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95자)

사안별로 다릅니다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9월 7일 월요일 아침 일곱 시⁠, 나윤은 305호 거실 바닥에서 눈을 떴다⁠. 휴대전화는 가슴 위에 엎어져 있었다⁠. 화면을 켜자 엿새 전 밤의 문자가 그대로 떠 있었다⁠. 「⁠보너스 50 보냄⁠. R3는 반 소장한테 들어감⁠」⁠.

지우지 못했다⁠. 9월 2일 새벽 두 시⁠, 나윤은 문자와 은행 알림을 캡처해 자기 메일로 보내 두고⁠, 메일 제목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제목 없는 메일은 받은편지함 맨 위에 엿새째 회색으로 누워 있었다⁠.

텔레비전을 켰다⁠. 아침 뉴스 화면 아래로 자막이 흘렀다⁠. 「⁠8월 전세사기 피해자 658건 추가 인정⁠…누적 4만 936건⁠」⁠. 지난달 4만 278건에서 한 달 만에 658건이 늘었다⁠. 피해자 넷 가운데 셋이 마흔 살 아래였다⁠. 화면이 바뀌어 기자가 어느 빌라 골목에 서 있었다⁠. 골목 끝 현관문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나윤은 리모컨을 내려놓고 현관문을 보았다⁠. 305호 문 안쪽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바깥쪽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단톡방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오늘 두 시 구청 LH 설명회⁠」 「⁠신분증 꼭⁠」 「⁠결정 통지서 있는 집은 통지서도⁠」⁠. 옥경희의 큰 글씨가 맨 아래였다⁠. 「⁠사안⁠」 「⁠별로⁠」 「⁠말하면⁠」 「⁠안 됨⁠」⁠. 무슨 뜻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

오후 두 시⁠, 미추홀구청 별관 강당에는 해든빌 사람만 예순 명이 왔다⁠. 다른 동네 빌라 피해자까지 합치면 의자가 모자랐다⁠. 앞 무대에 LH 인천지역본부 마용배 차장이 올라왔다⁠. 오십 대 중반⁠, 넓은 이마가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고⁠, 넥타이 매듭이 목에 꽉 끼어 있었다⁠. 나윤은 맨 뒷줄 벽에 등을 대고 서서 메모지를 폈다⁠.

마용배는 화면에 그림을 띄워 놓고 설명했다⁠. 순서는 이랬다⁠. 피해자로 결정된 세입자가 LH에 집을 사 달라고 요청한다⁠. LH가 집을 보고 살 수 있는 집인지 따진다⁠. 경매 날 피해자가 가진 우선매수권을 LH가 넘겨받아⁠, 가장 높게 부른 값에 LH가 먼저 산다⁠. LH가 산 집은 공공임대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게 경매차익입니다⁠. 저희가 매입할 때 감정한 가격과 실제 낙찰가의 차이요⁠. 감정가가 2억이고 1억 4천에 낙찰받으면 6천이 차익입니다⁠. 이 돈으로 임대료를 빼 드립니다⁠. 길게는 10년까지 임대료 없이 사실 수 있고⁠, 나가시겠다고 하면 나가시는 때 차익을 현금으로 드립니다⁠.⁠”

강당이 술렁였다⁠. 메모지에 숫자를 적는 소리가 났다⁠. 예슬이 계산기를 꺼냈다⁠.

“⁠302호는 감정가가 얼마예요⁠?⁠” 예슬이 손을 들었다⁠.

“⁠사안별로 다릅니다⁠.⁠”

“⁠1억 6천이 보증금인데 차익으로 다 돌려받아요⁠?⁠”

“⁠그것도 사안별로 다릅니다⁠. 낙찰가에 따라서요⁠.⁠”

“⁠우리 집 근저당이 동째로 묶였는데⁠, 그것도 사요⁠?⁠”

“⁠권리관계에 따라 사안별로 다릅니다⁠.⁠”

옥경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팡이 대신 우산을 짚었다⁠.

