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53자)

참고인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9월 1일 화요일 오전 열 시⁠, 인천경찰청 4층 조사실은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보다 따뜻했다⁠. 창문은 하나였고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책상 위에 모니터 두 대⁠, 서류철 한 무더기⁠, 그리고 반쯤 먹다 만 쫄면 그릇이 있었다⁠.

탁주엽 경위는 마흔여섯 살이었다⁠. 흰머리가 섞인 짧은 머리에 넥타이 없는 와이셔츠를 입었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나윤이 들어가자 탁주엽은 쫄면 그릇을 모니터 뒤로 밀었다⁠.

“⁠아침을 못 먹어서요⁠. 불면 맛없어서 미리 먹으려다가⁠, 피해자 진술서 읽다 보니까 또 불었네요⁠. 앉으세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다 기록됩니다⁠.⁠”

탁주엽은 참고인 조사가 무엇인지부터 말했다⁠. 나윤은 피의자가 아니고⁠, 묻는 말에 아는 만큼 대답하면 되고⁠, 대답하기 싫은 것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조사 내용은 조서로 남고⁠, 끝나면 읽어 보고 도장을 찍는다고 했다⁠.

“⁠으뜸에서 도상만 씨 집 계약 몇 건 하셨어요⁠?⁠”

“⁠제가 서류를 만든 건 이백 건쯤이에요⁠. 2022년부터요⁠.⁠”

“⁠이백 건⁠.⁠” 탁주엽이 자판을 쳤다⁠. “⁠계약서는 누가 써요⁠?⁠”

“⁠제가 뽑고요⁠, 설명이랑 도장은 소장님이요⁠.⁠”

“⁠2024년 4월 6일 해든빌 B동 302호 계약 때 받은 이행보증각서⁠, 입회인이 계나윤 씨죠⁠?⁠”

“⁠네⁠.⁠”

“⁠근저당 석 달 안에 말소⁠, 이거 될 거라고 보셨어요⁠?⁠”

“⁠아니요⁠.⁠”

탁주엽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자판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 서명하셨고요⁠.⁠”

“⁠소장님이 하라고 하셨어요⁠.⁠”

탁주엽은 다시 자판을 쳤다⁠. 치는 소리가 길었다⁠. 나윤이 한 말보다 길게 치는 것 같아 화면을 넘겨다보았지만 각도가 맞지 않았다⁠.

“⁠도상만 씨 집이 미추홀⁠, 부평⁠, 남동에 412채예요⁠. 지금 들어온 피해 신고가 120건이고⁠, 계속 늘어요⁠. 계약을 맡은 중개사무소가 일곱 곳입니다⁠. 으뜸이 그중 하나고요⁠.⁠”

탁주엽은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윤 앞에 놓았다⁠. 휴대전화 화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부평의 다른 중개사무소 단톡방이었다⁠. 「⁠부개동 ○○빌라 201 계약 완료⁠. R3 입금 확인 부탁드립니다⁠.⁠」 답장은 상만의 번호였다⁠. 「⁠확인⁠. 수고⁠」⁠.

“⁠R3⁠. 이런 말 들어 보셨어요⁠?⁠”

나윤은 종이를 보았다⁠. 종이 속 R은 상만이 쓰는 R과 모양이 같았다⁠. 대문자 R 뒤에 숫자 하나⁠, 숫자 뒤에 마침표 없이 끝나는 버릇까지⁠.

“⁠모릅니다⁠.⁠”

말이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쉽게 나온 말은 목에 걸리지 않았고⁠, 걸리지 않아서 무서웠다⁠.

