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68자)

둘이어야 열린다

진짜 던전 방탈출 카페 · 류시안

하담은 물병을 두 손으로 받았다⁠. 뚜껑을 따는 손가락에 힘이 없어 재이가 대신 따 주었다⁠. 하담은 물을 반쯤 마시고 나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의 전등이 숨에 맞춰 위아래로 흔들렸다⁠.

“⁠고마워요⁠. 위에서 떨어지는 물만 먹었어요⁠. 쇠 맛이 났어요⁠.⁠” 하담이 물병을 무릎에 세웠다⁠. “⁠랭킹 칠 위 님이죠⁠? 큐브⁠.⁠”

“⁠네⁠. 재이예요⁠.⁠”

“⁠같이 방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하담이 문 양옆의 손바닥 판을 턱으로 가리켰다⁠. “⁠지금 들어가요⁠. 둘이어야 열려요⁠.⁠”

도연은 하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젤리 봉지 일곱 장을 꺼내 하담의 무릎 앞에 늘어놓았다⁠. 계단에서⁠, 기둥 밑에서⁠, 타일 벽 아래에서⁠, 물 위에서 주운 봉지들이었다⁠.

“⁠하담 씨⁠, 올라가요⁠. 열흘이에요⁠. 위에서 다들 기다려요⁠.⁠”

“⁠안 올라가요⁠.⁠”

“⁠하담 씨⁠.⁠”

“⁠오빠가 아홉 번째 층에 있어요⁠.⁠” 하담이 빨간 봉지 하나를 집어 손가락으로 구겼다⁠. “⁠오 층 지도 보셨죠⁠. 을지로 선이 아홉 번째 층으로 와요⁠. 오빠는 을지로로 들어갔어요⁠. 이 문만 열면 오빠 있는 데예요⁠.⁠”

“⁠다섯 해예요⁠.⁠”

“⁠알아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하담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도연은 하담의 얼굴을 보았다⁠. 화를 내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 연습한 말을 꺼내는 얼굴이었다⁠.

“⁠제가 사장님 가게를 골랐어요⁠.⁠” 하담이 구긴 봉지를 폈다⁠. “⁠철거왕 아저씨 창고에서 그 문을 봤을 때 바로 알았어요⁠. 오빠 전단 붙이면서 미로상회 사진을 백 번 봤거든요⁠. 근데 문만 있으면 안 돼요⁠. 문에 장치가 붙어 있어야 하고⁠, 누가 풀어야 해요⁠. 그리고 제가 못 돌아오면 따라올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를요⁠?⁠”

“⁠사장님 가게 소개 글이요⁠. 「⁠열쇠공은 마지막 손님이 나올 때까지 불을 끄지 않습니다⁠.⁠」⁠” 하담이 도연을 보았다⁠. “⁠그 문장 보고 골랐어요⁠. 따라올 사람이라서요⁠.⁠”

도연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개업 전날 밤 세 번 고쳐 쓴 문장이었다⁠. 별점을 모으려고 쓴 문장이었다⁠.

“⁠두 분 이상 입장⁠. 그 규칙 깨게 하려고 베타 테스트라고 했어요⁠?⁠”

“⁠네⁠.⁠”

“⁠별점 다섯 개도요⁠?⁠”

“⁠네⁠.⁠”

“⁠저를 이용하셨네요⁠.⁠”

“⁠네⁠.⁠” 하담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노란 곰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미안해요⁠. 근데 사장님이 왔잖아요⁠. 문장대로요⁠.⁠”

도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화가 났다⁠. 화가 난 자리에 다른 것도 같이 있었다⁠. 하담이 고른 것은 별점이 아니라 문장이었다⁠. 도연이 쓴 문장을 하담은 도연보다 먼저 믿었다⁠.

*

계단 중간의 어둠 속에서 경탁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하담의 머리 전등이 계단으로 돌아갔다⁠. 빛이 경탁의 무릎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얼굴로 올라갔다⁠. 경탁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누구예요⁠?⁠”

“⁠여경탁입니다⁠.⁠”

하담의 손에서 물병이 기울었다⁠. 재이가 물병을 잡았다⁠.

