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5,494자)
창밖의 방송탑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2월 17일 목요일 오전 열 시 십오 분, 선양. 김옥화는 방송탑 앞 횡단보도 한가운데 하얀 줄 위에서 인도로 돌아와 있었다. 차승규가 옥화의 팔을 놓지 않았다. 승합차가 사라진 지 사십 분이 지났다. 옥화의 손목시계는 서울 시간이었고, 서울 시간은 평양 시간이었다.
승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승규가 받았다. 짧게 듣고, 한 번 더 듣고,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어 옥화를 보았다. 승규의 얼굴이 이상했다. 웃으려는데 입이 따라오지 않는 얼굴이었다.
“총영사관이에요. 방금 정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대요. 젊은 남자, 회색 점퍼, 손에 귤 하나. 이름이 리명길이래요.”
옥화는 대답하지 않고 걸었다. 두 블록이었다. 걷다가 뛰었다. 외투 단추가 하나 떨어져 인도에 굴렀다. 옥화는 줍지 않았다. 승규가 뒤에서 단추를 주웠다.
*
열한 시, 총영사관 이층 작은 회의실. 탁자 하나에 의자 넷, 창문 하나였다. 창밖으로 방송탑이 보였다. 사무실 창에서 보던 방송탑을 반대쪽에서 보는 자리였다.
명길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점퍼 지퍼를 목까지 올렸고, 왼쪽 가슴에 작은 구멍 두 개가 있었다. 탁자 위에 귤 하나가 까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옥화가 문을 열자 명길이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려 벽에 닿았다. 둘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섰다. 화면으로 한 번, 냉면집 문 앞에서 십 초, 횡단보도 너머로 육 차선. 탁자 하나는 처음이었다.
“앉으십시오.”
옥화가 먼저 말했다. 명길이 앉았다. 옥화도 앉았다. 승규가 문간에서 들어오지 않고 서 있었다. 손에 옥화의 외투 단추를 쥐고 있었다.
“선생님.”
“예.”
“제 어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옥화는 탁자 위 귤을 보았다. 열다섯 해 전 조사실에서 옥화가 한 질문이었다. 대답은 승규가 열다섯 해 걸려 찾아냈고, 금철이 냉면집에서 다시 일러 주었다.
“모릅니다.”
명길의 손이 탁자 위에서 주먹이 되었다.
“선생님이 화면에 나오지 않으셨으면 저는 금요일 기차를 탔을 겁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송이를 판다고 계속 믿으셨을 겁니다. 은정이도.”
“탔으면 오늘 낮에 따로 오는 차에 실려 갔을 겁니다. 메일 한 통 때문에요.”
“그래도 어머니 옆으로 갔을 겁니다.”
“예. 어머니 옆으로 갔을 겁니다.”
옥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명길의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옥화가 화면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면 명길은 어머니에게 가는 기차를 탔다. 옥화가 화면에 얼굴을 내밀어서 명길은 어머니가 없는 방에 앉아 있었다. 둘 다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열다섯 해 동안 후회하셨습니까?”
“날마다 했습니다.”
“그럼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날마다 후회했지만, 하루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옥화는 안경을 벗지 않았다. “둘 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리명길 씨도 앞으로 그럴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대가는 제가 압니다.”
명길이 주먹을 풀었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붉게 남았다. 명길은 귤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
승규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옥화의 외투 단추를 탁자에 내려놓고, 명길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았다.
“리명길 씨, 국정원 차승규입니다. 팀장님이 남쪽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 저예요. 열다섯 해 전에.”
명길이 승규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서탑에서 고구마 세 개 드신 분입니까?”
승규가 입을 벌렸다가, 웃었다. 이번에는 입이 따라왔다.
“네 개요. 하나는 주머니에 넣었어요.” 승규가 외투 주머니에서 식은 고구마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드세요. 이제부터 한동안 질문이 많을 거예요. 질문하는 동안 다들 먹는 걸 잊어요. 저 빼고.”
명길이 고구마를 내려다보았다. 금철이 차 안에서 한 말과 같았다. 명길의 입가가 떨렸다.
