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99자)

첫 만남

진짜 던전 방탈출 카페 · 류시안

토요일 아침⁠, 열쇠공 계산대 앞에 정장 차림의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목에 숏폼 플랫폼의 출입증을 걸었고⁠, 무릎 위에 얇은 서류 봉투를 올려 두었다⁠. 세찬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세찬은 도연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려다 도로 앉았다⁠.

“⁠사장님⁠, 이분은⁠.⁠”

“⁠제휴팀 담당자입니다⁠.⁠” 여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 뒷면에 플랫폼의 짧은 구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모두에게⁠」 “⁠사장님 가게 덕분에 저희 플랫폼 동시 시청 기록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감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여자는 감사 인사를 길게 하지 않았다⁠. 서류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계산대에 펼쳤다⁠. 「⁠실시간 독점 중계 계약서 — 실종자 첫 대면 장면⁠」 금액 칸의 숫자를 도연은 두 번 세었다⁠. 0이 일곱 개였다⁠.

“⁠첫 만남 장면만 저희 플랫폼에서 단독으로 내보내는 조건입니다⁠. 삼십 초 지연 송출⁠, 앞뒤로 광고 두 개⁠. 수익은 탁세찬 님 채널과 열쇠공이 반씩 가져가십니다⁠.⁠”

“⁠하담 씨 얼굴을요⁠?⁠”

“⁠구조되는 순간을요⁠. 전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자가 휴대전화를 보여 주었다⁠. 화면에 국가별 시청자 지도가 떠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붉은 점이 대륙마다 번져 있었다⁠. “⁠외국 시청자가 절반이 넘습니다⁠.⁠”

도연은 세찬을 보았다⁠. 세찬은 계약서의 서명란을 보고 있었다⁠. 서명란 하나에 이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탁세찬⁠.

“⁠회장님⁠, 사인했어요⁠?⁠”

“⁠어젯밤에⁠. 사장님 칸은 비워 뒀어요⁠.⁠” 세찬이 손가락으로 계약서 모서리를 눌렀다⁠. “⁠사장님⁠, 이 돈이면 사장님 대출 다 갚아요⁠. 건물주님 차 새로 사 드려도 남아요⁠. 타코집 영업정지 걸리면 그것도 막아 드리고요⁠.⁠”

“⁠하담 씨가 원하는지 물어봤어요⁠?⁠”

“⁠지하 팔 층에 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물어봐요⁠?⁠”

“⁠그러니까 못 하는 거예요⁠.⁠” 도연은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여자 앞으로 밀었다⁠. “⁠죄송해요⁠. 저는 사인 안 해요⁠. 하담 씨가 처음 사람을 만나는 얼굴은 하담 씨 거예요⁠.⁠”

여자는 서류를 받아 봉투에 넣었다⁠.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탁세찬 님 서명은 유효합니다⁠. 계약은 탁세찬 님 채널 단독으로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일어나며 세찬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밤 아홉 시 송출 준비해 두겠습니다⁠.⁠”

여자가 계단을 올라간 뒤에도 세찬은 오래 앉아 있었다⁠. 재이가 「⁠지하 서고⁠」 앞에서 큐브를 돌리며 둘을 보고 있었다⁠. 큐브가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열한 시⁠, 골목 입구에 커다란 트럭 한 대가 후진해 들어왔다⁠. 회색 통이 빙글빙글 도는 트럭이었고⁠, 뒤에 긴 팔이 접혀 있었다⁠. 콘크리트 펌프차였다⁠. 트럭은 선큰 마당 바로 위 길가에 멈췄다⁠. 기사가 내려서 바퀴에 고임목을 받치고 담배를 꺼냈다가⁠, 휴대전화 백 대가 자기를 찍는 것을 보고 도로 넣었다⁠.

차장이 펌프차 옆에 서서 도연을 내려다보았다⁠. 양복 주머니에서 배지 하나를 꺼내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경탁의 배지였다⁠.

