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32자)

서울갈비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1월 13일 금요일 밤 열한 시 이 분⁠, 305호⁠. 화면 속 서울갈비의 붉은 등이 상만의 얼굴을 덥혀 놓았다⁠. 해든빌 필로티의 형광등 아래에서 보던 얼굴보다 혈색이 좋았다⁠.

“⁠얼굴 좀 펴⁠. 나 도망 온 거 아니야⁠. 아들 가게 1주년이라 온 거야⁠. 출국금지 끝난 날 나온 거고⁠. 법대로 나온 거야⁠.⁠”

나윤은 휴대전화를 선인장 화분에 기대어 세웠다⁠. 화면 녹화 버튼은 전화를 받기 전에 이미 눌러 두었다⁠. 손이 떨리지 않게 무릎을 붙잡았다⁠.

“⁠사장님⁠, 하실 말씀 하세요⁠.⁠”

“⁠그래⁠, 계 실장은 그게 좋아⁠. 서류 순서대로⁠.⁠” 상만이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경찰이 반 소장을 어디까지 아는지 나도 알아⁠. 통장 넷⁠, 사무소 여섯⁠. 1억 9천⁠. 반 소장이 다 한 거야⁠. 사무소 데려온 것도 반 소장⁠, 리베이트 단톡방 만든 것도 반 소장⁠, R 숫자 정한 것도 반 소장⁠. 나는 집 짓는 사람이야⁠. 계약서는 부동산이 쓰지⁠.⁠”

“⁠R 숫자는 사장님이 보내셨어요⁠. 2024년 4월 6일 오후 세 시 십이 분에요⁠.⁠”

“⁠문자는 내가 보냈지⁠. 숫자는 반 소장이 정하고⁠.⁠” 상만이 웃었다⁠. “⁠그건 계 실장이 모르는 일이야⁠.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 아니야⁠. 반 소장이 정했다고 법정에서 한마디만 해⁠. 반 소장이 사무소 여섯 데려온 건 사실이잖아⁠. 사실 하나에 모르는 거 하나 붙이는 거야⁠.⁠”

나윤은 화면 속 상만의 뒤를 보았다⁠. 종업원이 숯불 화로를 들고 지나갔다⁠. 벽에 한복 입은 여자 그림이 붙어 있었고⁠, 계산대 위에 「⁠1주년⁠」이라는 금색 풍선이 떠 있었다⁠.

“⁠대신 뭘 주실 건데요⁠?⁠”

“⁠305호 9⁠,500⁠.⁠” 상만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그렸다⁠. “⁠경매 기다리면 4⁠,300 받고 끝이야⁠. 계 실장은 소액임차인 선 아래잖아⁠. 남은 5⁠,200은 영영 못 받아⁠. 내가 그 5⁠,200 다 줄게⁠. 계 실장한테 말고 어머님 통장으로⁠. 급식실 22년 퇴직금이라며⁠. 어머님 손목 아프시다며⁠.⁠”

나윤의 손이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엄마의 퇴직금 이야기는 네 해 전 사무실에서 태식에게 한 번 한 말이었다⁠. 태식이 상만에게 옮겼다⁠. 사람의 사정이 네 해 동안 상만의 수첩에 들어 있었다⁠.

“⁠생각해 봐⁠. 급할 거 없어⁠. 첫 공판은 내년이야⁠.⁠” 상만은 화면을 끄기 전에 덧붙였다⁠. “⁠선인장은 한 달에 한 번이야⁠. 너무 자주 주면 뿌리 썩어⁠.⁠”

화면이 꺼졌다⁠. 녹화 파일이 저장되었다는 안내가 떴다⁠. 십구 분 사십 초⁠. 나윤은 파일 이름을 바꾸었다⁠. 「⁠2026-11-13 상만 영상통화⁠」⁠. 서류 정리하는 손은 떨리지 않았다⁠.

