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70자)

어떻게 만나셨어요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네 시간을 잔 성규의 눈에 상가 유리문이 하얗게 번졌다⁠. 4월 3일 토요일 아침 아홉 시 오십 분이었다⁠. 단지 정문 앞 3층 상가 1층에는 물푸레약국과 물푸레공인중개사가 벽 하나를 두고 붙어 있었다⁠. 약국 유리 너머로 약국장이 진열대를 닦다가 성규를 보고 고개를 까딱했다⁠. 지애가 열한 해 동안 가운을 입고 서 있던 자리였다⁠.

부동산 문을 밀자 원두 냄새와 은단 냄새가 한꺼번에 덮쳤다⁠. 지애는 벌써 와서 탁자 끝에 앉아 있었다⁠. 십 분 일찍 오는 사람이었다⁠. 희철이 계약서를 가지런히 펴 놓고 볼펜 세 자루를 나란히 놓았다⁠.

“⁠남편분⁠, 손⁠.⁠”

희철이 턱으로 지애 옆자리를 가리켰다⁠. 성규는 앉아서 지애의 손을 잡았다⁠. 지애는 빼지 않았다⁠.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성규의 손등을 한 번 꾹 눌렀다⁠. 늦지 말라는 뜻이었는지⁠, 손님 앞이니 웃으라는 뜻이었는지 성규는 몰랐다⁠.

연 씨 부부가 들어왔다⁠. 아내는 커피를 받자마자 냄새를 맡았고⁠, 남편은 주차 등록이 두 대까지 되느냐고 물었다⁠. 희철이 계약서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매매가 5억 9천 5백⁠, 계약금은 다음 주⁠, 잔금은 6월 30일⁠.

“⁠6월 30일이요⁠?⁠”

성규가 물었다⁠. 희철이 웃으며 지애를 보았다⁠.

“⁠사모님이 맞추신 날짜예요⁠. 이사 가실 전세 잔금이랑 같은 날로⁠.⁠”

성규는 지애를 보았다⁠. 지애는 계약서만 보고 있었다⁠. 이사 갈 전세라는 말을 성규는 처음 들었다⁠. 손님 앞이라 큰 소리를 낼 수 없어서⁠, 성규는 웃는 얼굴로 지애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전세 계약했어⁠?⁠”

“⁠가계약⁠.⁠” 지애도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후곡 학원가⁠. 율비 학원 걸어 다니게⁠.⁠”

“⁠언제⁠?⁠”

“⁠지난주⁠.⁠”

연 씨 아내가 두 사람을 보며 손뼉을 쳤다⁠. “⁠어머⁠, 귓속말하신다⁠. 우리도 저렇게 늙자⁠.⁠”

*

지애는 연 씨 아내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웃음을 유지했다⁠. 희철이 시킨 웃음은 어제보다 덜 저렸다⁠. 연 씨 아내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물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약국에서요⁠.⁠”

“⁠버스에서요⁠.⁠”

이번에도 대답이 한꺼번에 나왔다⁠. 희철이 은단 통을 떨어뜨렸다⁠. 지애는 성규를 보았다⁠. 버스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약국이잖아⁠.⁠” 지애가 말했다⁠. “⁠당신이 소화제 사러 왔잖아⁠. 삼 주 동안 매일⁠.⁠”

연 씨 아내가 입을 막았다⁠. “⁠매일요⁠? 소화제를요⁠?⁠”

“⁠위가 안 좋았어요⁠.⁠” 성규가 머리를 긁었다⁠. “⁠그 전에 버스가 있었어요⁠. 열두 해 전에 빨간 광역버스로 서울 출근을 했는데⁠, 아침마다 같은 정류장에서 타는 사람이 있었어요⁠. 약리학 책을 펴고 타서 두 정거장 만에 잠들었어요⁠. 제 어깨에서요⁠.⁠”

“⁠거짓말⁠.⁠”

“⁠삼 주 동안⁠. 매일 아침⁠.⁠”

“⁠내가 무슨 남의 어깨에서 자⁠.⁠”

