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52자)

문고리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엘리베이터 도착음은 열두 층을 올라오는 동안 한 번도 서두르지 않았다⁠. 띵⁠. 문이 열리고 작은 운동화 두 켤레가 복도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1204호 현관문 너머로 들어왔다⁠. 계순은 거실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재봉틀 바늘꽂이를 올려놓고 있었다⁠. 빨간 비단 천을 씌운 토마토 모양 바늘꽂이였다⁠. 시침핀을 하나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여덟 시 이 분이었다⁠. 혜빈은 약속보다 이 분 늦었다⁠.

“⁠엄마⁠, 애들 여기 있어⁠.⁠”

초인종 대신 딸의 목소리가 문을 두드렸다⁠. 차분했다⁠. 회의실에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때의 목소리였다⁠.

“⁠가방에 바나나 우유 두 개 넣었어⁠. 유치원 아홉 시⁠. 나 셔틀 놓치면 지각이야⁠. 간다⁠.⁠”

운동화 굽 소리 한 켤레가 멀어지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복도에는 작은 운동화 두 켤레만 남았다⁠. 한동안 아무 소리가 없었다⁠. 계순은 시침핀을 바늘꽂이에 깊이 눌렀다⁠. 핀 머리가 비단 속으로 들어갈 만큼 눌렀다⁠.

똑똑⁠. 낮은 데서 두드리는 소리였다⁠. 다섯 살 주먹 높이였다⁠.

“⁠할머니이⁠.⁠”

라겸이었다⁠. 라겸은 부를 때 끝을 늘였다⁠. 그다음엔 라율이 노래를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배운 곰 세 마리였다⁠.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라율은 엄마 곰 다음에 가사를 바꿨다⁠. 할머니 곰은 갑옷 입어⁠.

계순은 눈을 감았다⁠. 허리 보호대가 갈비뼈 아래를 조였다⁠. 스물두 해 동안 남문 시장 골목에서 수선집을 하며 별별 손님을 다 상대했다⁠. 바짓단을 줄여 놓고 찾으러 안 온 손님⁠, 웨딩드레스 허리를 늘려 달라며 울던 신부⁠, 수선비 대신 사과 한 상자를 두고 간 할아버지⁠. 문을 사이에 두고 손주가 부르는 곰 세 마리는 처음이었다⁠.

안방 문이 열렸다⁠. 등산 양말 한 짝만 신은 순범이 나왔다⁠.

“⁠지금 애들을 복도에 세워 두고 뭐 하는 짓이여⁠.⁠”

“⁠혜빈이가 세워 둔 거야⁠.⁠”

“⁠당신이 안 열잖아⁠.⁠”

“⁠안 연다고 어제 말했잖아⁠.⁠”

순범은 계순을 지나쳐 현관으로 갔다⁠. 계순은 일어나 막으려 했지만 허리를 펴는 데 숨 한 번이 더 들었다⁠. 숨을 쉬는 동안 문이 열렸다⁠. 노란 원복을 입은 쌍둥이가 순범의 다리 사이로 뛰어들어 와 할머니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라겸의 이마가 바늘꽂이를 찍었다⁠. 다행히 핀은 비단 깊이 박혀 있었다⁠.

“⁠할머니 파업 끝났어⁠?⁠”

라율이 물었다⁠. 계순은 손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내려다봤다⁠. 혜빈이 묶다 만 머리였다⁠.

“⁠아니⁠. 오늘부터는 계약서대로 한다⁠.⁠”

*

계약서는 식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계순은 돋보기를 끼고 한 줄씩 손가락으로 짚었다⁠. 「⁠을은 갑의 자녀 2인의 등원⁠, 하원⁠, 저녁 식사⁠, 목욕을 담당한다⁠.⁠」 계순은 줄을 짚은 손가락을 떼지 않고 순범을 불렀다⁠.

