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5,321자)

붉은 배지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2월 17일 목요일 아침⁠, 선양⁠. 평양 시간 일곱 시 사십 분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리명길은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금철의 간이침대였다⁠. 어젯밤 금철은 집에 가서 자겠다고 했고⁠, 명길은 처음으로 칸막이 안에서 잤다⁠. 담요에서 귤 냄새가 났다⁠.

문간에 염상혁이 서 있었다⁠. 해바라기씨 봉지도⁠, 휴대전화도 들지 않은 빈손이었다⁠.

“⁠사장님이 늦게 나오신다길래 내가 일찍 왔다⁠.⁠”

상혁은 문을 닫고 문 앞 의자에 앉았다⁠. 명길이 날마다 앉던 문 옆 자리였다⁠. 상혁이 문 옆 자리에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선배님⁠, 저는 아홉 시 전에 나가야 합니다⁠.⁠”

“⁠어디를⁠?⁠”

“⁠류 사장네 냉면 쿠폰을 쓰러 갑니다⁠.⁠”

상혁이 웃지 않았다⁠. “⁠막내⁠, 평양 차가 낮에 온다⁠. 사장님이 너한테만 말한 줄 아니⁠? 나도 들었다⁠. 낮까지 너는 여기 있는다⁠. 내가 지킨다⁠.⁠”

명길은 점퍼를 입었다⁠. 지퍼를 목까지 올리지 않고 가슴께에서 멈췄다⁠. 왼쪽 가슴의 붉은 배지가 보였다⁠.

“⁠선배님⁠, 저는 나갑니다⁠. 선배님은 금요일에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사진을 내십시오⁠. 막내가 목요일 아침에 사라졌다고⁠, 선배님이 문 앞에서 막으려 했는데 못 막았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선배님은 깨끗합니다⁠. 따님 백일에 갈 수 있습니다⁠.⁠”

상혁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시키는 거냐⁠?⁠”

“⁠아닙니다⁠. 선배님은 진짜로 막으려 하셨습니다⁠. 지금 막고 계십니다⁠.⁠”

상혁이 문 앞 의자에서 일어섰다⁠. 명길과 상혁 사이에 송이 상자 두 개가 있었다⁠. 빈 상자였다⁠. 상혁은 명길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김책 다닐 때 이 자리에 앉던 형 이야기를 할 때의 얼굴이었다⁠.

“⁠막내⁠, 너희 어머니는⁠.⁠”

“⁠압니다⁠.⁠”

“⁠은정이는⁠.⁠”

“⁠압니다⁠. 선배님 따님도 압니다⁠. 웃는 사진 봤습니다⁠.⁠”

상혁이 고개를 숙였다⁠. 한참 바닥을 보다가⁠, 문 앞 의자를 벽으로 밀어 붙였다⁠.

“⁠나 화장실 간다⁠. 배가 아프다⁠. 오 분 걸린다⁠.⁠”

“⁠선배님⁠.⁠”

“⁠오 분이다⁠. 육 분 되면 나는 문 앞에서 너를 막는다⁠. 진짜로⁠.⁠”

상혁이 화장실로 걸어갔다⁠. 걸음이 일부러 느렸다⁠. 화장실 문 앞에서 상혁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잠금 번호 바꿨니⁠?⁠”

“⁠예⁠. 선배님 따님 생일로 바꿨습니다⁠.⁠”

상혁이 화장실 문을 쾅 닫았다⁠. 문 너머에서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났다⁠.

*

명길은 건물 뒷문으로 나왔다⁠. 골목에 찬 바람이 불었다⁠. 큰길로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골목 끝 큰길가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번호판이 단둥 번호였다⁠. 운전석 창이 반쯤 내려가 있었고⁠, 담배 연기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차 안에 누가 앉아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명길은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숨을 골랐다⁠. 평양 차가 낮에 온다고 했다⁠. 낮보다 일찍 온 차일 수도 있었고⁠, 아무 상관 없는 차일 수도 있었다⁠.