“⁠책에 침도 흘렸어⁠. 항생제 단원에⁠.⁠”

연 씨 남편이 커피를 뿜을 뻔했다⁠. 지애는 귀가 뜨거워졌다⁠. 열두 해 전 봄⁠, 국가시험을 치고 약국에 막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아침 버스에서 늘 졸았던 것은 기억났다⁠. 깨어 보면 옆자리 남자가 늘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도 기억났다⁠. 남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삼 주째 되는 날 당신이 일산에서 내렸어요⁠. 따라 내린 건 아니고⁠, 저도 거기서 갈아타야 해서⁠.⁠” 성규가 지애를 보지 않고 연 씨 아내에게 말했다⁠. “⁠약국 유리문 너머로 가운 입는 걸 봤어요⁠. 그래서 들어가서 소화제를 샀어요⁠. 할 말이 없어서⁠.⁠”

“⁠그래서 삼 주 동안 소화제를 샀다고⁠?⁠”

“⁠위가 진짜로 안 좋아졌어⁠. 소화제를 너무 먹어서⁠.⁠”

연 씨 아내가 남편의 팔을 때렸다⁠. “⁠당신은 나한테 뭘 샀어⁠?⁠”

“⁠치킨⁠.⁠”

“⁠그거 당신이 먹었잖아⁠.⁠”

희철이 끼어들 틈도 없이 연 씨 부부가 다투기 시작했다⁠. 지애는 성규의 옆얼굴을 보았다⁠. 열한 해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묻지 않아서 안 한 것인지⁠, 할 자리가 없어서 안 한 것인지 지애는 알 수 없었다⁠. 성규의 손은 여전히 지애의 손을 잡고 있었다⁠.

희철이 헛기침을 하고 볼펜을 내밀었다⁠. 지애가 먼저 도장을 꺼냈다⁠. 성규는 볼펜을 받지 않았다⁠.

“⁠잔금 날짜는 제가 못 정했습니다⁠.⁠”

연 씨 부부가 다투다 말고 돌아보았다⁠. 성규가 지애의 손을 놓고 계약서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이 집은 제가 사겠습니다⁠. 아내 몫을 제가 사서 딸하고 이 집에 살려고요⁠.⁠”

“⁠네⁠?⁠” 연 씨 남편이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요⁠? 가계약금 넣었는데요⁠?⁠”

희철이 두 손을 들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자⁠, 자⁠. 매도인 사정으로 깨지면 가계약금은 배로 돌려 드리는 게 원칙이에요⁠. 그런 일은 안 생깁니다⁠. 두 분께서 집안 이야기를 조금만 정리하시고⁠, 수요일까지 다시 모시겠습니다⁠. 수요일까지만요⁠.⁠”

연 씨 아내가 지애를 보았다⁠. 아까까지 반짝이던 눈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님⁠, 저희 진짜 이 집 좋아요⁠. 커피 냄새도 좋고요⁠.⁠”

연 씨 남편이 아내의 가방을 들어 주며 덧붙였다⁠. “⁠수요일 넘어가면 저희도 다른 집 봅니다⁠. 대출 심사가 다음 달부터 까다로워진다고 해서요⁠.⁠”

부부가 나가고 문에 달린 종이 두 번 울렸다⁠. 희철이 의자에 털썩 앉아 은단 통을 열었는데 통이 비어 있었다⁠.

*

상가 복도 끝⁠, 계단 밑에 성규와 지애가 마주 서 있었다⁠. 약국 유리문이 바로 옆이었다⁠. 약국장이 진열대를 다시 닦기 시작했다⁠. 같은 자리를 세 번째 닦고 있었다⁠.

