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73자)

사흘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시향지 끝이 분홍색으로 젖어 있었다⁠. 성규는 종이를 코밑에서 한 번 흔들고 눈을 감았다⁠. 4월 5일 월요일 오전⁠, 솔메향료 연구실은 언제나처럼 딸기와 바닐라와 소독용 알코올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성규가 맡은 일은 편의점 딸기우유에 들어갈 향이었다⁠.

“⁠마 책임님⁠, 거래처에서 또 메일 왔어요⁠.⁠” 후배 연구원이 모니터를 돌려 보였다⁠. 「⁠딸기가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딸기는 어떤 냄새야⁠?⁠”

“⁠모르죠⁠. 책임님이 아시겠죠⁠. 결혼하셨잖아요⁠.⁠”

성규는 시향지를 내려놓았다⁠. 결혼한 사람이 행복한 냄새를 안다는 말에 반박할 근거가 마땅치 않았다⁠. 후배는 성규가 이혼 서류를 냈다는 것을 몰랐다⁠. 연구실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심시간에 성규는 회사 근처 청솔은행 지점 창구에 앉았다⁠. 대출 담당 직원은 서른 중반쯤 된 남자였고⁠, 볼펜 끝을 딸깍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성규는 서류를 내밀었다⁠. 아내 몫 지분을 사들이고 남은 주택담보대출을 혼자 떠안는 방법을 묻는 서류였다⁠.

직원은 모니터를 한참 보다가 볼펜을 멈췄다⁠.

“⁠고객님⁠, 신용대출이 5천 있으시네요⁠.⁠”

“⁠네⁠.⁠”

“⁠그것 때문에 소득 대비 갚으시는 돈이 이미 한도 가까이 와 있어요⁠. 다음 달부터는 심사가 더 까다로워지고요⁠. 주택담보대출 4억 2천을 단독으로 받으시는 건 어렵습니다⁠.⁠”

“⁠신용대출을 빼면요⁠?⁠”

“⁠갚으시면 빠지죠⁠.⁠”

직원은 친절하게 웃었다⁠. 성규도 따라 웃었다⁠. 지점 벽 텔레비전에서 경제 뉴스가 흘렀다⁠. 「⁠미국 금리 인하 또 미뤄⁠… 환율 다시 올라⁠」 바다 건너 누군가 금리를 미루면 일산 아파트 한 채를 사려는 남자의 한도가 줄었다⁠. 성규는 서류를 접어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은행 문을 나서며 성규는 여섯 해 전 겨울을 떠올렸다⁠. 파주에서 걸려 온 전화⁠, 떨리던 목소리⁠, 그리고 끝에 덧붙던 한마디⁠. 지애한테는 말하지 말게⁠. 성규는 이 부탁을 여섯 해 동안 지켰다⁠. 지킨 결과가 오늘 창구에서 숫자 하나로 돌아왔다⁠.

*

같은 월요일 오후⁠, 지애는 물푸레약국 조제실에서 알약을 세고 있었다⁠. 약포지 기계가 덜컹거릴 때마다 종이 냄새와 쓴 가루 냄새가 올라왔다⁠. 열한 해 동안 맡아 온 냄새라 지애는 이 냄새를 맡으면 손이 먼저 빨라졌다⁠.

계산대 앞에는 마흔 중반쯤 된 남자가 서 있었다⁠. 몸에 붙는 크롭 재킷에 한정판 운동화를 신고⁠, 바구니에 탈모 샴푸와 숙취해소제와 눈 영양제를 담아 왔다⁠.

“⁠약사님⁠, 이거 셋 같이 먹어도 돼요⁠? 요즘 애들 따라 클럽을 한번 가 봤더니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샴푸는 드시는 거 아니에요⁠.⁠”

“⁠아⁠, 그건 알죠⁠.⁠” 남자가 웃었다⁠. “⁠농담이에요⁠. 영포티 농담⁠.⁠”

뒤에서 약국장이 혀를 찼다⁠. 예순넷의 약국장은 남자가 나가자마자 지애 옆으로 와서 목소리를 낮췄다⁠.

