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27자)

빈, 모범의 균열

비교체험 유럽/한국 · 윤서각

2026년 10월 22일 목요일⁠, 오스트리아 빈⁠.

오후 3시⁠, 카를스플라츠의 빈 공과대학 본관 앞에서 행진이 출발했다⁠. 전국 학생회와 공무원 노동조합이 함께 불렀고⁠, 맨 앞 현수막에는 「⁠빨간 경보⁠」라고 적혀 있었다⁠. 10억 유로 구멍을 알리는 경보라고 했다⁠. 신고 인원은 2만 명이었고⁠, 출발 직후 학생회는 3만 명가량이라고 했다⁠. 린츠의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은 2만 8천 명⁠, 튀르키예 아나돌루 통신은 5만 명가량이라고 전했다⁠. 한 행진에 숫자가 넷이다⁠. 한국 대학가에도 연구 예산을 두고 소리가 난 날이 있다⁠. 2024년 2월 16일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항의하다 경호원들에게 입이 막힌 채 끌려 나갔다⁠. 빈 학생들은 거리를 걸었고⁠, 대전의 졸업생은 졸업식장에서 한 마디를 외쳤다⁠.

다툼의 한가운데는 2028⁠~2030년 대학 예산이다⁠. 정부가 잡은 세 해 예산은 155억 유로(⁠약 23조 1천억 원⁠)이고⁠, 대학 총장 협의회는 실제로 10억 유로(⁠약 1조 4⁠,900억 원⁠)쯤이 모자란다고 본다⁠. 대학들은 15억 유로를 더해 180억 유로로 올려 달라고 했다⁠. 마르쿠스 마르터바워 재무부 장관은 10억 유로가 부풀린 숫자라고 했고⁠, 국립대 총장들은 예산이 그대로면 교직원 열 자리 중 한 자리를 줄이겠다고 했다⁠. 한국은 거꾸로 갔다⁠. 2024년 정부 연구개발 예산을 14⁠.7% 깎아 26조 5천억 원으로 줄였다가⁠, 2027년 예산안에서는 39조 5천억 원으로 11⁠.2% 늘렸다⁠. 빈은 지금 깎고⁠, 한국은 깎았다가 되돌려 더 늘렸다⁠.

깎는 까닭은 나라 살림에 있다⁠. 오스트리아는 2024년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의 4⁠.7%로 유럽연합 기준 3%를 넘었고⁠, 2025년 유럽연합의 과도 재정적자 절차에 들어갔다⁠. 국민당과 사회민주당⁠, 네오스가 함께 꾸린 연립정부는 적자를 줄이려 지출을 줄이는 중이고⁠, 대학 예산도 삭감 목록에 올랐다⁠. 한국 정부가 국회에 낸 2027년 예산안에서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0⁠.1%다⁠. 행렬 옆 카페 주인은 커피값을 올린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정부는 대학을 깎고 저는 우유를 깎아요⁠. 라테가 점점 연해지는 걸 손님들이 알아요⁠.⁠”

빈 대학교 총장 제바스티안 쉬체는 예산이 계획대로 155억 유로에 머물면 교직원을 크게 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빈 미술 아카데미 학생들은 예산 다툼 속에 학교 건물을 점거했다⁠. 법에 따라 다음 성과 협약 기간의 대학 예산은 10월 말까지 정해야 한다⁠. 행렬의 학생들은 등록금을 없애라는 요구도 함께 들었다⁠. 오스트리아 국립대는 유럽연합 학생이 정해진 학기 안에 다니면 등록금을 받지 않고⁠, 기한을 넘기면 한 학기에 363⁠.36유로(⁠약 54만 원⁠)를 받는다⁠. 한국 4년제 대학의 올해 평균 등록금은 727만 300원이다⁠. 빈 학생은 기한을 넘겨야 내는 돈을 없애 달라고 하고⁠, 한국 학생은 입학하는 날부터 낸다⁠.

오스트리아 등록금에는 짧은 역사가 있다⁠. 2001년 국민당과 자유당 정부가 모든 학생에게 한 학기 363⁠.36유로를 받기 시작했고⁠, 2008년 의회가 유럽연합 학생 대부분의 등록금을 다시 없앴다⁠. 한국은 2009년부터 대학 등록금을 사실상 묶었다⁠. 2012년에는 소득에 따라 장학금을 주는 국가장학금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등록금을 받았다가 거두었고⁠, 한국은 높아진 등록금을 묶은 뒤 장학금으로 덜어 주는 길을 택했다⁠.

