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75자)

최소보장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1월 13일 금요일 오전 아홉 시⁠, LH 인천지역본부 1층 민원 창구⁠. 번호표 기계 앞에 줄이 계단까지 이어졌다⁠. 기계 옆에 A4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전세사기 피해자 최소보장 신청 · 오늘부터 접수⁠」⁠. 글자 크기를 보니 옥경희가 썼어도 이보다 작게는 안 썼을 것이었다⁠.

재열과 예슬은 41번 번호표를 받았다⁠. 대기 화면에는 6번이 떠 있었다⁠. 예슬이 계산기를 꺼냈다⁠.

“⁠한 사람에 칠 분이면 네 시간이야⁠.⁠”

“⁠점심은 여기서 먹자⁠.⁠”

“⁠여기 매점 없어⁠.⁠”

“⁠그럼 굶자⁠.⁠”

나윤은 예슬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아침 단톡방에 재열이 올린 공지는 짧았다⁠. 「⁠최소보장 신청 서류 도와줄 분 계나윤 실장⁠. 질문은 실장한테⁠.⁠」 실장이라는 말이 다시 붙어 있었다⁠. 나윤은 아침 내내 단톡방 공지를 다시 열어 보았다⁠. 실장이라는 두 글자를 보려고 연 것이었다⁠.

최소보장은 이날부터 시행이었다⁠. 피해자가 경매나 매입으로 돌려받은 돈이 보증금의 3분의 1보다 적으면 LH가 차액을 준다⁠. 신청하면 LH가 90일 안에 정한다⁠. 302호는 1억 6천의 3분의 1이 5⁠,333만 원⁠, LH 경매차익이 4⁠,700만 원⁠. 차액은 633만 원이었다⁠.

“⁠633만 원이면 시험관 한 번 하고 남아⁠.⁠” 예슬이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남은 133은 뭐 할까⁠?⁠”

“⁠한우⁠.⁠” 재열이 말했다⁠.

“⁠압수된 한우 말고⁠.⁠”

창구에서 마용배 차장이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나윤을 알아본 얼굴이었다⁠. 마용배는 오늘도 넥타이 매듭을 목에 꽉 조여 매고 있었다⁠.

“⁠계 실장님⁠, 서류 좀 봐 주세요⁠. 사람들이 확정일자 받은 계약서를 안 가져와요⁠. 다들 휴대전화 사진만 보여 줘요⁠.⁠”

“⁠원본 꼭 있어야 해요⁠?⁠”

“⁠사안별로⁠…⁠…⁠” 마용배가 말을 멈추고 웃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사본 받습니다⁠. 원본은 나중에 봅니다⁠.⁠”

나윤은 창구 옆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번호표를 쥔 사람들이 하나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계약서 사진⁠, 확정일자 도장 사진⁠, 결정 통지서 사진⁠. 나윤은 사진마다 보증금과 회수액을 받아 적고 3분의 1을 계산해 주었다⁠. 1억 2천의 3분의 1은 4천만 원⁠. 9천의 3분의 1은 3천만 원⁠.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가 없는 숫자들이었다⁠. 숫자 뒤의 사정은 계산기로 나오지 않았다⁠.

열한 번째로 온 사람은 남동구 간석동의 해든파크 세입자였다⁠. 나윤이 모르는 집이었다⁠. 계약서 사진 아래 중개사무소 도장이 찍혀 있었다⁠. 「⁠간석 미래공인⁠」⁠. 한솔의 통장 네 번째 줄에 있던 이름이었다⁠. 나윤은 사진을 오래 보았다⁠. 세입자가 물었다⁠.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나윤은 아니라고⁠, 서류는 다 맞다고 대답했다⁠. 서류는 다 맞았다⁠. 2024년에도 서류는 다 맞았다⁠.

