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57자)

배지

진짜 던전 방탈출 카페 · 류시안

금요일 아침⁠, 계산대 텔레비전에는 하루 종일 같은 얼굴이 나왔다⁠. 푸른 돌빛 아래에서 점퍼 가슴의 배지를 손바닥으로 덮는 경탁의 얼굴이었다⁠. 자막이 바뀌어 가며 붙었다⁠. 「⁠관리국⁠, 실종자 두고 봉인 … 조사관 생중계 고백⁠」 「⁠2022년 을지로 공사장 부상 인부 “⁠그날 다리를 잃었다⁠”⁠」 「⁠정부 “⁠사실관계 확인 중⁠”⁠」

도연은 텔레비전 소리를 껐다⁠. 선큰 마당 난간에는 휴대전화가 다시 백 대쯤 매달려 있었다⁠. 사흘 전과 달리 카메라 사이사이에 방송사 마이크가 섞여 있었고⁠, 「⁠관리국 해명 요구⁠」라고 적은 종이를 든 사람도 보였다⁠.

열 시⁠, 골목 입구에 관리국 천막이 쳐졌다⁠. 흰 천막 아래 접이식 탁자 하나와 마이크 하나⁠. 차장이 탁자 뒤에 앉았고⁠, 경탁이 차장 옆에 서 있었다⁠. 경탁은 남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 은색 배지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차장이 마이크를 당겼다⁠.

“⁠어제 방송에 나온 내용은 사실입니다⁠. 2022년 7월⁠, 관리국은 을지로3가의 문을 실종자 한 명이 안에 있는 상태로 봉인했습니다⁠. 봉인 결정은 제가 내렸고⁠, 집행은 여경탁 조사관이 했습니다⁠.⁠” 차장은 숨을 고르지 않았다⁠. 쓴 원고를 읽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 조사관은 오늘부로 직무에서 물러납니다⁠. 저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 골목의 문을 닫는 일이 남아 있어서입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졌다⁠. 차장이 경탁을 보았다⁠. 경탁이 점퍼 가슴에서 배지를 뗐다⁠. 핀이 천에서 빠지는 소리가 마이크에 작게 잡혔다⁠. 경탁은 배지를 차장의 손바닥에 올렸다⁠. 차장의 손바닥이 배지를 쥐지 않고 펼친 채 잠깐 머물렀다가 닫혔다⁠.

“⁠열쇠공의 문은 모레⁠, 일요일 정오에 봉인합니다⁠.⁠” 차장이 배지를 쥔 손을 탁자 위에 얹었다⁠. “⁠지금까지 다섯 층이 열렸고⁠, 여섯 번째 층이 열려 있습니다⁠. 쥐 삼백 마리⁠, 나방 수천 마리⁠, 주차장 침수 한 건⁠, 전선 피해 서른한 곳⁠, 꺼진 조명 이백열 개⁠. 다섯 층에서 이만큼 올라왔습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층에서는 무엇이 올라올지 모릅니다⁠. 관리국이 아는 것은 하나입니다⁠. 지난 여덟 해⁠, 덮은 문 위에서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실종자는요⁠?⁠”

기자 하나가 소리쳤다⁠. 차장이 소리친 기자를 보았다⁠.

“⁠모레 정오까지 구조 시도는 허용합니다⁠. 하루 한 층입니다⁠. 생존자가 확인되면 즉시 데리고 나옵니다⁠.⁠”

*

천막이 걷히기 전에 도연은 탁자 앞으로 갔다⁠. 기자들이 길을 터 주었다⁠. 카메라가 도연의 노란 앞치마를 따라왔다⁠.