“⁠4억 2천을 당신 혼자 떠안겠다고⁠?⁠” 지애가 목소리를 낮췄다⁠. “⁠대출 나와⁠? 당신 연봉으로⁠?⁠”

“⁠알아볼게⁠.⁠”

“⁠알아보는 게 아니라⁠, 나오냐고⁠.⁠”

“⁠알아본다고⁠.⁠”

“⁠전세는 내가 율비 생각해서 잡은 거야⁠. 학원 걸어 다니게⁠.⁠”

“⁠나한테 물어봤으면 나도 율비 생각했어⁠.⁠” 성규가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당신은 정하고 나서 알려 줘⁠. 나는 맨날 다 끝난 다음에 들어⁠.⁠”

지애가 안경을 고쳐 썼다⁠. 숫자를 말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사흘⁠. 수요일까지⁠. 대출 확정 문자 받아 와⁠. 못 받으면 내 식대로 연 씨 부부한테 판다⁠.⁠”

“⁠좋아⁠.⁠”

“⁠좋다고⁠?⁠”

“⁠좋다고⁠.⁠”

부동산 문이 열리고 희철이 고개를 내밀었다⁠. 은단을 씹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사흘이요⁠? 좋습니다⁠. 대신 사흘 동안 소문 안 나게 조심하세요⁠. 이 단지는 사흘이면 다 압니다⁠. 신발 바꿔 신은 것도 알아요⁠.⁠”

성규는 고개를 들었다⁠. 상가 2층 창문에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었고⁠, 블라인드 틈으로 검은 옷자락이 지나갔다⁠. 2층은 두 달 전까지 영어 학원이었다⁠. 지금은 창에 아무 간판도 없었다⁠.

*

오후에 성규는 율비를 데리고 단지 놀이터에 나갔다⁠. 율비는 그네를 타기엔 다 컸다고 하면서 그네에 앉았고⁠, 성규는 등을 밀어 주기엔 율비가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 등을 밀었다⁠. 놀이터 모래에서 비 온 뒤의 흙냄새가 올라왔다⁠. 벚나무 가지 끝마다 봉오리가 부풀어 있었다⁠.

“⁠아빠⁠, 이 집 아빠가 사면 나 여기 살아⁠?⁠”

“⁠응⁠. 그러려고⁠.⁠”

“⁠엄마는⁠?⁠”

“⁠엄마는 학원 가까운 데⁠.⁠”

율비가 그네를 발로 멈췄다⁠. 운동화 코가 모래에 긴 줄을 그었다⁠.

“⁠그럼 나는 반으로 잘라⁠? 월화수는 엄마⁠, 목금토는 아빠⁠?⁠”

“⁠일요일은⁠?⁠”

“⁠일요일은 할머니 집⁠.⁠” 율비가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솔로몬 왕 이야기 알아⁠? 아기를 반으로 자르자고 했더니 진짜 엄마는 자르지 말라고 했대⁠. 학교에서 배웠어⁠.⁠”

성규는 그네 줄을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율비는 아빠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그네를 다시 굴렀다⁠.

“⁠아빠는 자르지 말라고 할 거야⁠?⁠”

“⁠아빠는⁠…⁠…⁠.⁠”

“⁠엄마는 자르자고 할 것 같아⁠. 엄마는 빨리 정하잖아⁠.⁠”

놀이터 입구로 작은 흰 개가 달려 들어왔다⁠. 개 줄 끝에 4단지 부녀회장이 매달려 있었다⁠. 단지 단톡방 방장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얼굴이었다⁠. 개가 성규의 운동화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고⁠, 부녀회장이 줄을 당기며 웃었다⁠.

“⁠1101호 아빠⁠, 집 내놨다며⁠? 앱에 떴던데⁠. 얼마에 내놨어⁠?⁠”

“⁠아직 정하는 중이에요⁠.⁠”

“⁠정하는 중이면 6억 밑으로는 하지 마요⁠. 우리 동 1501호가 작년에 5억 8천에 팔아서 단지가 석 달을 앓았어⁠. 시세라는 게 혼자 거 아니야⁠.⁠”

부녀회장은 대답도 듣지 않고 개에게 끌려갔다⁠. 율비가 그네 위에서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

“⁠아빠⁠, 시세가 뭐야⁠?⁠”

“⁠우리 집이 얼마짜리인지 동네 사람들이 같이 정하는 거⁠.⁠”

“⁠그럼 우리 집인데 우리가 못 정해⁠?⁠”

성규는 대답 대신 그네를 한 번 더 밀었다⁠. 율비의 운동화가 벚나무 가지에 닿을 듯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

저녁에 지애는 율비 방 침대 끝에 앉았다⁠. 율비는 수학 학습지를 펴 놓고 지우개 가루를 모아 공을 만들고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학원 냄새가 났다⁠. 복사지 냄새와 떡볶이 냄새가 반반이었다⁠.