*

11월 16일 월요일 오전 열 시 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윤아⁠, 엄마 통장에 1천만 원이 들어왔다⁠.⁠”

“⁠누가 보냈어요⁠?⁠”

“⁠영어야⁠. 에스⁠, 이⁠, 오⁠, 유⁠, 엘⁠. 지⁠, 에이⁠, 엘⁠, 비⁠. 무슨 갈비래⁠.⁠”

나윤은 송현동으로 갔다⁠. 동인천역에서 내려 언덕을 오르면 엄마의 다세대 1층이 나왔다⁠. 마당에 배추 서른 포기가 반으로 쪼개져 소금물 대야에 누워 있었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 사이에 소금을 치고 있었다⁠. 김장은 매년 11월 셋째 주였다⁠. 올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왔으면 장갑 껴⁠.⁠”

나윤은 장갑을 꼈다⁠. 배추 잎 사이에 굵은 소금을 뿌렸다⁠. 손목을 돌릴 때마다 엄마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급식실에서 22년 동안 국자를 저은 손목이었다⁠.

“⁠엄마⁠, 그 돈 돌려보내야 해요⁠.⁠”

“⁠왜⁠?⁠”

“⁠그 돈 받으면 제가 법정에서 거짓말해야 해요⁠. 반 소장님이 다 했다고요⁠.⁠”

“⁠반 소장이 여섯 군데 데려왔다며⁠. 그것도 거짓말이냐⁠?⁠”

“⁠그건 사실이에요⁠. 근데 그것만 말하면 사장님이 빠져요⁠. 숫자 보낸 사람이 빠져요⁠.⁠”

엄마는 배추 한 포기를 뒤집었다⁠. 소금물이 마당에 튀었다⁠.

“⁠나윤아⁠. 너는 50만 원 받고 네 해를 살았다⁠.⁠” 엄마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엄마는 1천만 원 받고 하루도 못 사냐⁠?⁠”

나윤은 소금을 쥔 손을 펴지 못했다⁠. 엄마가 처음으로 50만 원을 입에 올린 날이었다⁠. 9월에 압수수색 소식을 들은 날에도⁠, 10월에 기사가 나간 날에도 엄마는 밥 먹었느냐고만 물었다⁠.

“⁠그 돈 엄마 돈이야⁠. 내 퇴직금 4⁠,000만 원이 네 보증금에 들어가 있어⁠. 1천은 그중에 돌아온 거야⁠. 나는 누가 보냈는지 몰라도 돼⁠.⁠”

“⁠엄마⁠, 예슬이도 그렇게 말했어요⁠. 몰라도 된다고요⁠. 재열 씨가 알아야 된다고 했고요⁠.⁠”

“⁠재열이가 누군데⁠?⁠”

“⁠제가 계약서 써 준 사람이요⁠. 302호요⁠. 1억 6천이요⁠.⁠”

엄마는 대야에서 손을 뺐다⁠. 고무장갑에서 소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는 장갑을 벗지 않고 마루 끝에 앉았다⁠.

“⁠엄마는 그 돈 안 쓴다⁠. 통장에 둔다⁠.⁠”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쓰면 네가 평생 그 돈 생각할 거잖아⁠. 네가 50만 원 생각한 것처럼⁠. 니가 정해⁠. 돌려보낼 거면 니가 은행 같이 가⁠.⁠”

“⁠네⁠.⁠”

“⁠배추는 다 절이고 가⁠.⁠”

엄마는 다시 장갑을 끼고 대야 앞으로 돌아왔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배추만 뒤집었다⁠. 옆집 할머니가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올해는 딸이 왔네⁠, 했다⁠. 엄마가 딸이 회사 쉬어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윤은 회사에서 잘렸다는 말을 엄마가 회사 쉰다고 바꿔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해 질 녘까지 배추 서른 포기를 절였다⁠. 엄마는 절인 배추 한 통을 나윤의 손에 들려 보냈다⁠. 「⁠305⁠」라고 매직으로 쓴 김장 봉투였다⁠. 엄마의 글씨도 컸다⁠.