“⁠약사님⁠, 2층 학원 빠진 자리 누가 샀는지 알아요⁠? 상가 건물이 통째로 주인이 바뀌었대요⁠. 우리 재계약이 6월인데⁠.⁠”

“⁠새 주인이 누군데요⁠?⁠”

“⁠나도 몰라요⁠. 관리사무소에서도 말을 안 해⁠. 여자라는 것만 알아⁠.⁠”

지애의 휴대전화가 가운 주머니에서 울렸다⁠. 후곡 학원가 전세 집주인의 문자였다⁠. 「⁠가계약 확정하시려면 금요일까지 계약금 넣어 주세요⁠. 다른 분도 보러 오신다고 해서요⁠.⁠」 지애는 문자를 닫고 약포지를 다시 접었다⁠. 금요일까지 계약금을 넣으려면 이 집이 수요일에는 팔려야 했다⁠. 손이 빨라졌다⁠. 약국장이 지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천천히 세요⁠. 약은 빨리 센다고 빨리 낫지 않아⁠.⁠”

*

화요일 오후 두 시⁠, 두 번째 손님은 여든이 넘은 할머니와 쉰 살쯤 된 아들이었다⁠. 아들이 집을 사고⁠, 할머니가 같이 산다고 했다⁠. 할머니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벌름거렸고⁠, 신발도 벗기 전에 신발장 문부터 열었다⁠.

지애는 희철이 시킨 대로 소파에 앉아 성규의 손을 잡았다⁠. 성규는 오후 반차를 냈다⁠. 부엌에서는 아침에 희철이 두고 간 원두로 커피가 내려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거실을 지나 부엌 찬장을 하나씩 열었다⁠. 싱크대 밑⁠, 냉장고 옆 틈⁠, 세탁실 배수구까지 코를 들이밀었다⁠. 아들이 엄마 그만 좀 하라고 할 때마다 할머니는 손을 휘휘 저었다⁠.

“⁠집은 냄새를 맡아 봐야 혀⁠. 사람은 얼굴로 속이고 집은 냄새로 속여⁠.⁠”

할머니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 선반 위 향료 병들이 오후 햇빛에 반짝였다⁠. 딸기⁠, 바나나⁠, 바닐라⁠, 볶은 보리⁠. 할머니가 병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더니 지애를 돌아보았다⁠.

“⁠딸기 냄새로 곰팡이 냄새를 덮었구먼⁠.⁠”

“⁠아니에요⁠, 어머님⁠. 남편 회사 거예요⁠.⁠”

“⁠회사가 딸기 공장이여⁠?⁠”

“⁠향료 회사예요⁠.⁠” 성규가 일어나 베란다로 갔다⁠. “⁠우유나 과자에 들어가는 향을 만들어요⁠.⁠”

할머니가 성규를 위아래로 훑었다⁠. 회색 후드 집업과 덥수룩한 머리에서 눈이 멈췄다⁠.

“⁠향수도 만들어⁠?⁠”

“⁠예전에 그러려고 했죠⁠.⁠”

“⁠왜 안 했어⁠?⁠”

성규는 병뚜껑을 닫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지애는 소파에서 성규의 등을 보았다⁠.

“⁠집 사느라고요⁠. 여섯 해 전에 서울 성수동에 작은 향수 회사가 있었는데⁠, 조향사로 오라고 했어요⁠. 월급이 지금 회사 절반이었어요⁠. 마침 그달에 이 집 계약을 했고⁠, 대출이 나왔고요⁠. 대출 갚으려면 월급이 줄면 안 되니까⁠.⁠”

지애는 그런 제안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들었다⁠. 여섯 해 전⁠, 이 집을 사자고 정한 사람은 지애였다⁠. 계약서에 먼저 도장을 찍은 사람도 지애였다⁠. 성규는 그때도 “⁠그래⁠” 하고 커피를 내렸다⁠.