*

아홉 시 사십 분⁠, 나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탁주엽이었다⁠. 쫄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제 오후 두 시 사십 분⁠, 인천공항 2터미널에서 호치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도상만이요⁠.⁠”

나윤은 일어나 창구 밖 복도로 나갔다⁠. 복도 창 너머로 주차장의 흰 차들이 보였다⁠.

“⁠출국금지 연장 신청 들어갔다고 하셨잖아요⁠.⁠”

“⁠들어갔죠⁠. 기존 기간이 11일 밤 열두 시에 끝났습니다⁠. 연장 결정은 12일 저녁에 나왔고요⁠. 그 사이 열네 시간이었습니다⁠.⁠” 탁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제가 날짜를 하루 잘못 셌습니다⁠. 서류는 다 기록됩니다⁠. 제 실수도요⁠.⁠”

“⁠사장님이 날짜를 알았던 거예요⁠?⁠”

“⁠변호사가 알았겠죠⁠. 변호사는 날짜를 셉니다⁠.⁠”

“⁠이제 어떻게 돼요⁠?⁠”

“⁠여권 무효화 신청 들어가고⁠, 인터폴 적색수배 요청 들어가고⁠, 베트남 공안에 협조 요청 들어갑니다⁠. 다 들어갑니다⁠. 들어가는 데 몇 달 걸립니다⁠.⁠” 탁이 숨을 한 번 쉬었다⁠. “⁠계 실장님⁠, 호치민 쪽에서 연락 오면 받으세요⁠. 끊지 마시고요⁠.⁠”

창구로 돌아오자 재열이 나윤의 얼굴을 보았다⁠. 나윤은 말하지 않았다⁠. 대기 화면이 19번으로 바뀌었다⁠. 재열이 번호표를 쥔 손을 펴서 다시 보았다⁠. 41이었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갔죠⁠.⁠”

“⁠네⁠.⁠”

“⁠어디로요⁠?⁠”

“⁠아들 가게요⁠.⁠”

재열은 번호표를 예슬의 손에 쥐여 주고 일어났다⁠. 예슬이 재열의 소매를 잡았다⁠.

“⁠어디 가⁠?⁠”

“⁠사무실⁠. 주안동⁠.⁠”

“⁠위원장님⁠, 제가 갈게요⁠.⁠” 나윤이 말했다⁠. “⁠위원장님은 41번 기다리셔야 해요⁠. 633만 원이요⁠.⁠”

*

오전 열한 시⁠, 주안동 해든건설 사무실⁠. 해든관리와 같은 문을 쓰는 3층이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파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해든빌에서 태식이 블라인드를 내리던 날과 같은 소리였다⁠.

김 실장이 파쇄기 앞에 있었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발밑에 서류 상자 네 개를 두고 있었다⁠. 상자에는 매직으로 「⁠청천⁠」⁠, 「⁠간석⁠」⁠, 「⁠해든빌⁠」⁠, 「⁠합의⁠」라고 쓰여 있었다⁠.

“⁠나가세요⁠.⁠” 김 실장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여기 해든관리 사무실입니다⁠. 계 실장은 이제 아무 데도 아니잖아요⁠.⁠”

나윤은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대신 문틀에 어깨를 대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탁주엽 경위님 번호예요⁠. 지금 누르면 이십 분이면 와요⁠. 수사 중인 사건 서류예요⁠. 경위님이 와서 파쇄기 보시면 실장님도 같이 들어가요⁠. 사장님은 비행기에 계시고 여기는 실장님 혼자예요⁠.⁠”

파쇄기가 종이 한 장을 먹다가 멈췄다⁠. 과열 표시등이 빨갛게 켜졌다⁠. 김 실장이 기계를 내려다보았다⁠. 기계도 쉬어야 했다⁠.