“⁠내일 정오야⁠, 금 사장⁠. 미리 와 있어야 시간 맞춰 부어⁠.⁠”

“⁠아직 스물다섯 시간 남았어요⁠.⁠”

“⁠스물다섯 시간 동안 두 층 더 열 수 있지⁠. 하루 한 층이라고 했는데⁠, 금 사장은 어젯밤 자정 전에 한 층⁠, 오늘 또 한 층 가겠지⁠.⁠” 차장이 배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숫자를 세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금 사장이 연 층도 세고 있어⁠.⁠”

골목 끝 전광판에서 뉴스가 돌았다⁠. 「⁠홍대 지하 영상⁠, 시청 국가 120곳 넘어 … 해외 지하 정전 지역 조사단 방한 예정⁠」 차장이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숫자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

일곱 번째 층은 길쭉한 방이었다⁠. 오른편 벽이 붉은 벽돌이었고⁠, 왼편 벽은 던전의 돌이었다⁠. 바닥에는 회색 네모난 돌이 고르게 깔려 있었다⁠. 보도블록처럼 보였다⁠. 방 끝의 문에 둥근 돌판이 박혀 있었다⁠. 돌판 둘레에 눈금 열둘이 새겨져 있었고⁠, 가운데에 돌 바늘 두 개가 축에 걸쳐 늘어져 있었다⁠. 바늘 없는 시계였다⁠. 시계 한가운데에 소용돌이가 있었다⁠.

경탁이 바닥을 밟고 한 걸음 내디뎠다⁠. 발밑의 보도블록이 움직였다⁠.

“⁠어⁠.⁠”

보도블록에 다리가 여섯 개 돋았다⁠. 돌게였다⁠. 등껍질이 보도블록 무늬였고⁠, 집게가 블록 모서리처럼 각져 있었다⁠. 경탁을 태운 돌게가 옆으로 세 걸음 걸었다⁠. 경탁은 돌게 등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팔을 벌렸다⁠.

“⁠여러분⁠, 조사관님이 지금 돌게를 타고 계십니다⁠.⁠” 세찬이 가슴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목소리에 오랜만에 힘이 붙었다⁠. 댓글이 폭발했다⁠. 「⁠돌게 라이더⁠」 「⁠아저씨 균형감 무엇⁠」 「⁠저거 우리 동네 인도에도 있음⁠?⁠」

“⁠전 조사관입니다⁠.⁠” 경탁이 돌게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우리 동네 인도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보시면 신고하십시오⁠.⁠”

바닥의 보도블록 가운데 절반이 돌게였다⁠. 손전등을 비추면 돌게는 굳었다⁠. 빛을 거두면 느릿느릿 움직였다⁠. 네 사람은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추며 문까지 걸었다⁠. 굳은 돌게를 피해 진짜 블록만 밟았다⁠. 재이가 블록을 밟을 때마다 큐브를 한 칸씩 돌렸다⁠. 밟은 블록을 세는 손이었다⁠.

벽돌 틈으로 흰빛이 새어 들어왔다⁠. 열차 소리가 커졌다⁠. 빛이 벽돌 틈을 지나며 굵은 줄 몇 개가 되어 방을 가로질렀다⁠. 빛줄기 셋이 시계 돌판 위를 쓸고 지나갔다⁠. 빛이 지나가는 동안 바닥의 돌게가 전부 굳었다⁠. 열차가 멀어지자 빛줄기가 사라지고 돌게들이 다시 움직였다⁠.

“⁠봤어요⁠?⁠” 도연이 물었다⁠.

“⁠빛줄기가 시계 위에서 멈추는 데가 있었어요⁠.⁠” 재이가 말했다⁠. “⁠아주 잠깐요⁠. 나머지는 쓸고 지나갔는데 둘은 멈췄어요⁠.⁠”

“⁠몇 시랑 몇 시요⁠?⁠”

“⁠모르겠어요⁠. 너무 빨라요⁠.⁠”

도연은 시계 앞에 쪼그려 앉아 벽돌 벽을 보았다⁠. 벽돌 틈은 고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비스듬히 갈라진 틈이었고⁠, 둘만 곧게 뚫린 구멍이었다⁠. 구멍 둘의 높이가 달랐다⁠. 열차 불빛이 구멍을 지날 때 빛이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날아가 시계의 한 눈금에 오래 머물렀다⁠.

