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5,338자)

받을게요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2월 3일 목요일 밤 열 시 십 분⁠, 305호⁠. 휴대전화가 냉장고 위에서 울렸다⁠. +84⁠. 나윤은 화면 녹화를 먼저 누르고 수락을 눌렀다⁠. 순서는 열흘 동안 매일 밤 연습했다⁠. 녹화⁠, 수락⁠, 숨⁠.

화면 속 상만은 서울갈비 주방에 있었다⁠. 뒤로 양념 통이 줄지어 있었고⁠, 아들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갈비를 재고 있었다⁠. 상만이 화면을 들고 걸어 나와 가게 뒤 골목에 앉았다⁠. 골목에 오토바이가 끝도 없이 지나갔다⁠.

“⁠계 실장⁠, 생각 좀 해 봤어⁠?⁠”

나윤은 숨을 한 번 쉬었다⁠. 대본은 없었다⁠. 탁은 대본을 쓰지 말라고 했다⁠. 대본은 읽는 소리가 난다고 했다⁠.

“⁠받을게요⁠.⁠”

상만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퍼졌다⁠. 이번에는 눈가 주름보다 입이 먼저 웃었다⁠.

“⁠그렇지⁠. 계 실장은 계산이 빨라⁠. 어머님은 뭐라셔⁠?⁠”

“⁠통장에 그대로 두셨어요⁠. 쓰지 않으셨어요⁠.⁠”

“⁠어머님이 점잖으시네⁠. 나머지 4⁠,200은 공판 날짜 잡히면 보낼게⁠. 반 소장 얘기는 내 변호사가 문장 정리해서 보낼 거야⁠. 계 실장은 외우기만 해⁠.⁠”

“⁠언제 보내 주세요⁠?⁠”

“⁠다음 주⁠. 이번 주는 바빠⁠. 내일 아들 가게 1주년이야⁠. 손님이 백 명 넘게 온대⁠.⁠” 상만이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붉은 천막에 금색 글씨로 1주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구워 드린다고 아들이 광고를 냈어⁠. 여섯 시부터 열 시까지 내가 집게 들고 있어야 돼⁠. 한국에서 집 412채 지은 사람이 갈비 굽는 거 봐야 한대⁠. 웃기지⁠?⁠”

“⁠직접 구우세요⁠?⁠”

“⁠직접 굽지⁠. 고기는 사람이 구워야 맛있어⁠. 집도 사람이 지어야 하고⁠.⁠” 상만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계 실장⁠, 고마워⁠. 진짜야⁠. 나는 계 실장이 끝까지 내 편일 줄 알았어⁠. 계약서 이백 장 쓴 사람이 어디 가겠어⁠.⁠”

화면이 꺼졌다⁠. 녹화 파일 십일 분 오 초⁠. 나윤은 냉장고에 이마를 대었다⁠. 냉장고가 웅 소리를 냈다⁠. 이마가 차가웠다⁠.

탁은 신호가 한 번 가자 받았다⁠.

“⁠내일 여섯 시부터 열 시까지 가게에 있대요⁠. 집게 들고요⁠. 호치민 시간으로요⁠.⁠”

“⁠들었습니다⁠. 녹음 파일 보내 주세요⁠. 바로 공안에 넘깁니다⁠.⁠” 탁이 잠깐 말을 멈췄다⁠. “⁠받겠다고 하셨죠⁠.⁠”

“⁠네⁠.⁠”

“⁠기록됩니다⁠. 그 말도요⁠.⁠”

*

12월 4일 금요일 저녁 일곱 시 오십 분⁠, 302호⁠. 거실에 해든빌 사람 아홉 명이 앉아 있었다⁠. 재열과 예슬⁠, 사샤⁠, 옥경희⁠, 그리고 대책위에 남은 집 다섯⁠. 거실 텔레비전에 예슬의 노트북이 연결되어 있었다⁠. 화면에는 서울갈비 계정의 생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호치민은 다섯 시 오십 분이었다⁠.

