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55자)

베를린, 누가 총을 드나

비교체험 유럽/한국 · 윤서각

2026년 10월 31일 토요일⁠, 독일 베를린⁠.

정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십 대와 이십 대가 모였다⁠. 행진을 연 청년 모임 「⁠Z세대가 정한다⁠」의 구호는 「⁠우리 미래는 우리 손에⁠」였다⁠. 문 앞 판지 하나에는 「⁠군 설문지는 연애편지가 아니다⁠, 답장 안 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요구는 여섯 가지였다⁠. 망가진 학교와 긴축⁠, 오르는 생활비⁠, 불공평한 짐⁠, 병역 의무 끝내기⁠, 감시 확대 멈추기⁠, 기후 대책⁠. 모임은 전국 21곳 집회에 3만 명 가까이 참가 신청을 했다고 밝혔고⁠, 저녁 보도는 서른 곳 넘는 도시에서 수만 명이 걸었다고 전했다⁠. 병역을 거부할 권리는 한국에서도 법정에서 다퉈졌다⁠. 2018년 6월 한국 헌법재판소는 대체복무를 두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헌법에 맞지 않는다고 했고⁠, 2020년 10월 첫 대체복무요원들이 교정시설에서 36개월 합숙 복무를 시작했다⁠.

독일 연방하원은 2025년 12월 5일 병역 현대화법을 통과시켰고⁠, 법은 2026년 1월 1일 시행됐다⁠. 열여덟 살이 되는 모든 사람이 복무 의사와 적합성을 묻는 설문지를 받는다⁠. 남자는 반드시 답해야 하고 여자는 답하지 않아도 된다⁠. 답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적으면 1⁠,000유로(⁠약 149만 원⁠)까지 과태료를 물 수 있다⁠. 2008년생 남자부터는 2027년 7월부터 의무 신체검사가 시작된다⁠. 법이 통과되자 수백 개 도시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했고⁠, 주최 측은 4만 명까지 나왔다고 했다⁠. 한국 남자는 열여덟 살에 병역준비역이 되고⁠, 열아홉 살이 되는 해 병역판정검사를 받는다⁠. 육군 현역이면 18개월을 복무한다⁠. 행렬에서 만난 베를린 공대 한국 유학생이 말했다⁠. “⁠독일 친구들은 설문지 받고 거리에 나왔어요⁠. 저는 신체검사 받고 훈련소 갔다 왔고요⁠. 설문지면 저는 ‘⁠복무 의사 없음⁠, 대신 짐은 잘 나름⁠’에 체크했을 거예요⁠.⁠”

독일은 징병을 한 번 내려놓은 나라다⁠. 2011년 7월 독일은 징병을 멈추고 지원병으로만 군을 꾸렸다⁠. 냉전이 끝날 무렵 50만 명에 가깝던 서독 연방군은 통일 뒤 크게 줄었다⁠. 지금 독일 청년들이 설문지를 징병의 첫 계단으로 보는 까닭이다⁠. 한국은 징병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는데도 병력이 준다⁠. 2025년 7월 기준 병사와 간부를 합친 한국군은 45만 명가량이다⁠. 2040년 병력 전망은 한국국방연구원 35만 명⁠, 국방부 병사 전망을 바탕으로 한 분석 27만 명으로 엇갈린다⁠. 독일은 사람이 있어도 군대에 오지 않고⁠, 한국은 군대에 올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다⁠.

해가 지자 몇몇 도시에서 충돌이 났다⁠. 경찰은 밤새 200명 넘게 체포했다⁠. 낮의 행진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전날 경찰 노조 위원장 안드레아스 로스코프는 폭력 시위에는 주 경찰과 연방 경찰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거리를 걷는 것은 권리이고⁠, 불을 지르고 상점을 터는 것은 범죄다⁠. 정치의 바닥도 흔들린다⁠. 2025년 5월 취임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의 지지도는 4월부터 내려갔고⁠,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은 전례 없는 지지를 얻었으며⁠, 9월 베를린 선거에서는 좌파당이 이겼다⁠. 한국은 2026년 6월 3일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2곳⁠, 국민의힘이 4곳을 가져갔다⁠. 베를린은 성난 표가 양 끝으로 갈라졌고⁠, 한국의 표는 한쪽으로 몰렸다⁠.

