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25자)

금채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상계동 시장 신발 가게 아저씨는 운동화 상자를 열 개쯤 꺼내 놓고 손님 아홉 살의 결정을 기다렸다⁠. 아롬은 분홍색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운동화와 반짝이 줄이 들어간 하얀 운동화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저울질했다⁠. 용준은 아롬이 고르는 동안 가게 벽의 가격표를 보았다⁠. 아이 운동화 한 켤레에 만 원 남짓⁠. 2027년이었다면 동네 마트에서 같은 걸 오만 원에 샀을 것이다⁠.

“⁠아빠⁠, 둘 다 사면 안 돼⁠?⁠”

“⁠하나만⁠.⁠”

“⁠엄마는 아빠한테 물어보면 둘 다 사 준다고 했어⁠.⁠”

“⁠엄마가 그랬어⁠?⁠”

“⁠아니⁠. 근데 아빠는 원래 다 사 줘⁠.⁠”

용준은 웃었다⁠. 편우곤은 딸에게 약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신발 가게 아저씨가 라디오를 꺼내 놓고 혀를 찼다⁠.

“⁠어제오늘 뉴스 보셨어요⁠? 나라가 꾸러 간대요⁠. 우리 같은 가게는 원래 겨울에 장사 안 되는데 올겨울은 신발 사러 오는 사람이 반도 안 될 거래⁠.⁠”

“⁠그래서 오늘 사러 왔습니다⁠.⁠”

“⁠아이고⁠, 손님 같은 분만 있으면 나라가 살지⁠.⁠”

아롬은 결국 하얀 운동화를 골랐다⁠. 용준은 바지 뒷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휴대전화를 찾는 손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편우곤의 지갑뿐이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자 아저씨가 거스름돈으로 동전을 한 움큼 내주었다⁠.

“⁠카드는 안 됩니다⁠. 요새 카드 받으면 수수료가 아까워서⁠.⁠”

“⁠괜찮습니다⁠. 현금 좋습니다⁠.⁠”

“⁠현금 좋다는 손님은 오랜만이네⁠.⁠”

아롬은 가게 의자에 앉아 새 운동화를 신고 발을 굴렀다⁠. 헌 운동화는 상자에 넣지 않고 손에 들었다⁠. 밑창 앞부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건 버려⁠?⁠”

“⁠아빠가 들고 갈게⁠.⁠”

용준은 헌 운동화를 비닐봉지에 넣었다⁠. 2027년의 병실에서 편우곤이 잠꼬대로 걱정하던 밑창이었다⁠. 토요일에 시장 가자던 약속은 하루 늦게 남의 손으로 지켜졌다⁠.

*

오후 세 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 앞에 막내가 귤 한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청바지에 학교 다닐 때 입던 것 같은 점퍼 차림이었다⁠. 정장을 벗은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은 더 어려 보였다⁠.

“⁠과장님⁠, 쉬시는 날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귤을 많이 받으셔서⁠.⁠”

“⁠들어와⁠.⁠”

금채가 반갑게 막내를 맞았다⁠. 추석에 송편 스무 개를 먹고 간 막내를 금채는 기억했다⁠. 아롬은 막내 아저씨가 왔다고 새 운동화를 신고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막내는 소파 끝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았다⁠. 금채가 커피를 타러 부엌으로 가자 막내가 목소리를 낮췄다⁠.

“⁠과장님⁠, 금요일 밤 일 때문에 왔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안 여쭙겠습니다⁠. 대신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저희 어머니 전세금이 화곡동 집주인한테 들어가 있습니다⁠. 내년 봄이 만기입니다⁠. 그 돈은 괜찮습니까⁠?⁠”

용준은 막내의 얼굴을 보았다⁠. 서른 해 전⁠, 1998년 봄에 화곡동 집주인은 전세금을 석 달 늦게 돌려주었다⁠. 석 달 동안 어머니는 이삿짐을 싸 놓고 반지하 바닥에서 잤다⁠. 스물여덟 살의 용준은 석 달 내내 회사 잃은 것만 억울해했고⁠, 어머니 허리가 반지하 바닥에서 나빠졌다는 것은 몇 해 뒤에야 알았다⁠.

“⁠집주인이 석 달 늦게 줄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사 갈 집 계약하지 마⁠. 돈 받고 나서 구해⁠. 그리고 그 석 달 동안 어머니 바닥에서 주무시게 하지 마⁠. 침대 하나 사 드려⁠. 싼 걸로⁠.⁠”

막내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이 귤 봉지를 꼭 쥐었다⁠.

“⁠과장님은 저희 어머니를 어떻게 그렇게⁠.⁠”

“⁠네가 나한테 말했잖아⁠. 술 먹고⁠.⁠”

“⁠제가요⁠?⁠”

“⁠응⁠. 기억 안 나지⁠?⁠”

막내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금채가 커피 잔 두 개를 들고 와서 하나를 막내 앞에 놓았다⁠. 프림이 둘⁠, 설탕이 둘 들어간 커피였다⁠. 막내가 잔을 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과장님이 요새 좀 이상하십니다⁠.⁠”

“⁠알아⁠. 나도 이상해⁠.⁠”

막내가 돌아간 뒤 금채는 현관문을 닫고 용준을 오래 보았다⁠. 귤 봉지가 신발장 위에 놓여 있었다⁠.