“차 선생님.” 옥화가 말했다. “본부 지시는요?”
“아까 보고했어요. 그 친구가 이미 정문 안으로 들어왔다고. 돌려보낼 길이 없다고. 들어온 사람을 내보내는 건 총영사관 일이 아니라고요.” 승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이니까요. 정문까지는 몰라도 정문 안은 서류에 들어가요.”
“들어오기 전에 보고하셨으면요?”
“전화를 늦게 받았어요. 고구마 먹느라고.”
옥화는 승규를 보았다. 승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류 밖에서 한 두 번째 일이었다.
“레이철 씨 쪽은요?”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한대요. 그건 나중 일이에요. 몇 달 걸려요. 정부와 정부의 일이에요.” 승규가 명길을 보았다. “리명길 씨, 그동안 하실 일이 있어요. 바이낸스 엔지니어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팀장님이 그러던데요. 그건 미국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묻고 싶어 할 거예요. 그 사람 이름도, 그 사람 딸 이름도, 미국 사람들은 알아요.”
명길이 고개를 들었다.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리명길 씨가 다 말하면요.”
*
오후 세 시, 회의실에 옥화와 명길만 남았다. 승규는 본부와 통화하러 나갔고, 총영사관 직원은 서류를 가지러 갔다. 옥화의 한국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첫 번째는 주태강이었다.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하얀 몰티즈 옆에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등을 붙이고 자고 있었다.
「팀장님!! 반룡이가 콩이 밥 먹었어요. 콩이는 반룡이 물 마셨어요. 재하 씨가 이거 떡볶이 몇 그릇이냐고 해서 제가 계산 못 했어요. 팀장님 언제 오세요?」
두 번째는 강도원의 전화였다. 옥화는 회의실 구석으로 가서 받았다.
“팀장님, 거기 괜찮아요? 기사 보셨어요? 기자들이 난리예요. 사 분 만에 막은 외부 제보자가 누구냐고요. 어떤 기자는 벌써 북한 쪽 사람이 제보했다는 소문을 들었대요.”
“대표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근데 팀장님, 홍보팀장이 그러는데요. ‘북한 해커의 양심 제보로 막았다’ 이게 나가면 우리 회사가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거래소가 된대요. 투자사들도 좋아하고요. 이벤트 말고 진짜 이야기잖아요.”
옥화는 창가의 명길을 보았다. 명길은 고구마를 손에 쥐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대표님, 그 말이 나가면 평양이 읽습니다. 평양은 남쪽 기사를 다 읽습니다. 제보한 사람의 어머니가 그 기사 때문에 어떻게 되는지는 기사에 안 나옵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제보한 사람은 지금 막내가 중국 공안에 끌려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 식구가 삽니다. 대표님이 그 기사를 내시면 그 사람을 끌고 간 게 공안이 아니라 가람엑스가 됩니다.”
“……알았어요. 외부 제보자는 끝까지 외부 제보자로 할게요. 우리 보안팀이 잘해서 막았다고 하면 되죠. 그것도 사실이니까.”
“사실입니다. 태강 씨가 새벽에 메일을 열었습니다.”
“태강 씨 승진시켜야겠네.” 강도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팀장님, 공지문에 이상 무 안 썼어요. 복귀 비용 영수증 꼭 챙기세요. 회계팀이 저보다 무서워요.”
옥화는 전화를 끊고 탁자로 돌아왔다. 휴대전화를 명길 쪽으로 돌렸다. 명길이 고양이와 개 사진을 보았다.
“콩이입니까?”
“콩이입니다. 옆이 제 고양이 반룡이입니다.”
“반룡이요?”
“함흥 반룡산의 반룡입니다.”
명길이 사진을 오래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끝나기 전에 눈이 붉어졌다. 옥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거두었다.
“재하 씨가 망고를 진짜 좋아했다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쪽지 받았습니다. 엔지니어한테 하는 사과는 제가 미국 사람한테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리명길 씨 글씨로요.”
“선생님 어머니는요? 선생님도 대가를 치르셨습니까?”