“⁠아들이 생방송도 해⁠. 효자네⁠.⁠” 옥경희가 귤을 까며 말했다⁠. 귤 껍질은 비닐봉지에 담았다⁠. “⁠상만이 저 앞치마 얼마야⁠? 우리 보증금으로 산 거야⁠?⁠”

“⁠할머니⁠, 앞치마는 만 원이에요⁠.⁠” 사샤가 말했다⁠.

“⁠만 원도 우리 돈이야⁠.⁠”

화면 속 상만은 숯불 화로 앞에 있었다⁠. 집게를 들고 갈비를 뒤집었다⁠. 손님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상만을 찍었다⁠. 상만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영장 기각 날 사진과 같은 각도였다⁠. 302호 거실의 누구도 귤을 먹지 않았다⁠.

나윤은 현관 신발장 옆에 앉아 있었다⁠. 예슬이 거실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나윤은 현관에 남았다⁠. 302호 현관 바닥은 2024년 4월에 이사 들어올 때 나윤이 같이 닦은 바닥이었다⁠.

여덟 시 사십 분⁠, 호치민 여섯 시 사십 분⁠. 화면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카메라가 흔들렸다⁠. 노란 제복 두 사람이 화로 앞으로 들어왔다⁠. 뒤로 셋이 더 들어왔다⁠. 상만이 집게를 든 채 돌아보았다⁠. 갈비 한 점이 화로 밖으로 떨어졌다⁠. 아들이 무언가를 외쳤다⁠. 화면이 까맣게 바뀌었다⁠.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거실이 조용했다⁠. 냉장고가 웅 소리를 냈다⁠.

“⁠아이고⁠.⁠” 사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갈비 탔겠네요⁠. 거시기 아깝다⁠.⁠”

사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공장 동료가 생방송을 같이 보고 있었다⁠. 사샤가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아들이 외친 말이요⁠. 베트남어로⁠, 아빠 집게 내려놓으세요⁠. 그랬대요⁠.⁠” 사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집게가 위험한 물건이에요⁠? 아이고⁠, 공안이 집게를 무서워했나 봐요⁠.⁠”

옥경희가 웃었다⁠. 웃다가 울었다⁠. 귤을 쥔 손으로 눈을 닦았다⁠. 예슬이 계산기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셀 것이 없었다⁠.

아홉 시 십 분⁠, 나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붙잡았습니다⁠. 여권 효력이 없는 체류자로요⁠. 송환 절차 들어갑니다⁠. 한두 달 걸립니다⁠.⁠” 탁의 목소리 뒤로 쫄면 소리가 났다⁠. 오늘은 먹는 소리였다⁠. “⁠고맙습니다⁠. 기록됩니다⁠. 고맙다는 말도요⁠.⁠”

나윤은 거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옥경희가 가방에서 매직펜을 꺼내 달력 뒷면에 큰 글씨를 썼다⁠. 「⁠잡힘⁠」⁠. 글자가 종이 밖으로 나갈 만큼 컸다⁠.

재열만 웃지 않았다⁠. 재열은 꺼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돈은요⁠?⁠” 재열이 나윤을 보았다⁠. “⁠잡혔다고 1억 6천이 오는 건 아니잖아요⁠.⁠”

“⁠네⁠. 안 와요⁠.⁠”

“⁠그럼 오늘 뭐가 달라졌어요⁠?⁠”

나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거실의 아홉 명이 나윤을 보았다⁠.

“⁠재판을 받아요⁠. 우리가 낸 서류가 판사 앞에 가요⁠. 412채가 한 사람 이름으로 판결문에 들어가요⁠.⁠” 나윤이 말했다⁠. “⁠돈은 그다음이에요⁠. 그다음도 오래 걸려요⁠.⁠”

재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맥주 세 캔을 꺼냈다⁠. 하나를 옥경희에게⁠, 하나를 사샤에게 주고⁠, 남은 하나를 현관의 나윤에게 내밀었다⁠.