“⁠저 아이한테 하는 말이 꼭 자기한테 하는 말 같아⁠.⁠”

용준은 대답하지 않고 귤을 하나 깠다⁠.

귤을 반쯤 먹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대구의 순구였다⁠. 병원 공중전화인지 뒤에서 링거 수레 바퀴 소리가 났다⁠.

“⁠우곤아⁠. 회장님 비서실에서 전화 왔다⁠. 월요일 아침 여덟 시 반에 회장실로 오라 카더라⁠. 니한테는 말하지 말라 캤다⁠.⁠”

“⁠근데 왜 나한테 말해⁠?⁠”

“⁠모르겠다⁠. 이게 마지막이다⁠. 다음부터는 안 말한다⁠.⁠”

순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끊었다⁠. 용준은 끊긴 수화기를 들고 귤 껍질을 손바닥에 쥐었다⁠.

*

일요일 저녁⁠, 아롬은 식탁에 숙제를 펼쳤다⁠. 분수 더하기였다⁠. 이분의 일 더하기 삼분의 일⁠. 아롬은 연필 꽁무니를 깨물며 분자끼리 더하고 분모끼리 더해서 오분의 이를 썼다⁠.

“⁠틀렸어⁠.⁠”

“⁠왜⁠?⁠”

용준은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칼로 반을 잘랐다⁠. 반쪽 하나를 다시 셋으로 나누려다 멈추고⁠, 다른 사과를 꺼내 셋으로 나누었다⁠.

“⁠반쪽 하나랑 세 조각 중 하나⁠. 둘이 같은 크기야⁠?⁠”

“⁠아니⁠. 반쪽이 커⁠.⁠”

“⁠그럼 크기를 같게 잘라야 더할 수 있지⁠. 둘 다 여섯 조각으로 잘라 볼까⁠?⁠”

용준은 사과를 여섯 조각씩으로 잘랐다⁠. 반쪽은 세 조각⁠, 삼분의 일은 두 조각⁠. 아롬이 손가락으로 조각을 세었다⁠.

“⁠다섯 조각⁠! 육분의 오⁠!⁠”

“⁠맞아⁠.⁠”

“⁠아빠 언제부터 수학 잘했어⁠?⁠”

부엌 개수대 앞에서 금채가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금채의 눈이 사과 조각에서 용준의 손으로⁠, 손에서 얼굴로 올라왔다⁠.

“⁠우리 남편은 분수 몰라⁠. 결혼할 때 축의금 봉투 세다가 세 번 틀렸어⁠. 그래서 집 대출 이자도 내가 계산해⁠.⁠”

아롬이 깔깔 웃으며 사과 조각을 입에 넣었다⁠. 금채는 웃지 않았다⁠. 행주로 손을 닦고 아롬의 머리를 쓸었다⁠.

“⁠아롬아⁠, 숙제 다 했으면 씻고 자⁠.⁠”

*

아롬의 방에서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올 때까지 금채는 식탁 맞은편에서 기다렸다⁠. 식탁 위에는 사과 껍질이 길게 한 줄로 남아 있었다⁠. 금채가 껍질을 손가락으로 감았다가 풀었다⁠.

“⁠이제 대답해⁠. 당신 누구야⁠?⁠”

용준은 거짓말을 해도 영업부 과장답게 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회장의 말을 내려놓았다⁠.

“⁠반용준입니다⁠. 영업2과 막내 반용준⁠.⁠”

“⁠막내는 스물여덟 살이야⁠. 지난 추석에 우리 집에 와서 송편 스무 개 먹고 갔어⁠.⁠”

“⁠그 막내가 서른 해 뒤의 저입니다⁠. 2027년에 쉰여덟 살이고⁠, 원단 회사 부장이었고⁠, 이번 봄에 명예퇴직했습니다⁠. 송별회 끝나고 을지로 골목에서 쓰러졌는데 눈을 뜨니 지난 화요일이었습니다⁠. 과장님 몸으로요⁠.⁠”

금채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과 껍질을 다시 손가락에 감았다⁠. 그리고 웃었다⁠. 짧고 차가운 웃음이었다⁠.

“⁠당신 회사 그만둘 생각이지⁠? 그래서 미친 척하는 거지⁠? 미친 척하면 퇴직금 더 나와⁠?⁠”

“⁠퇴직금은 안 나옵니다⁠. 28일에 회사가 부도 납니다⁠.⁠”

금채의 손가락에서 껍질이 툭 끊겼다⁠.

