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280자)

부러진 부채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고백하자면 나는 멱살을 잡히는 데는 이골이 났다⁠. 노름판에서 이기면 진 놈이 멱살을 잡고⁠, 지면 빌려준 놈이 멱살을 잡는다⁠. 다만 이때까지 멱살을 잡혀 발이 땅에서 떨어져 본 적은 없었다⁠. 철선자는 쉰을 넘긴 노인인데⁠, 한 손으로 내 앞섶을 쥐고 일어서니 내 짚신 코가 땅에서 한 뼘 떠올랐다⁠. 나는 공중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삼백 냥을 잃었다고⁠? 그래서⁠, 그 돈을 나한테 받으러 왔느냐⁠?⁠”

“⁠아닙니다⁠, 어른⁠. 받으러 왔으면 이렇게 들려 있지 않고 도망가고 있겠지요⁠.⁠”

노인의 숨이 내 얼굴에 닿았다⁠. 술 냄새는 없었다⁠. 쇠 냄새가 났다⁠. 하루 종일 쇠부채를 쥐고 있던 손의 냄새였다⁠.

“⁠그럼 왜 왔느냐⁠?⁠”

“⁠어른이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서요⁠.⁠”

손이 조금 풀렸다⁠. 짚신 코가 땅에 닿았다⁠. 노인은 아직 앞섶을 놓지는 않았다⁠.

“⁠담 밖에서 들었습니다⁠. 스물한 번째 합에 부채 소리가 안 났지요⁠. 칼이 바람을 가르고⁠, 그다음 어깨가 먼저 땅에 닿고⁠, 한 번 굴러서 등이 닿고⁠, 마지막에 발뒤꿈치가 닿았습니다⁠. 칼에 맞은 사람은 그렇게 차례로 못 쓰러집니다⁠. 그리고 숨이요⁠. 맞은 사람은 숨을 짧게 끊어 쉬는데⁠, 어른은 길게 들이쉬고 한참 안 내쉬셨습니다⁠. 아파서가 아니라⁠…⁠…⁠.⁠”

철선자의 손바닥이 내 뺨에 날아왔다⁠. 찰싹⁠, 하는 소리가 마구간 안까지 들어가 말 한 마리가 투레질을 했다⁠. 볼이 얼얼했다⁠. 귀가 웅 울렸다⁠. 내 귀가 울리는 건 질색이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노인에게 화가 났다⁠.

“⁠때리시는 건 좋은데 귀는 피해 주십시오⁠. 그거 하나로 먹고삽니다⁠.⁠”

*

열 해 전⁠, 개봉 동쪽 수문 다리 밑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었고⁠, 구팔봉은 쉰다섯이었다⁠. 노인은 다리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엎은 사발 두 개를 번갈아 흔들며 나에게 듣게 했다⁠. 어느 사발에 주사위가 들었는지⁠, 몇이 나왔는지⁠. 강물 소리와 다리 위 수레바퀴 소리가 다 끼어들어서⁠, 처음 한 달은 하나도 못 맞혔다⁠.

“⁠귀를 닫아⁠. 강물을 듣지 말고 사발만 들어⁠.⁠”

“⁠귀를 어떻게 닫습니까⁠?⁠”

“⁠다른 걸 다 들으면 닫혀⁠. 강물을 다 들어⁠. 수레를 다 들어⁠. 그러면 남는 게 사발이야⁠.⁠”

이 말을 알아듣는 데 석 달이 걸렸다⁠. 알아듣고 나니 세상이 달라졌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다 달랐다⁠. 빚진 놈은 발끝으로 걷고⁠, 돈 받으러 가는 놈은 뒤꿈치로 걸었다⁠.

어느 날 저녁 노인은 사발을 내려놓고 품에서 뼈 주사위 한 쌍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하나는 모서리가 깨져 있었다⁠.