“⁠사안별 말고⁠, 집별로 말해 봐⁠. 우리 집은 501호야⁠. 8⁠,000만⁠. 우리 집은 어떻게 되는데⁠.⁠”

강당에 웃음이 퍼졌다⁠. 마용배도 웃었다⁠. 웃고 나서 다시 말했다⁠. “⁠어머님⁠, 그건 상담 창구에서 서류 보시고 사안별로⁠.⁠”

“⁠또 사안이야⁠.⁠”

웃음이 한 번 더 났다⁠. 사샤가 손을 들었다⁠. 일어서서 외국인등록증을 들어 보였다⁠.

“⁠C동 204호요⁠. 저는 우즈베키스탄 국적이에요⁠. 고려인이요⁠. 피해자 신청은 넣었어요⁠. 결정되면 LH가 우리 집도 사요⁠?⁠”

마용배가 등록증을 보았다⁠. 이번에는 사안별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외국 국적이시면 LH가 매입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피해주택을 사는 돈이 주택도시기금에서 나오는데⁠, 기금법에 지원 대상이 국민으로 한정돼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사샤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 등록증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옆자리 사람이 사샤의 소매를 당겼고⁠, 사샤는 그제야 앉았다⁠. 앉으면서 무릎이 의자 다리에 부딪혔다⁠.

재열이 일어났다⁠. 후드는 벗었고 점퍼 지퍼는 끝까지 올렸다⁠.

“⁠같은 건물이에요⁠. 같은 근저당이고 같은 날 경매예요⁠. 사샤 씨 집은 우리 집 바로 옆 동이에요⁠. 국적이 다르면 집이 달라요⁠?⁠”

“⁠법이 그렇습니다⁠. 저희도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우면 바꿔요⁠.⁠”

“⁠법은 저희가 못 바꿉니다⁠. 국회에서 바꿔야 합니다⁠.⁠”

“⁠국회 가면 돼요⁠?⁠”

마용배는 대답하지 않고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화면에는 매입 요청 서류 목록이 떠 있었다⁠. 재열은 서 있는 채로 목록을 휴대전화로 찍었다⁠. 찍고 나서도 앉지 않았다⁠. 설명회가 끝날 때까지 재열은 서 있었다⁠. 나윤은 맨 뒷줄에서 메모지에 한 줄을 적었다⁠. 「⁠C동 204호 사샤 — LH 불가 · 기금법 · 국회⁠」⁠. 보름 전 동그라미를 쳤던 이름 옆이었다⁠.

*

설명회가 끝나고 구청 앞 계단에 사샤가 앉아 있었다⁠. 담배를 꺼냈다가 구청 앞이라 다시 넣었다⁠. 나윤이 옆에 앉았다⁠.

“⁠아이고⁠, 한국 사람 되려면 거시기 몇 년 걸려요⁠?⁠”

“⁠귀화요⁠? 사샤 씨는 몇 년 살았어요⁠?⁠”

“⁠일곱 해요⁠. 우리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태어났어요⁠. 1937년에 기차 타고 카자흐스탄으로 갔대요⁠. 강제로요⁠. 가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또 가고⁠. 할아버지가 맨날 그랬어요⁠. 한국 가면 우리 집 있다고⁠.⁠” 사샤가 손바닥으로 계단 모서리를 쓸었다⁠. “⁠집 있어요⁠. 1억 1천짜리⁠. 근데 LH는 우리 집 몰라요⁠.⁠”

나윤은 대답할 말을 찾다가 메모지를 꺼냈다⁠. 「⁠C동 204호⁠」⁠. 쓸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사샤가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웃었다⁠.

“⁠실장님은 서류로 위로해요⁠. 거시기하게 한국 사람이에요⁠.⁠”

*

저녁 일곱 시⁠, 태식에게서 문자가 왔다⁠. 「⁠밥 먹자⁠. 집으로 와⁠. 한솔이가 김치찌개 끓인대⁠.⁠」 보름 전 사람을 자른 사람의 문자였다⁠. 나윤은 가지 않을 이유를 열 가지쯤 떠올렸고⁠, 그래도 D동 계단을 올라갔다⁠.

