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5,354자)
방송탑 앞 횡단보도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2월 16일 수요일 밤 열한 시 십 분, 선양. 김옥화는 호텔 방 창가에서 중국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화면에 한 줄이 떠 있었다.
「목요일 아침 아홉 시, 방송탑 앞 횡단보도」
옥화는 일 분 동안 답장 칸을 보았다. 쓸 말이 많았다. 몸조심하라는 말, 누가 따라오면 돌아가라는 말, 총영사관은 두 블록 떨어져 있다는 말. 옥화는 한 글자만 쳤다. 「네」. 긴 답은 아이의 휴대전화에 오래 남았다. 누가 아이의 휴대전화를 열어 볼지 몰랐다.
옥화는 옆방 문을 두드렸다. 차승규가 컵라면을 든 채 문을 열었다. 호텔 방 탁자에 컵라면 빈 그릇이 두 개 더 있었다.
“차 선생님, 아이가 나온답니다. 내일 아침 아홉 시, 방송탑 앞.”
승규가 화면을 읽었다. 컵라면을 탁자에 내려놓고, 오래 화면을 보았다.
“총영사관이라는 말은 없네요.”
“방송탑에서 총영사관까지 두 블록입니다. 아이는 총영사관 문 앞을 매일 돌아서 다녔습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자고 하면 공안이 봅니다. 그래서 방송탑입니다.”
“팀장님, 하나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승규가 침대 끝에 앉았다. “저녁에 본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친구가 나오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설득해서 사무실로 돌려보내라고요. 금요일 기차 타게. 평양까지 들어가는 줄이 생기는 거라고. 레이철 씨 쪽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미국은 그 친구가 나오면 미국에 넘겨 달래요. 둘 다 그 친구가 총영사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원하지 않아요.”
옥화는 문간에 선 채로 승규를 내려다보았다.
“차 선생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는요.” 승규가 빈 컵라면 그릇을 손으로 돌렸다. “저는 팀장님 편이고 싶어요. 근데 저도 월급 받는 사람이에요. 열다섯 해 전에 팀장님 조건 다섯 개 중에 두 개 들어준 것도, 위에 거짓말 안 하고 들어줄 수 있는 게 두 개였어서 그랬어요.”
“아이를 돌려보내면 아이는 내일 낮에 열아홉 상자를 지고 평양에 갑니다. 메일 한 통 때문에요.”
“그 친구가 그걸 알고 나오는 거면, 저희가 돌려보내도 그 친구가 안 가요.”
“그럼 왜 설득하십니까?”
승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옥화는 문고리를 쥐었다.
“차 선생님, 내일 아이가 방송탑 앞에 오면 저는 아이한테 하나만 묻겠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본부 지시는 차 선생님이 하십시오. 저는 묻기만 하겠습니다.”
“팀장님 지금 조건 거시는 거예요?”
“세 번째입니다.”
*
12월 17일 목요일 아침 일곱 시, 옥화는 호텔 방에서 연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김 선생은 신호가 두 번 가자 받았다. 이른 시각이었는데 목소리가 또렷했다. 중개인은 새벽에 일하는 사람이었다.
“선생님, 이번 달 돈은 어제 보냈습니다. 받으셨습니까?”
“받았습니다. 다음 주에 들어갑니다.”
“그게 마지막입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옥화는 창밖을 보았다. 호텔 창에서 방송탑 꼭대기가 보였다. 붉은 등이 아침 안개 속에서 깜박였다.
“다음 달부터는 보내지 않겠습니다. 사진도 찍지 마십시오. 선생님 이름도, 제 이름도, 어머니 이름도 이제 서로 모르는 겁니다.”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니가 쓸모없는 노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냥 둡니다.”
