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504자)

금요일 밤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금요일 저녁 아홉 시⁠, 성규가 후드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율비는 오후에 덕희를 따라 파주 금촌 할머니 집에 갔다⁠. 주말을 자고 오기로 했다⁠. 집 안이 조용해서 현관문 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나갔다 올게⁠.⁠”

“⁠어디 가⁠?⁠”

성규가 신발을 신다 말고 돌아보았다⁠. 지애가 소파에서 일어나 있었다⁠. 두 해 동안 금요일 밤마다 듣지 않던 말이었다⁠. 지애는 묻고 나서 대답을 정해 주지 않고 기다렸다⁠. 상담위원의 숙제를 하는 얼굴이었다⁠.

“⁠일하러⁠.⁠”

지애가 성규를 오래 보았다⁠. 일하러⁠, 라는 말을 지애가 어떻게 받을지 성규는 알 수 없었다⁠. 지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과 기다리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성규는 현관문을 닫으며 알았다⁠.

단지 정문을 나서자마자 휴대전화에 대리운전 앱을 켰다⁠. 「⁠밤길대리 · 운행 대기⁠」 첫 콜은 열 시⁠, 일산 라페스타 앞에서 탄 회사원이었다⁠. 뒷좌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같은 후렴을 일곱 번 불렀고⁠, 일곱 번 다 음이 틀렸다⁠. 두 번째 콜은 미용실 원장이었다⁠. 회식을 마치고 탄 원장의 몸에서 바닐라와 머스크를 섞은 달고 무거운 향수 냄새가 났다⁠. 원장이 내린 뒤에도 냄새가 운전석까지 남았다⁠. 성규는 후드 어깨를 털었다⁠. 털어도 안 빠지는 냄새라는 것을 알았다⁠.

세 번째 콜의 손님은 성규 또래의 남자였다⁠. 몸에 붙는 가죽 재킷을 입고⁠, 조수석에 타겠다고 우겼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남자는 휴대전화로 요즘 아이돌 노래를 틀고 따라 불렀다⁠. 가사의 절반을 모르는데도 후렴에서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앞 유리를 쏘았다⁠.

“⁠기사님도 이 노래 알죠⁠? 우리 나이에 이거 모르면 꼰대예요⁠.⁠”

“⁠딸이 불러요⁠.⁠”

“⁠딸이 몇 살인데요⁠?⁠”

“⁠열 살요⁠.⁠”

남자가 손가락 총을 내렸다⁠. 한참 창밖을 보다가 노래를 껐다⁠. 내릴 때 남자는 요금을 내며 “⁠열 살이면 아직 아빠랑 놀아 주죠⁠?⁠” 하고 물었다⁠. 성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 밤에는 놀아 준 적이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들었다⁠.

열한 시 이십 분⁠, 금촌 쪽 콜을 기다리며 성규는 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덕희는 귀가 어두워 늘 스피커로 받았다⁠.

*

할머니 집에서는 늘 멸치 육수 냄새와 파스 냄새가 같이 났다⁠. 율비는 작은방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천장 무늬를 세고 있었다⁠. 열한 시가 넘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부엌에서 할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렸고⁠, 할머니가 받자마자 아빠 목소리가 부엌 가득 울렸다⁠. 스피커였다⁠.

“⁠장모님⁠, 주무세요⁠?⁠”

“⁠안 자⁠. 서방⁠, 지금 운전 중이야⁠?⁠”

“⁠콜 기다려요⁠. 금촌 근처예요⁠.⁠”

율비는 이불을 젖히고 방문 쪽으로 기어갔다⁠. 문틈으로 부엌 불빛이 한 줄 들어왔다⁠.

“⁠서방⁠, 이번 달 이자는 내가 보탤게⁠. 가게 보증금 나오면⁠…⁠…⁠.⁠”

“⁠괜찮아요⁠, 장모님⁠. 금요일에 콜 몇 개 더 뛰면 돼요⁠.⁠”

“⁠그 대리운전 이제 그만해⁠. 여섯 해야⁠. 내 빚을 서방이 여섯 해를 갚았어⁠.⁠”

“⁠이제 반 조금 넘게 남았어요⁠.⁠”

할머니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율비는 문틈에 귀를 댔다⁠. 빚⁠, 이라는 말은 학교에서 배웠다⁠. 남의 돈을 빌리고 아직 안 갚은 것이었다⁠. 대리운전은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았다⁠. 술 마신 사람 대신 차를 몰아 주는 일이었다⁠.