“⁠차장님⁠, 하담 씨는 신호를 보냈어요⁠. 살아 있어요⁠.⁠”

“⁠알아⁠. 혼자 못 가요⁠, 내려와요⁠.⁠” 차장이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재이가 한글 신호를 읽던 생중계 장면이 멈춰 있었다⁠. “⁠구조 요청이 아니야⁠. 금 사장도 들었잖아⁠. 그 사람은 올라올 생각이 없어⁠. 더 내려가고 싶어 해⁠. 금 사장이 여섯 층⁠, 일곱 층을 더 열어 주길 바라는 거야⁠.⁠”

“⁠그래도 사람이에요⁠.⁠”

“⁠이 골목에도 사람이 있어⁠.⁠” 차장이 천막 밖을 턱으로 가리켰다⁠. 타코집 앞⁠, 네일숍 계단⁠, 보컬 학원 창문⁠. “⁠저 사람들은 신호를 안 보냈지⁠. 보낼 일이 없게 하는 게 내 일이고⁠.⁠” 차장이 일어났다⁠. 배지를 쥔 손을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금 사장⁠, 나는 오늘 실종자를 두고 문을 닫은 사람이라고 전국에 말했어⁠. 모레 한 번 더 말할 수도 있어⁠. 숫자가 그렇게 나오면⁠.⁠”

“⁠숫자 말고 하담 씨 이름으로 말해 주세요⁠.⁠”

“⁠채하담⁠. 스물다섯⁠. 랭킹 1위⁠.⁠” 차장이 웃지 않았다⁠. “⁠나도 이름은 알아⁠. 이름을 안다고 문이 안전해지지는 않아⁠.⁠”

*

점심때 타코집 사장이 열쇠공 계단을 내려왔다⁠. 솜브레로는 쓰지 않았다⁠. 한 손에 타코 접시를⁠, 다른 손에 서류판을 들고 있었다⁠. 서류판에는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열쇠공 지하 문 봉인 찬성 — 골목 상인회 서명⁠」 서명이 스무 줄쯤 차 있었다⁠. 네일숍 원장⁠, 보컬 학원 원장⁠, 건물주⁠. 마지막 줄은 비어 있었다⁠.

“⁠사장님⁠, 이거예⁠.⁠” 사장이 서류판을 계산대에 내려놓고 타코 접시를 서류판 위에 얹었다⁠. 서명지가 타코에 가려졌다⁠. “⁠보건소에서 왔다 갔어예⁠. 쥐 한 번만 더 나오면 영업정지라꼬⁠. 내는 이 가게 하나로 아들 대학 보내야 해예⁠.⁠”

“⁠알아요⁠, 사장님⁠.⁠”

“⁠내는 서명 안 할라 캤어예⁠. 근데 원장님들이 다 했어예⁠. 건물주 어르신도 하고⁠. 내만 안 하면 내가 사장님 편이 되는 기라⁠.⁠” 사장이 서류판을 타코 밑에서 빼냈다가 도로 넣었다⁠. “⁠사장님 편 하면 안 되는 거는 아니라예⁠. 근데 내가 사장님 편 하면 우리 가게가 사장님 가게처럼 될까 봐⁠.⁠”

사장은 볼펜을 꺼내 마지막 줄에 이름을 썼다⁠. 쓰는 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 쓰고 나서 서류판을 겨드랑이에 끼고 타코 접시는 계산대에 남겼다⁠.

“⁠살사 넣었어예⁠. 빨간 거⁠. 진짜 토마토예⁠.⁠”

사장이 올라가고 나서 도연은 타코 하나를 들고 오래 앉아 있었다⁠. 타코는 따뜻했다⁠.

선큰 마당 계단 맨 아래 칸에 세찬이 혼자 앉아 있었다⁠. 가슴에 카메라가 없었다⁠. 휴대전화 화면에 채널 관리 창이 떠 있었다⁠. 구독자 숫자가 위아래로 출렁였다⁠. 어제 저녁에는 십만 명이 구독을 끊었고⁠, 같은 밤에 이십만 명이 새로 구독했다⁠. 댓글 창 맨 위에 고정된 댓글은 세찬이 쓴 것이었다⁠. 「⁠하운이 형에게⁠. 미안해⁠. 하담아⁠, 미안해⁠.⁠」 답글이 만 개 넘게 달려 있었다⁠.