“⁠원래대로라면 과장님은 부도 난 다음 해에 이 집을 팝니다⁠. 과원들 우리사주 대출을 대신 갚으려고요⁠.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공사 현장에 갑니다⁠. 2001년에 거기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만해⁠.⁠”

“⁠과장님이 어디 계신지도 압니다⁠. 오늘 밤 열두 시에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밤 열두 시⁠, 상가 앞 공중전화 부스는 둘이 들어가기에 좁았다⁠. 금채는 패딩 점퍼를 잠옷 위에 걸치고 부스 문에 등을 붙였다⁠. 금 간 유리 틈으로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용준의 허리춤에서 삐삐가 떨었다⁠. 용준이 화면을 내밀었다⁠. 「⁠010⁠」

“⁠이게 무슨 번호야⁠? 이런 번호가 어딨어⁠?⁠”

“⁠2027년에는 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용준은 전화카드를 꽂고 번호를 눌렀다⁠. 남은 금액이 이천사백 원이었다⁠. 물속 같은 먹먹함 뒤로 삑⁠, 삑 소리가 들어오자 용준은 수화기를 금채에게 건넸다⁠. 금채는 수화기를 받아 귀에서 한 뼘 떨어뜨려 들었다⁠. 들으면서도 믿지 않겠다는 거리였다⁠.

먼저 들린 것은 2027년 아내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피곤하고 짜증이 섞여 있었다⁠.

“⁠또 금채야⁠? 여보⁠, 나 오늘 그 이름 열 번 들었어⁠. 간호사 선생님들도 이제 금채 씨 언제 오냐고 물어⁠.⁠”

금채의 눈이 커졌다⁠. 수화기가 귀로 한 뼘 다가갔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쉰여덟 살 반용준의 목소리였고⁠, 편우곤의 말투였다⁠.

“⁠금채야⁠. 장롱 두 번째 서랍⁠. 겨울 내복 밑에 비상금 통장⁠. 나 다 안다⁠. 화 안 낸다⁠. 아롬이 피아노 다시 보내라⁠.⁠”

금채가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입술이 떨렸다⁠.

“⁠우곤 씨⁠? 우곤 씨⁠, 거기 어디야⁠? 내 말 들려⁠?⁠”

대답은 없었다⁠. 2027년의 아내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금채가 수화기에 대고 한 번 더 이름을 불렀을 때 딸깍 하고 선이 끊겼다⁠. 금채는 신호음만 나오는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있었다⁠.

“⁠비상금 통장⁠, 결혼하고 나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친정 엄마한테도⁠.⁠”

“⁠압니다⁠.⁠”

“⁠당신은 몰라⁠. 우곤 씨가 알아⁠.⁠”

금채는 수화기를 걸고 부스 문을 밀었다⁠. 찬바람이 들어왔다⁠. 금채는 상가 앞 벤치에 앉아 점퍼 지퍼를 턱까지 올렸다⁠. 한참 하늘을 보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닦았다⁠. 그리고 다시 학원 강사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롬이 피아노 다시 보내래⁠. 거기 누워서도 그 걱정이야⁠. 바보 같은 사람⁠.⁠”

*

벤치에 둘이 앉았다⁠. 상가 셔터에 붙은 대통령 선거 벽보 귀퉁이가 바람에 들썩였다⁠.

“⁠조건이 있어⁠.⁠”

금채가 손가락을 하나 폈다⁠.

“⁠금요일 밤 열두 시⁠. 그게 열흘째라며⁠. 그때 우곤 씨 돌려줘⁠.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회사가 망하든 살든⁠, 금요일 밤에는 저 전화 걸어서 돌려줘⁠.⁠”

“⁠그러겠습니다⁠.⁠”

“⁠둘⁠. 이 집 건드리지 마⁠. 이 집에 우리 친정 돈이 들어 있어⁠. 아롬이 학교도 여기 있어⁠.⁠”

“⁠예⁠.⁠”

금채가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셋⁠. 우리 사내 예금 천오백⁠. 월요일 아침에 내가 직접 가서 뺀다⁠.⁠”

용준은 고개를 저었다⁠.

“⁠금고에 돈이 없습니다⁠. 칠억이 지난달에 월급으로 나갔습니다⁠. 회장님이 어제 그러셨습니다⁠.⁠”

“⁠없으면 더 빨리 가야지⁠.⁠”

금채는 망설이지 않았다⁠. 숫자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답이었다⁠.

“⁠금고에 돈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먼저 간 사람이 받아⁠. 다 없으면 아무도 못 받고⁠. 어느 쪽이든 늦게 가는 사람이 손해야⁠. 그게 산수야⁠.⁠”

“⁠사모님이 창구에 가시면 뒤에 줄이 섭니다⁠. 줄이 서면 회사가 그날로 문을 닫습니다⁠. 이백 명이⁠.⁠”

“⁠이백 명은 당신 사람들이고⁠, 천오백은 우리 집 돈이야⁠.⁠”

금채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용준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우곤 씨 얼굴로 그 이백 명 지키겠다는 건 알겠어⁠. 근데 우곤 씨 얼굴로 우리 집 돈 버리는 건 안 돼⁠. 월요일 아홉 시⁠. 나 본사 가⁠.⁠”

금채는 아파트 현관으로 걸어갔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계단을 올라갔다⁠. 용준은 벤치에 혼자 남아 비닐봉지에 든 헌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밑창이 입을 벌린 채 수은등 불빛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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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채 ·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