“⁠모르세요⁠.⁠” 탁주엽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판을 쳤다⁠. 이번에는 짧았다⁠.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참고인은 여기서 거짓말을 해도 처벌받지 않아요⁠. 법정에서 선서하는 증인하고 달라요⁠. 대신 나중에 참고인이 피의자가 되면 오늘 한 말이 같이 갑니다⁠. 조서는 안 없어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탁주엽이 모니터 뒤의 쫄면 그릇을 다시 끌어당겼다⁠. 면이 그릇 모양대로 굳어 있었다⁠. “⁠도상만 씨 출국 기록을 봤는데⁠, 올해만 베트남을 네 번 다녀오셨더라고요⁠. 아드님이 호치민에서 식당 하신다면서요⁠. 혹시 들으신 거 있으면 연락 주세요⁠.⁠”

“⁠하나만 더 여쭐게요⁠.⁠” 탁주엽이 쫄면 그릇을 다시 밀어냈다⁠. “⁠도상만 씨가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 보증금으로 나가는 세입자 보증금 돌려준다는 얘기⁠, 사무실에서 들으신 적 있어요⁠? 전화로든 직접이든⁠.⁠”

나윤의 머릿속에 2024년 4월 6일 오전의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새로 들어오는 신혼부부 돈으로 A동 201호 빼 줘야 하니까⁠. 수화기를 든 사람은 태식이었고⁠, 스피커는 켜져 있었다⁠.

“⁠잘 기억이 안 나요⁠. 사무실에 전화가 많이 와서요⁠.⁠”

“⁠전화가 많이 오죠⁠, 중개사무소는⁠.⁠” 탁주엽이 자판을 쳤다⁠. “⁠기억나시면 연락 주세요⁠. 기억은 가끔 늦게 와요⁠. 늦게 온 기억도 조서에 넣어 드립니다⁠.⁠”

조서는 아홉 장이었다⁠. 나윤은 아홉 장을 다 읽었다⁠. 「⁠모릅니다⁠」는 일곱 번째 장 가운데에⁠, 「⁠잘 기억이 안 납니다⁠」는 여덟 번째 장 맨 아래에 있었다⁠. 나윤은 두 줄 위에서 손가락을 한 번씩 멈췄다가 다음 줄로 넘어갔다⁠. 마지막 장에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인주가 엄지 주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

1층 로비 자판기 앞에 재열이 있었다⁠. 대책위가 지난주 낸 집단 고소장 때문에 고소인 조사를 받으러 왔다고 했다⁠. 재열은 이온 음료 두 개를 뽑아 하나를 나윤에게 주었다⁠. 자판기가 두 번째 캔을 내놓을 때 덜컹 소리가 났고⁠, 재열은 자판기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냉동 창고의 기계들도 그렇게 친다고 했다⁠.

“⁠뭐라고 했어요⁠?⁠”

“⁠아는 만큼요⁠.⁠”

“⁠아는 만큼이 얼마만큼인데요⁠?⁠”

나윤은 대답 대신 손에 든 출석요구서를 반으로 접었다⁠. 다시 반으로 접었다⁠. 재열이 나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실장님 곤란하면 종이 접어요⁠. 계약 날도 그랬어요⁠. 각서 쓸 때 각서 귀퉁이 접었어요⁠. 예슬이가 펴 줬잖아요⁠.⁠”

나윤은 접던 손을 멈췄다⁠. 종이는 이미 손바닥만 해져 있었다⁠.

“⁠재열 씨는 뭐라고 했어요⁠?⁠”

“⁠우리가 본 거요⁠. 각서⁠, 석 달⁠, 고개 끄덕인 사람⁠.⁠” 재열이 이온 음료를 땄다⁠. “⁠고개 끄덕인 사람 이름도 말했어요⁠. 물어보길래요⁠.⁠”

“⁠잘했어요⁠.⁠”

“⁠잘한 건지 모르겠어요⁠.⁠” 재열이 캔을 한 번에 반쯤 마셨다⁠. “⁠다음 주엔 미추홀서에 가요⁠. 명예훼손 피의자 조사요⁠. 같은 주에 고소인도 하고 피의자도 해요⁠. 경찰서 마일리지 쌓이면 뭐 주나 몰라요⁠.⁠”

재열이 웃지 않고 말해서 나윤도 웃지 않았다⁠. 로비 텔레비전에서는 지난달 전세 시장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 빌라 골목은 해든빌과 똑같이 생겼다⁠.

*

오후에 나윤은 주안역 근처 중개사무소 세 곳에 이력서를 들고 갔다⁠. 첫 번째 사무소 소장은 이력서를 다 읽기도 전에 물었다⁠.

