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86자)

명찰 두고 가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8월 22일 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 책상 위에 303호 계약서가 펼쳐져 있었다⁠. 보증금 1억 3천⁠, 계약 기간 2년⁠, 임대인 도상만⁠. 빈 곳은 임차인 이름과 도장 자리뿐이었다⁠. 나윤은 어젯밤 이 계약서를 뽑으면서 손님 이름 칸에 커서를 놓고 오래 앉아 있었다⁠. 결국 이름은 비워 두고 출력 단추를 눌렀다⁠.

태식은 아침부터 넥타이를 맸다⁠. 계약하는 날의 넥타이였다⁠. 에어컨은 손님이 온다고 20도까지 올려 두었다⁠. 손님이 오기 전에 사무실이 따뜻해지면 계약이 잘 된다는 것이 태식의 믿음이었다⁠.

열 시 정각에 간호사 손님이 들어왔다⁠. 구월동 종합병원에서 3교대를 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온 얼굴이었고⁠, 손에는 병원 커피숍 컵을 들고 있었다⁠.

“⁠지난번에 못 봐서요⁠. 사진으로는 채광 좋아 보이던데요⁠.⁠”

“⁠아침 해가 끝내줘요⁠.⁠” 태식이 웃었다⁠. “⁠남향 같은 동향이에요⁠.⁠”

계약은 순서대로 갔다⁠. 신분증을 받고⁠, 등기부를 보여 주고⁠, 계약서 조항을 하나씩 짚었다⁠. 나윤의 손은 네 해 동안 해 온 순서를 하나도 빼먹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를 꺼냈다⁠. 권리관계 칸에는 을구 근저당이 한 줄 적혀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대개 손님들은 서명할 곳만 찾았다⁠.

나윤은 서명할 곳을 짚지 않았다⁠. 확인·설명서의 근저당 줄에 손가락을 올리고 소리 내어 읽었다⁠.

“⁠근저당권자 늘솔금고⁠, 설정일 2021년 5월 14일⁠. 이 근저당은 이 집 하나가 아니라 해든빌 네 동 76세대에 같이 잡혀 있어요⁠. 공동담보예요⁠. 금고가 지금 B동 여섯 집을 경매에 넣었어요⁠. 7월에 한 번 유찰돼서 값이 깎였고⁠, 다음 매각기일이 9월 15일이에요⁠. 이 집 바로 옆집 302호도 들어가 있어요⁠.⁠”

손님의 커피 컵이 책상에 닿았다⁠. 탁⁠, 소리가 났다⁠.

“⁠경매요⁠? 지금요⁠?⁠”

“⁠네⁠. 이 집에 들어오시면 손님 보증금은 금고 뒤에 서요⁠. 경매가 되면 금고가 먼저 받아요⁠. 이 집 보증금 1억 3천은 소액임차인 선 아래라 일부는 먼저 받을 수 있지만⁠, 전부는 못 받아요⁠.⁠”

“⁠계 실장⁠.⁠” 태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손님이 내신 보증금은 302호 세입자 보증금을 돌려주는 데 쓰일 거예요⁠. 그다음 손님 돈으로 손님 보증금을 돌려주게 되고요⁠.⁠”

손님은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가 나윤을 보았다가 태식을 보았다⁠. 오래 보지 않았다⁠. 신분증을 챙기고⁠, 커피 컵을 챙기고⁠, 의자를 밀었다⁠. 문을 나가기 전에 한 번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근데 이거 왜 말해 주세요⁠?⁠”

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님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문에 단 종이 딸랑 울렸다⁠.

*

태식은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 넥타이를 쥐고 의자에 앉아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임차인 칸이 비어 있었다⁠.

“⁠그 돈이면 302가 나갔어⁠.⁠”

“⁠그 돈이면 303이 302가 돼요⁠.⁠”

“⁠302는 니가 써 준 집이야⁠.⁠”

“⁠303도 제가 써 줄 뻔한 집이에요⁠.⁠”

태식이 계약서를 반으로 접었다⁠. 한 번 더 접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 종이 모서리가 찢어졌다⁠.

“⁠니가 무슨 자격으로 손님한테 우리 집주인 사정을 다 까발려⁠? 니가 중개사야⁠? 너 보조원이야⁠. 설명은 내가 해⁠. 니가 할 일은 서류 뽑고 집 문 열어 주는 거야⁠.⁠”

“⁠확인·설명서 설명은 소장님이 하셔야 하는 거 맞아요⁠. 근데 소장님이 안 하셨잖아요⁠. 네 해 동안 한 번도요⁠.⁠”

태식이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 벽에 부딪혔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 명찰 두고 가⁠.⁠”

나윤은 목에 건 명찰을 벗었다⁠. 파란 줄을 손에 감아 쥐고 명찰을 내려다보았다⁠. 「⁠부동산중개사무소 계약담당 계나윤⁠」⁠. 사진 속 얼굴은 네 해 전 얼굴이었다⁠. 입사 첫날 태식이 사진관에 데려가 찍어 준 사진이었다⁠. 앞머리를 내리고 웃으라고⁠, 중개사무소 얼굴은 웃어야 한다고 했다⁠.