*

11월 20일 금요일 저녁⁠,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청천동 해든하임 4층 매트리스 같이 들어 주신 분 맞으시죠⁠? 등기부 뗐어요⁠. 공동담보 목록이 열네 장이었어요⁠. 계약 깼어요⁠. 계약금 1⁠,500은 아직 못 받았어요⁠. 근데 1억 5천은 안 넣었어요⁠.⁠」

문자가 하나 더 왔다⁠.

「⁠그리고 어떤 할머니가 편지를 보내셨어요⁠. 글씨가 너무 커서 편지지 다섯 장이에요⁠. 등기부 떼라고 한 장에 한 글자씩 쓰셨어요⁠.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나윤은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 전화번호와 계약금 반환 상담 시간을 답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옥경희에게 문자를 전했다⁠. 옥경희의 답은 큰 글씨 한 줄이었다⁠. 「⁠다섯 장 다 읽었대⁠?⁠」 나윤은 다섯 장 다 읽었다고 답했다⁠. 옥경희는 엄지 이모티콘을 다섯 번 보냈다⁠.

밤에 나윤은 1억 5천과 1⁠,500을 나란히 수첩에 적어 보았다⁠. 잃은 숫자 옆에 잃지 않은 숫자를 적은 것은 처음이었다⁠. 1억 5천이 1⁠,500보다 훨씬 길었다⁠.

*

11월 24일 화요일 오후 두 시⁠,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 탁주엽의 책상에 쫄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불지 않았다⁠. 젓가락을 대기 전이었다⁠.

나윤이 앉기도 전에 탁이 먼저 말했다⁠.

“⁠김 실장이 지난주에 와서 상자 네 개 다 냈습니다⁠. 「⁠청천⁠」⁠, 「⁠간석⁠」⁠, 「⁠해든빌⁠」⁠, 「⁠합의⁠」⁠. 파쇄된 건 반 상자도 안 됐어요⁠. 기계가 자주 쉬었더군요⁠.⁠” 탁이 쫄면 그릇을 밀어 두었다⁠. “⁠간석동 해든파크 1억도 매형 상대로 고소했습니다⁠. 처남이 매형을 고소하면서 울더라고요⁠. 울면서도 서류 순서는 맞게 냈습니다⁠. 계 실장님한테 배웠다고 하던데요⁠.⁠”

“⁠저 그런 거 안 가르쳤어요⁠.⁠”

“⁠문틀에 기대 서서 이십 분 버티는 거요⁠. 그거 배웠답니다⁠.⁠”

“⁠먹고 하세요⁠.⁠”

“⁠먹으면서 들으면 안 됩니다⁠. 기록이 다 들어가는데 쫄면 소리도 들어가요⁠.⁠”

나윤은 USB 하나와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녹화 파일⁠, 엄마 통장의 입금 내역⁠, 은행 창구에서 뽑은 해외 송금 확인서⁠. 송금인 칸에 「⁠SEOUL GALBI⁠」가 찍혀 있었다⁠. 탁은 영상을 끝까지 보았다⁠. 십구 분 사십 초 동안 쫄면은 손대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상만이 선인장 이야기를 할 때 탁이 영상을 멈췄다⁠.

“⁠이 말 좋네요⁠. 뿌리 썩는다는 말⁠. 판사가 좋아할 말입니다⁠. 사람 사정 다 알고 있었다는 거니까요⁠.⁠”

“⁠1천만 원은 어떻게 해요⁠?⁠”

“⁠증거입니다⁠. 돌려보내지 마시고 그대로 두세요⁠. 어머님 통장에 그대로요⁠. 나중에 돌려보낼 때도 저한테 먼저 말씀하시고요⁠.⁠”

탁은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여권 무효화 신청서 사본⁠, 인터폴 적색수배 요청서 사본⁠, 베트남 공안 협조 요청 공문 사본⁠. 세 장 다 결재가 났다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여권은 효력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지금 도상만은 베트남에서 체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공안이 붙잡을 수 있는 근거가 생겼습니다⁠.⁠” 탁이 서류철을 덮었다⁠. “⁠문제는 어디 있느냐입니다⁠. 아들 가게 주소는 압니다⁠. 근데 매일 가게에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공안이 한 번 허탕 치면 다음은 없습니다⁠.⁠”

나윤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샤가 보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서울갈비 계정의 새 글이었다⁠. 사샤의 공장 동료가 베트남어 부분을 한국어로 옮겨 사진 아래 적어 보냈다⁠.