“⁠목소리 알아요⁠.⁠” 하담이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이 떨렸다⁠. 등산 가방을 짚고 겨우 일어났다⁠. “⁠칠월마다 들었어요⁠. 「⁠확인해 드릴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다섯 번요⁠. 다섯 해 동안 다섯 번⁠. 똑같은 목소리로⁠.⁠”

“⁠네⁠.⁠”

“⁠관리국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이 문도 덮으러 왔어요⁠?⁠”

“⁠이제 관리국 사람이 아닙니다⁠.⁠” 경탁이 계단을 내려왔다⁠. 맨 아래 칸에서 멈췄다⁠. “⁠어제 배지를 반납했습니다⁠. 하운 씨를 두고 을지로 문을 덮은 사람이 저라고 방송에서 말했습니다⁠.⁠”

하담은 바닥의 젤리 봉지 하나를 집었다⁠. 노란 곰을 다 골라 먹고 빨간 곰과 초록 곰만 남은 봉지였다⁠. 하담이 봉지를 경탁에게 던졌다⁠. 힘이 없어 봉지는 경탁의 가슴에 툭 맞고 떨어졌다⁠. 터진 봉지에서 빨간 곰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하담이 다른 봉지를 집어 또 던졌다⁠. 이번에는 경탁의 어깨에 맞았다⁠. 세 번째 봉지를 집다가 하담이 손을 멈췄다⁠.

“⁠오빠 살아 있어요⁠?⁠”

경탁은 바닥의 빨간 곰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보았다⁠.

“⁠모릅니다⁠.⁠”

“⁠다섯 해 동안 모른다고만 했잖아요⁠.⁠”

“⁠이번 모른다는 진짜 모르는 겁니다⁠.⁠” 경탁이 고개를 들었다⁠. “⁠다섯 해 동안은 알고 싶지 않아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알고 싶은데 모릅니다⁠.⁠”

하담이 세 번째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던지지 않았다⁠. 하담은 다시 주저앉아 등산 가방에 기댔다⁠. 경탁이 가방에서 곰젤리 봉지를 꺼내 하담 앞에 놓았다⁠. 하담이 봉지를 보았다⁠. 섞인 맛이었다⁠. 노란 곰이 몇 개 없었다⁠.

“⁠노란 거 다섯 마리밖에 없어요⁠.⁠”

“⁠제가 다른 건 먹었습니다⁠. 노란 건 남겼습니다⁠.⁠”

하담이 봉지를 뜯었다⁠. 노란 곰 다섯 마리를 손바닥에 모았다⁠. 한 마리를 먹고⁠, 나머지는 손바닥에 쥐고 있었다⁠.

도연은 문 앞으로 갔다⁠. 손바닥 판 둘을 차례로 보았다⁠. 왼편 판에 새겨진 손은 작았고⁠, 오른편 판의 손은 컸다⁠. 두 판 사이는 열 걸음이 넘었다⁠. 판 둘레에 가는 홈이 파여 있었고⁠, 홈 안이 비어 있었다⁠. 오래 누르고 있으면 홈에 빛이 찰 것 같은 모양이었다⁠.

“⁠혼자 눌러 봤어요⁠?⁠”

“⁠백 번요⁠. 한쪽 누르고 뛰어가면 손 떼는 순간 꺼져요⁠. 가방으로 눌러도 안 돼요⁠. 돌로 눌러도요⁠. 사람 손이어야 해요⁠.⁠” 하담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에 판의 무늬가 붉게 찍혀 있었다⁠. “⁠둘이 동시에⁠, 한참⁠.⁠”

경탁이 가방 옆구리의 전선 뭉치를 풀었다⁠. 유선 전화 상자를 계단에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위층 칠 층의 상자까지 줄이 이어져 있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 끊겼고⁠, 차장의 목소리가 나왔다⁠.