명길은 오른쪽 골목으로 꺾었다⁠. 상혁이 세 번 꺾어 돌아가던 길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골목은 생각보다 길었고⁠, 세 번째 골목 끝은 공사 가림막으로 막혀 있었다⁠. 명길은 되돌아 나와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휴대전화 시계가 아홉 시를 넘겼다⁠. 평양 시간 아홉 시⁠. 옥화가 손목시계를 돌리지 않았다면 같은 아홉 시였다⁠.

아홉 시 삼십오 분⁠, 명길은 방송탑 앞 큰길로 나왔다⁠.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회색 외투가 서 있었다⁠. 턱선에서 자른 단발⁠. 사이에 육 차선 도로가 있었다⁠.

명길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건너편에서도 고개가 숙여졌다⁠.

옆에서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회색 승합차였다⁠. 뒷좌석 창에 솔잎 한 가닥이 붙어 있었다⁠. 운전석에서 금철이 내렸다⁠. 군복이었다⁠.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

“⁠타라⁠.⁠”

“⁠사장님⁠.⁠”

“⁠저 모퉁이 봐라⁠. 공안 차다⁠. 네가 지금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저 여자한테 닿기 전에 공안이 먼저 너를 잡는다⁠. 공안은 다니엘을 싫어한다⁠. 공안한테 잡히면 너는 단둥으로 간다⁠. 그러면 낮에 오는 차보다 빠르다⁠.⁠”

명길은 건너편 모퉁이를 보았다⁠. 공안 둘이 담배를 피우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타라⁠. 내가 데려간다⁠.⁠”

“⁠어디로 데려가십니까⁠?⁠”

금철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명길은 건너편의 옥화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탔다⁠.

*

승합차는 선양역으로 가는 큰길로 들어갔다⁠. 백미러에 공안 순찰차가 따라붙었다⁠. 금철은 속도를 내지 않았다⁠. 신호를 다 지켰다⁠. 히터에서 솔잎 냄새가 났다⁠.

“⁠사장님⁠, 역으로 가십니까⁠?⁠”

“⁠공안이 따라오는 동안은 역으로 간다⁠.⁠”

금철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번호를 눌렀다⁠. 중국말로 길게 말했다⁠. 명길은 반쯤 알아들었다⁠. 왕 경관⁠, 송이 한 상자가 아직 남았다⁠, 북쪽 송이다⁠, 오늘 오후에 류 사장네로 보내겠다⁠, 막내는 내가 역으로 데려간다⁠, 금요일 기차 전에 단둥 사람한테 넘기겠다⁠. 금철이 웃었다⁠. 전화를 끊었다⁠.

백미러 속 순찰차가 다음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금철은 교차로를 두 개 더 지나고 나서야 차를 길가에 세웠다⁠. 엔진을 끄지 않았다⁠.

“⁠막내⁠, 배지를 다오⁠.⁠”

명길은 왼쪽 가슴을 손으로 덮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배지의 테두리가 느껴졌다⁠. 김책에 입학하던 날 단 배지였다⁠. 아버지가 떠난 해에 받았다⁠. 은정도 같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어머니도⁠.

“⁠이걸 드리면 저는 무엇이 됩니까⁠?⁠”

“⁠평양에 내가 이렇게 말한다⁠.⁠” 금철이 앞 유리 너머를 보았다⁠. 방송탑이 백미러 끝에 작게 비쳤다⁠. “⁠막내가 목요일 아침 역 앞에서 중국 공안한테 끌려갔다⁠. 미국이 찾는 다니엘 건으로⁠. 내가 쫓아갔지만 놓쳤다⁠. 공안 차가 떠난 자리에 이게 떨어져 있었다⁠. 그러면서 이걸 내민다⁠.⁠”

“⁠믿겠습니까⁠?⁠”

