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11자)

진단서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허리 보호대의 찍찍이는 뗄 때보다 붙일 때 소리가 더 컸다⁠. 찌이익⁠, 하고 배를 한 바퀴 감아 붙이자 103동 1204호 안방 창문으로 3월 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육계순은 거울 앞에서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연두 티셔츠 자락을 보호대 위로 끌어내렸다⁠. 꽃무늬 몸뻬 바지 주머니에는 네 번 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어제 오후 정형외과에서 받은 진단서였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봤지만 머리는 늘 그렇듯 손을 밀어냈다⁠. 지난달 단지 상가 미용실 원장이 “⁠어머님⁠, 이번엔 오래 가요⁠.⁠” 했을 때 계순은 칭찬인지 경고인지 몰랐다⁠. 오래 갔다⁠. 한 달째 머리가 하늘로 솟아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새벽 다섯 시에 누른 단톡방이 떠 있었다⁠. 「⁠84 졸업 꽃띠들⁠」 여고 동창 차영채가 어젯밤 열한 시에 여섯 번째 초대를 보내면서 한 줄을 붙였다⁠. 「⁠계순아 이번엔 들어와라⁠. 3월 20일 토요일 수원⁠. 안 들어오면 니네 집 찾아간다⁠.⁠」 다섯 번은 나가기를 눌렀다⁠. 오늘 새벽에는 참여를 눌렀고⁠, 누르자마자 동창 열아홉 명이 꽃다발 이모티콘을 한꺼번에 보내는 바람에 휴대전화가 이불 속에서 삼 분 동안 떨었다⁠.

휴대전화는 그다음에도 혼자 떠들었다⁠. 어젯밤 「⁠직장인이 파업할 때 꼭 알아야 할 다섯 가지⁠」를 하나 봤을 뿐인데⁠, 아침이 되자 유튜브 첫 화면이 전부 붉은 머리띠로 바뀌어 있었다⁠. 「⁠사장님이 절대 말해 주지 않는 노동법⁠」 「⁠단체교섭⁠, 이렇게 이긴다⁠」 계순은 돋보기를 찾아 화장대 위를 더듬다가 정수리에 얹어 둔 것을 손끝으로 찾아냈다⁠. 다섯 해째 되풀이하는 아침 일이었다⁠.

“⁠진짜 갈겨⁠?⁠”

거실에서 남편 육순범이 등산 양말을 신으며 물었다⁠. 화요일은 산악회 날이었다⁠. 은퇴한 지 네 해⁠, 시내버스를 서른한 해 몬 사람은 휴일에도 여섯 시 반이면 눈을 떴다⁠.

“⁠가야지⁠. 말하러 가는 건데⁠.⁠”

“⁠애들 새 학기 첫날이여⁠. 하필 오늘⁠.⁠”

“⁠하필 오늘이니까 가는 거야⁠.⁠”

계순은 현관에서 운동화 끈을 묶으려다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순범이 다가와 끈을 대신 묶었다⁠. 고마운 일이었는데⁠, 순범은 끈을 다 묶고 나서 덧붙였다⁠.

“⁠내가 나중에 가 볼 테니까 너무 세게 말하지 마⁠. 혜빈이 요새 회사 일로 날카로워⁠.⁠”

“⁠나는 안 날카로웠는 줄 알아⁠?⁠”

*

103동에서 107동까지는 걸어서 오 분이었다⁠. 놀이터를 가로지르면 사 분⁠. 다섯 해 동안 계순은 이 길을 아침 일곱 시 이십오 분에 지나 일곱 시 반에 107동 802호 초인종을 눌렀다⁠. 비가 와도⁠, 순범이 대상포진에 걸린 날에도⁠, 계순 자신이 몸살로 이마에 물수건을 얹은 날에도 눌렀다⁠.

