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66자)

맞지 않고 쓰러진 사람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산문 돌에서 비탈을 스무 걸음 내려가면 늙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돌 바깥이니 관부의 땅이고⁠, 가지 하나가 비무장 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심운학은 나에게 담 너머를 보지 말라고 했지⁠, 내 스승한테 보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구팔봉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지팡이를 내게 맡기고 감나무를 탔다⁠. 예순다섯 노인이 나무를 타는 소리는 다람쥐보다 요란했다⁠. 가지가 세 번 울고⁠, 노인이 두 번 욕을 하고⁠, 감꽃이 한 줌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보이십니까⁠?⁠”

“⁠다 보인다⁠. 내가 왕년에 낙양 기루 지붕에서 사흘 밤낮 판을 내려다본 사람이야⁠.⁠”

“⁠그때 뭘 보셨는데요⁠?⁠”

“⁠기생들 패를 봤지⁠. 노름 패⁠.⁠”

나는 감나무 밑동에 등을 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예선 사흘째⁠, 해가 머리 위에 있었다⁠. 철선자의 승부는 이날 세 번째였다⁠.

*

쇠부채는 펼 때와 접을 때 소리가 다르다⁠. 펼 때는 쇠살 열두 개가 차례로 미끄러지며 촤르륵 소리를 내고⁠, 접을 때는 마지막 살이 제자리에 들어가면서 딸깍 하고 닫힌다⁠. 철선자는 쉰 줄의 강남 노고수로⁠, 쇠부채 하나로 이름을 얻은 사람이었다⁠. 이 부채가 담 너머에서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함성이 한 번 크게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펼쳤다⁠!⁠” 구팔봉이 가지 위에서 외쳤다⁠. “⁠철선자가 부채를 폈다⁠! 아니⁠, 접었다⁠! 아니⁠, 저건 부채가 아니라 손이구나⁠.⁠”

“⁠스승님⁠,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중계를 해 달라며⁠.⁠”

“⁠해 달란 적 없습니다⁠.⁠”

쇠와 쇠가 맞부딪쳤다⁠. 하남 청년이라는 애송이는 칼을 크게 휘두르는 버릇이 있었다⁠. 휘두를 때마다 칼끝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너무 길었다⁠. 칼을 오래 써 본 사람은 칼끝 소리를 짧게 끊는다⁠. 철선자는 이 긴 소리들을 부채로 툭툭 쳐 냈는데⁠, 칠 때마다 반 박자씩 여유가 있었다⁠. 열 합⁠, 열다섯 합⁠. 나는 숨을 고르며 셌다⁠. 이대로면 스무 합 전에 끝날 승부였다⁠. 철선자가 이기는 쪽으로⁠.

그런데 스물한 번째 합에서 부채 소리가 안 났다⁠.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다음 사람 하나가 땅에 쓰러지는 소리⁠. 쿵이 아니었다⁠. 먼저 어깨가 땅에 닿고⁠, 몸이 한 번 굴러서 등이 닿고⁠, 마지막으로 발뒤꿈치가 닿았다⁠. 넘어지는 법을 아는 몸이 넘어지는 소리였다⁠. 칼에 맞은 사람은 그렇게 쓰러지지 못한다⁠. 맞은 사람은 한꺼번에 무너진다⁠.

함성이 터지지 않았다⁠. 담 너머가 잠깐 텅 비었다가⁠, 웅성거림이 물처럼 차올랐다⁠.

“⁠쓰러졌다⁠!⁠” 구팔봉이 외쳤다⁠. “⁠철선자가 쓰러졌어⁠! 피는⁠…⁠… 피는 안 보이는데⁠.⁠”

나는 다른 걸 듣고 있었다⁠. 담 너머⁠,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한 사람의 숨⁠. 맞은 사람은 숨을 짧게 끊어 쉰다⁠. 아파서 들이쉬다 말고 내쉰다⁠. 그런데 이 숨은 길게 들어가서 오래 머물렀다가 아주 천천히 나왔다⁠. 무언가를 참는 숨이었다⁠. 아픔이 아니라 다른 것을⁠.