기름값에서 독일은 유럽의 예외였다⁠. 독일 정부는 5월과 6월에 이어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휘발유와 경유의 에너지세를 리터당 14⁠.04센트 깎았다⁠. 5⁠~6월 할인에만 16억 유로(⁠약 2조 4천억 원⁠)쯤이 들어갔다⁠. 독일 정부는 2027년부터 이웃 벨기에처럼 주유소 판매가에 상한을 두는 방안도 따지고 있다⁠. 한국은 3월 13일 석유 최고가격제를 꺼내 정유사 공급가에 상한을 두었고⁠, 유류세 인하는 휘발유 15%⁠, 경유 25%로 11월 30일까지 이어진다⁠. 독일은 세금을 깎은 뒤 상한을 고민하고⁠, 한국은 상한과 세금 인하를 처음부터 함께 썼다⁠.

같은 가을의 성장도 다르다⁠. 유럽연합 통계청 속보로 독일 3분기 성장은 0⁠.2%였고⁠, 한국은 1⁠.0%였다⁠. 박성훈 차장이 메시지를 보냈다⁠. 「⁠독일도 기름값 손댔네⁠. 한국 따라 한 거 아니냐⁠.⁠」 나는 「⁠벨기에 따라 한대요⁠」라고 보냈다⁠. 박 차장은 「⁠벨기에가 한국 따라 했겠지⁠」라고 답했다⁠. 벨기에는 정부와 석유업계의 협약으로 오래전부터 연료 최고가격을 정해 온 나라다⁠. 이 사실을 보내자 박 차장은 「⁠리에주에서 등록금만 보지 말고 주유소도 봤어야지⁠」라며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독일 청년이 설문지 앞에 선 까닭은 동쪽에서 온다⁠. 스웨덴 공영방송 SVT와 유럽방송연맹이 유럽 공영방송 17곳과 함께 조사한 결과⁠, 4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러시아와 이어진 물리적 혼합 공격과 모의는 54건이었다⁠. 사이버 공격과 기밀로 남은 사건은 빠진 숫자다⁠. 폴란드와 루마니아⁠, 라트비아에서 가장 많았다⁠. 8월에는 독일 라이프치히·할레 공항에서 화물기를 폭파하려던 공작이 실패했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이를 러시아의 작전으로 확인했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마리야 자하로바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는 유럽 방산업체가 정당한 표적이라고 했다⁠. 한국의 북쪽에서는 북한과 러시아가 2024년 6월 평양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었고⁠, 북한군이 러시아로 건너가 싸웠다⁠. 두 나라는 2025년 4월 파병을 공식 인정했다⁠.

동쪽 끝에서는 중국이 광물을 쥐었다⁠. 중국 상무부는 7월 24일 독일 방산업체 라인메탈과 체코 트럭 회사 타트라를 포함한 유럽 기관 14곳을 수출 통제 명단에 올렸다⁠. 희토류와 영구자석 같은 군민 겸용 품목을 허가 없이 넘기지 못하게 했다⁠. 유럽연합이 21차 대러 제재에 중국 회사들을 올린 지 몇 시간 만이었다⁠. 이후 중국의 유럽행 희토류와 자석 수출은 크게 줄었다⁠. 한국은 2026년 1월 5일 베이징 국빈 방문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다시 세웠다⁠. 유럽은 러시아 제재의 대가를 중국 광물로 치르고⁠, 한국은 북러가 붙는 사이에도 베이징과의 길을 다시 열었다⁠.

서쪽에서는 동맹이 관세를 들었다⁠. 유럽연합은 2025년 미국과 15% 관세에 합의했다⁠. 2026년 1월 1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란드를 「⁠완전히 사들이는 거래⁠」가 될 때까지 나토 동맹 여덟 나라에 2월부터 10%⁠, 6월까지 25% 관세를 매기겠다고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관세 위협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10월 27일에는 유럽투자은행이 6월 에어버스에 약속한 30억 유로 대출을 두고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가 대서양 항공 교역에 큰 불확실성을 불어넣는다고 했다⁠. 한국은 2025년 미국과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양해각서를 맺었다⁠. 2⁠,000억 달러는 투자⁠, 1⁠,500억 달러는 조선 협력이다⁠. 2026년 2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상호관세를 위법·무효로 판단하자 미국은 강제노동 관련 301조 조사로 최혜국 관세를 합쳐 12⁠.5%쯤을 매기고 있다⁠. 첫 사업으로 텍사스 가스복합화력발전소가 정해졌고⁠, 미국 안 대형 원전 8기 건설도 추진한다⁠.