경비실 창문 너머 라디오에서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정부가 저출생 대책을 또 내놓는다고 했다⁠. 놀이터 앞 게시판에는 화성시청 현수막 사진을 붙인 안내문이 새로 붙어 있었다⁠. 「⁠조부모 손주 돌봄 수당 조례안 — 시민 의견을 듣습니다⁠」 계순은 걸음을 멈추고 돋보기를 내려 안내문 글자를 한 번 읽었다⁠. 할머니한테 돈을 준다고⁠? 미끄럼틀 옆을 지나면서 계순은 혼자 웃었다⁠. 돈 주면 허리도 주나⁠.

107동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여자는 보호대 때문에 허리가 한 뼘 굵어 보였다⁠. 계순은 주머니 속 진단서를 꺼내 한 번 더 펼쳤다⁠. 「⁠요추 제4-5번 추간판 탈출증⁠. 6주간 무거운 물건 들기 및 허리 굽히기를 삼갈 것⁠.⁠」 쌍둥이는 한 아이에 열여덟 킬로였다⁠. 둘이 한꺼번에 안기면 서른여섯 킬로였다⁠.

802호 문은 계순이 번호를 누르기 전에 열렸다⁠.

“⁠엄마⁠, 늦었어⁠. 칠 분⁠.⁠”

딸 육혜빈이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면서 현관에 서 있었다⁠. 서른다섯⁠, 동탄 산업단지 의료기기 회사 세묘테크의 품질관리팀장⁠. 지난해 2월에 팀장을 단 뒤로 혜빈은 모든 것을 분 단위로 말했다⁠. 거실에서는 쌍둥이 라율과 라겸이 노란 유치원 원복 한 벌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원복은 두 벌이었는데 둘 다 같은 한 벌을 원했다⁠.

“⁠할머니⁠! 라겸이가 내 거 뺏어⁠!⁠”

“⁠이거 내 거야⁠! 이름 써 있어⁠!⁠”

“⁠너 글씨 못 읽잖아⁠!⁠”

평소라면 계순은 신발을 벗기도 전에 둘 사이에 무릎으로 내려앉아 원복을 갈라 쥐었을 것이다⁠. 오늘은 신발을 벗고⁠, 식탁까지 걸어가고⁠, 의자를 빼서 천천히 앉았다⁠. 보호대가 의자 등받이에 닿아 사각거렸다⁠. 라율이 줄다리기를 멈추고 할머니 배를 쳐다봤다⁠.

“⁠할머니⁠, 갑옷 입었어⁠?⁠”

“⁠그래⁠. 오늘부터 할머니는 싸우는 날이야⁠.⁠”

계순은 진단서를 식탁 위에 펴서 혜빈 쪽으로 밀었다⁠. 손바닥으로 두 번 눌러 접힌 자리를 폈다⁠. 그리고 어젯밤 잠자리에서 열 번은 소리 없이 말해 본 문장을 소리 내어 말했다⁠.

“⁠엄마 오늘부터 파업이다⁠. 돌봄 파업⁠.⁠”

*

혜빈은 진단서를 집어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품질관리팀장답게 날짜와 병원 직인부터 확인했다⁠. 그다음 일어날 줄 알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혜빈은 울지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식탁 의자에 걸어 둔 출근 가방을 열고 클리어 파일 하나를 꺼냈다⁠.

“⁠알아⁠. 아빠한테 들었어⁠. 지난주에 엄마 허리 아프다고⁠.⁠”

클리어 파일 안에는 두 장짜리 문서가 들어 있었다⁠. 맨 위에 굵은 글씨로 「⁠할머니 돌봄 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혜빈은 문서를 엄마 앞에 내려놓고 볼펜 한 자루를 옆에 나란히 놓았다⁠. 회사에서 협력 업체와 계약할 때 쓰는 양식을 고친 것이 한눈에 보였다⁠. ‘⁠갑⁠’ 자리에 「⁠육혜빈⁠」⁠, ‘⁠을⁠’ 자리에 「⁠육계순⁠」

“⁠엄마가 다섯 해 동안 계약서도 없이 해 준 거 알아⁠. 그래서 이제 정식으로 하자는 거야⁠. 월 칠십만 원⁠.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저녁 일곱 시 반까지⁠, 등원 하원 저녁 목욕⁠. 허리 아프면 목욕은 찬솔 씨가 할게⁠. 주말은 당연히 빼고⁠.⁠”

계순은 정수리의 돋보기를 내려 문서를 읽었다⁠. 읽는 동안 휴대전화를 꺼내 계산기 앱을 눌렀다⁠. 하루 열두 시간⁠, 한 달 스무하루⁠.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 숫자가 나왔다⁠.