“⁠여기 빨래 있어⁠?⁠”

“⁠뭐⁠?⁠”

“⁠빨래⁠. 머리 묶기⁠. 손톱 깎기⁠. 유치원 알림장 쓰기⁠. 장보기⁠. 소아과 데려가기⁠. 이 계약서에 그런 거 하나라도 있어⁠?⁠”

순범은 돋보기 없이 문서를 들여다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순범의 돋보기는 산악회 배낭 안주머니에 있었다⁠.

“⁠없으면 안 하겠다고⁠?⁠”

“⁠계약서에 없는 걸 하면 계약서가 왜 있어⁠.⁠”

계순은 유튜브에서 밤새 들은 말을 하나 꺼냈다⁠. 「⁠준법 투쟁⁠. 정해진 일만 정확하게 하는 것⁠.⁠」 강사는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계순은 머리띠 대신 보호대를 두르고 있었다⁠.

라율의 머리는 이날 하루 묶이지 않았다⁠. 계순은 고무줄 두 개를 라율 손바닥에 쥐여 주고 유치원 선생님께 부탁하라고 했다⁠. 라겸의 왼쪽 양말과 오른쪽 양말은 색이 달랐다⁠. 계순은 양말을 맞춰 주지 않았다⁠. 대신 아홉 시 정각에 해님 유치원 정문 앞에 쌍둥이를 세우고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등원은 계약서에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라율의 머리와 라겸의 양말을 번갈아 봤다⁠.

“⁠어머님⁠,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파업 중이에요⁠.⁠”

선생님은 웃어야 할지 몰라 고무줄을 받아 들었다⁠. 라율은 선생님 손에 고무줄을 쥐여 주며 할머니 말을 그대로 옮겼다⁠. “⁠우리 할머니 준법이에요⁠.⁠”

*

아홉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는 계약서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섯 해 동안 이 일곱 시간에 계순은 쌍둥이 방을 치우고⁠, 빨래를 개고⁠, 저녁 반찬을 만들고⁠, 장을 보고⁠, 혜빈네 냉장고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오늘 계순은 유치원 정문에서 뒤돌아 단지 밖으로 나갔다⁠.

동탄 노인복지관은 버스로 두 정거장이었다⁠. 이 층 로비 텔레비전에서 지역 뉴스가 흘렀다⁠. 화면 아래 자막이 지나갔다⁠. 「⁠탁세란 시의원 “⁠손주 돌봄 수당보다 국공립 연장보육부터⁠”⁠」 정장을 입은 여자가 마이크 앞에서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로비 의자의 노인들은 아무도 화면을 보지 않았다⁠. 다들 노인대학 등록 줄에 서 있었다⁠.

줄은 길었다⁠. 계순 앞에는 꽃분홍 패딩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서 있었다⁠. 키는 계순과 비슷했고⁠, 등에 아이 가방 세 개를 겹쳐 멘 채였다⁠. 공룡 가방⁠, 로봇 가방⁠, 그리고 반짝이가 박힌 분홍 가방⁠. 할머니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가방들이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렸다⁠.

“⁠아이고 마⁠, 이거 언제 줄어드노⁠.⁠”

할머니가 뒤돌아봤다⁠. 계순의 허리 보호대에 눈이 갔다⁠.

“⁠허리요⁠?⁠”

“⁠네⁠. 사⁠, 오번⁠.⁠”

“⁠나는 삼⁠, 사번⁠.⁠”

할머니는 자기 허리를 주먹으로 두 번 쳤다⁠. 103동 3층에 사는 변묘순이었다⁠. 계순은 다섯 해 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묘순을 여러 번 봤다⁠. 늘 손자들과 함께였고⁠, 늘 바빴고⁠, 늘 큰 소리로 손자들 이름을 불렀다⁠. 둘이 서로 이름을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자 셋 봐요⁠. 큰놈이 아홉 살⁠, 쌍둥이가 여섯 살⁠. 우리 며느리가 간호사라 밤 근무가 있어 놓으니까⁠, 내가 아주 그 집 상주 직원이라⁠.⁠”

“⁠나도 쌍둥이 봐요⁠. 다섯 살⁠.⁠”

“⁠아이고⁠, 쌍둥이 둘이면 사람 하나 반 버는 기라⁠. 근데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 나왔능교⁠?⁠”

계순은 줄이 한 걸음 줄어드는 동안 말을 고르다가⁠, 그냥 말했다⁠.