“⁠생존자 확인했습니다⁠. 채하담 씨입니다⁠. 탈수가 있고 걸을 수 있습니다⁠.⁠”

「⁠잘했어⁠. 데리고 올라와⁠. 내일 정오 봉인은 그대로야⁠.⁠」

경탁이 수화기를 하담에게 내밀었다⁠. 하담은 받지 않았다⁠. 도연이 대신 받았다⁠.

“⁠차장님⁠, 하담 씨가 안 올라가겠대요⁠.⁠”

「⁠그럼 금 사장이 올라와⁠. 금 사장은 확인된 사람이잖아⁠. 둘 다 안 올라오면 내일 정오에 둘 다 확인된 사람으로 남는 거고⁠.⁠」 차장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금 사장⁠, 나는 사람 둘을 안에 두고 덮은 적은 없어⁠. 처음 해 보는 숫자는 싫어⁠.⁠」

전화가 끊겼다⁠. 도연은 수화기를 쥔 채 하담을 보았다⁠. 하담은 손바닥의 노란 곰 넷을 보고 있었다⁠.

재이의 휴대전화가 주머니에서 짧게 떨었다⁠. 지하 여덟 층에서 신호가 잡힐 리 없었다⁠. 재이가 화면을 보았다⁠. 「⁠신호 없음⁠」 위에 위층에서 겨우 받은 문자 하나가 늦게 떠 있었다⁠. 엄마였다⁠. 「⁠재이야 숲길에 방송 차 왔다⁠. 너희 회장님 아니니⁠?⁠」

재이가 일어났다⁠.

“⁠올라갈게요⁠. 회장님이 연남동에 있어요⁠. 엄마 가게 앞이에요⁠.⁠”

재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칠 층의 부서진 벽돌 벽 너머에서 멈춘 열차의 비상등이 깜빡였다⁠. 육 층의 호수에 재이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쳤다가 사라졌다⁠. 오 층 지도 위를 뛰어 건너면서 재이는 연남동 표시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크게 뻗었다⁠. 삼 층 계단에서 나방 한 무리가 손전등에 달라붙었다⁠. 재이는 손전등을 끄고 어둠 속에서 칸을 세며 올랐다⁠. 경탁이 세던 숫자를 재이도 외우고 있었다⁠.

*

밤 아홉 시 십 분 전⁠, 경의선숲길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철길을 걷어 낸 자리에 깔린 산책길을 따라 조명이 줄지어 켜져 있었고⁠, 조명마다 흰 나방이 두세 마리씩 붙어 있었다⁠. 산책길 한가운데 잔디밭 옆에 맨홀 하나가 있었다⁠. 맨홀 둘레에 이동식 조명 넷이 세워져 있었다⁠. 후원사 직원들이 조명 사이를 바쁘게 오갔고⁠, 맨홀 바로 옆에 세찬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재이는 숨을 몰아쉬며 조명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편의점 조끼가 땀에 젖어 등에 붙어 있었다⁠. 숲길 건너편⁠, 두 블록 떨어진 골목 모퉁이에 엄마의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24시 연남 편의점⁠」 유리문 안에서 엄마가 계산대에 기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야간 근무를 재이에게 맡기고 낮에만 가게를 지켰다⁠. 오늘은 재이가 사흘째 야간을 비워서 엄마가 밤까지 서 있었다⁠. 계산대 옆에 재이가 쓰던 접이식 의자가 접힌 채 기대어 있었다⁠. 엄마가 유리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재이는 흔들어 주지 못했다⁠.

맨홀 뚜껑에는 소용돌이가 새겨져 있었다⁠. 하수구 뚜껑의 격자무늬 사이로 소용돌이가 겹쳐 있었고⁠, 뚜껑 둘레의 쇠 테두리에 숫자 눈금이 새겨진 고리가 끼워져 있었다⁠. 고리를 돌리는 장치였다⁠.