“⁠한 시간에 이천칠백칠십팔 원이네⁠.⁠”

“⁠엄마⁠.⁠”

“⁠편의점 알바도 이거보단 받어⁠.⁠”

“⁠돈 얘기 하려는 거 아니잖아⁠. 엄마도 알잖아⁠. 나 지금 엄마 손 놓으면 회사 그만둬야 돼⁠. 팀장 단 지 일 년이야⁠. 우리 본부에서 여자 팀장 처음이야⁠. 내가 빠지면 다음 사람 없어⁠.⁠”

혜빈의 말은 빨랐고 정확했고⁠, 말끝마다 숫자가 붙어 있었다⁠. 계순은 딸의 그런 말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 학원비를 혼자 계산해 와서 엄마 가게 재봉틀 옆에 내밀던 날부터였다⁠. 「⁠이번 달 학원비 이십팔만 원⁠, 교재비 별도⁠.⁠」 그때도 혜빈은 울지 않았다⁠.

“⁠돈 얘기 아니야⁠. 엄마가 하는 얘기도⁠.⁠”

계순은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손바닥 밑에 깔았다⁠.

“⁠엄마가 다섯 해 동안 친구를 한 번도 못 만났어⁠. 여고 동창들 단톡방 초대가 다섯 번 왔는데 다섯 번 다 나가기 눌렀어⁠. 모임이 화요일이라서⁠. 영채가 남편 장례 치를 때도 못 갔어⁠. 그날도 화요일이었어⁠. 엄마는 칠십만 원 말고 화요일을 달라는 거야⁠. 화요일하고 목요일⁠.⁠”

혜빈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혜빈의 달력에서 본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이틀이면 열두 시간 곱하기 이틀⁠, 한 주에 스물네 시간이야⁠. 그걸 누가 채워⁠? 찬솔 씨 교대 근무 엄마도 알잖아⁠. 도우미 쓰면 한 달에 백팔십이야⁠.⁠”

“⁠그럼 백팔십 주고 써⁠.⁠”

“⁠엄마⁠!⁠”

원복 줄다리기를 하던 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라겸이 원복을 놓쳤고 라율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라율은 울려다가 할머니가 안 일어나는 것을 보고 울음을 멈췄다⁠.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다섯 살도 알았다⁠.

*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띠⁠, 띠⁠, 띠⁠, 띠⁠, 띠리릭⁠. 산악회 조끼를 입은 순범이 등산 스틱을 접어 들고 들어왔다⁠. 나중에 가 보겠다던 나중은 십오 분이었다⁠.

“⁠출발합니다⁠, 출발해요⁠. 다들 앉아 계세요⁠.⁠”

순범은 버스 안내 방송처럼 말하며 거실을 둘러봤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순범은 식탁 위의 진단서와 계약서를 차례로 보고⁠, 딸의 얼굴을 보고⁠, 아내의 허리를 봤다⁠. 그리고 딸 옆 의자를 빼서 앉았다⁠.

“⁠당신 이거 너무하는 거야⁠. 애 엄마가 지금 회사에서 얼마나 버티는데⁠. 우리 때는 다 그랬어⁠. 우리 엄마도 너 낳았을 때 서천에서 올라와서⁠…⁠.⁠”

“⁠당신 엄마는 석 달 있다 가셨어⁠. 석 달⁠.⁠”

“⁠석 달이든 다섯 해든⁠, 애 엄마 앞길을 막겠다는 거잖아⁠. 그게 이기적인 거지⁠.⁠”