“⁠으뜸 계 실장⁠? 경찰 다녀왔다며⁠. 아침에 우리 협회 단톡방에 벌써 돌았어⁠.⁠”

두 번째 사무소는 문 앞에서 사람을 안 구한다고 했다⁠. 세 번째 사무소 소장은 이력서를 받아 서랍에 넣으면서⁠, 요즘 빌라 전세는 아무도 안 한다고⁠, 손님이 와도 빌라 소리만 나오면 나간다고 했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컸다⁠.

나윤은 주안역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하나 사서 길에서 먹었다⁠. 김 포장을 순서대로 뜯었는데 1번 다음에 2번이 찢어져 김이 반만 감겼다⁠. 반만 감긴 김밥을 들고 있으려니 웃음이 났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

저녁 여섯 시 반⁠, 해든빌 B동 3층 복도에 낯선 남자가 있었다⁠. 쉰 살쯤⁠, 짧은 파마머리에 검은 조끼를 입었고⁠, 겨드랑이에 전단 뭉치를 끼고 있었다⁠. 남자는 303호 문에 전단을 붙이는 중이었다⁠. 「⁠급매 전세 1억 2천 · 즉시 입주 · 집주인 직거래 · 문의 김 실장⁠」⁠.

나윤은 남자를 알았다⁠. 상만의 관리인 김 실장이었다⁠. 빈집 열쇠를 들고 다니며 보일러를 고치고⁠, 계약 날엔 상만 대신 도장 상자를 들고 오던 사람이었다⁠.

“⁠실장님⁠, 그거 떼세요⁠.⁠”

“⁠어⁠, 계 실장⁠. 아니⁠, 이제 실장 아니지⁠.⁠” 김 실장이 테이프를 이로 끊었다⁠. “⁠직거래야⁠. 중개사무소 안 끼고⁠. 수수료도 없고⁠. 세입자한테 좋은 거야⁠.⁠”

“⁠이 집 같은 동이 보름 뒤에 경매예요⁠.⁠”

“⁠그건 302 얘기고⁠. 303은 아직이야⁠.⁠”

“⁠303도 들어가 있어요⁠. 9월 15일이요⁠. 법원 경매정보에 다 나와요⁠.⁠”

김 실장이 대답하기 전에 302호 문이 열렸다⁠. 옥경희가 반찬통을 들고 예슬네에 와 있던 참이었다⁠. 옥경희는 303호 문의 전단을 보더니 반찬통을 예슬에게 맡기고 걸어왔다⁠. 걸음은 느렸고⁠, 손은 빨랐다⁠. 전단이 문에서 떨어져 옥경희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이 동네에서 직거래는 내가 해⁠. 열무김치 직거래⁠.⁠”

“⁠할머니⁠, 그거 재물손괴예요⁠.⁠”

“⁠그럼 신고해⁠. 나도 신고할게⁠. 사기 미수로⁠.⁠” 옥경희가 구긴 전단을 김 실장의 조끼 주머니에 꽂았다⁠. “⁠글씨도 작아⁠. 이렇게 작게 써서 누가 읽어⁠.⁠”

김 실장은 전단 뭉치를 겨드랑이에 고쳐 끼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나윤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계 실장⁠, 사장님이 너 많이 서운해하셔⁠. 사진 잘 받으셨대⁠.⁠”

복도에 남은 테이프 조각이 303호 문에서 바람에 팔랑거렸다⁠. 예슬이 반찬통을 든 채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

밤 아홉 시⁠, 숭의 로터리 포장마차에서 태식이 소주잔을 두 개 놓고 기다렸다⁠. 닭똥집 볶음이 철판 위에서 지글거렸다⁠. 태식은 넥타이도 없이 반팔 셔츠 차림이었고⁠, 셔츠 가슴께에 볶음 기름이 한 방울 튀어 있었다⁠.

“⁠경찰에서 뭐라고 했어⁠.⁠”

“⁠모른다고 했어요⁠.⁠”

태식의 어깨가 한 뼘쯤 내려갔다⁠. 소주를 따라 한 번에 비우고⁠, 한 잔을 더 따랐다⁠.