세 나라를 한 줄에 놓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유럽은 러시아를 막으려 중국과 부딪히고⁠, 중국을 막으려 미국과 묶이고⁠, 미국 관세에는 하나로 맞서려 한다⁠. 한국은 미국에는 투자와 조선으로⁠, 중국에는 정상 방문으로⁠, 북러에는 동맹의 억지력으로 따로따로 답해 왔다⁠. 한쪽을 고르지 않고 세 나라와 각각 거래한 것이다⁠. 남은 위험도 있다⁠. 미국은 11월 3일 중간선거를 치르고⁠, 301조의 과잉생산 조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세 나라 가운데 하나만 틀어져도 수출로 버틴 한국의 계산은 흔들린다⁠.

총값을 대는 방법도 다르다⁠. 독일 연방하원은 2025년 3월 헌법의 부채 제동 장치를 고쳐 국내총생산의 1%를 넘는 국방비는 빚 한도에서 빼고⁠, 기반 시설에 5⁠,000억 유로 기금을 따로 두었다⁠. 총을 빚으로 사도 되게 길을 낸 것이다⁠. 한국의 2027년 국방예산 73조 3천억 원은 8⁠.2% 늘었지만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0⁠.1%에 머문다⁠. 늘어난 국방비 대부분이 반도체가 늘린 세수 안에서 나왔다⁠. 독일은 빚의 문을 열어 총을 사고⁠, 한국은 곳간에서 꺼내 총을 산다⁠. 베를린 행렬의 한 대학생은 판지에 이렇게 적었다⁠. 「⁠탱크는 빚으로⁠, 학교는 긴축으로⁠?⁠」

독일이 오래 가진 장점은 대학과 노동시간이다⁠. 독일 국공립대는 대부분 등록금이 없고 학기마다 교통권이 딸린 분담금만 낸다⁠. 바덴뷔르템베르크처럼 유럽연합 밖 학생에게 한 학기 1⁠,500유로를 받는 주도 있다⁠. 한국 4년제 대학 평균 등록금은 727만 300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집계로 한국 사람은 2025년 한 해 평균 1⁠,833시간 일해 회원국 평균 1⁠,736시간보다 길었고⁠, 독일보다 501시간 더 일했다⁠. 501시간이면 하루 여덟 시간씩 62일이다⁠. 유학생이 계산기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독일 사람은 한국 사람보다 1년에 두 달 덜 일하고⁠, 저는 그 두 달 동안 독일어 문법을 외워요⁠.⁠”

공장 안의 장점도 있다⁠. 독일은 1976년 공동결정법으로 직원 2⁠,000명 넘는 회사의 감독 이사회 절반을 노동자 대표에게 맡겼다⁠. 노동자가 회사의 큰 결정에 같은 수의 표로 앉는다⁠. 한국은 2022년 8월 공공기관에 노동이사제를 들여⁠, 노동자 대표 한 명이 비상임 이사로 이사회에 들어간다⁠. 민간 기업에는 아직 없다⁠. 독일은 큰 회사 이사회의 절반을⁠, 한국은 공공기관 이사회의 한 자리를 노동자에게 내줬다⁠.

독일의 넉넉함이 기댄 곳도 적는다⁠.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앞서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지금의 나미비아에서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학살했다⁠. 2021년 5월 독일 정부는 이를 집단 학살로 인정하고 30년 동안 11억 유로를 개발 지원으로 내겠다고 했다⁠. 법적 배상이라는 말은 피했다⁠. 한국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일본에게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받았다⁠. 일본은 이 돈을 배상이 아닌 경제 협력이라 불렀다⁠.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와 식민지였던 나라 모두 과거를 돈으로 닫으려 할 때 같은 낱말을 피했다⁠.

전후 독일의 공장을 돌린 것은 동쪽의 가스였다⁠. 2021년 독일 가스 수입의 절반 넘게가 러시아에서 왔고⁠, 2022년 9월 발트해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이 폭발로 끊겼다⁠. 독일은 2023년 4월 마지막 원전 세 기를 껐다⁠. 한국은 2024년 발전량의 3분의 1 가까이를 원전에서 얻었다⁠. 독일은 싼 가스와 원전을 같은 시기에 잃었고⁠, 한국은 비싼 기름을 사 오면서도 원전을 그대로 돌렸다⁠.

저녁 7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 탑승구에서 체포 200명 넘게 소식을 들었다⁠. 박 차장의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제목 세 나라로 가자⁠.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입장에선 세 나라⁠, 한국 입장에선 네 나라요⁠. 북한이 있어요⁠.⁠」 「⁠그럼 부제에 넣어⁠.⁠」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방에는 에손 주유소의 영수증 두 장과 리스본의 카네이션 사진⁠, 프라하의 96 대 81이 적힌 수첩이 들어 있었다⁠. 내일 오후면 인천이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