이기적⁠. 계순은 낱말을 입속에서 한 번 굴렸다⁠. 남문 시장에서 바짓단을 하루에 마흔 벌씩 줄이던 시절에도⁠, 손님이 바지를 찾으러 오지 않아 석 달 치 수선비를 떼였을 때도⁠, 계순은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계순은 허리 보호대 찍찍이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찌익⁠,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다섯 해 동안 당신은 화요일마다 산에 갔지⁠. 목요일엔 경로당에서 바둑 뒀고⁠. 그거는 이기적 아니고⁠?⁠”

“⁠나는 할 만큼 했지⁠. 토요일마다 애들 놀이터 데리고 나가잖아⁠.⁠”

“⁠한 시간⁠.⁠”

“⁠한 시간도 시간이여⁠.⁠”

순범의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산악회 단톡방이었다⁠. 순범이 화면을 엎으려는데 라겸이 먼저 낚아채 할머니에게 달려왔다⁠. 라겸은 글자는 못 읽어도 화면 속 사진은 읽었다⁠. 등산복 입은 할아버지들이 산꼭대기에서 막걸리 잔을 든 사진이었다⁠. 계순은 돋보기를 내려 사진 아래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총무님 오늘 도시락 두 개 챙겨 오세요⁠. 지난주 김밥 최고⁠!⁠」

“⁠김밥은 누가 쌌는데⁠.⁠”

순범이 휴대전화를 도로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김밥은 지난 월요일 밤 계순이 쌌다⁠. 쌍둥이 재우고 열한 시에⁠.

현관에서 신발 벗는 소리가 들렸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들어온 사위 강찬솔이 작업복 점퍼를 입은 채 신발장 앞에 멈춰 있었다⁠. 찬솔은 거실 안을 한 번 보고⁠, 장모의 허리를 보고⁠, 아내를 보고⁠, 아무 말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 내리는 소리가 오래 났다⁠.

혜빈이 손목시계를 봤다⁠. 일곱 시 오십이 분⁠. 셔틀버스는 여덟 시 오 분이었다⁠.

“⁠엄마⁠, 나 지금 나가야 돼⁠. 오늘 첫 출근하는 신입이 셋이야⁠.⁠”

“⁠나가⁠. 애들은 오늘까지만 본다⁠. 새 학기 첫날이니까⁠.⁠”

“⁠오늘까지만⁠?⁠”

“⁠내일부터 파업이라고 했잖아⁠.⁠”

혜빈은 계약서를 엄마 손바닥 밑에서 빼내려다 말고⁠, 그대로 두었다⁠. 대신 출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쌍둥이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었다⁠. 라겸의 뒤통수 머리가 하늘로 뻗쳐 있었다⁠. 할머니 머리와 똑같았다⁠.

“⁠알았어⁠. 그럼 내일 아침 여덟 시⁠. 애들 103동 문 앞에 두고 갈게⁠. 엄마가 문 열어 주면 계약서대로 하는 거고⁠.⁠”

계순은 진단서를 반으로 접어 몸뻬 주머니에 넣었다⁠. 허리를 펴는 데 숨이 한 번 더 들었다⁠. 일어선 계순은 딸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다섯 해 전에는 반 뼘 차이였다⁠.

“⁠두고 가 봐라⁠. 문 안 연다⁠.⁠”

혜빈의 셔틀버스가 단지 정문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창문 밖으로 멀어졌다⁠. 순범은 등산 스틱을 다시 펴지 못하고 식탁 모서리에 세워 두었다⁠. 라율이 할머니 바지를 잡아당겼다⁠.

“⁠할머니⁠, 파업이 뭐야⁠?⁠”

계순은 대답 대신 원복 두 벌을 집어 들었다⁠. 한 벌의 목덜미에는 「⁠강라율⁠」⁠, 다른 한 벌에는 「⁠강라겸⁠」이 계순의 손바느질로 수놓아져 있었다⁠. 계순은 원복 두 벌을 쌍둥이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무릎을 꿇지 않고⁠, 허리를 숙이지 않고⁠, 높이에서 떨어뜨리듯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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