“⁠회장님⁠, 다음 열차 오면 시계를 찍어 줄래요⁠? 느리게 볼 수 있게요⁠.⁠”

“⁠어⁠, 고속 촬영⁠. 그거 돼요⁠.⁠”

다음 열차가 왔다⁠. 세찬이 카메라를 시계에 들이댔다⁠. 빛줄기가 쓸고 지나갔다⁠. 세찬이 화면을 되감아 한 장씩 넘겼다⁠. 빛줄기 둘이 머무는 눈금이 보였다⁠. 셋⁠, 그리고 여덟⁠.

“⁠짧은 바늘은 낮은 구멍이에요⁠. 낮은 구멍 빛이 셋에 머물러요⁠. 긴 바늘은 여덟⁠.⁠” 도연이 돌 바늘을 잡았다⁠. 무거웠다⁠. 경탁이 다른 바늘을 잡아 주었다⁠. 짧은 바늘을 셋에⁠, 긴 바늘을 여덟에⁠. 바늘이 눈금에 닿자 소용돌이가 푸르게 물들었다⁠.

시계 돌판이 안으로 꺼지며 문이 열렸다⁠.

바닥 전체가 움직였다⁠. 돌게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굳어 있던 것까지 다 일어났다⁠. 진짜 블록인 줄 알고 밟았던 것들 가운데 몇이 다리를 내밀었다⁠. 열린 문 아래에서 돌게가 더 올라왔다⁠. 돌게들은 네 사람을 지나 벽돌 벽으로 몰려갔다⁠. 집게로 벽돌 틈을 긁었다⁠. 사람이 쌓은 벽돌이 돌게의 집게 아래에서 부서졌다⁠. 틈이 구멍이 되고⁠, 구멍이 문짝만큼 커졌다⁠. 돌게 떼가 선로로 쏟아졌다⁠.

벽 너머에서 다음 열차의 경적이 길게 울렸다⁠. 이어서 쇠가 쇠를 긁는 비명이 났다⁠. 비상 제동이었다⁠. 열차가 멈추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고⁠, 멈춘 뒤에는 열차 안의 안내 방송이 벽 너머로 작게 들렸다⁠. 선로에 이물질이 있어 잠시 정차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부서진 벽 너머로 멈춘 열차의 불빛이 보였다⁠. 창문마다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선로를 비췄다⁠. 선로 위에서 보도블록들이 기어 다녔다⁠.

*

“⁠사장님⁠, 나 오늘 밤 아홉 시에 송출해야 돼요⁠.⁠”

열린 문 앞에서 세찬이 말했다⁠. 가슴 카메라의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도연은 문 아래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짧은 계단이었다⁠. 계단 끝에서 희미한 흰빛이 흔들렸다⁠. 손전등이 아니었다⁠. 머리에 쓰는 전등의 빛이었다⁠.

“⁠아래에 하담 씨가 있어요⁠. 회장님⁠, 카메라 꺼 주세요⁠.⁠”

“⁠계약했어요⁠.⁠”

“⁠꺼 주세요⁠.⁠”

“⁠사장님은 돈 안 받는다고 하면 끝이지만 나는 아니야⁠.⁠” 세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방송 말투가 아니었다⁠. “⁠나 회사 그만두고 빚이 사천이야⁠. 채널 하나 보고 버텼어⁠. 어제 십만 명이 구독 끊었어⁠. 이거 안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다섯 해 전에 형 두고 도망친 놈으로 끝나⁠.⁠”

“⁠카메라 켜고 하담 씨 앞에 가면 그걸로 끝이에요⁠.⁠”