빈이 오래 가진 장점은 집이다⁠. 1919년 메츨라인스탈러 호프의 첫 삽부터 지금까지 빈 시가 지은 시영 주택은 22만 채다⁠. 「⁠붉은 빈⁠」이라 불린 사회민주당 시정은 1934년까지 6만 채 넘게 지었다⁠. 빈 시 자료로 1934년에는 시민 열에 하나가⁠, 2010년대에는 넷에 하나가 시영 주택에 산다⁠. 시의 돈을 받은 협동조합 주택까지 넣으면 시민 절반가량이 공공의 손을 거친 집에 산다⁠. 한국 정부는 2024년 말 장기 공공임대 재고율을 8⁠.4%로 집계했다⁠. 시민단체는 민간 소유 전세임대를 빼면 4⁠~5%대라고 본다⁠. 빈 숫자는 사는 사람으로⁠, 한국 숫자는 집으로 잰 것이라 잣대가 다르다⁠. 그래도 빈은 시민 넷 중 하나가 시영 주택에 살고⁠, 한국은 집 열둘 가운데 하나쯤이 장기 공공임대다⁠.

아침에는 하일리겐슈타트의 카를 마르크스 호프에 들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지은 시영 주택으로⁠, 건물 한 동이 1⁠.1킬로미터를 이어 간다⁠. 정문 아치 아래에서 유모차를 밀던 주민은 할머니 때부터 3대째 이 단지에 산다고 했다⁠. 한국의 첫 단지형 아파트는 1962년 서울 마포에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마포아파트다⁠. 민수에게 사진을 보냈다⁠. 「⁠마포아파트도 이렇게 길었음⁠?⁠」 민수가 답했다⁠. 「⁠누나 그거 재건축돼서 없어⁠. 우리 동네는 길게 짓는 대신 높게 짓고 비싸게 팔아⁠.⁠」

빈의 시영 주택은 무엇 위에 지어졌나⁠. 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지자 빈은 5천만 인구 제국의 수도에서 작은 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오스트리아는 바다 건너 식민지가 없던 나라다⁠. 시영 주택의 돈은 1923년 휴고 브라이트너 재무 담당 시의원이 들인 누진 주택 건설세에서 나왔다⁠. 비싼 집일수록 세율이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은 2005년 비싼 집과 땅에 매기는 종합부동산세를 들였고⁠, 2026년 세제개편으로 고가 주택과 사는 사람 없는 집에 세금을 더 올렸다⁠. 빈은 부자의 집에서 거둔 세금으로 노동자의 집을 지었고⁠, 한국은 비싼 집의 세금으로 집값을 누르려 한다⁠.

빈 시는 한동안 시영 주택 짓기를 멈췄다가 2015년 다시 짓기로 했고⁠, 새 시영 주택은 2019년부터 문을 열었다⁠. 시가 땅을 사고 시가 직접 짓는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9월 7일 내놓은 대책도 수도권 135만 가구를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착공하며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직접 시행하게 했다⁠. 숫자로 견주면 빈은 백 년 넘게 22만 채⁠, 한 해에 2천 채쯤을 지었다⁠. 한국은 다섯 해에 135만 가구를 착공하겠다고 한다⁠. 다만 135만 가구가 모두 공공 임대는 아니다⁠. 빈의 22만 채는 지금도 시가 가진 집이고⁠, 한국의 135만 가구 가운데 얼마가 나라 손에 남을지는 아직 숫자가 없다⁠.

빈이 백 년 동안 집을 지을 수 있었던 다른 까닭은 땅이다⁠. 빈 시는 1984년 주택 기금을 세워 집 지을 땅을 미리 사 모으고⁠, 공모로 짓는 사람을 골라 왔다⁠. 땅값이 집값에 얹히지 않게 하는 장치다⁠. 한국도 2009년부터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공공 토지 비축 제도로 쓸 땅을 미리 사 둔다⁠. 빈은 사 모은 땅을 집 짓는 데 먼저 썼고⁠, 한국의 비축 제도는 도로와 산업단지 같은 공공사업 전반에 쓰도록 만들어졌다⁠.

저녁 기차에서 박성훈 차장의 메시지가 왔다⁠. 「⁠프라하 가지⁠? 수신료 건은 2⁠,500원으로 제목 뽑자⁠.⁠」 한국 텔레비전 수신료는 1981년부터 한 달 2⁠,500원이다⁠. 박 차장이 덧붙였다⁠. 「⁠내 첫 월급 때도 2⁠,500원이었다⁠. 그사이 내 월급 빼고 다 올랐다⁠.⁠」 체코는 수신료를 아예 없애고 공영방송을 나라 예산으로 돌리려 한다⁠. 나는 「⁠제목은 표결 보고 정할게요⁠」라고 답했다⁠. 박 차장은 「⁠표결은 새벽이라던데⁠. 자지 마⁠」라고 보냈다⁠.

다음 날인 23일 밤⁠, 나는 프라하 하원 건물 앞에 있었다⁠. 체코 텔레비전과 체코 라디오를 받치는 수신료를 없애는 법안이 밤새 심의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담요를 두르고 「⁠공영방송은 국가방송이 아니다⁠」라는 판지를 들었다⁠. 일부는 건물로 밀고 들어가려다 경찰에 막혔다⁠. 시위는 16시간가량 이어졌다⁠. 야당 시민민주당 대표 마르틴 쿠프카는 “⁠아마 체코 현대사에서 가장 긴 시위⁠”라고 했다⁠. 한국은 2023년 7월 대통령실 권고 한 달 만에 시행령을 고쳐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따로 걷게 했다⁠. 수납률은 80%대로 떨어졌고⁠, KBS 수신료 수입은 1년 전보다 335억 원쯤 줄었다⁠.