D동 501호 현관에는 운동화 두 켤레와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거실 벽에 액자가 셋 있었다⁠. 한솔의 간호학과 입학식⁠, 가족 셋이 월미도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요양병원 침대에 앉아 웃는 한솔 엄마⁠. 마지막 사진 속 침대 머리맡에는 링거 걸이가 있었다⁠. 한솔 엄마는 네 해를 요양병원에 있다가 2022년 봄에 갔다⁠.

한솔은 스물한 살⁠, 간호학과 4학년이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냄비를 식탁에 올렸다⁠. 김치찌개에 햄이 많이 들어 있었다⁠.

“⁠아빠가 언니 오면 햄 많이 넣으래요⁠. 언니 햄 좋아한다고⁠.⁠”

“⁠소장님이 그런 걸 기억해요⁠?⁠”

“⁠아빠는 남의 집 평수랑 사람 입맛만 기억해요⁠. 제 생일은 까먹어요⁠.⁠”

태식이 헛기침을 했다⁠. 셋은 찌개를 먹었다⁠. 한동안 숟가락 소리만 났다⁠. 밥을 반쯤 먹었을 때 태식이 거실 서랍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꺼냈다⁠. 표지에 반짝이는 글씨가 박혀 있었다⁠. 「⁠부평 청천동 복합개발 사업계획서 · 해든건설⁠」⁠.

“⁠상만이가 준 거야⁠. PF 계획서⁠. 9월 말이면 첫 대출 나와⁠. 여기 봐⁠. 금융사 이름도 있어⁠.⁠”

“⁠금융사 확인해 보셨어요⁠?⁠”

“⁠확인은 무슨⁠. 계획서에 다 있잖아⁠.⁠”

나윤은 서류철을 넘겼다⁠. 사진은 화려했고 숫자는 컸다⁠. 마지막 장에 금융사 이름이 있었는데⁠, 확약서는 없었다⁠. 「⁠협의 중⁠」이라는 세 글자만 있었다⁠.

“⁠나윤아⁠, 경찰에서 또 부르면 하나만 말해 줘⁠. 사무실은 몰랐다고⁠. 상만이 혼자 한 거라고⁠. 우리는 서류만 했다고⁠.⁠”

“⁠R3는 소장님 통장으로 들어갔잖아요⁠.⁠”

“⁠니 50만 원은⁠?⁠”

숟가락이 그릇에 닿았다⁠. 한솔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식도 더 묻지 않았다⁠. 둘은 서로 상대의 통장을 쥐고 있었고⁠, 둘 다 먼저 놓지 않았다⁠. 찌개가 식어 햄 위로 기름이 하얗게 굳었다⁠.

설거지는 한솔이 했다⁠. 나윤이 신발을 신는 동안 한솔이 고무장갑을 낀 채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태식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언니⁠.⁠” 한솔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빠 감옥 가요⁠?⁠”

나윤은 신발 끈을 묶던 손을 멈췄다⁠. 한솔의 고무장갑 끝에서 물이 한 방울씩 현관 타일에 떨어졌다⁠.

“⁠모르겠어⁠.⁠”

“⁠언니가 아는 거 있으면 저한테 먼저 말해 줘요⁠. 아빠는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해요⁠. 등록금도 다음 주⁠, 다음 주⁠, 다음 주⁠.⁠”

한솔이 다음 주를 세 번 말하는 동안 물방울이 세 번 떨어졌다⁠.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인지 아닌지 자기도 몰랐다⁠.

*

밤 아홉 시 반⁠, D동에서 나와 B동 앞을 지나는데 3층 303호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빈집이었다⁠. 나윤은 계단을 올라갔다⁠. 303호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김 실장이 줄자를 당기고 있었다⁠. 거실 창틀에서 벽까지⁠, 벽에서 부엌 싱크대까지⁠.