지애가 웃는 얼굴 그대로 성규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그런 제안이 있었어⁠?⁠”

“⁠있었어⁠.⁠”

“⁠왜 말 안 했어⁠?⁠”

“⁠당신이 벌써 도장 찍었잖아⁠.⁠”

할머니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지애에게 물었다⁠.

“⁠새댁⁠, 몰랐어⁠?⁠”

거실이 조용해졌다⁠. 아들이 엄마 팔을 잡아끌었다⁠. 할머니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지애를 한 번 더 보았다⁠.

“⁠집은 좋은디⁠, 둘이 냄새가 달러⁠. 한 집에 냄새가 둘이면 못 써⁠.⁠”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 소리가 멀어졌다⁠. 희철이 소파에 주저앉아 은단 통을 흔들었다⁠. 오늘은 통이 가득 차 있었다⁠.

“⁠여든 넘은 분들이 제일 무서워요⁠. 코가 안 늙어⁠.⁠”

*

화요일 밤 열한 시⁠, 성규의 휴대전화가 식탁 위에서 울렸다⁠. 화면이 위를 보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던 지애가 고무장갑을 낀 채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청솔은행 마성규 고객님⁠, 신용대출 5⁠,000만 원 이자 납입일은 4월 10일입니다⁠.⁠」

지애는 고무장갑을 벗지 않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성규는 향료 선반 앞에 쪼그려 앉아 시향지를 접고 있었다⁠. 지애가 휴대전화를 성규의 코앞에 내밀었다⁠. 장갑 끝에서 세제 거품이 뚝 떨어졌다⁠.

“⁠신용대출 오천⁠? 언제 받았어⁠?⁠”

성규가 화면을 보고 천천히 일어났다⁠.

“⁠오래됐어⁠.⁠”

“⁠어디에 썼어⁠?⁠”

“⁠말 못 해⁠.⁠”

“⁠여자야⁠?⁠”

“⁠아니⁠.⁠”

“⁠도박이야⁠?⁠”

“⁠아니⁠.⁠”

“⁠코인이야⁠?⁠”

“⁠코인은 당신이 하지 말라며⁠.⁠”

지애는 웃음이 날 뻔한 것을 이로 깨물었다⁠. 지금 웃으면 지는 것이었다⁠.

“⁠금요일 밤마다 나가는 거⁠, 그거랑 상관있어⁠?⁠”

성규가 시향지를 선반에 내려놓았다⁠. 딸기 향이 베란다 안에 고였다⁠. 지애는 성규의 얼굴을 보았고⁠, 성규는 지애의 고무장갑을 보았다⁠.

“⁠상관있어⁠. 근데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 아니야⁠.⁠”

“⁠그럼 말해⁠.⁠”

“⁠말 못 해⁠.⁠”

“⁠당신은 말을 안 해⁠.⁠” 지애가 고무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열한 해 내내 그랬어⁠. 그래서 내가 혼자 정했어⁠. 집도⁠, 학원도⁠, 대출도⁠. 당신이 말을 안 하니까⁠.⁠”

“⁠당신은 묻지를 않아⁠.⁠” 성규의 목소리는 낮았다⁠. “⁠정해 놓고 알려 주지⁠. 물어봤으면 말했을 거야⁠. 어쩌면⁠.⁠”

“⁠어쩌면⁠?⁠”

성규가 대답하지 않았다⁠. 지애는 바닥에 떨어진 고무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하나가 뒤집혀 있었다⁠. 거실에서 율비 방 문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지애가 율비 방에 들어갔을 때 율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에 초록색 슬라임이 쥐여 있었다⁠. 지애가 침대 끝에 앉자 이불 속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엄마⁠, 아빠가 나쁜 사람이야⁠?⁠”

“⁠아니⁠.⁠”

“⁠그럼 엄마가 나쁜 사람이야⁠?⁠”

“⁠아니⁠.⁠”

“⁠그럼 왜 싸워⁠?⁠”

지애는 율비의 손에서 슬라임을 빼 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대답을 고르는 동안 슬라임 통에서 인공 사과 냄새가 났다⁠.