“⁠엄마⁠, 우리 이사 가⁠?⁠”

“⁠아마⁠.⁠”

“⁠아마는 가는 거잖아⁠. 어른들이 아마라고 하면 다 가던데⁠.⁠”

지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율비가 지우개 공을 손바닥에서 굴렸다⁠. 놀이터에서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 얼굴을 한참 보다가 물었다⁠.

“⁠엄마는 이 집 좋아⁠?⁠”

“⁠좋아⁠.⁠”

“⁠근데 왜 팔아⁠?⁠”

“⁠좋아도 팔아야 할 때가 있어⁠.⁠”

“⁠나는 엄마랑 살 거야⁠. 근데 집은 여기면 좋겠어⁠. 둘 다 되면 안 돼⁠?⁠”

“⁠둘 다는 어려워⁠.⁠”

“⁠어른들은 왜 맨날 하나만 골라⁠?⁠”

“⁠어른이라서⁠.⁠”

“⁠그럼 나 어른 안 할래⁠.⁠”

율비가 학습지로 고개를 숙였다⁠. 지애는 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가르마가 비뚤었다⁠. 아침에 묶어 줄 때 지애가 서둘러서 그렇게 됐다⁠.

거실 텔레비전에서 밤 뉴스가 흘러나왔다⁠. 「⁠다음 달부터 주택담보대출 심사 강화⁠… 소득 대비 상환액 따진다⁠」 소득에 비해 갚을 돈이 많으면 대출을 안 내준다는 규제였다⁠. 베란다에서는 성규가 휴대전화로 은행 앱을 열어 놓고 무언가를 계속 눌렀다⁠. 화면 불빛이 성규의 턱을 파랗게 비췄다⁠. 향료 병들이 선반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열 시 십 분⁠, 지애의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수요일까지 기다리신다고 들었어요⁠. 목요일 아침에 연락드릴게요⁠. 그때는 5억 5백입니다⁠. 석묘진⁠」

지애는 문자를 두 번 읽었다⁠. 사흘 이야기는 상가 복도에서 나왔다⁠. 복도에는 지애와 성규와 희철이 있었다⁠. 약국장은 유리문 안에 있었고⁠, 유리문은 닫혀 있었다⁠.

지애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딸기 향료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성규가 돌아보았다⁠.

“⁠당신이 말했어⁠?⁠”

“⁠뭘⁠?⁠”

지애가 휴대전화 화면을 성규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성규가 문자를 읽는 동안 지애는 성규의 얼굴을 보았다⁠. 놀란 얼굴인지⁠, 놀란 척하는 얼굴인지 지애는 가려낼 수 없었다⁠. 열한 해를 같이 살았는데도⁠.

“⁠당신이 그 여자랑 짰어⁠? 값 떨어뜨려 놓고 당신이 싸게 사려고⁠?⁠”

성규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딸기 향료 병 뚜껑이 열린 채였다⁠. 달콤한 냄새가 두 사람 사이에서 점점 짙어졌다⁠.

“⁠내가 그 여자 번호를 어떻게 알아⁠.⁠”

“⁠그럼 누가 알려 줬는데⁠?⁠”

성규는 대답하지 않고 병뚜껑을 닫았다⁠. 지애는 닫힌 병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언제나 대답 대신 뚜껑을 닫는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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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리온2026.11.01· 2화

    약국이랑 공인중개사가 벽 하나 두고 붙어 있는 거, 이혼 숙려 중인 부부한테 너무 잔인한 배치 아니에요?

    • 여시결작가2026.11.01

      그래서 골랐어요. 집을 내놓으러 가는 길에 지애 씨가 열한 해 일한 약국을 지나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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