김 실장은 한 손으로 줄자를 쥐고 한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를 켠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네⁠, 사장님⁠. 15일에 우리가 받아 오면 됩니다⁠. 해든관리 이름으로요⁠. 감정가 아래로 떨어지면 1억 아래로 가져오고⁠, 나중에 도배만 새로 해서 다시 내놓으면 돼요⁠. 네⁠. 302도 같이 넣을게요⁠.⁠”

줄자가 툭 소리를 내며 감겨 들어갔다⁠. 나윤은 계단참 벽에 등을 붙였다⁠. 302호 문의 「⁠법원 경매 진행 중⁠」 종이가 복도 끝 창에서 들어온 바람에 한쪽 귀퉁이를 들썩였다⁠.

전화가 끊기자 나윤은 303호 문을 끝까지 밀었다⁠. 김 실장이 줄자를 떨어뜨렸다⁠. 줄자가 바닥을 굴러 나윤의 슬리퍼 앞에서 멈췄다⁠.

“⁠해든관리가 누구 회사예요⁠?⁠”

“⁠깜짝이야⁠. 계 실장⁠, 남의 집에 왜 들어와⁠.⁠”

“⁠남의 집에 실장님도 들어와 계시잖아요⁠. 해든관리요⁠.⁠”

김 실장은 줄자를 주우려다 나윤의 발 앞이라 손을 거뒀다⁠. 대신 조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불은 붙이지 않았다⁠.

“⁠내 처남 회사야⁠. 사장님 회사 아니야⁠. 법원 경매에 처남이 입찰하는 게 무슨 죄야⁠? 누구나 하는 거야⁠.⁠”

“⁠처남 회사 입찰 보증금은 누가 내요⁠?⁠”

“⁠그건 처남이 내지⁠.⁠” 김 실장이 담배를 입에서 뺐다⁠. “⁠계 실장⁠, 너 똑똑한 거 알아⁠. 근데 똑똑한 애들이 제일 먼저 다쳐⁠. 15일에 법원 와 봐⁠. 우리가 302 받아 오면 재열이네는 그냥 우리 세입자 되는 거야⁠. 새 계약서 쓰고 새로 살면 돼⁠. 계약서는 네가 써 줘도 되고⁠.⁠”

김 실장이 웃었다⁠. 웃음 끝에 찌든 담배 냄새가 났다⁠. 나윤은 발 앞의 줄자를 주워 김 실장에게 내밀었다⁠. 김 실장이 받으려는 순간 손을 놓았다⁠. 줄자는 다시 바닥에 떨어져 굴렀고⁠, 이번에는 싱크대 밑으로 들어갔다⁠.

“⁠직접 주우세요⁠. 남의 집 치수는 직접 재셔야죠⁠.⁠”

나윤은 복도로 나와 휴대전화를 켰다⁠. 재열에게 보낼 메시지를 썼다⁠. 「⁠15일 302호 입찰에 해든관리가 들어옵니다⁠. 상만 사장 관리인 처남 회사입니다⁠. LH 우선매수 신고 꼭 확인하세요⁠.⁠」 보내기 전에 한 번 읽었고⁠, 「⁠꼭⁠」을 지웠다가 다시 넣었다⁠.

출처 조세금융신문 · 2026년 9월 7일 · 「⁠국토부⁠, 8월 전세사기 피해자 658건 추가 인정⁠」 — 누적 4만 936건⁠, 피해자 약 4분의 3이 40세 미만 SBS Biz · 「⁠전세사기 특별 지원 ‘⁠2년 더⁠’⁠」 — LH 경매차익⁠, 최장 10년 거주⁠, 퇴거 때 차익 지급 주간경향 · 2025년 8월 25일 · 「⁠끝나지 않는 ‘⁠전세사기⁠’⁠」 — 주택도시기금법상 지원 대상이 국민으로 한정돼 LH가 외국인 피해주택 경매에 참여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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