“⁠지애한테는 끝까지 말하지 마세요⁠, 장모님⁠.⁠”

“⁠알아⁠. 안 해⁠. 안 하는데⁠…⁠… 서방⁠, 그러다 이혼까지 하면 어떡해⁠.⁠”

아빠가 한참 말이 없었다⁠. 부엌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지애가 알면 지애가 다 떠안아요⁠. 장모님 빚도⁠, 갚는 것도⁠, 미안한 것도⁠. 지애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게 싫어서 그래요⁠.⁠”

율비는 이불로 돌아가 머리끝까지 덮었다⁠. 이불 속에서 점퍼를 끌어당겨 코에 댔다⁠. 아빠 차를 타고 온 점퍼였다⁠. 금요일 다음 날 아침마다 아빠한테서 나던 모르는 냄새가 거기에도 조금 묻어 있었다⁠. 남의 차 냄새였다⁠. 율비는 이제 그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았다⁠.

*

열한 시 사십 분⁠, 콜이 떴다⁠. 「⁠출발 · 물푸레4단지 상가 앞 / 도착 · 파주 운정⁠」 성규는 콜을 잡고 나서야 출발지를 다시 읽었다⁠. 금촌에서 일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상가 앞에 흰색 대형 SUV가 비상등을 켜고 있었다⁠.

운전석 문을 열자 새 가죽 냄새가 났다⁠. 송풍구에 분홍색 망사 주머니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딸기우유 냄새였다⁠. 성규가 회사 향료로 만들어 장터 좌판에 내놓았던 방향제였다⁠.

뒷좌석에서 목소리가 났다⁠.

“⁠남편분⁠?⁠”

성규는 백미러를 보았다⁠. 검은 트렌치코트가 뒷좌석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묘진은 술을 마신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맑았다⁠. 다만 볼이 조금 붉었다⁠.

“⁠상가 사람들이랑 저녁 먹었어요⁠. 부녀회장님이 자꾸 따라 주셔서 한 잔 받았어요⁠. 한 잔이라도 운전은 안 해요⁠.⁠” 묘진이 안전띠를 맸다⁠. “⁠운정이요⁠. 출발하세요⁠.⁠”

성규는 차를 출발시켰다⁠. 자유로로 들어설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 건너 불빛이 차창에 길게 흘렀다⁠.

“⁠금요일 밤 대리⁠.⁠” 묘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신용대출 5천⁠. 혼자 집 사겠다는 남편⁠. 처가 일이죠⁠?⁠”

성규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저는 숫자로 맞히는 거라 틀릴 때도 있어요⁠. 근데 이건 잘 안 틀려요⁠.⁠” 묘진이 창밖을 보았다⁠. “⁠남편분 같은 분 많아요⁠. 저도 2012년에 혼자 남고 나서 밤마다 편의점 계산대에 섰어요⁠. 낮에는 경매 법정 다니고요⁠.⁠”

“⁠5동⁠, 9동⁠, 12동⁠.⁠” 성규가 말했다⁠. “⁠그 집들도 다 급할 때 사셨죠⁠?⁠”

“⁠방 소장님이 다 말씀하셨네요⁠.⁠” 묘진은 놀라지 않았다⁠. “⁠맞아요⁠. 근데 남편분⁠, 제가 안 사면 그 세 집은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경매로 가요⁠. 경매는 더 싸요⁠. 은행이 먼저 가져가고 남는 게 없어요⁠. 저는 경매보다 비싸게 사요⁠. 그게 제 자랑이에요⁠.⁠”

“⁠1101호 값에 맞춰서요⁠.⁠”

“⁠시세에 맞춰서요⁠. 시세는 제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제일 먼저 판 사람이 만들어요⁠.⁠” 묘진이 다리를 꼬았다⁠. “⁠남편분 집이 6억에 팔리면 그 세 집도 6억이에요⁠. 그럼 저는 세 집 다 안 사요⁠. 그 집 사람들은 6억을 기다리다가 경매로 가겠죠⁠. 남편분이 제값 받으면 그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으세요⁠?⁠”

성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차선을 바꾸는 손이 조금 늦었다⁠. 뒤차가 짧게 경적을 울렸다⁠.