“⁠파업했어요⁠.⁠”

묘순이 웃음을 터뜨렸다⁠. 로비 텔레비전 소리가 묻힐 만큼 큰 웃음이었다⁠. 웃다가 허리를 짚고⁠, 짚은 채로 또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계순의 팔을 잡았다⁠.

“⁠진짜로⁠?⁠”

“⁠어제부터⁠.⁠”

“⁠딸이 가만있습디까⁠?⁠”

“⁠계약서를 내밀던데요⁠. 월 칠십⁠.⁠”

“⁠칠십⁠? 아이고⁠, 나는 영 원이다⁠. 반찬값도 내 돈으로 산다⁠.⁠”

등록 창구 직원이 다음 분을 불렀다⁠. 묘순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가 수업 시간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노래 교실은 화요일 오후 세 시⁠. 하원은 세 시 반이었다⁠. 묘순은 서류를 창구에 도로 밀어 넣었다⁠. 계순은 같은 시간표를 보고 노래 교실 칸에 동그라미를 쳤다⁠. 볼펜을 쥔 손이 조금 떨렸다⁠. 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자기 이름 옆에 자기 일정을 적었다⁠.

묘순이 그것을 내려다봤다⁠.

“⁠그 딸이 진짜 가만있으면⁠, 나한테도 말 좀 해 주소⁠.⁠”

*

오후 두 시⁠, 가족 단톡방 「⁠육씨네⁠」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혜빈이 올린 것이었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 보내 준 사진으로⁠, 고무줄 두 개로 머리를 하늘 높이 묶은 라율이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할머니 머리와 똑같았다⁠. 사진 아래 혜빈이 한 글자를 달았다⁠. 「⁠?⁠」

순범이 엄지를 치켜든 이모티콘을 보냈다가 일 분 뒤에 지웠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가 남았다⁠.

계순은 복지관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이모티콘 가게를 열었다⁠. 돋보기를 끼고 한참 고른 끝에 이천오백 원을 냈다⁠. 머리띠를 두른 할머니가 주먹을 쥐고 「⁠투쟁⁠!⁠」을 외치는 이모티콘이었다⁠. 계순은 그것을 「⁠?⁠」 아래에 보냈다⁠. 혜빈은 읽었고⁠, 답하지 않았다⁠. 숫자 1이 사라지는 것을 계순은 버스가 올 때까지 들여다봤다⁠.

*

밤이 되자 103동 1204호 거실 식탁은 남문 시장 「⁠계순 수선⁠」의 작업대가 되었다⁠. 계순은 다섯 해 동안 베란다 창고에 넣어 둔 공구 상자를 꺼냈다⁠. 재단 가위⁠, 줄자⁠, 초크⁠, 시침핀⁠, 빨간 수선 펜⁠. 순범이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건 왜 꺼내⁠?⁠”

“⁠옷 고치지⁠.⁠”

계순은 계약서 두 장을 식탁에 펴고 시침핀으로 네 귀퉁이를 꽂았다⁠. 옷감을 재단대에 고정할 때처럼⁠. 그리고 빨간 펜 뚜껑을 이로 물어 뺐다⁠.

「⁠평일 주 5일⁠」에 줄을 그었다⁠. 위에 「⁠주 3일⁠. 월·수·금⁠」 품을 줄였다⁠.

「⁠화·목⁠」 옆에 「⁠을의 날⁠. 갑은 연락하지 않는다⁠」 단을 접었다⁠.

「⁠목욕⁠」에 줄을 그었다⁠. 옆에 「⁠사위⁠」 「⁠저녁 식사⁠」 옆에는 「⁠반찬은 금요일에 사흘 치⁠」

「⁠월 70만 원⁠」에 두 줄을 그었다⁠. 옆자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돈 칸은 비워 두는 것이 계순의 대답이었다⁠.

