리믄 됩니꺼⁠?⁠”

용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소례가 맞은편에서 용준을 보았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 하소례의 눈이었다⁠.

“⁠지금은 대답 못 해⁠. 금요일까지 대답할게⁠. 그때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나를 직기 북으로 때려⁠.⁠”

“⁠우리 직기는 북이 없는데예⁠. 바람으로 쏩니더⁠.⁠”

“⁠그럼 바람으로 때려⁠.⁠”

젊은 직공이 웃었다⁠. 웃다가 숟가락으로 콩나물만 건져 먹었다⁠. 하소례가 국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저 마시고 내려놓았다⁠.

“⁠금요일이다⁠. 니 입으로 그랬다⁠.⁠”

*

아침 열 시⁠, 직포반 사무실 전화로 본사 김 상무가 용준을 찾았다⁠.

“⁠차장⁠, 운봉은행 됐다⁠. 일주일 연장⁠.⁠”

“⁠일주일요⁠?⁠”

“⁠일주일⁠. 이자는 두 배⁠. 회장님이 지점장실에서 세 시간 앉아 계셨다⁠. 나오시면서 웃으시더라⁠.⁠”

김 상무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본사 전화벨들이 겹쳐 울렸다⁠.

“⁠그리고 회장님이 차장 어디 있냐고 찾으신다⁠. 구미라고 했더니 아무 말씀 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차장⁠, 너 구미에서 뭐 하냐⁠?⁠”

“⁠천 짭니다⁠.⁠”

“⁠천을 짜⁠? 대책반장이⁠?⁠”

“⁠대책이 천에서 나올 것 같아서요⁠.⁠”

김 상무는 한참 말이 없다가 그냥 끊었다⁠.

*

정오 무렵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대구였다⁠. 수화기를 들자 순구의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코가 막힌 숨이었다⁠.

“⁠끝났다⁠. 엄마 수술 잘 끝났다⁠. 의사가 허리 뼈 사이에 뭘 박았다 카는데 잘 박혔단다⁠.⁠”

“⁠다행이다⁠.⁠”

“⁠엄마가 깨어나자마자 회장님 안부부터 묻더라⁠. 회장님이 수술비 주셨다 캤더니 울더라⁠. 내 우리 엄마 우는 거 아부지 돌아가실 때 말고 처음 봤다⁠.⁠”

순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병원 복도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국제통화기금과 정부가 얼마를 빌릴지 줄다리기한다는 뉴스였다⁠.

“⁠우곤아⁠.⁠”

“⁠응⁠.⁠”

“⁠고맙다는 말은 회장님한테 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니한테 하고 싶다⁠. 근데 안 할란다⁠.⁠”

“⁠왜⁠?⁠”

“⁠니가 들으면 안 되는 걸 내가 했을까 봐⁠.⁠”

전화가 끊겼다⁠. 용준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쥐고 있었다⁠. 순구의 마지막 말이 귓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하소례가 사무실 문간에서 견본 원단을 신문지에 싸며 용준을 보았다⁠.

“⁠친구가⁠?⁠”

“⁠예⁠.⁠”

“⁠목소리 들으니 니한테 미안한 일 한 사람 목소리다⁠. 우리 신랑이 술 먹고 들어오면 꼭 저랬다⁠.⁠”

*

오후 세 시⁠, 견본을 들고 서울 가는 버스를 타려고 짐을 챙기는데 직포반 사무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사무실 여직원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편 차장님⁠, 서울에서 미국 회사래요⁠.⁠”

그레이슨 소장의 또박또박한 한국말이 들렸다⁠. 받침 몇 개가 미끄러졌다⁠.

“⁠편 차장님⁠? 견본은 잘 되고 있어요⁠?⁠”

“⁠다 됐습니다⁠. 오늘 밤에 가져가겠습니다⁠.⁠”

“⁠아⁠, 그게요⁠. 오늘 아침에 탁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어요⁠. 차장님 회사 회장님 맞으시죠⁠?⁠”

용준은 견본 꾸러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문지가 바스락거렸다⁠.

“⁠회장님이 견본은 회장님 새 회사 이름으로 받겠다고 하시던데요⁠. 새 회사가 구미 공장을 맡을 거라고요⁠. 재무제표도 새 회사 걸로 깨끗하게 보내 주시겠대요⁠. 탁산텍스⁠.⁠”

소장이 잠깐 멈췄다⁠.

“⁠그게 탁산섬유랑 같은 회사예요⁠? 다른 회사예요⁠?⁠”

용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무실 창밖으로 직포동 지붕이 보였다⁠. 지붕 너머에서 직기 백 대가 한 박자로 돌아가는 소리가 넘어왔다⁠. 탁재황은 그레이슨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을까를 용준은 묻지 않았다⁠. 서울역 승강장에서 호두과자를 먹던 순구의 빠른 대답이 귓속에서 다시 울렸다⁠. 아무것도⁠.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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