“⁠생일이라며⁠. 선물이다⁠.⁠”

“⁠깨진 걸 주십니까⁠?⁠”

“⁠깨진 걸 줘야 네가 소리를 안 잊지⁠. 이건 반 박자 늦게 멈춰⁠. 판이 시끄러워서 네 귀가 흔들릴 때 이걸 굴려⁠. 늦는 소리가 들리면 네 귀가 아직 살아 있는 거다⁠.⁠”

이날 노인은 한 가지를 더 말했다⁠. 다리 위로 흑룡방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빚을 받으러 가는 뒤꿈치 소리였다⁠.

“⁠삼통아⁠, 판에서 제일 비싼 게 뭔 줄 아냐⁠?⁠”

“⁠판돈이요⁠.⁠”

“⁠사람이야⁠. 고수도 사람이고⁠, 사람은 빚이 있어⁠. 칼 잘 쓰는 놈한테 이기려면 칼을 들지 말고 그놈 빚을 사면 돼⁠.⁠” 노인은 거기서 말을 끊고 한참 강물을 들었다⁠. “⁠그러니까 너는 절대 남의 빚을 사지 마⁠. 사람을 사면 너도 팔린다⁠.⁠”

이 말을 한 노인이 같은 해 겨울 아무 말 없이 개봉에서 사라졌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이 노인의 것이었는지⁠, 노인이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

철선자는 내 앞섶을 놓고 쭈그려 앉았다⁠. 휜 쇠부채가 철선자의 무릎 위에 있었다⁠. 등불이 부채살 사이로 새어 땅바닥에 금을 그었다⁠.

“⁠두 해 전이다⁠.⁠” 노인이 말했다⁠. “⁠개봉에 제자 혼사가 있어서 갔다가⁠, 밤에 할 일이 없어서 흑룡방 판에 앉았다⁠. 처음엔 땄지⁠. 처음엔 다 따⁠. 그다음엔 이백 냥을 잃었다⁠. 강남에 돌아가 갚으려 했는데 도장이 기울어 제자들 밥값도 모자랐다⁠.⁠”

“⁠그래서 오늘 넘어지셨군요⁠.⁠”

“⁠총관이 찾아왔다⁠. 스물한 합째에 넘어지면 빚은 없던 걸로 해 주겠다고⁠. 나는 넘어졌다⁠.⁠” 노인은 부채의 휜 살 하나를 손톱으로 튕겼다⁠. 탱⁠, 하고 맥없이 울렸다⁠. “⁠그런데 아까 해 질 녘에 총관이 또 왔다⁠. 빚 문서는 대회 끝나고 찢어 주겠다더라⁠. 그동안 입 다물고 있으라고⁠.⁠”

“⁠대회 끝나고 찢어 줄 사람이 아니지요⁠.⁠”

“⁠나도 안다⁠.⁠” 노인이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목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였다⁠. “⁠서른 해 동안 이 부채로 강남에서 진 적이 세 번이다⁠. 세 번 다 나보다 센 놈한테 졌다⁠. 오늘은 칼도 제대로 못 쥐는 애송이한테 누웠다⁠. 그래서 이걸 부러뜨리는 중이다⁠. 다시는 안 쥐려고⁠.⁠”

나는 노인의 무릎 위 부채를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살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휜 것 셋⁠, 부러진 것 하나⁠, 성한 것 여덟⁠. 나는 성한 살들을 한 번에 펴 보았다⁠. 촤르륵⁠. 이 소리 가운데 하나가 늦었다⁠.

“⁠어른⁠, 이 부채 아홉째 살이 반 박자 늦습니다⁠.⁠”

철선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등불 아래 이 눈이 처음으로 똑바로 나를 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들리니까요⁠. 다른 살은 다 제 무게대로 미끄러지는데 아홉째만 한 번 걸렸다가 갑니다⁠. 이음매가 있는 것 같은데요⁠.⁠”

노인은 한참 말이 없었다⁠. 마구간 안에서 말이 여물을 씹는 소리가 났다⁠.