맨 아래 여백에 계순은 한 줄을 더 적었다⁠. 「⁠화·목 중 하루는 갑의 아버지가 본다⁠.⁠」

순범이 텔레비전을 끄고 다가왔다⁠. 계순 어깨 너머로 맨 아래 줄을 읽었다⁠. 이번에는 돋보기를 끼고 있었다⁠.

“⁠이건 뭐여⁠.⁠”

“⁠당신 이름 들어간 데⁠.⁠”

“⁠내가 왜⁠.⁠”

“⁠당신도 할아버지잖아⁠.⁠”

“⁠나는 화요일에 산에 가야 돼⁠. 총무여⁠.⁠”

“⁠그럼 목요일⁠.⁠”

“⁠목요일엔 경로당 바둑 리그가⁠…⁠.⁠”

계순은 빨간 펜 뚜껑을 다시 이로 물어 끼웠다⁠. 딸깍 소리가 났다⁠. 순범은 이 소리를 알았다⁠. 서른아홉 해를 같이 사는 동안⁠, 아내가 펜 뚜껑을 이로 끼우고 나면 다음 말은 없었다⁠.

*

저녁 일곱 시 반⁠, 107동 802호 현관⁠. 하원과 저녁밥까지 마친 계순은 신발을 신은 채로 혜빈을 기다렸다⁠. 계약서에 목욕은 없었다⁠. 라겸은 얼굴에 짜장 소스를 그린 채 소파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다⁠. 짜장은 반찬 가게에서 산 것이었다⁠.

혜빈이 들어오자마자 계순은 고친 계약서를 내밀었다⁠. 시침핀이 아직 네 개 꽂혀 있었다⁠. 혜빈은 받아 들다가 엄지손가락을 찔렸다⁠.

“⁠아⁠, 엄마⁠!⁠”

“⁠시접 조심해⁠.⁠”

혜빈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빨간 줄들을 읽었다⁠. 품질관리팀장은 수정 사항을 볼 때 맨 아래부터 거꾸로 읽었다⁠. 맨 아래 줄에서 혜빈이 멈췄다⁠.

“⁠아빠가⁠? 아빠 라면도 못 끓여⁠.⁠”

“⁠배우면 끓여⁠.⁠”

“⁠엄마⁠, 주 사흘이면 화목은 누가 봐⁠? 아빠 하루 빼도 하루가 남잖아⁠.⁠”

“⁠그건 갑이 알아서 하는 거지⁠. 갑이 계약서 만들었잖아⁠.⁠”

혜빈은 한참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짜장 묻은 라겸이 다가와 엄마 다리에 매달렸다⁠. 혜빈은 아들을 안아 올리지 않고 무릎으로 받쳤다⁠. 그리고 계약서를 반으로 접었다⁠. 시침핀이 접힌 종이 사이에서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혜빈은 접은 계약서를 신발장 위⁠, 자동차 열쇠 옆에 올려놓았다⁠.

“⁠도우미 쓸게⁠. 앱에서 구했어⁠. 내일 일곱 시 반에 와⁠.⁠”

계순은 신발 끈을 내려다봤다⁠. 아까 순범이 묶어 준 끈이 반쯤 풀려 있었다⁠.

“⁠그래라⁠.⁠”

“⁠엄마가 원하던 거잖아⁠. 이제 엄마 없어도 돼⁠.⁠”

혜빈은 그렇게 말하고 아들을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났다⁠. 목욕은 갑이 했다⁠.

계순은 현관 바닥에 떨어진 시침핀을 주웠다⁠. 허리를 굽힐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어서 주웠다⁠. 거실에서 라율이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내일도 와⁠? 계순은 시침핀을 몸뻬 주머니에 넣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고리가 차가웠다⁠. 계순은 손주에게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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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밤에책2026.11.01· 2화

    토마토 바늘꽂이에 시침핀 꽂으면서 손주 기다리는 장면, 우리 엄마랑 너무 똑같아서 웃다가 찡했어요.

    • 윤은류작가2026.11.01

      계순 씨 바늘꽂이는 저희 어머니 재봉틀 옆에 있던 걸 그대로 데려왔어요. 핀이 꽂힐수록 계순 씨 속도 같이 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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