김 선생이 한참 말이 없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팀장님, 지난번 사진 찍을 때 어머님이 그러셨답니다. 딸이 돈을 끊으면, 그때는 딸이 잘 사는 줄 알겠다고. 걱정 말라고요. 이 말은 사진값에 넣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옥화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창유리에 이마를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열다섯 해 전 함흥 집 문 앞에서 단추를 채워 주던 손이, 다시 한 번 옥화의 등을 밀고 있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전해 주십시오. 반룡산 단풍은 내년에도 듭니다.”
“전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옥화는 연락처에서 연길 번호를 찾아 길게 눌렀다. 「삭제」 단추 위에서 엄지가 오래 멈췄다. 옥화는 눌렀다.
여덟 시, 이번에는 한국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울의 레이철 문이었다.
“김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차 선생님한테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이라고요.”
“예.”
“미국 법무부 뜻은 어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 사람을 원합니다. 바이낸스 이용자들, 바이비트 이용자들, 모두 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레이철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런데 김 팀장님,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이 대한민국 총영사관 안으로 들어가면,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합니다. 그건 나중 일입니다. 정부와 정부의 일입니다. 오늘 아침 횡단보도 앞의 일은 아닙니다.”
옥화는 휴대전화를 고쳐 쥐었다.
“레이철 씨, 그 말씀은 오늘은 기다려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제 우리말이 서툴러서 정확히 무슨 뜻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레이철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다만 오늘은 그리하겠사옵니다.”
옥화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을 손등으로 눌렀다. 열다섯 해 동안 아침마다 그랬듯이.
*
여덟 시 사십 분, 방송탑 앞. 탑은 가까이서 보니 더 높았다. 꼭대기가 아침 안개에 잠겨 있었고, 탑 아래 광장에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다. 광장 끝에 횡단보도가 있었다. 횡단보도 건너편 인도를 따라 두 블록 가면 회색 건물이 나왔다. 정문 위 태극기가 여기서는 손톱만 하게 보였다.
승규는 광장 가장자리에 세운 검은 승용차 안에 있었다. 국정원이 선양에서 빌린 차였다. 승규 옆자리에 낯선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총영사관에서 나온 직원이라고 승규가 말했다. 직원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승규는 만두를 먹었다.
옥화는 횡단보도 앞에 혼자 섰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건넜다. 빨강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멈췄다. 출근하는 중국 사람들이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옥화 곁을 지나갔다. 털모자를 쓴 할머니가 손자의 손을 잡고 신호를 기다렸다. 손자가 할머니 손을 놓고 비둘기를 쫓아갔다. 할머니가 중국말로 손자를 불렀다. 손자가 돌아와 할머니 손을 다시 잡았다.
할머니가 옥화를 흘끗 보더니 중국말로 무어라 물었다. 옥화는 반쯤 알아들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는 말이었다. 옥화는 서툰 중국말로 대답했다. 아이를 기다린다고.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바구니에서 군고구마 하나를 꺼내 옥화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구마가 뜨거웠다. 할머니가 손자를 가리키며 한마디를 더 했다. 아이들은 늘 늦게 온다는 말이었다. 신호가 바뀌자 할머니는 손자의 손을 잡고 건너갔다. 옥화는 고구마를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하나가 내내 따뜻했다.
여덟 시 오십 분, 횡단보도 건너편 모퉁이에 공안 순찰차 한 대가 멈췄다. 공안 둘이 내려 담배를 피웠다. 공안 하나가 횡단보도 건너편의 옥화를 한 번 보고,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옥화는 외투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
아홉 시. 아이는 오지 않았다.
아홉 시 십 분. 신호가 다섯 번 바뀌었다. 옥화는 바뀔 때마다 건너편 인도와 이쪽 인도를 번갈아 보았다. 회색 점퍼를 입은 젊은 남자가 셋 지나갔다. 셋 다 아이가 아니었다.