“⁠이건 제 사진이에요⁠.⁠”

나윤은 명찰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태식은 주머니로 들어가는 명찰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짐은 종이 상자 하나에 다 들어갔다⁠. 머그컵⁠, 공인중개사 수험서 두 권⁠, 책상 모니터 옆에 두던 손바닥만 한 선인장⁠. 선인장은 태식이 입사 축하로 준 것이었다⁠. 물을 한 달에 한 번만 주면 된다고⁠, 너처럼 손이 안 가는 애라고 했다⁠. 나윤은 선인장을 상자 맨 위에 올렸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삑⁠, 삑⁠, 에어컨 온도를 18도로 내리는 소리가 났다⁠.

*

오후 한 시⁠, 해든빌 B동 필로티 주차장에 접이식 탁자 다섯 개가 펼쳐졌다⁠. 예슬이 회사에서 빌려 온 복합기가 가운데 탁자에⁠, 사샤의 토너 두 통이 복합기 옆에 놓였다⁠. 옥경희는 수박 한 통을 반으로 갈라 쟁반에 올렸다⁠.

“⁠서류 공장이야⁠. 공장엔 수박이 있어야 돼⁠.⁠”

재열이 계단을 내려오다 나윤의 종이 상자를 보았다⁠. 상자 위로 선인장이 삐죽 나와 있었다⁠.

“⁠이사 가요⁠?⁠”

“⁠잘렸어요⁠.⁠”

“⁠303 때문에요⁠?⁠”

“⁠손님한테 경매 얘기 다 했어요⁠. 손님 갔어요⁠.⁠”

재열은 아무 말 없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볍다는 얼굴을 하고 기둥 옆에 내려놓았다⁠. 선인장이 흔들리지 않게 상자 모서리를 기둥에 붙였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단톡방에 몇 글자를 쳤다⁠. 「⁠303호 계약 깨졌습니다⁠. 오늘 아침 계나윤 씨가 손님한테 경매 사실을 다 말했습니다⁠. 계나윤 씨는 해고됐습니다⁠.⁠」

일 분도 안 돼 옥경희의 답이 올라왔다⁠. 화면 한가득 한 낱말이었다⁠. 「⁠잘했다⁠」⁠. 이어서 두 번째 메시지⁠. 「⁠소장 나빠⁠」⁠. 세 번째는 수박 사진이었다⁠.

나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탁자 하나를 맡았다⁠. 선인장은 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사람들이 한 집씩 와서 앉았다⁠. 나윤은 집집마다 같은 순서로 물었다⁠. 계약서 원본 있으세요⁠? 전입일은요⁠? 확정일자 도장은 계약서 어디에 찍혀 있어요⁠? 보증금은 어느 통장에서 어느 통장으로 보내셨어요⁠?

순서대로 물으면 사람들은 순서대로 대답했다⁠. 순서가 없으면 사람들은 2년 전 이사하던 날 비가 왔다는 이야기부터 했다⁠. 나윤은 비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비 이야기 끝에 이삿짐센터 영수증이 나왔고⁠, 영수증에 이사 날짜가 찍혀 있었다⁠.

A동 201호 할아버지는 계약서를 비닐 봉투 세 겹에 싸 왔다⁠. 봉투를 벗기는 데 이 분이 들었다⁠. 마지막 봉투 안에서 계약서와 함께 세뱃돈 봉투가 나왔고⁠, 할아버지는 손주한테 줄 돈이라며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C동 402호 남자는 보증금 이체 내역을 은행 앱에서 찾지 못해 이십 분을 헤맸다⁠. 예슬이 남자의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삼십 초 만에 찾아 주었다⁠.

“⁠회계사무소 직원은 남의 통장 찾는 게 일이에요⁠.⁠”

재열은 야간 근무를 마치고 와서 식당 의자에 앉은 채로 졸았다⁠. 고개가 앞으로 떨어질 때마다 손에 든 볼펜이 바닥에 떨어졌고⁠, 사샤가 주워서 다시 쥐여 주었다⁠. 다섯 번째에 사샤가 볼펜 대신 수박 한 조각을 쥐여 주었다⁠. 재열은 눈을 감은 채 수박을 먹었다⁠.

사샤의 차례가 왔다⁠. 사샤는 외국인등록증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확인해 봤어요⁠?⁠”

“⁠해 봤어요⁠. 외국 국적도 피해자 신청은 받아요⁠. 서류는 똑같고⁠, 외국인등록 사실증명이 더 들어가요⁠.⁠”

“⁠아이고⁠, 다행이다⁠. 거시기 확인 좋네요⁠.⁠”

나윤은 사샤의 계약서를 넘기다가 한 줄에서 손을 멈췄다⁠. 임차인 박 알렉산드르⁠, 국적 우즈베키스탄⁠. 신청은 받는다⁠. 결정이 난 다음 LH가 사샤의 집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나윤은 확인할 것 목록 맨 위에 「⁠C동 204호 사샤 — LH⁠」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쳤다⁠.