「⁠12월 4일 금요일 저녁 6시 1주년 감사 행사⁠. 사장님 아버지가 손님들께 직접 갈비를 구워 드립니다⁠」

“⁠직접 굽는다⁠.⁠” 탁이 따라 읽었다⁠. “⁠사람이 고기를 구우면 자리를 못 뜨죠⁠.⁠”

“⁠그날 가게에 있을까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탁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계 실장님⁠, 한 번만 더 통화해 주세요⁠. 상만이 다시 전화하면 받으시고⁠, 4일에 가게에 있는지만 알아내 주세요⁠. 돈 얘기는 받겠다고 하셔도 됩니다⁠. 녹음되니까요⁠. 다 기록됩니다⁠.⁠”

나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받겠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녹음에 남는다는 뜻이었다⁠. 녹음은 상만의 변호사도 듣게 될 것이었다⁠.

“⁠제가 받겠다고 하면⁠, 나중에 법정에서 그 말이 나와요⁠.⁠”

“⁠나옵니다⁠. 상만 쪽 변호사가 틀 겁니다⁠. 증인이 돈을 받겠다고 했다고요⁠.⁠” 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싫다고 하시면 다른 길을 찾습니다⁠. 몇 달 더 걸릴 거고요⁠.⁠”

나윤은 엄마의 마당을 떠올렸다⁠. 소금물 대야⁠, 서른 포기⁠, 「⁠305⁠」라고 쓴 봉투⁠. 그리고 청천동 4층 복도⁠, 「⁠신혼 특가⁠」라고 인쇄된 매트리스 비닐⁠.

“⁠할게요⁠.⁠”

탁이 쫄면 그릇을 당겼다⁠. 면이 다 불어 있었다⁠. 탁은 불은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결국 불었네요⁠.⁠”

“⁠다음엔 비빔밥 드세요⁠. 안 불어요⁠.⁠”

“⁠비빔밥은 식으면 굳어요⁠.⁠” 탁이 처음으로 웃었다⁠. “⁠수사관 밥은 다 그렇습니다⁠.⁠”

*

밤⁠, 305호⁠. 나윤은 엄마가 준 김장 봉투를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 문을 닫기 전에 휴대전화를 냉장고 위에 올려 두었다⁠. 화면 녹화 버튼이 첫 화면에 오도록 옮겨 두었다⁠. 그다음 선인장을 보았다⁠. 11월 12일에 물을 주었다⁠. 다음은 12월 12일이었다⁠.

단톡방에 사샤의 글이 올라왔다⁠. 「⁠동료가 서울갈비 주소 지도로 보내 줬어요⁠. 호치민 1군⁠. 아이고⁠, 1군이면 거시기 비싼 동네래요⁠.⁠」 옥경희가 큰 글씨로 답했다⁠. 「⁠비싼 동네에서 잡혀라⁠」⁠.

나윤은 단톡방에 아무 답도 달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 알림 소리를 가장 크게 올렸다⁠.

출처 여권법 · 장기 3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로 기소되거나 체포영장·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국외로 도피한 사람의 여권 반납 명령과 효력 상실 경찰청 · 국외 도피 사범에 대한 인터폴 적색수배 요청 절차

15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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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린독자2026.11.06· 15화

    엄마 통장에 1천만 원이 먼저 들어오는 장면에서 진짜 마음이 흔들렸어요. 김장 배추 절이면서 받으라고 하는 엄마 말이 이해가 돼서 더 아팠고요. 그런데도 녹음이랑 송금 내역을 들고 가는 나윤 보고 울컥했습니다.

    • 금나율작가2026.11.06

      급식실에서 22년 일한 돈이라 엄마에게도 나윤에게도 쉬운 돈이 아니었어요. 한 번 더 걸려 올 호치민 통화가 다음 화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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