재이가 편의점 조끼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오다 세찬 옆에서 멈췄다⁠. 세찬이 고개를 들었다⁠. 재이는 세찬을 보지 않고 지나쳐 가게로 들어갔다⁠. 세찬은 휴대전화를 끄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마당 난간의 휴대전화 몇 대가 세찬을 찍었다⁠. 세찬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찬을 도연은 처음 보았다⁠.

*

밤 열 시⁠,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칸을 세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경탁이었다⁠. 남색 점퍼 대신 회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등에 낡은 등산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 옆구리에 유선 전화 전선 뭉치가 매달려 있었다⁠.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배지가 달려 있던 자리에 티셔츠가 조금 늘어나 있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가게 문은 열려 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걸쇠가 아직 덜 걸립니다⁠.⁠” 경탁이 계산대 앞에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민간인으로 따라가겠습니다⁠. 이제 지침이 없습니다⁠. 차장님이 하루 한 층 허용하셨으니 오늘 한 층 남았습니다⁠. 자정 전에요⁠.⁠”

“⁠왜요⁠?⁠”

경탁은 대답하기 전에 가방 지퍼를 열었다⁠. 안에 손전등 넷⁠, 물 여섯 병⁠, 은박 담요⁠, 밧줄이 들어 있었다⁠. 맨 위에 곰젤리 한 봉지가 있었다⁠.

“⁠다섯 해 동안 칠월마다 하담 씨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는 데까지 같이 가 보겠습니다⁠.⁠” 경탁이 곰젤리 봉지를 들어 보였다⁠. “⁠이건 편의점에서 샀습니다⁠. 하담 씨가 무슨 맛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섞인 걸로요⁠.⁠”

재이가 「⁠지하 서고⁠」 문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토끼 님은 레몬 맛만 먹어요⁠. 노란 거요⁠. 나머지는 버려요⁠.⁠”

경탁이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노란 곰은 다섯 마리쯤 보였다⁠.

“⁠다른 건 제가 먹겠습니다⁠.⁠”

경탁은 빨간 곰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씹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단 것을 못 먹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 마리 더 넣었다⁠. 재이가 큐브를 돌리다 말고 경탁의 입을 보았다⁠.

“⁠조사관님⁠, 억지로 안 드셔도 돼요⁠.⁠”

“⁠이제 조사관 아닙니다⁠. 그리고 버리는 건 아깝습니다⁠.⁠” 경탁이 봉지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관리국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뭐든 남기면 결국 누가 치운다는 겁니다⁠.⁠”

계단 꼭대기에서 세찬이 내려다보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켜지 않았다⁠. 도연이 올려다보자 세찬이 카메라를 등 뒤로 감췄다⁠.

“⁠회장님⁠, 오세요⁠. 카메라 켜고요⁠.⁠”

“⁠사장님⁠, 관리국이 지하 촬영 금지했어요⁠. 작전 구역이래요⁠.⁠”

“⁠민간인 셋에 전 조사관 하나예요⁠. 작전 아니에요⁠.⁠” 도연은 앞치마 끈을 묶었다⁠. “⁠켜 두세요⁠. 꺼지면 일요일 정오가 와요⁠.⁠”

*

육 층은 고요한 호수였다⁠. 계단이 끝나는 자리부터 방 끝까지 검은 물이 깔려 있었고⁠, 물은 거울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의 푸른 돌이 물에 한 번 더 비쳐 방에 별이 두 배로 떠 있었다⁠. 물가를 따라 좁은 돌길이 맞은편 문까지 이어졌다⁠.

문 위 벽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 줄이었다⁠. 글자들이 다 뒤집혀 있었다⁠. 받침이 위로 가고⁠, 모음이 거꾸로 붙었다⁠. 문에는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진 둥근 돌 손잡이 넷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손잡이 위 벽에 같은 소용돌이 넷이 그려져 있었는데⁠, 소용돌이마다 감긴 방향이 달랐다⁠.