잠시 뒤 쇠부채가 땅에서 들리는 소리가 났다⁠. 철선자가 일어나 애송이에게 두 손을 맞쥐고 고개를 숙이는 포권을 하는 것 같았다⁠. 무릎뼈가 두 번 우두둑 울렸다⁠. 다음 구경꾼들의 야유가 담을 넘어왔다⁠. 돈을 건 사람들의 야유였다⁠. 철선자의 발소리가 이 야유 속을 지나 비무장 밖으로 멀어졌다⁠. 끌리는 발소리였다⁠.

*

갑례는 쌀독 뚜껑을 열기 전에 나를 한 번 보았다⁠. 흑룡방 사람 다섯이 탁자 앞에 물표를 늘어놓고 서 있었다⁠. 총관은 맨 뒤에서 이를 쑤셨다⁠.

“⁠삼백 냥⁠.⁠” 갑례가 말했다⁠.

쌀독에는 이틀 반 동안 거리에서 모은 돈이 들어 있었다⁠. 이기는 편에 건 사람들에게 내준 돈을 빼면 판에 남은 건 백팔십 냥 남짓이었다⁠. 나는 방으로 올라가 탁문석이 빌려준 이백 냥 꾸러미를 들고 내려왔다⁠. 꾸러미를 풀 때 손가락이 매듭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갑례가 은자를 하나하나 세어 흑룡방 사람들 손에 올려 주었다⁠. 은자가 손바닥에 놓일 때마다 짧게 탁⁠, 탁 소리가 났다⁠. 다 세고 나니 쌀독 바닥이 다시 보였다⁠. 내 꾸러미에는 여든 냥이 남았다⁠.

총관이 이쑤시개를 뱉고 웃었다⁠. “⁠장사 잘하시오⁠, 왕 선생⁠.⁠”

개방 거지가 탁자 귀퉁이에 앉아 이걸 다 보고 있었다⁠. 총관은 아무것도 걸지 않은 날이었는데 표정은 제일 많이 잃은 사람 같았다⁠.

*

하남 청년은 해 지기 전에 국숫집에 나타났다⁠. 흑룡방 사람 둘이 양옆에 붙어 앉아 국수를 시켜 주고 술을 따라 주었다⁠. 청년은 스무 살을 갓 넘긴 얼굴로⁠, 칼을 탁자 위에 눕혀 놓고 칼집을 자꾸 손바닥으로 쓸었다⁠. 칼집에 흠집 하나 없었다⁠. 오늘 처음 뽑아 본 칼 같았다⁠.

나는 옆 탁자에 앉아 국수를 한 그릇 시켰다⁠.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는 소리를 일부러 크게 냈다⁠. 노름꾼이 남의 이야기를 엿들을 때는 제 소리를 크게 내는 게 낫다⁠. 조용한 놈을 사람들이 경계한다⁠.

“⁠형씨⁠, 오늘 철선자를 넘겼다면서요⁠? 대단하오⁠. 어디를 베었소⁠?⁠”

청년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웃음이 넓었다⁠. 아직 칭찬이 공짜인 줄 아는 나이였다⁠.

“⁠가슴이오⁠. 이렇게 사선으로⁠.⁠”

“⁠가슴이요⁠? 피가 안 났다던데⁠.⁠”

“⁠아⁠, 아니⁠, 어깨였소⁠. 어깨를 칼등으로⁠…⁠…⁠.⁠”

“⁠칼등으로요⁠?⁠”

“⁠아니 칼날로⁠. 아니⁠…⁠…⁠.⁠”

청년의 왼쪽에 앉은 흑룡방 사내가 국수 그릇을 청년 앞으로 밀었다⁠. 그릇이 탁자를 긁는 소리가 길었다⁠. “⁠먹어⁠. 불어⁠.⁠” 청년은 입을 다물고 국수를 먹었다⁠. 오른쪽 사내가 나를 보았다⁠. 이번엔 눈이 웃지 않았다⁠.