“⁠반은 믿는다⁠. 왕 경관이 막내를 단둥 사람한테 넘긴다는 말을 아까 들었다⁠. 공안도 오늘 오후에 송이 한 상자를 받는다⁠. 다들 반쯤 아는 이야기가 된다⁠. 반만 믿으면 된다⁠.⁠”

“⁠그럼 어머니는요⁠?⁠”

“⁠네 어머니는 아들이 배지를 떼고 남쪽으로 갔다는 말 대신⁠, 아들이 중국에서 끌려갔다는 말을 듣는다⁠. 둘 중 어느 말이 은정이를 대학에 두겠니⁠?⁠”

명길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바닥 아래에서 배지가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다⁠.

“⁠사장님은요⁠?⁠”

“⁠나는 막내를 놓친 상관이다⁠.⁠”

“⁠열아홉 상자는요⁠? 조장 동지는요⁠?⁠”

“⁠열아홉 상자는 서울 일을 짠 사람이 진다⁠. 내가 짰다⁠. 조장 손은 늦지 않았다⁠. 나는 총화에서 그렇게 말한다⁠.⁠” 금철이 운전대에서 손을 내렸다⁠. “⁠상혁이는 오늘 아침 일곱 시에 우리 집 앞에 와서 휴대전화 사진을 지웠다⁠. 내 앞에서 하나씩⁠. 지우고 나서 사무실에 가서 너를 지킨다고 하더라⁠. 지키는 척이라도 해야 백일에 떳떳하다고⁠.⁠”

명길은 상혁이 문 앞 의자에 앉아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빈손이었다⁠. 휴대전화를 들고 있지 않았다⁠.

“⁠사장님⁠, 사장님 따님은요⁠?⁠”

금철이 처음으로 오래 말이 없었다⁠. 히터 바람 소리만 났다⁠.

“⁠우리 딸은 손 크림을 세 개 받았다⁠. 은정이는 두 개⁠. 둘이 같은 강의실에서 장갑 끝을 잘라 끼고 필기한다⁠. 나는 그 그림을 지키려고 열다섯 해 송이를 팔았다⁠. 앞으로 몇 해 더 팔면 된다⁠.⁠” 금철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막내⁠, 내가 고른 거다⁠. 너도 골랐고⁠. 저 여자도 골랐다⁠. 다들 골랐으면 내라⁠.⁠”

명길은 점퍼 지퍼를 내렸다⁠. 배지의 핀을 손가락으로 찾았다⁠. 핀이 잘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두 번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 빠졌다⁠. 점퍼 왼쪽 가슴에 작은 구멍 두 개가 남았다⁠.

명길은 배지를 금철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금철은 배지를 오래 보지 않았다⁠. 군복 윗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막내⁠, 하나 더⁠.⁠” 금철이 군복 주머니에서 귤 하나를 꺼냈다⁠. “⁠가면서 먹어라⁠. 들어가면 한동안 아무것도 안 줄 거다⁠. 남쪽 사람들은 묻는 게 많다⁠. 묻는 동안은 다들 먹는 걸 잊는다⁠. 그 고구마 먹는 사람 빼고⁠.⁠”

명길은 귤을 받았다⁠. 웃음이 나오려다 목에서 막혔다⁠.

“⁠사장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저를 서울에 보낼 때부터요⁠?⁠”

“⁠아니다⁠.⁠” 금철이 곧바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송이만 생각했다⁠. 서른 상자⁠. 그 여자 눈을 너한테 묶어 두면 된다고⁠. 네가 신문지를 끼울 줄은 몰랐다⁠. 네가 창문을 닫으라고 쓸 줄도 몰랐다⁠.⁠”

“⁠언제 바꾸셨습니까⁠?⁠”

금철이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2011년 3월에 평양역 대합실에서 나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 여자 얼굴을 안 보려고⁠. 그다음 열다섯 해 동안 신문을 내리지 못했다⁠.⁠” 금철이 앞 유리를 보았다⁠. “⁠어제 냉면집에서 그 여자 얼굴을 봤다⁠. 오늘은 신문 대신 운전대를 들었다⁠. 그게 다다⁠.⁠”

명길은 점퍼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류 사장이 준 쿠폰이었다⁠. 「⁠냉면 한 그릇 무료⁠」⁠. 명길은 쿠폰을 계기판 위에 올려놓았다⁠.