“⁠삼십 년 전에 내 사부가 부러뜨렸다⁠. 내가 사부를 처음으로 이긴 날⁠, 사부가 그걸 보더니 아홉째 살을 손가락으로 꺾고 다시 붙여 주었다⁠. 이제 네 부채에 흠이 하나 생겼으니⁠, 다른 놈한테 질 때마다 이 흠을 생각하라고⁠.⁠” 노인이 부채를 내 손에서 도로 가져갔다⁠. 이번엔 이걸 꺾지 않고 무릎에 눕혔다⁠. “⁠그 흠을 알아본 놈이 사부 다음으로 네가 처음이다⁠. 무공도 모르는 놈이⁠.⁠”

“⁠무공은 모르지만 소리는 압니다⁠.⁠”

“⁠첫날 팔괘장을 익혔다고 장로 앞에서 떠들던 놈이 너 아니냐⁠?⁠”

“⁠그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왔습니까⁠?⁠”

“⁠산 밑 개도 안다⁠. 팔괘 점쟁이⁠.⁠”

노인은 부채를 성한 쪽으로만 반쯤 펴 들고 일어섰다⁠. “⁠눈 감아라⁠. 네 귀가 칼도 듣는지 보자⁠.⁠”

나는 눈을 감았다⁠. 부채가 바람을 세 번 갈랐다⁠. 한 번은 위에서 아래로 길게⁠, 한 번은 옆으로 짧게⁠, 마지막은 거의 소리 없이 내 코앞까지 왔다가 멈췄다⁠. 부채 끝에서 쇠 냄새가 났다⁠.

“⁠무슨 초식이냐⁠?⁠”

“⁠그⁠, 첫 번째는 학이 날개를 펴는⁠…⁠… 백학량시 아닙니까⁠?⁠”

“⁠아니다⁠.⁠”

“⁠그럼 두 번째가 백학량시고요⁠.⁠”

“⁠그런 초식은 내 문파에 없다⁠.⁠”

“⁠그럼 셋 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첫 번째는 오른발이 반 걸음 나오면서 내리치셨고⁠, 두 번째는 허리만 돌리셨고⁠, 세 번째는 발을 안 떼고 팔만 뻗으셨습니다⁠. 세 번째가 제일 빨랐고 제일 조용했어요⁠. 그게 진짜 쓰시는 수지요⁠?⁠”

눈을 떴다⁠. 철선자가 부채를 거두고 있었다⁠. 이름은 하나도 못 맞혔는데 노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름은 몰라도 된다⁠. 이름은 책에 있고⁠, 칼은 발에 있다⁠.⁠”

“⁠그 말씀⁠, 판에 써먹어도 됩니까⁠?⁠”

“⁠돈 받고 써라⁠.⁠”

*

나는 이 자리에서 셈을 했다⁠. 노름꾼은 사람 앞에서도 셈을 한다⁠. 이게 우리 병이다⁠. 이 노인을 내 편으로 두면 무엇이 생기나⁠? 노인은 예선에서 떨어졌어도 강남 원로라 대회 끝까지 비무장 원로석에 앉을 수 있다⁠. 나는 담 안에 못 들어가지만⁠, 노인은 들어간다⁠. 노인이 내 눈이 되어 주면 나는 귀와 눈을 다 갖는다⁠. 대신 무엇을 내야 하나⁠?

“⁠어른⁠, 그 빚 제가 사겠습니다⁠.⁠”

말이 먼저 나왔고⁠, 다리 밑 노인의 목소리가 뒤따라 왔다⁠. 사람을 사면 너도 팔린다⁠. 나는 이 목소리를 귓바퀴 바깥으로 밀어냈다⁠.