“⁠왕 선생⁠, 국수는 각자 먹읍시다⁠.⁠”

“⁠그럽시다⁠. 근데 형씨⁠, 칼이 사람 몸에 닿으면 손바닥이 먼저 압니다⁠. 오늘 형씨 손바닥이 뭘 알았는지는 형씨가 제일 잘 알겠지요⁠.⁠”

나는 국숫값을 놓고 일어났다⁠. 등 뒤에서 젓가락이 그릇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이 떨어뜨린 것이었다⁠. 이 애는 오늘 이긴 게 아니라 이기게 된 거였고⁠, 이걸 아는 사람이 저 하나만이 아니라는 걸 방금 알았다⁠.

*

탁문석은 저녁밥 때에 왔다⁠. 이번엔 객잔 정문으로⁠, 발소리 없이⁠. 갑례가 국을 퍼다 말고 국자를 내려놓았다⁠. 내 탁자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청했고⁠, 갑례는 차 대신 숭늉을 갖다 놓았다⁠. 탁문석은 숭늉도 차처럼 마셨다⁠.

“⁠운이 나빴소⁠, 왕 선생⁠.⁠”

“⁠운이 아니라 부채가 무거웠던 거겠지요⁠. 강남 노고수가 스물한 합 만에 애송이한테 맞지도 않고 넘어지다니⁠.⁠”

“⁠맞지도 않았다고⁠? 그걸 어떻게 아시오⁠? 왕 선생은 담 너머로 눈도 못 대게 되어 있는데⁠.⁠”

“⁠귀는 대지 말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탁문석이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소리친다고 누가 믿을까⁠? 담 너머를 보지도 못한 노름꾼이 숨소리를 들었다고⁠? 심운학은 오히려 판을 연 놈부터 굴릴 것이다⁠. 심운학도 이걸 알았다⁠.

“⁠판이 망하면 내 돈도 못 받소⁠.⁠” 탁문석이 말했다⁠. “⁠그래서 삼백 냥을 더 빌려주겠소⁠. 보름날에 같이 갚으시오⁠. 합하면 천오백이군⁠.⁠”

“⁠안 받으면요⁠?⁠”

“⁠판을 닫아야겠지⁠. 닫으면 왕 선생은 무엇으로 천이백을 갚소⁠?⁠”

이 대목에서 구팔봉이 끼어들었다⁠. 노인은 어느새 탁문석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 손이 탁문석의 숭늉 그릇 쪽으로 아주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방주⁠, 숭늉이 식었소⁠. 내가 마셔 드리지⁠.⁠”

탁문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숭늉 그릇을 구팔봉 앞으로 밀어 주었다⁠. “⁠오랜만이오⁠, 구 노인⁠. 개봉에서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였더라⁠.⁠”

구팔봉의 손이 그릇 앞에서 멎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노인은 숭늉을 들이켜고 트림을 했다⁠. “⁠기억 안 나⁠. 늙으면 다 잊어⁠.⁠”

나는 이 잠깐을 들었다⁠. 노인의 숨이 한 번 걸렸다⁠. 당시에는 그냥 넘겼다⁠.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탁문석은 은자 삼백 냥을 탁자에 놓았다⁠. 나는 이것을 받았다⁠. 받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없었다⁠. 탁문석이 일어서며 말했다⁠.

“⁠판은 닫지 마시오⁠. 예선은 이틀 남았고⁠, 본선부터는 판이 더 커질 거요⁠.⁠”

*

탁문석이 나가자 갑례가 국자로 내 머리를 때렸다⁠. 소리만 큰 게 아니라 정말 아팠다⁠.