“⁠잘했다⁠.⁠”

“⁠잘한 건지 모르겠어요⁠.⁠”

“⁠잘한 거야⁠. 경찰은 우리가 뭘 알았는지 몰라⁠. 우리가 말 안 하면 몰라⁠.⁠” 태식이 바지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철판 옆에 놓았다⁠. “⁠이백이야⁠. 퇴직금은 아니고⁠, 퇴직금 비슷한 거⁠.⁠”

“⁠안 받아요⁠.⁠”

“⁠받아⁠. 너 다음 달 월세⁠, 아니 관리비⁠, 아니⁠.⁠” 태식이 말을 고르다 말았다⁠. 나윤은 월세를 내지 않았다⁠. 전세였다⁠. 전세 보증금은 늘솔금고 뒤에 서 있었다⁠. “⁠아무튼 받아⁠.⁠”

“⁠소장님 한솔이 등록금은요⁠?⁠”

태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솔⁠」⁠. 태식은 전화를 받으면서 몸을 돌렸다⁠.

“⁠응⁠, 아빠야⁠. 응⁠. 다음 주에⁠. 다음 주에 넣어 줄게⁠. 마감이 언젠데⁠? 금요일⁠? 금요일 전에 넣어 줄게⁠. 밥 먹었어⁠? 실습 힘들지⁠?⁠”

전화를 끊은 태식은 봉투를 도로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봉투는 철판 옆에서 기름 연기를 쐬었다⁠.

“⁠나윤아⁠.⁠” 태식이 나윤의 이름을 불렀다⁠. 계 실장이 아니었다⁠. 네 해 동안 몇 번 안 들어 본 소리였다⁠. “⁠R 문자⁠, 내 폰에 있던 건 다 지웠다⁠.⁠”

“⁠지운다고 없어져요⁠?⁠”

“⁠없어지게 해야지⁠. 니 폰에도 있지⁠? 상만이가 너한테 직접 보낸 거⁠.⁠”

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대답이었다⁠. 태식이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지워⁠. 그거 하나면 너도 엮여⁠. 너 서른셋이야⁠. 엮이면 이 동네에서 다시 일 못 해⁠. 나는 끝났어도 너는 안 끝나야지⁠.⁠”

포장마차 비닐 벽 너머로 해든빌 B동이 보였다⁠. 3층 복도 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고⁠, 302호 앞만 조금 더 밝았다⁠. 재열이 문에 붙인 「⁠법원 경매 진행 중⁠」 종이가 복도 등 빛을 받아 하얗게 떠 있었다⁠.

*

밤 열한 시 반⁠, 305호 거실 바닥에서 나윤은 휴대전화 메시지를 2024년 4월까지 올렸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자리에 문자가 있었다⁠.

「⁠2024⁠. 4⁠. 6⁠. 오후 3⁠:12 도상만 사장님 — 계 실장 302 수고⁠. 신혼부부 착하더라⁠. 보너스 50 보냄⁠. R3는 반 소장한테 들어감⁠」

바로 아래에 은행 알림이 이어져 있었다⁠. 「⁠입금 500⁠,000원 도상만⁠」⁠.

나윤은 문자를 길게 눌렀다⁠. 화면 아래에 메뉴가 떴다⁠. 복사⁠, 전달⁠, 삭제⁠. 엄지가 「⁠삭제⁠」 위로 갔다⁠. 화면 위의 작은 글씨가 엄지 그림자에 가려졌다⁠. 신혼부부 착하더라⁠.

창틀의 선인장 너머로 복도 등이 하나 꺼졌다⁠. 302호 앞 등이었다⁠. 나윤은 엄지를 「⁠삭제⁠」 위에 얹어 둔 채 숨을 멈추고 있었다⁠.

5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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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세시2026.11.06· 5화

    참고인은 거짓말해도 처벌 안 받는데 나중에 피의자가 되면 오늘 한 말이 같이 간다는 말이 너무 무서웠어요. 집 412채에 중개사무소 일곱 곳이라니 숫자 보고 한참 멈췄고요. 로비에서 재열이랑 마주치는 장면은 제가 다 숨고 싶었습니다.

    • 금나율작가2026.11.06

      나윤은 피해자이면서 계약서를 쓴 사람이라 어느 자리에서도 편하지 않아요. 문자를 지우라는 태식의 말을 나윤이 어떻게 할지 이어서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