세찬이 입을 다물었다⁠. 경탁이 둘 사이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재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재이가 세찬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카메라 주세요⁠, 회장님⁠.⁠”

“⁠재이야⁠.⁠”

“⁠회장님이 영상에서 그랬어요⁠. 같이 들어간 사람을 믿는 게임이라고⁠.⁠” 재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이었다⁠. “⁠저는 아직 회장님을 믿어요⁠. 그러니까 카메라 주세요⁠.⁠”

세찬은 재이의 손을 오래 보았다⁠. 손을 내밀지도⁠, 카메라를 떼지도 않았다⁠. 대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형한테 먼저 갈 거야⁠.⁠” 세찬이 말했다⁠. “⁠오 층 지도 봤잖아⁠. 연남동에 안 덮인 문이 하나 있어⁠. 거기서 내려가면 형 있는 데로 바로 가⁠. 을지로 선이랑 만나는 아홉 번째 층으로⁠. 하담이보다 내가 먼저 가서 형한테 미안하다고 할 거야⁠. 그건 카메라에 담을 거야⁠. 형 얼굴은 내 거니까⁠.⁠”

“⁠회장님⁠, 하운 씨는⁠.⁠”

도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섯 해였다⁠. 세찬도 알았다⁠. 세찬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빨간 불이 계단 꺾인 데서 사라졌다⁠. 재이가 내민 손을 내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경탁이 재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 거두었다⁠.

“⁠재이 씨⁠.⁠”

“⁠괜찮아요⁠.⁠” 재이가 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큐브가 주머니 안에서 덜그럭거렸다⁠. “⁠내려가요⁠. 하담 씨 기다려요⁠.⁠”

*

팔 층은 둥근 방이었다⁠. 천장이 낮았고 푸른 돌이 하나뿐이었다⁠. 맞은편 벽에 문이 있었고⁠, 문 양옆에 돌로 된 손바닥 판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판과 판 사이는 어른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만큼 멀었다⁠. 문 한가운데의 소용돌이는 다른 문보다 두 배로 컸다⁠.

문 앞 바닥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등산 가방에 등을 기댄 채였다⁠. 머리에 쓴 전등이 바닥을 비췄다⁠. 바닥에 빨간 봉지가 열 장 넘게 흩어져 있었다⁠. 노란 곰만 골라 먹고 남긴 빨간 곰⁠, 초록 곰이 봉지마다 들어 있었다⁠. 사람은 손에 쥔 봉지에서 노란 곰을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씹던 입이 멈췄다⁠. 머리의 전등이 들렸다⁠. 빛이 바닥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도연의 노란 앞치마로 올라왔다⁠. 도연은 눈이 부셔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하담의 얼굴이 보였다⁠. 열흘 전보다 볼이 꺼져 있었고⁠, 입술이 하얗게 텄다⁠. 눈은 그대로였다⁠. 화면 속에서 첫 자물쇠를 칠 분 만에 열던 눈이었다⁠.

재이가 계단 끝에서 멈췄다⁠. 경탁은 계단 중간에서 더 내려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 반쯤 몸을 숨긴 채였다⁠. 도연은 손에 쥔 빈 젤리 봉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일곱 장이었다⁠. 계단마다⁠, 방마다 하나씩 주워 온 봉지들이었다⁠. 봉지들은 길을 잃지 말라고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다⁠. 따라오라고 떨어뜨린 것이었다⁠.

하담이 젤리를 마저 씹어 삼켰다⁠.

“⁠왜 이제 와요⁠.⁠” 하담이 말했다⁠. 쉰 목소리였다⁠. “⁠둘이어야 열려요⁠.⁠”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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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하람2026.11.01· 9화

    플랫폼 제휴팀 담당자가 온 순간 불안했어요. 던전이 들키면 어떻게 돼요?

    • 류시안작가2026.11.01

      도연 씨가 제일 걱정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서류 봉투 안에 든 게 다음 화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