토요일인 24일 새벽 4시 36분⁠, 표결이 끝났다⁠. 토미오 오카무라 하원의장이 밤샘 표결 시간을 제안했고⁠, 출석 177명 가운데 96명이 찬성⁠, 야당 81명이 반대했다⁠.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는 표결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직 1차 독회일 뿐이고⁠, 법안은 언론문화위원회로 간다⁠. 법안대로면 내년 체코 텔레비전은 나라 예산에서 57억 4천만 코루나⁠, 체코 라디오는 20억 6⁠,500만 코루나를 받는다⁠. 올해 기대한 수신료 수입보다 각각 10억 코루나와 4억 코루나 적다⁠. 한국 국회는 2024년 12월 26일 수신료를 다시 전기요금과 함께 걷는 방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의를 요구했지만 2025년 4월 17일 재표결에서 212표로 다시 통과됐고⁠, 개정법은 지난해 10월 23일 시행됐다⁠.

바비시 총리는 표결 뒤 정부가 약속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바비시의 긍정당은 지난해 12월 극우 자유와 직접민주주의당⁠, 운전자당과 연립정부를 꾸렸고⁠, 수신료 폐지는 선거 때부터 내건 약속이었다⁠. 체코는 수신료를 없애 공영방송을 나라 예산에 기대게 하려 하고⁠, 한국은 따로 걷던 수신료를 다시 묶었다⁠. 두 나라 모두 걷는 방법 하나를 두고 정부와 의회가 밤을 새웠다⁠. 의사당 앞에서 밤을 새운 대학생이 물었다⁠. “⁠한국 수신료는 얼마예요⁠?⁠” “⁠한 달 2⁠,500원⁠, 45년째 그대로예요⁠.⁠” 학생은 휴대전화로 환산해 보더니 웃었다⁠. “⁠그럼 한국 방송은 45년 동안 커피 반 잔으로 버틴 거예요⁠?⁠”

체코 공영방송의 싸움은 처음이 아니다⁠. 2000년 말 정치권이 밀어 넣은 사장에 맞서 체코 텔레비전 기자들이 보도국을 지켰고⁠, 2001년 1월 3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 10만 명가량이 모였다⁠. 한국 공영방송 노동자들도 방송을 멈춘 적이 있다⁠. 2017년 KBS 노동조합은 142일⁠, MBC 노동조합은 72일 동안 파업했다⁠. 체코 텔레비전과 체코 라디오 직원들은 11월 3일 하루 파업을 예고했다⁠. 프라하는 기자들이 보도국에 남아 싸웠고⁠, 서울은 기자들이 보도국을 비우고 싸웠다⁠.

내가 프라하를 떠난 뒤인 일요일 25일⁠, 구시가 광장에는 수천 명이⁠, 매체에 따라서는 수만 명이 다시 모였다⁠. 시민단체 「⁠민주주의를 위한 백만의 순간⁠」은 11월 15일 레트나 평원에서 집회를 열 예정이다⁠. 1989년 11월 벨벳 혁명 때 70만 명 넘게 모인 언덕이다⁠. 한국 사람들도 비슷한 무렵 같은 일을 겪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외쳤다⁠. 체코는 2년 뒤 공산 정권을 무너뜨렸고⁠, 한국은 1987년 10월 헌법을 바꿨다⁠.

새벽 4시 36분의 표결 소식을 들은 뒤 나는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탔다⁠. 25일 세르비아 조기 총선에서 대학생들이 만든 후보 명단이 처음 투표지에 오른다고 했다⁠. 버스는 밤새 국경을 여럿 넘었다⁠. 나는 창밖 대신 수첩을 넘겼다⁠. 빈의 숫자는 22만 채와 155억 유로⁠, 프라하의 숫자는 96 대 81⁠, 서울의 숫자는 39조 5천억 원과 2⁠,500원이었다⁠. 박 차장에게 제목을 보냈다⁠. 「⁠45년 동안 2⁠,500원⁠, 프라하는 0원으로⁠.⁠」 답은 짧았다⁠. 「⁠0원은 아직 아니잖아⁠. 1차 독회야⁠.⁠」 박 차장 말이 맞았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새벽세시2026.11.02· 9화

    박 차장 「내 첫 월급 때도 2,500원이었다. 그사이 내 월급 빼고 다 올랐다」에서 웃었어요. 체코는 수신료를 없애고 한국은 다시 묶었다니, 같은 밤을 반대로 새운 거네요?

    • 윤서각작가2026.11.02

      맞아요, 프라하 표결이 새벽 4시 36분에 끝났고 서울은 그보다 먼저 길을 정했어요. 박 차장 월급은 아쉽게도 연재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입니다.

빈, 모범의 균열 · 비교체험 유럽/한국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