“⁠율비 그 방에서 재워 준다는 거요⁠.⁠” 성규가 백미러를 보지 않고 물었다⁠. “⁠진짜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에요⁠?⁠”

“⁠반은요⁠.⁠” 묘진이 바로 대답했다⁠. “⁠나머지 반은 계산이고요⁠. 저는 반반이 제일 정직하다고 생각해요⁠.⁠”

“⁠이 방향제는 왜 다셨어요⁠?⁠” 성규가 물었다⁠. “⁠냄새 싫어하시잖아요⁠.⁠”

묘진이 송풍구를 보았다⁠. 망사 주머니가 바람에 흔들렸다⁠.

“⁠따님이 장사를 잘해서요⁠. 자전거 사고 나서 이것도 사라고 하더라고요⁠. 천 원⁠.⁠” 묘진이 짧게 웃었다⁠. “⁠우리 딸도 열 살 때 저랬어요⁠. 지금은 열일곱이고 저랑 말 안 해요⁠. 할머니 집에 살아요⁠.⁠”

차가 운정으로 빠지는 길로 들어갔다⁠. 묘진이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성규 쪽으로 기울였다⁠. 희철의 문자였다⁠. 「⁠1101호에 6억 현금 매수자 나타남⁠. 토요일 계약 예정⁠.⁠」

“⁠방 소장님이 문자 열한 통을 안 읽더니 갑자기 이런 걸 보내셨어요⁠.⁠” 묘진이 화면을 껐다⁠. “⁠거짓말에도 냄새가 나요⁠. 딸기 향처럼 너무 달면 가짜예요⁠.⁠”

성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미러 속에서 묘진이 성규를 보았다⁠.

“⁠제안은 아직 유효해요⁠. 5억 3천⁠. 율비는 그 방에서 자고요⁠.⁠” 묘진이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아내분께는 말씀 안 드릴게요⁠. 제가 말 안 해도 곧 아시겠지만⁠.⁠”

운정 아파트 앞에서 묘진은 앱으로 요금을 내고 현금으로 만 원을 더 얹었다⁠. 받지 않으려는 성규의 손에 지폐를 쥐여 주었다⁠.

“⁠수고하셨어요⁠. 운전 잘하시네요⁠. 한 번도 브레이크를 세게 안 밟으셨어요⁠.⁠”

*

새벽 한 시⁠, 운정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다음 콜을 기다리던 성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장모님⁠」이 떴다⁠. 받자 덕희가 아니라 율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 다 들었어⁠. 데리러 와⁠.⁠”

심야 택시가 금촌 빌라 앞에 멈췄을 때 율비는 빌라 옆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다⁠. 잠옷 위에 점퍼를 입고 운동화 뒤꿈치를 구겨 신었다⁠. 빌라 3층 창문에 덕희의 얼굴이 비쳤다가 커튼 뒤로 숨었다⁠.

성규는 그네 옆 미끄럼틀 계단에 앉았다⁠. 놀이터 모래에서 밤이슬 냄새가 올라왔다⁠. 율비가 그네를 발로 멈췄다⁠.

“⁠왜 말 안 했어⁠?⁠”

“⁠…⁠…⁠.⁠”

“⁠엄마는 아빠가 나쁜 사람인 줄 알아⁠. 금요일마다 놀러 가는 줄 알아⁠. 나도 그랬어⁠.⁠” 율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엄마랑 산다고 했잖아⁠. 아빠 냄새 이상하다고⁠.⁠”

“⁠괜찮아⁠.⁠”

“⁠안 괜찮아⁠.⁠” 율비가 그네 줄을 꽉 쥐었다⁠. “⁠왜 엄마한테 말 안 해⁠?⁠”

“⁠엄마가 알면 엄마가 아파⁠.⁠”

“⁠아빠는 안 아파⁠?⁠”

성규는 율비를 보았다⁠. 놀이터 가로등 아래에서 율비의 눈이 젖어 있었다⁠. 성규는 대답을 고르다가⁠, 고르지 않기로 했다⁠.