사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 속에서 머리에 꽃무늬 수건을 쓴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타슈켄트의 엄마라고 했다⁠. 사샤가 러시아 말로 몇 마디 하다가 화면을 나윤 쪽으로 돌렸다⁠.

“⁠엄마가 한국 집 괜찮냐고 물어요⁠. 서류 해 주는 사람이 누구냐고요⁠.⁠”

나윤은 화면 속 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자도 고개를 숙였고⁠, 숙인 채로 무슨 말을 길게 했다⁠. 사샤가 웃었다⁠.

“⁠우리 아들 집 잘 부탁한대요⁠. 한국 사람은 서류를 잘한대요⁠. 아이고⁠, 엄마는 거시기하게 한국을 너무 믿어요⁠.⁠”

여섯 시까지 스물일곱 집의 신청서가 들어갔다⁠. 시스템 화면에 「⁠접수되었습니다⁠」가 뜰 때마다 옥경희가 박수를 쳤다⁠. 스무 번째부터는 박수 소리가 작아졌고⁠, 스물일곱 번째에는 수박 씨를 뱉다가 박수를 놓쳤다⁠.

*

해 질 녘 일곱 시⁠, 필로티 입구에 태식이 나타났다⁠. 넥타이는 풀었고⁠, 손에는 떡집 봉투가 들려 있었다⁠. 상만이 사무실에 두고 간 떡이었다⁠.

“⁠여러분⁠, 반태식입니다⁠.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 소장입니다⁠.⁠”

몇 사람이 일어났다⁠. 재열이 눈을 떴다⁠.

“⁠걱정 많으신 거 압니다⁠. 건물주가 잠깐 자금이 막혔을 뿐입니다⁠. 9월 말이면 부평 땅 대출이 나와요⁠. 그런데 이렇게 대책위 하시고 현수막 거시면 금고가 겁을 먹습니다⁠. 경매가가 떨어집니다⁠. 여러분 손해입니다⁠.⁠”

“⁠소장님⁠.⁠” 재열이 일어났다⁠. 볼펜을 쥔 채였다⁠. “⁠소장님 집도 D동이죠⁠?⁠”

태식의 입이 잠깐 멈췄다⁠.

“⁠D동 501호⁠, 보증금 1억 8천⁠. 우리가 다 떼 봤어요⁠. 같은 늘솔금고 근저당이에요⁠. 소장님 보증금은 누가 빼 줘요⁠?⁠”

필로티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고개가 재열에게서 태식으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에요⁠. 나도 묶였어요⁠. 나도 기다리는 거예요⁠.⁠”

“⁠그럼 여기 앉으세요⁠.⁠” 재열이 빈 식당 의자 하나를 밀었다⁠. “⁠서류 해 드릴게요⁠. 저기 계나윤 씨가요⁠. 소장님이 오늘 아침에 자른 사람이요⁠.⁠”

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떡집 봉투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나윤은 탁자 앞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탁자에 부딪혀 복합기가 덜컥 흔들렸다⁠.

“⁠소장님⁠, PF 안 나와요⁠. 늘솔금고가 네 동을 경매에 넣었어요⁠. 앉으세요⁠. 소장님 계약서는 제가 안 썼으니까 처음부터 물어볼게요⁠.⁠”

태식은 앉지 않았다⁠. 떡집 봉투를 수박 쟁반 옆에 내려놓고⁠, 아무도 보지 않고 돌아서 나갔다⁠. 봉투 안에는 꿀떡이 들어 있었다⁠. 옥경희가 봉투를 열어 보다가 닫았다⁠.

“⁠꿀떡은 소장이 좋아하는 거잖아⁠.⁠”

재열이 꿀떡 하나를 꺼내 나윤에게 내밀었다⁠. 나윤은 받지 않았다⁠. 재열은 떡을 도로 봉투에 넣고 봉투 입구를 두 번 접었다⁠.

“⁠자른 사람이라고 한 건 사람들 들으라고 한 거예요⁠. 실장님 들으라고 한 게 아니고요⁠.⁠”

“⁠알아요⁠.⁠”

“⁠그래도 들었잖아요⁠.⁠”

재열은 봉투를 탁자 끝에 놓고 다음 집 서류를 나윤 앞으로 밀었다⁠.

*

밤 아홉 시⁠, 나윤은 305호 거실에서 종이 상자를 풀었다⁠. 선인장을 창틀에 올리고⁠, 수험서를 책꽂이에 꽂았다⁠. 머그컵을 씻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계나윤 씨죠⁠?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 탁주엽 경위입니다⁠. 도상만 씨 사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후루룩 소리가 났다⁠. 무언가를 먹다가 건 전화였다⁠.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 건으로 참고인 조사 좀 받으셔야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오전 열 시 괜찮으세요⁠? 편하게 오셔서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다 기록됩니다⁠.⁠”

나윤은 젖은 머그컵을 쥔 채 창틀의 선인장을 보았다⁠. 가시 끝에 형광등 빛이 하나씩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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