“⁠네가⁠? 너도 빚쟁이라며⁠.⁠”

“⁠빚쟁이니까 빚 셈은 잘합니다⁠. 보름날 제 빚 갚을 때 어른 이백 냥도 같이 흑룡방에 들고 가겠습니다⁠. 그 문서를 어른 손으로 찢게 해 드리지요⁠.⁠”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느냐⁠?⁠”

“⁠판에서요⁠. 어른이 도와주시면 판이 커집니다⁠.⁠”

“⁠내가 무엇을 도우란 말이냐⁠?⁠”

“⁠담 안에서 제 눈이 되어 주십시오⁠. 누가 누구한테 언제 고개를 숙이는지⁠, 누가 칼을 잡기 전에 관중석 어디를 보는지⁠. 그리고 하나 더⁠.⁠” 나는 부채를 가리켰다⁠. “⁠다시는 안 쥐신다는 그 부채⁠, 보름날까지만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철선자가 휜 부채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나를 보았다⁠. 다음 내 뺨을 보았다⁠. 볼이 아직 부어 있었다⁠.

“⁠때려서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하겠다⁠.⁠”

“⁠안 하셔도 됩니다⁠. 이백 냥에 얹어 드리지요⁠.⁠”

노인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쇳소리 섞인 웃음이었는데⁠, 아까 목에서 바람 빠지던 소리와는 달랐다⁠. 부채를 접으려다 휜 살 때문에 안 접히자 그냥 펼친 채로 봇짐 위에 얹었다⁠. 묶다 만 봇짐을 도로 풀었다⁠.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내게는 판돈이 떨어지는 소리보다 반가웠다⁠.

이날 밤 내 빚은 천칠백 냥이 되었다⁠. 탁문석에게 천오백⁠, 그리고 철선자 몫으로 이백⁠. 그런데 이상하게 셈이 무겁지 않았다⁠. 노름꾼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산 것이 판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구팔봉에게 들키면 한 소리 들을 일이었다⁠. 그래서 들키지 않기로 했다⁠. 노인은 내 뺨이 왜 부었느냐고 물을 테고⁠, 나는 마구간 문에 부딪혔다고 할 것이다⁠. 이 노인은 믿는 척하고 속으로 웃을 것이다⁠. 우리 둘은 오래전부터 그런 식으로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 왔다⁠.

*

봇짐을 다 풀고 나서 철선자가 물었다⁠.

“⁠너⁠, 판을 열었다고 했지⁠. 결승에 누가 올라갈 것 같으냐⁠?⁠”

“⁠하원비요⁠. 다들 그렇게 보고⁠, 돈도 다 그쪽으로 몰립니다⁠.⁠”

“⁠올라가긴 한다⁠. 올라가서 진다⁠.⁠”

나는 숨을 멈췄다⁠. 벽 너머에서 칼이 칼집에 밀려 들어가던 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른도 그걸 아십니까⁠?⁠”

“⁠흑룡방 총관이 나한테 입 다물라고 할 때 그 애 이름을 같이 댔다⁠. 나 하나만 넘어지는 게 아니니 부끄러워 말라고⁠. 위로랍시고⁠.⁠” 철선자가 이를 갈았다⁠. 어금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결승에서 이길 놈은 귀면도다⁠. 흑룡방이 개봉에서 돈을 주고 데려다 쓰는 손님 무사⁠, 객경인데⁠, 예선 내내 귀신 탈을 쓰고 나온다⁠. 칼은 진짜다⁠. 진짜라서 더 더러운 거지⁠. 져 주지 않아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르는 놈한테⁠, 굳이 상대를 눕혀 놓고 판을 깔아 주는 거다⁠.⁠”

“⁠판돈 때문이지요⁠. 하원비가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귀면도에게도 돈을 나눠 겁니다⁠. 하원비가 꼭 이긴다고 믿어야 거리의 돈이 전부 그쪽으로 쏠리고⁠, 그래야 다 삼킬 수 있습니다⁠.⁠”

철선자가 나를 오래 보았다⁠. “⁠너는 그걸 듣자마자 셈이 되는구나⁠.⁠”

“⁠그게 제 병입니다⁠.⁠”

노인은 등불 심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줄였다⁠. 마구간이 어둑해졌다⁠. 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하원비는 밤마다 비탈 위 소나무 숲에서 혼자 칼을 닦는다⁠. 이야기를 하려거든 거기로 가라⁠. 그 애 칼은 내 부채보다 빠르니⁠, 이번엔 귀를 단단히 챙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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