“⁠아빠도 아파⁠.⁠”

“⁠그럼 둘 다 아프면 같이 아파야지⁠. 왜 아빠만 아파⁠?⁠”

성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율비가 그네에서 내려와 아빠 무릎 앞으로 왔다⁠. 점퍼에서 남의 차 냄새와 할머니 집 멸치 육수 냄새가 같이 났다⁠.

“⁠나 아빠랑 살래⁠.⁠”

“⁠율비야⁠.⁠”

“⁠아빠랑 살 거야⁠. 그리고 엄마한테 말할 거야⁠.⁠”

“⁠아빠가 말할게⁠.⁠” 성규가 율비의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려 주었다⁠. “⁠조금만 시간 줘⁠.⁠”

율비가 아빠를 빤히 보았다⁠.

“⁠숙려 기간처럼⁠?⁠”

성규는 웃음이 나서 고개를 숙였다⁠. 웃음 끝이 목에서 걸려 기침이 되었다⁠.

*

토요일 오전 열 시⁠, 도어록 소리에 지애가 현관으로 나갔다⁠. 성규가 율비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율비가 주말을 자고 오기로 한 날이었다⁠. 둘 다 눈이 붉었고⁠, 둘 다 같은 옷을 입은 채였다⁠.

율비가 신발을 벗고 거실 한가운데에서 엄마를 보았다⁠.

“⁠엄마⁠, 나 아빠랑 살 거야⁠.⁠”

지애는 신발장을 짚었다⁠. 화요일에 율비가 소파에 앉아 엄마랑 살겠다고 했던 말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왜⁠?⁠”

“⁠약속했어⁠. 말 안 하기로⁠.⁠”

율비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성규는 지애를 보지 않고 부엌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받았다⁠. 원두 가는 소리가 났다⁠. 지애는 율비가 벗어 던진 점퍼를 주워 들었다⁠.

점퍼에서 냄새가 났다⁠. 남의 차 방향제 냄새⁠, 지난 금요일 새벽 성규의 후드에서 맡았던 달고 무거운 향수 냄새⁠. 냄새들 밑에 다른 냄새가 깔려 있었다⁠. 멸치와 다시마를 오래 끓인 육수 냄새⁠. 덕희의 칼국숫집에서 서른 해 동안 나던 냄새였다⁠.

지애는 점퍼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성규의 후드 어깨에 코를 댔다⁠. 같은 냄새가 났다⁠. 남의 차와 향수와 육수⁠.

“⁠당신⁠, 어젯밤에 금촌 갔어⁠?⁠”

성규가 원두 가는 손을 멈췄다⁠.

“⁠율비 데리러⁠.⁠”

“⁠그 전에는⁠? 금요일마다 어디 갔는데 엄마 집 냄새가 나⁠?⁠”

성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전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 지애는 점퍼를 식탁 의자에 걸고 차 열쇠를 집었다⁠.

“⁠나 금촌 갔다 올게⁠.⁠”

“⁠지애야⁠.⁠”

“⁠당신이 말 안 하면 엄마한테 물어볼게⁠.⁠” 지애가 현관에서 운동화를 꿰었다⁠. “⁠이번엔 정하러 가는 거 아니야⁠. 물으러 가는 거야⁠.⁠”

현관문이 닫혔다⁠. 주전자가 혼자 끓다가 딸깍 꺼졌다⁠. 성규는 머그잔 두 개를 꺼내 놓고⁠, 하나에만 커피를 부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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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보겸2026.11.01· 9화

    두 해 동안 안 묻던 「어디 가?」가 나왔을 때 숨 멈췄어요.

    • 여시결작가2026.11.01

      딸이 할머니 집에 간 금요일이라 집이 조용했어요. 조용해야 들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금요일 밤 · 이혼 숙려 기간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