“⁠한 캔만이요⁠. 실장님 몫⁠.⁠”

*

12월 5일 토요일 아침 일곱 시⁠, 제물포역 김밥집⁠. 나윤은 단무지를 길게 썰고 있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 아침 뉴스가 나왔다⁠. 자막이 지나갔다⁠. 「⁠인천 빌라 412채 전세사기 혐의 건물주⁠, 베트남서 붙잡혀⁠」⁠. 화면에 해든빌 필로티가 잠깐 나왔다⁠. 기둥에 붙은 큰 글씨 「⁠4만⁠」이 보였다⁠. 옥경희의 글씨였다⁠.

김밥집 사장이 김을 펴다 말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저 사람 잡혔네⁠. 우리 가게 건물주도 좀 잡아 가지⁠. 월세를 석 달마다 올려⁠.⁠”

“⁠사장님 건물주는 사기는 안 쳤잖아요⁠.⁠”

“⁠월세 올리는 게 사기지⁠.⁠” 사장이 밥을 펴며 투덜거렸다⁠. “⁠계 씨⁠, 저 빌라 알아⁠? 표정이 왜 그래⁠?⁠”

“⁠저 빌라 살아요⁠. 305호요⁠.⁠”

사장이 주걱을 멈췄다⁠. 한참 나윤을 보다가 김밥 한 줄을 썰어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단무지가 두 줄 들어간 김밥이었다⁠. 사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윤은 김밥을 먹으며 단무지를 마저 썰었다⁠. 단무지 두 줄은 짰다⁠. 짠 것을 다 먹었다⁠.

*

12월 8일 화요일⁠, 단톡방에 긴 글이 올라왔다⁠. 대책위를 나간 서른한 집 가운데 누군가 퍼 온 글이었다⁠. 상만의 변호인이 해든빌 세입자 몇 집에 보낸 문자였다⁠.

「⁠계나윤 씨는 처음부터 도상만 씨의 동업자로 리베이트를 받았고⁠, 최근에도 도상만 씨에게 금전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힌 녹음이 있습니다⁠. 해든빌 피해자 여러분께서 계나윤 씨의 진술을 그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단톡방이 빠르게 올라갔다⁠. 「⁠진짜예요⁠?⁠」⁠, 「⁠받겠다고 했대⁠」⁠, 「⁠역시⁠」⁠, 「⁠50만 원은 맛보기였네⁠」⁠. 나윤은 글을 끝까지 내려 읽었다⁠. 답을 달지 않았다⁠. 탁은 녹음 이야기를 단톡방에 하지 말라고 했다⁠. 재판 전에 녹음이 돌면 증거의 무게가 줄었다⁠.

재열이 글을 올렸다⁠. 「⁠그 녹음 뭔지 나는 알아요⁠. 4일에 302호에 있던 사람은 다 알아요⁠. 그 얘기는 재판에서 해요⁠.⁠」 옥경희가 큰 글씨로 이어 올렸다⁠. 「⁠재판에서 해⁠」⁠. 단톡방이 잠깐 조용해졌다⁠.

오후 두 시⁠, 나윤은 엄마와 송현동 은행에 갔다⁠. 번호표는 17번이었다⁠. 엄마는 의자에 앉아 손목을 주물렀다⁠.

“⁠어떻게 할 거야⁠? 돌려보내⁠?⁠”

“⁠아직 못 돌려보내요⁠. 경위님이 증거라서 재판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래요⁠.⁠” 나윤이 말했다⁠. “⁠통장 하나 새로 만들어서 거기로 옮겨 놓을게요⁠. 엄마 이름으로요⁠. 엄마 돈하고 안 섞이게요⁠.⁠”

창구 직원이 통장 이름을 물었다⁠. 통장 표지에 별칭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엄마가 대답했다⁠.

“⁠305요⁠. 숫자로요⁠.⁠”

“⁠305가 무슨 뜻이에요⁠? 비밀번호는 아니시죠⁠?⁠” 직원이 물었다⁠.