“⁠류 사장님이 다음에 오면 공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다음이 없으니 사장님이 쓰십시오⁠.⁠”

금철이 쿠폰을 내려다보았다⁠. 집지 않았다⁠. 계기판 위에서 쿠폰이 히터 바람에 한 번 떨렸다⁠.

“⁠3월에 쓰마⁠.⁠”

3월에 무엇이 있는지 명길은 묻지 않았다⁠. 금철도 말하지 않았다⁠.

*

승합차가 큰길을 되돌아 달렸다⁠. 이번에는 금철이 골목으로 꺾지 않았다⁠. 교차로를 지나자 회색 건물이 나왔다⁠. 정문 위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있었다⁠. 창구 앞에 비자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공안 둘이 정문 옆에서 발을 굴렀다⁠.

금철이 횡단보도 앞⁠, 건너편 인도에 차를 세웠다⁠.

“⁠열네 걸음⁠, 열 걸음이지⁠.⁠”

“⁠사장님도 세셨습니까⁠?⁠”

“⁠열다섯 해 동안 이 앞을 안 지나갔다⁠. 안 지나가려면 걸음을 알아야 한다⁠.⁠”

금철은 앞만 보았다⁠. 명길을 보지 않았다⁠. 명길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사장님⁠.⁠”

“⁠가라⁠. 평양 시간으로 지금 열 시 십 분이다⁠. 낮 차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

명길은 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들어왔다⁠. 내리기 전에 명길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금철은 끝까지 보지 않았다⁠. 아래턱을 조금 내민 옆얼굴만 보였다⁠.

명길은 내렸다⁠. 문을 닫았다⁠.

신호가 초록이었다⁠. 명길은 횡단보도에 발을 올렸다⁠. 하나⁠, 둘⁠, 셋⁠. 손에 쥔 귤이 차가웠다⁠. 일곱⁠, 여덟⁠. 건너편 정문 옆 공안 하나가 명길을 보았다⁠. 명길의 얼굴을 보고⁠, 점퍼 왼쪽 가슴을 보았다⁠. 배지가 있던 자리에 작은 구멍 두 개뿐이었다⁠. 열둘⁠, 열셋⁠, 열넷⁠.

인도에 올라섰다⁠. 정문까지 열 걸음⁠.

공안이 명길을 보고 있었다⁠. 명길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비자 줄에 선 중국 대학생의 여행 가방 옆을 지났다⁠. 하나⁠, 둘⁠. 공안이 입을 열려다 하품을 했다⁠. 다섯⁠, 여섯⁠. 공안 뒤로 열린 문 안쪽에 흰 벽과 태극기가 보였다⁠. 여덟⁠, 아홉⁠.

열⁠.

명길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차 한 대가 출발하는 소리가 났다⁠. 명길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사장이 아직 거기 있을까 봐⁠, 혹은 없을까 봐⁠.

1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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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린독자2026.11.06· 19화

    열 걸음 세는 장면에서 같이 숨을 참았어요. 공안이 하품하는 순간 진짜 소리 지를 뻔했습니다. 「돌아보면 사장이 아직 거기 있을까 봐, 혹은 없을까 봐」 이 한 줄에 금철 사장과의 시간이 다 들어 있네요.

    • 금나율작가2026.11.06

      붉은 배지를 받아 간 사람은 금철이었어요. 마지막 화는 옥화의 눈으로, 문 안으로 들어간 명길을 맞이합니다.

붉은 배지 ·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