“⁠좋은 사람끼리도 싸워⁠.⁠”

“⁠그럼 좋은 사람끼리는 이혼도 해⁠?⁠”

지애는 이불 위로 율비의 등을 두 번 두드렸다⁠. 이불 속은 더 묻지 않았다⁠.

*

수요일 아침⁠, 지애는 일곱 시에 식탁에 앉았다⁠. 사흘째였다⁠. 성규가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왔다⁠. 하나를 지애 앞에 놓으며 말했다⁠.

“⁠대출 안 나와⁠.⁠”

“⁠알아⁠.⁠”

“⁠알았어⁠?⁠”

“⁠어젯밤에 알았지⁠.⁠” 지애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 씨 부부한테 가자⁠. 6월 30일 잔금⁠. 당신이 싫으면 잔금 날짜는 같이 다시 잡아⁠.⁠”

성규는 머그잔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애는 같이 다시 잡자는 말을 하고 나서야 이 말이 입에서 처음 나온 것을 알았다⁠. 희철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희철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원두 봉지도 방향제도 없었다⁠. 얼굴이 잿빛이었고 손에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사모님⁠, 연 씨 부부가 안 한답니다⁠.⁠”

“⁠왜요⁠?⁠”

희철이 화면을 내밀었다⁠. 「⁠물푸레4단지 소통방⁠」 단지 사람 육백 명이 들어 있는 단톡방이었다⁠. 프로필 사진 없는 「⁠411동 주민⁠」이 새벽 다섯 시에 올린 글이 있었다⁠.

「⁠411동 1101호 이혼 숙려 중이래요⁠. 숙려 끝나면 급매로 5억 초반에 나온다고⁠. 집 보시는 분들 조금만 기다리세요⁠.⁠」

밑으로 답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헐 거기 맨날 커피 냄새 나는 집⁠?⁠」 「⁠5억 초반이면 단지 시세 다 무너지는데요⁠」 「⁠이혼은 개인 사정이지만 시세는 공공재입니다⁠」 「⁠1501호 때도 이랬어요⁠」

“⁠연 씨 부부가 이걸 봤어요⁠. 기다리면 오천이 빠지는데 왜 지금 사냐고⁠. 가계약금은 자기들이 깨는 거라 포기하겠답니다⁠.⁠”

지애가 화면을 쥔 채 말했다⁠.

“⁠돌려줘요⁠.⁠”

“⁠사모님⁠, 매수인이 깬 거라 안 돌려줘도 됩니다⁠.⁠”

“⁠돌려줘요⁠. 그 사람들 잘못 아니잖아요⁠.⁠” 지애가 성규를 돌아보았다⁠. “⁠괜찮지⁠?⁠”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은단 통을 꺼내지도 않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단지 전체 앞에서 연기하셔야 돼요⁠. 거실에서만 하던 거⁠, 엘리베이터에서도⁠, 놀이터에서도⁠, 분리수거장에서도⁠.⁠”

지애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성규를 보았다⁠. 숙려라는 말은 법원 봉투에만 있었다⁠. 이 집 밖에서 숙려라는 말을 쓴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검은 트렌치코트에 아무 냄새도 없던 사람⁠.

“⁠당신이 말했어⁠?⁠”

“⁠내가 누구한테 말해⁠.⁠” 성규가 머그잔을 들었다⁠. “⁠나 단톡방도 없어⁠.⁠”

희철이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지애는 웃지 않았다⁠. 식탁 위 달력에서 이번 주 토요일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단지 벚꽃 장터 날이었다⁠.

“⁠토요일 장터⁠, 우리 둘이 좌판 나가⁠.⁠”

“⁠우리가⁠?⁠”

“⁠응⁠. 손잡고⁠.⁠”

성규가 식탁 위 머그잔을 지애 앞으로 조금 밀었다⁠. 지애는 받지 않고 희철의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411동 주민⁠」의 프로필을 눌렀다⁠. 사진도⁠, 이름도⁠, 상태 글도 없었다⁠. 회색 동그라미 하나가 화면 가운데에서 지애를 마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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