“⁠나는 시킨 대로 한 거예요⁠.⁠”

“⁠저도 그랬어요⁠.⁠”

김 실장이 의자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었다⁠. 나윤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경매법정에서 끽 소리 나는 구두를 신고 영수증을 받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30퍼센트⁠, 열두 집밖에 못 보냈어요⁠.⁠” 김 실장이 「⁠합의⁠」 상자를 발로 밀었다⁠. “⁠11월 10일에 열두 집⁠. 옥 할머니가 첫 번째였고요⁠. 매형이 첫 번째 도장 찍은 집에는 꼭 보내라고 했어요⁠. 단톡방에 소문이 나야 다음 도장이 찍힌다고⁠.⁠”

“⁠나머지 스물여섯 집은요⁠?⁠”

“⁠청천 잔금 들어오면 보낸다고 했어요⁠. 청천 마지막 두 세대가 안 나갔어요⁠.⁠” 김 실장이 웃었다⁠. 웃음이 바로 꺼졌다⁠. “⁠계 실장이 청천동 갔다면서요⁠. 신혼부부한테 등기부 떼라고 했다면서요⁠. 그 집 계약 깨졌어요⁠. 늘봄 소장이 전화로 난리 쳤어요⁠.⁠”

나윤은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

“⁠실장님은 얼마 묶였어요⁠?⁠”

김 실장이 고개를 들었다⁠.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1억이요⁠. 우리 집⁠. 간석동 해든파크 전세⁠. 매형이 처남 집은 걱정 말라고 했어요⁠.⁠” 김 실장이 「⁠간석⁠」 상자를 보았다⁠. “⁠어제 공항 가는 차도 내가 몰았어요⁠. 매형이 내리면서 그랬어요⁠. 처남⁠, 수고했어⁠.⁠”

나윤은 탁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은 말리지 않았다⁠. 파쇄기의 빨간 불이 꺼질 때까지 둘은 말없이 기다렸다⁠. 탁의 차가 골목에 들어왔을 때 상자 네 개는 그대로 있었다⁠. 「⁠청천⁠」 상자 맨 위에 계약서 사본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특약 칸에 「⁠임대인은 잔금일 다음 날까지 근저당 일부를 감액한다⁠」가 박혀 있었다⁠. 나윤이 만든 문구였다⁠.

*

오후 세 시⁠, 숭의 로터리 모퉁이⁠.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 유리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정상 당분간 휴업합니다⁠」⁠. 글씨가 태식의 글씨였다⁠. 휴업 안내에도 「⁠채광 좋은 매물 문의 환영⁠」이라는 작은 글씨가 아래 붙어 있었다⁠. 지우는 것을 잊은 문구였다⁠.

유리문 안에 태식이 있었다⁠. 등산복 차림으로 혼자 앉아 전기난로를 쬐고 있었다⁠. 나윤을 보고 문을 열고 나왔다⁠. 사무실 안에서 더운 바람이 같이 나왔다⁠.

“⁠난로 몇 도예요⁠?⁠”

“⁠30도⁠. 에어컨 18도 하던 사람이 난로는 30도 한다⁠. 웃기지⁠?⁠” 태식이 웃지 않고 말했다⁠. “⁠상만이 갔다며⁠.⁠”

“⁠네⁠.⁠”

“⁠어제 나한테도 전화 왔다⁠. 공항이었나 봐⁠. 방송 소리가 났어⁠. 반 소장⁠, 계 실장 잘 챙겨⁠. 그게 끝이었다⁠. 네 해 같이 일한 사람한테 하는 말이 그거였다⁠.⁠”

태식은 사무실 유리문을 돌아보았다⁠. 압수수색 때 수사관이 26도로 올려놓았던 에어컨 리모컨이 책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변호사가 그러는데 나 다음 달에 기소된대⁠. 불구속으로⁠.⁠” 태식이 손바닥을 비볐다⁠. “⁠한솔이 국가고시가 1월이다⁠. 1월까지만 아무 일 없으면 좋겠다⁠.⁠”

“⁠소장님⁠.⁠”

“⁠응⁠.⁠”

“⁠선인장 물 줬어요⁠. 어제요⁠.⁠”

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난로 앞에 앉았다⁠. 나윤은 유리문 위의 휴업 안내를 보았다⁠. 작은 글씨의 「⁠채광 좋은 매물⁠」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종이가 조금 찢어졌다⁠.