“⁠회장님⁠.⁠”

세찬이 고개를 들었다⁠. 가슴 카메라의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이동식 조명 하나에 매달린 큰 화면에 생중계가 떠 있었다⁠. 「⁠동시 시청 1⁠,204⁠,330⁠」

“⁠재이야⁠, 왜 왔어⁠.⁠”

“⁠여기서 열면 엄마 가게 앞이에요⁠.⁠”

“⁠금방 내려갔다 올게⁠. 형 있는 데까지만⁠.⁠”

“⁠이 층에서 쥐 삼백 마리 나왔어요⁠. 칠 층에서 돌게가 지하철을 세웠어요⁠. 여기는 몇 층으로 바로 가는 문인지도 몰라요⁠.⁠” 재이가 맨홀 뚜껑 위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뚜껑이 차가웠다⁠. “⁠안 비켜요⁠.⁠”

후원사 담당자가 조명 뒤에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송출 오 분 전입니다⁠.⁠」 담당자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재이야⁠, 비켜 줘⁠.⁠”

“⁠회장님이 형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싶은 거 알아요⁠. 근데 형한테 미안하다고 하려고 엄마 가게 앞에 문 여는 거⁠, 그건 다섯 해 전이랑 똑같아요⁠. 회장님만 생각하는 거예요⁠.⁠”

세찬의 얼굴이 굳었다⁠. 화면 속 댓글이 빠르게 올라갔다⁠. 「⁠재이 님 말 맞음⁠」 「⁠회장님 열어⁠」 「⁠둘 다 이해됨⁠」 「⁠i can‘⁠t watch⁠」

“⁠재이야⁠. 나는 다섯 해 전에 계단에서 도망쳤어⁠. 오늘은 안 도망칠 거야⁠.⁠” 세찬이 맨홀 테두리의 고리에 손을 얹었다⁠. “⁠너 거기 앉아 있어도 돼⁠. 고리는 테두리에 있어⁠.⁠”

세찬이 고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재이는 뚜껑 위에서 세찬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리 눈금 위에 작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쥐⁠, 나방⁠, 돌게⁠, 물결⁠. 세찬의 손가락이 그림을 하나씩 짚었다⁠. 쥐가 처음⁠, 나방이 다음⁠. 열쇠공 아래에서 올라온 차례였다⁠. 세찬은 생중계를 다 보았다⁠. 다 보았으니까 알았다⁠.

“⁠회장님⁠, 하지 마요⁠.⁠”

“⁠물결⁠.⁠” 세찬이 고리를 돌렸다⁠. “⁠돌게⁠.⁠”

고리가 딸깍 맞물렸다⁠. 맨홀 뚜껑 밑에서 무언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뚜껑이 재이를 태운 채 한 뼘 들렸다⁠. 재이가 균형을 잃고 잔디밭으로 굴렀다⁠. 뚜껑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맨홀 아래에서 푸른빛이 솟았다⁠. 사다리 대신 돌계단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에서 보도블록들이 올라왔다⁠.

돌게 떼가 맨홀에서 넘쳐 숲길로 흩어졌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돌게들은 조명을 피해 어두운 데로 달렸다⁠. 숲길 건너 골목의 어둠으로⁠, 골목 모퉁이의 편의점으로⁠. 편의점 유리문에 돌게 하나가 집게를 박았다⁠. 유리에 하얀 금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계산대 뒤에서 엄마가 뒷걸음질했다⁠.

“⁠엄마⁠!⁠”

재이가 잔디밭에서 일어나 골목으로 뛰었다⁠. 등 뒤에서 세찬이 맨홀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가슴의 빨간 불이 깜빡였다⁠. 후원사 담당자가 화면 앞에서 손을 모았다⁠. 「⁠송출 시작합니다⁠.⁠」 화면 귀퉁이의 숫자가 이백만을 넘었다⁠. 세찬은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편의점으로 달려가는 재이의 등을 보고 있었다⁠. 맨홀 아래에서는 돌게가 계속 올라왔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