옥화는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연길 번호가 있던 자리를 엄지로 쓸었다.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 아침에 줄을 끊었습니다. 어머니가 쓸모없는 노인이 되셔야 그냥 두니까요. 황 선배가 가르쳐 줬습니다.”
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았다. 방송탑 꼭대기의 붉은 등이 깜박였다.
*
저녁 여섯 시, 서울에서 온 조사관이 화상으로 첫 질문을 했다. 옥화는 회의실 뒤쪽에 앉아 있도록 허락받았다. 벽의 텔레비전에서는 소리를 끈 뉴스가 흘렀다. 화면 아래 자막이 지나갔다. 「미국, 바이낸스·가람엑스 탈취 자금 흘러간 지갑 추가 동결 추진」. 기자는 그렇게 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조사관은 이름부터 물었다. 명길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리명길. 스물세 살. 김책공업종합대학 졸업. 조사관이 수첩을 넘기며 다음 칸을 물었다.
“고향은요?”
“평양입니다.”
“고향에 산이 있어요? 다들 고향 산을 하나씩 말하더라고요.”
명길이 잠깐 말을 멈췄다. 회의실 뒤쪽의 옥화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한 달 전 에릭의 대화창에 쳤다가 지운 문장이었다.
“대성산입니다. 봄이면 진달래가 핍니다. 동생을 업고 남문까지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조사관이 수첩에 받아 적었다. 「대성산」. 옥화는 회의실 뒤쪽에서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백두, 낭림, 묘향, 칠보, 금강, 반룡. 아이는 금강 다음 자리에 처음으로 자기 산을 넣었다.
*
12월 18일 금요일 아침, 같은 회의실. 명길은 밤을 총영사관 숙소에서 보내고 아침 일찍 창가 의자로 돌아와 있었다. 옥화가 들어왔을 때 명길은 점퍼를 입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승규가 휴대전화를 든 채 들어왔다.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선양역에 우리 사람이 있었어요. 아침 기차, 단둥행. 세 사람이 탔대요.”
명길이 창에서 돌아섰다.
“황금철은 군복을 입었대요. 외투 없이요. 군복 윗주머니가 불룩했대요. 염상혁은 기차 타기 전에 매점에서 해바라기씨를 세 봉지 샀대요. 한 봉지는 같이 탄 마른 남자한테 줬고요. 마른 남자는 분유 냄새가 났다고 하던데, 그건 우리 사람이 지어낸 말일 수도 있어요.”
“세 사람이 웃었습니까?”
승규가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보았다.
“염상혁이 승강장에서 휴대전화를 보면서 웃었대요. 사진을 보는 것 같았대요. 황금철은 기차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봤대요. 역 광장 쪽을요. 그리고 탔대요.”
명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는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옥화는 명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창가에 같이 섰다. 사이에 의자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
베이징 시간 여덟 시 반, 단둥행 기차가 떠난 지 삼십 분이 지났다. 명길이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시계를 보았다.
“선생님, 지금 몇 시입니까?”
옥화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열다섯 해 동안 서울에 맞춰 둔 시계였다.
“아홉 시 삼십일 분입니다.”
명길이 자기 휴대전화를 옥화 쪽으로 돌렸다. 평양 시간으로 맞춰 둔 시계였다. 아홉 시 삼십일 분.
“같습니다.”
“같습니다. 서울 시간하고 평양 시간은 원래 같습니다.”
명길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시계를 돌리는 화면을 열었다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닫았다. 바꿀 것이 없었다.
창밖으로 방송탑이 보였다. 사무실 블라인드 사이로, 승합차 앞 유리 너머로,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보던 탑이었다. 오늘은 창틀 하나 너머에 있었다. 꼭대기의 붉은 등이 아침 햇빛 속에서 한 번 깜박였다.
명길이 창유리에 손바닥을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손바닥 둘레로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가 천천히 걷혔다. 옥화는 탁자 위의 외투 단추를 집어 손바닥에 쥐었다. 승규가 주워 온 단추였다. 꿰매 달 실은 서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