“⁠여러분⁠, 지하 육 층입니다⁠. 오늘은 호수예요⁠.⁠” 세찬이 작게 말했다⁠. 목소리에 「⁠여러분⁠」이 붙었지만 힘이 없었다⁠. 댓글이 올라갔다⁠. 「⁠회장님 왔네⁠」 「⁠조사관님 티셔츠 뭐임⁠」 「⁠배지 없는 아저씨가 더 멋있음⁠」

“⁠거울 글자예요⁠.⁠” 재이가 말했다⁠. “⁠물에 비춰 보면 바로 읽혀요⁠.⁠”

넷은 물가에 쪼그려 앉아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벽의 글씨가 물 위에 거꾸로 떨어져 바로 읽혔다⁠. 도연이 소리 내어 읽었다⁠.

“⁠아래에서 열리는 문은 없다⁠.⁠”

경탁이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도연은 물에 비친 글씨를 오래 보았다⁠. 아래에서는 어떤 문도 열 수 없다⁠. 위에서 풀어야 열린다⁠. 다섯 해 전 을지로의 문이 위에서 덮였을 때⁠, 아래에 있던 하운은 어떤 문도 열 수 없었다⁠.

“⁠손잡이요⁠.⁠” 재이가 물속의 소용돌이 넷을 가리켰다⁠. “⁠벽 그림은 거꾸로예요⁠. 물에 비친 방향대로 돌려야 해요⁠.⁠”

“⁠제가 해 보겠습니다⁠.⁠”

모두가 경탁을 보았다⁠. 경탁이 문 앞으로 걸어가 첫 손잡이를 잡았다⁠. 물에 비친 첫 소용돌이를 보고⁠, 손잡이를 돌렸다⁠. 딸깍⁠. 손잡이 둘레가 푸르게 물들었다⁠.

세찬의 화면이 댓글로 덮였다⁠. 「⁠조사관님 첫 성공⁠」 「⁠울컥함⁠」 「⁠아저씨 잘했어요⁠」

“⁠어떻게 하셨어요⁠?⁠”

“⁠관리국에서 서류를 거꾸로 읽는 일이 많았습니다⁠. 결재판 너머 차장님 책상의 서류를요⁠.⁠” 경탁이 두 번째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이건 모르겠습니다⁠.⁠”

도연이 나머지 셋을 돌렸다⁠. 물에 비친 방향대로 왼쪽⁠, 오른쪽⁠, 왼쪽⁠. 손잡이 넷이 다 푸르게 물들자 문이 물 위로 떠오르듯 들렸다⁠. 문 아래로 계단이 이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올라와 호수에 처음으로 잔물결을 일으켰다⁠. 물에 비친 글씨가 흔들려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계단은 짧았다⁠. 열 칸쯤 내려가자 일곱 번째 층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왔고⁠, 입구 너머 오른편이 벽돌 벽이었다⁠. 던전의 돌이 아니라 사람이 쌓은 붉은 벽돌이었다⁠. 벽돌 틈으로 흰빛이 새어 들어왔다⁠.

벽 너머에서 소리가 커져 왔다⁠. 쇠바퀴가 쇠를 긁는 소리⁠, 바람을 밀어내는 소리⁠, 낮게 울리는 경적⁠. 벽돌 틈의 흰빛이 한쪽에서 반대편으로 빠르게 쓸고 지나갔다⁠. 바닥이 발밑에서 떨렸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지하철이에요⁠.⁠” 재이가 말했다⁠. “⁠홍대입구 선로예요⁠.⁠”

소리가 멀어졌다⁠. 벽돌 틈의 빛이 꺼졌다⁠. 일곱 번째 층의 어둠 속 어딘가에서 단단한 것들이 돌바닥을 긁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도블록을 끄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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