*

밤 여덟 시⁠, 필로티 주차장⁠. 대책위를 나간 서른한 집 가운데 스물두 집이 내려와 있었다⁠. 30퍼센트를 못 받은 집들이었다⁠. 처벌불원서는 이미 상만의 변호사 손에 있었다⁠. 돈은 오지 않았고 도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위원장님⁠, 우리 다시 들어가도 돼요⁠?⁠” C동 할아버지가 물었다⁠. “⁠고소장에 이름 다시 넣어 줘요⁠.⁠”

재열은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 LH 창구에서 41번이 불렸고⁠, 재열은 633만 원 신청서를 냈다⁠. 접수증을 아직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처벌불원서는 못 물러요⁠. 냈으니까요⁠.⁠” 재열이 말했다⁠. “⁠그래도 고소장에는 다시 이름 넣을 수 있어요⁠. 피해자는 피해자예요⁠. 도장 찍었다고 집이 안 날아간 거 아니잖아요⁠.⁠”

“⁠나도 넣어 줘⁠.⁠”

옥경희였다⁠. 계단에서 내려오며 통장을 흔들었다⁠.

“⁠2⁠,400 들어왔어⁠. 근데 이거 누구 돈이야⁠? 청천동 애들 돈이면 나 이거 못 써⁠. 손이 떨려서 못 써⁠.⁠”

“⁠할머니 보증금 8천 중에 돌아온 2⁠,400이에요⁠.⁠” 나윤이 말했다⁠. “⁠할머니 돈이에요⁠. 청천동 사람들은 청천동 사람들대로 받아야 할 돈이 따로 생기는 거고요⁠.⁠”

“⁠그럼 상만이는 두 번 뺏은 거네⁠.⁠”

“⁠네⁠.⁠”

옥경희가 매직펜을 들었다⁠. 재열의 탁자에 두고 갔던 매직펜이었다⁠. 새 종이에 큰 글씨로 썼다⁠. 「⁠도망감⁠」⁠. 종이를 기둥에 붙인 다음⁠, 숫자 「⁠38⁠」 옆에 작은 글씨로 「⁠12만 받음⁠」이라고 덧붙였다⁠. 옥경희가 작은 글씨를 쓴 것은 처음이었다⁠.

사샤가 웃었다⁠. “⁠아이고⁠, 할머니 작은 글씨 쓰시네⁠. 거시기 큰일 났네요⁠.⁠”

*

밤 열한 시⁠, 305호⁠. 나윤은 선인장 화분을 창가로 옮기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화면에 +84로 시작하는 번호가 떴다⁠. 영상통화였다⁠.

화분을 내려놓고 수락을 눌렀다⁠. 화면 속에 붉은 등이 달린 식당이 있었다⁠. 벽에 「⁠서울갈비⁠」라는 한글 간판이 있었고⁠, 간판 아래로 베트남어 간판이 붙어 있었다⁠. 상만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앞치마에도 「⁠서울갈비⁠」가 박혀 있었다⁠. 뒤로 숯불 연기가 지나갔다⁠.

“⁠계 실장⁠. 늦은 시간에 미안해⁠. 여기는 아홉 시야⁠. 두 시간 늦어⁠.⁠”

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녹음 버튼이 어디 있는지 손가락이 먼저 찾았다⁠.

“⁠얼굴 좀 보여 줘⁠. 305호네⁠. 선인장 아직 살아 있네⁠.⁠” 상만이 웃었다⁠. 눈가 주름이 먼저 웃었다⁠. “⁠계 실장⁠, 얘기 좀 하자⁠.⁠”

출처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개정 법률 · 2026년 11월 13일 시행 — 회수액이 보증금의 3분의 1에 못 미치면 차액을 최소지원금으로 지급⁠, LH가 신청을 받아 90일 안에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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