“⁠집 호수예요⁠. 딸 집⁠.⁠” 엄마가 대답했다⁠. “⁠비밀번호로는 안 써요⁠. 도둑이 알면 안 되니까⁠.⁠”

직원이 웃으며 통장을 찍어 주었다⁠. 표지 아래에 작은 글씨로 「⁠305⁠」가 박혔다⁠. 엄마는 새 통장을 나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도장도 같이 주었다⁠.

“⁠니가 정한다며⁠. 그러니까 니가 갖고 있어⁠.⁠”

“⁠엄마⁠.⁠”

“⁠엄마는 김장 다 했다⁠. 엄마 할 일은 끝났어⁠.⁠”

*

12월 10일 목요일 밤 아홉 시⁠, 305호 초인종이 울렸다⁠. 문 앞에 태식이 있었다⁠. 등산복 위에 양복 윗도리를 걸친 차림이었다⁠.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 겉에 인천지방검찰청 글자가 보였다⁠.

“⁠오늘 공소장 받았다⁠. 불구속 기소⁠.⁠” 태식이 봉투를 들어 보였다⁠. “⁠들어가도 되냐⁠?⁠”

나윤은 문을 열었다⁠. 태식은 신발을 벗지 않고 현관에 머물렀다⁠. 10월에 통장을 두고 맞서던 자리였다⁠. 태식은 선인장을 보았다⁠.

“⁠살아 있네⁠.⁠”

“⁠한 달에 한 번이요⁠.⁠”

“⁠그래⁠.⁠” 태식이 봉투를 신발장 위에 올렸다⁠. “⁠상만이 잡혔다며⁠. 니가 받겠다고 했다며⁠. 상만 변호사가 나한테도 문자 보냈다⁠. 너를 조심하라고⁠.⁠”

“⁠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니가 왜 받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탁 경위 얼굴이 떠오르더라⁠.⁠” 태식은 웃지 않았다⁠. “⁠나윤아⁠, 부탁이 있어서 왔다⁠.⁠”

태식이 나윤을 이름으로 불렀다⁠. 네 해 동안 계 실장이라고만 부른 사람이었다⁠.

“⁠내 재판에 증인 서 줘⁠. 내 쪽으로⁠.⁠” 태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짓말하라는 거 아니다⁠. 숫자는 상만이가 정했다고⁠, R3도 R5도 상만이가 정했다고⁠, 내 보증금 1억 8천도 상만이한테 묶였다고⁠, 그것만 말해 줘⁠. 다 사실이잖아⁠. 한솔이 국가고시가 다음 달이다⁠. 졸업이 2월이고⁠. 그때까지만 아빠가 덜 나쁜 사람이면 된다⁠.⁠”

나윤은 신발장 위의 공소장 봉투를 보았다⁠. 봉투 아래로 태식의 손이 떨렸다⁠. 리모컨을 쥐던 손이었다⁠.

“⁠소장님⁠, 상만 사장님도 저한테 똑같이 말했어요⁠. 사실 하나에 모르는 거 하나 붙이면 된다고요⁠.⁠”

“⁠나는 모르는 거 안 붙인다⁠.⁠” 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니가 아는 것만 말해⁠. 니가 아는 거 다 말해도 나는 상만이보다 덜 나쁘다⁠. 그건 너도 알잖아⁠.⁠”

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생각해 봐⁠.⁠” 태식이 봉투를 다시 집었다⁠. 문을 열다 멈추고 돌아보았다⁠. “⁠나윤아⁠, 니 쪽 증인 서 달라고 상만이도 하고 나도 하고⁠, 검사도 할 거다⁠. 니가 쓴 계약서가 이백 장이라서 그래⁠. 다들 그 이백 장이 자기 편이었으면 하는 거야⁠.⁠”

문이 닫혔다⁠. 복도에서 태식의 등산화 소리가 계단 쪽으로 멀어졌다⁠. 나윤은 엄마가 준 「⁠305⁠」 통장을 냉장고 위에 올려 두었다⁠. 휴대전화 옆이었다⁠.

출처 베트남 「⁠외국인의 출입국·경유·거주에 관한 법⁠」 · 2014년 제정 — 외국인의 체류에 유효한 여권과 체류 자격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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