“⁠이 화상아⁠, 저놈 돈을 또 받아⁠?⁠”

“⁠안 받으면 판을 닫아야 하잖아요⁠.⁠”

“⁠닫아⁠! 저놈 돈 받고 사는 것보다 굶는 게 나아⁠.⁠” 갑례가 국자를 탁자에 내리쳤다⁠. 숭늉 그릇이 튀어 올랐다⁠. “⁠우리 영감이 저놈들 판에서 빚을 져서 이 객잔 문서까지 넘어갈 뻔했어⁠. 영감 죽고 내가 삼 년을 국수 말아서 겨우 찾았다고⁠.⁠”

갑례는 문설주에 걸린 국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손잡이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손가락 자국대로 패어 있었다⁠. 저 국자로 삼 년 동안 국수를 몇 그릇 말았는지 나는 셈하지 않았다⁠. 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여자의 팔뚝이 왜 내 종아리만 한지 그제야 알았다⁠.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구팔봉이 숭늉 그릇을 핥다가 말했다⁠.

“⁠삼통아⁠, 판을 바꿔⁠.⁠”

“⁠어떻게요⁠?⁠”

“⁠네가 배당을 정하니까 네가 물어 주는 거야⁠. 배당을 정하지 마⁠. 건 돈을 한데 모아서 이긴 쪽에 건 사람들이 나눠 갖게 해⁠. 판은 거기서 한 할만 떼고⁠. 그럼 판은 절대 안 잃어⁠.⁠” 노인이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내가 왕년에 강남에서 그 판을 처음 만들었다⁠. 물레판이라고⁠, 돈이 물레처럼 돌아서 판에 실을 감아 준다고⁠.⁠”

“⁠그걸 스승님이 만들었다고요⁠?⁠”

“⁠내가 이름을 붙였지⁠. 그게 만든 거다⁠.⁠”

갑례가 처음으로 구팔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판은 안 잃어⁠. 우리 독은 안전해⁠.⁠”

나는 셈을 해 보았다⁠. 판은 안 잃는다⁠. 대신 누군가 승부를 미리 사 두면⁠, 거리 사람들이 건 돈이 통째로 그쪽으로 흘러간다⁠. 판은 거기서 한 할을 떼어 내 빚을 갚는다⁠. 탁문석이 이날 왜 그렇게 쉽게 고개를 끄덕였는지⁠, 물레판이 되면 더 잘 보였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건 내 판이 망하는 게 아니었다⁠. 내 판이 커지는 거였다⁠.

개방 거지가 탁자 귀퉁이에서 동전 세 닢을 짤랑거렸다⁠. 하원비에게 걸었던 이 세 닢이 첫날 이겨서 몇 푼 붙어 돌아온 것이었다⁠. 이 사람은 이 돈을 또 하원비에게 걸겠다고 했다⁠.

나는 물레판으로 바꿨다⁠. 그리고 저녁을 먹지 않고 일어났다⁠.

*

철선자가 묵는 곳은 비탈 맨 아래⁠, 객잔들이 끝나는 자리의 마구간 딸린 여인숙이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찾았다⁠. 마구간 뒤에서 무언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망치 소리가 아니라⁠, 맨손으로 쇠를 구부리는 소리였다⁠. 끼익⁠, 하고 쇠가 비명을 지르다 멈추고⁠, 다시 비명을 질렀다⁠.

등불 하나 아래 노인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옆에는 묶다 만 봇짐이 있었고⁠, 손에는 쇠부채가 들려 있었다⁠. 쇠살 열두 개 가운데 셋이 엿가락처럼 휘어 있었다⁠. 노인은 이 부채를 무릎에 대고 하나를 더 꺾고 있었다⁠.

“⁠철선자 어른이시지요⁠.⁠”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등불 그을음 때문은 아니었다⁠.

“⁠누구냐⁠?⁠”

“⁠산 밑에서 내기판을 여는 놈입니다⁠. 오늘 어른 덕에 삼백 냥을 잃었지요⁠.⁠”

노인의 손에서 쇠살 하나가 뚝 부러졌다⁠. 이 소리가 마구간 안의 말들을 깨웠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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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차승객2026.10.25· 3화

    3화에서 맞지도 않았는데 쓰러진 사람, 혹시 승부 조작이에요?

    • 설묵향작가2026.10.26

      판을 연 노름꾼이 제일 먼저 의심한 것도 그거였어요. 판 주인이 조작을 의심해야 하는 처지라는 게 이 작품의 재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