옥화는 2011년 3월의 신의주를 떠올렸다. 기차에서 내려 압록강 가 갈대밭에서 사흘을 기다렸다. 강을 건네줄 안내인은 오기로 한 날 오지 않았고, 이튿날에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 새벽에 온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옥화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늦게 온 사람이 옥화를 건넸다. 옥화는 열다섯 해 동안 늦게 온 안내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강을 건너자 안내인은 돈을 세고 돌아갔고, 옥화는 젖은 신발을 벗어 들고 한참 서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갈대밭의 언 흙과, 기다리는 동안 외투 단추를 몇 번이나 풀었다 채웠는지였다.
옥화는 외투 주머니 속 군고구마를 쥐었다. 아직 따뜻했다.
아홉 시 이십 분, 승규가 차에서 내려 옥화 곁으로 왔다. 만두 봉지는 차에 두고 왔다.
“팀장님, 안 오면 안 오는 거예요. 사무실에서 들켰을 수도 있고,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어요.”
“기다립니다.”
“공안이 저쪽에서 우리를 보고 있어요. 동양 여자가 한 시간 가까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으면 저쪽도 궁금해해요.”
“그럼 궁금해하라고 하십시오.”
승규가 옥화 곁에 섰다. 둘은 나란히 신호등을 보았다. 신호가 또 바뀌었다.
“차 선생님, 아이가 오면 본부 지시대로 하실 겁니까?”
승규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빈손으로 꺼냈다. 먹을 것이 없었다.
“팀장님, 열다섯 해 전에 팀장님 어머니 이름 서류에 안 넣은 거요. 그거 위에 말 안 하고 한 거예요. 들키면 저 잘렸어요. 그때 처음으로 서류 밖에서 일을 했어요.” 승규가 신호등을 보았다. “오늘이 두 번째가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 그 친구 얼굴 보고 정할게요.”
옥화는 승규를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아홉 시 삼십오 분이었다.
건너편 인도 끝, 골목에서 회색 점퍼가 하나 나왔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였다. 점퍼 깃이 귀까지 올라와 있었다. 걸음이 빨랐다가, 큰길로 나오자 일부러 느려졌다. 사무실 사람들이 세 번 꺾어 돌아가던 골목에서 나오는 걸음이었다.
명길이었다.
옥화의 숨이 멈췄다. 명길이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왔다. 건너편 신호는 빨강이었다. 명길이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옥화와 눈이 마주쳤다. 사이에 왕복 육 차선 도로가 있었다.
명길이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다. 옥화도 고개를 숙였다.
회색 승합차 한 대가 건너편 길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명길의 바로 옆에 멈췄다. 옥화는 승합차를 알아보았다. 서탑 냉면집 앞에서 아이가 운전하던 차였다. 뒷좌석 창에 솔잎 한 가닥이 붙어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황금철이 내렸다. 군복이었다.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 금철은 승합차를 돌아 명길 앞에 섰다. 둘이 무슨 말을 했다. 옥화에게는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금철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명길이 승합차를 보고, 횡단보도 건너편의 옥화를 보았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옥화 곁을 지나 횡단보도로 쏟아져 들어갔다.
명길이 조수석에 올랐다.
금철이 문을 닫았다. 운전석으로 돌아가며 금철이 한 번 옥화를 건너다보았다. 육 차선 너머에서도 아래턱을 조금 내민 얼굴이 보였다. 금철이 운전석에 올랐다. 승합차가 출발했다.
옥화는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초록 신호가 깜박이기 시작했다. “팀장님!” 승규가 뒤에서 소리치며 옥화의 팔을 잡았다. 옥화는 팔을 빼려다 멈췄다. 승합차는 이미 다음 교차로를 지나고 있었다. 총영사관이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선양역으로 가는 큰길이었다.
건너편 모퉁이의 공안 둘이 담배를 끄고 순찰차에 올랐다. 순찰차가 승합차를 따라 같은 길로 들어갔다.
신호가 빨강으로 바뀌었다. 옥화는 횡단보도 한가운데 섬처럼 칠해진 하얀 줄 위에 서 있었다. 양쪽으로 차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방송탑 꼭대기의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붉은 등이 대낮에도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