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693자)

누가 보낸 전보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1월 13일 금요일 저녁 여섯 시⁠, 김인철은 보통강 기슭 아파트 9층 복도에서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보통강은 평양 시내를 굽이쳐 대동강으로 드는 물줄기였다⁠. 승강기는 7층에서 멈춰 있었고⁠, 인철과 혜림은 계단 두 층을 걸어 올라왔다⁠. 계단참마다 전등이 하나씩 꺼져 있었다⁠. 1층 관리원 아주머니가 두 사람이 올라간 시각을 수첩에 적었다⁠.

문이 열렸다⁠. 허리가 조금 굽은 노인이 흰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채 서 있었다⁠. 회색 털실 조끼 아래로 털 슬리퍼가 보였다⁠. 인철이 신은 것과 같은 회색이었다⁠. 노인은 손자의 얼굴보다 발을 먼저 보았다⁠.

“⁠아직도 신고 다니냐⁠.⁠”

“⁠할아버지가 사 주신 거예요⁠. 열두 살 때⁠.⁠”

“⁠그건 벌써 닳았겠지⁠.⁠”

“⁠네 번 새로 샀어요⁠. 같은 가게에서⁠.⁠”

김평일은 문지방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 손자를 들였다⁠. 여든을 앞둔 손이 인철의 등에 한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 혜림이 뒤따라 들어가 현관에 구두를 벗었고⁠, 부엌 식탁 끝 의자에 앉아 손을 무릎에 모았다⁠. 안내원은 가족 방문에 같이 앉는다고 했다⁠.

거실 벽에는 액자가 둘 있었다⁠. 하나는 모든 집에 있는 초상화였고⁠, 하나는 프라하 카를교의 흑백 사진이었다⁠. 다리 난간에 비둘기 세 마리가 앉아 있었다⁠. 식탁에는 감자 반죽을 삶아 썬 것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크네들리키예요⁠?⁠”

“⁠감자로만 했다⁠. 밀가루가 모자라서⁠.⁠”

“⁠프라하에서는 이걸 고깃국물에 찍어 먹어요⁠.⁠”

“⁠평양에서는 간장에 찍어 먹어라⁠.⁠”

인철은 크네들리키 한 조각을 간장에 찍어 먹고 웃었다⁠. 맛이 달랐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썬 두께는 같았다⁠.

“⁠22번은 아직 성 밑으로 도냐⁠?⁠”

“⁠말라스트라나 지나서 성까지 올라가요⁠. 제가 오후 조를 몰아요⁠. 관광객이 문간에 서서 사진 찍느라 안 들어와서⁠, 하루에 서른 번은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해요⁠. 체코말로요⁠.⁠”

“⁠나는 그 전차를 딱 한 번 탔다⁠. 대사는 전차를 타는 게 아니라더라⁠. 그래서 밤에 몰래 탔지⁠.⁠”

“⁠누가 그랬어요⁠, 대사는 안 탄다고⁠?⁠”

“⁠대사관 사람들이⁠. 대사가 전차에서 누구 옆에 앉는지 보고서를 써야 하니까⁠.⁠”

김평일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기침을 했고⁠, 기침이 멎자 손자의 말씨를 흉내 냈다⁠.

“⁠너는 내 말을 그대로 쓰는구나⁠. 「⁠하오⁠」 「⁠하였소⁠」⁠. 여기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 안 한다⁠. 너 공항에서 경비병한테 뭐라고 했냐⁠?⁠”

“⁠동무⁠, 수고하였소⁠.⁠”

“⁠그 사람 오늘 밤 꿈에 나올 거다⁠.⁠” 인철은 외투 안주머니에서 전보를 꺼내 식탁에 펼쳤다⁠. 김평일이 돋보기를 쓰고 종이를 들어 올렸다⁠. 글자를 한 줄씩 짚어 가다 「⁠김평일⁠」 세 글자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돋보기를 벗어 식탁에 내려놓았다⁠.

“⁠내가 보낸 거 아니다⁠.⁠”

부엌 의자에서 혜림의 손이 무릎 위에서 마주 쥐어졌다⁠. 인철은 전보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누가 보냈어요⁠?⁠”

“⁠내 이름을 쓰는 사람은 많다⁠. 내가 쓰는 일만 없지⁠.⁠”

김평일은 전보를 반으로 접어 손자 앞으로 밀었다⁠. 손등에 검버섯이 앉아 있었다⁠.

“⁠1989년 불가리아에 처음 내렸을 때 일이다⁠. 대사로 부임하는 날이었는데 공항에 대사관 사람이 한 명도 안 나왔다⁠. 나랑 악수한 사람이 다음 해 어디로 가는지 다들 알았으니까⁠. 흰 차를 타고 다니면 뒤에서 「⁠곁가지가 어디로 간다⁠」 하고 보고가 올라갔다고도 하더라⁠. 나는 그 보고를 본 적이 없다⁠. 들었을 뿐이다⁠.⁠”

“⁠할아버지⁠, 프라하로 가요⁠. 제가 표 두 장 끊을게요⁠.⁠”

“⁠나는 마흔 해를 밖에서 떠돌다 돌아왔다⁠. 여기서 늙으려고 왔다⁠.⁠”

“⁠여기서는 할아버지 이름으로 전보가 나가요⁠. 할아버지 모르게⁠.⁠”

김평일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보통강 얼음 위에 아이들이 썰매를 끌고 있었다⁠. 썰매 하나가 뒤집혀 아이 둘이 얼음 위를 굴렀고⁠, 둘 다 울지 않고 일어나 웃었다⁠.

“⁠너 가지치기 해 봤냐⁠?⁠”

“⁠프라하 할머니네 사과나무요⁠. 한 번⁠.⁠”

“⁠곁가지는 원줄기 살리려고 친다⁠. 치는 사람은 언제나 원줄기 편에 서서 톱을 든다고 말하지⁠. 가지는 말을 못 하고⁠.⁠”

인철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열네 해 동안 편지 한 통 안 하셨잖아요⁠.⁠”

“⁠편지는 쓰면 읽는 사람이 둘이다⁠. 너하고⁠, 너 말고⁠.⁠”

김평일은 부엌 끝에 앉은 혜림을 보지 않았다⁠. 혜림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김평일은 조끼 주머니에서 몽당연필을 꺼내 신문 귀퉁이를 찢었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획은 반듯했다⁠. 노인은 종이를 접지 않고 손자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가거라⁠」

전보의 「⁠곧 오너라⁠」 옆에 놓인 연필 글씨 세 자였다⁠. 인철은 열네 살 공책 맨 뒷장의 글씨를 떠올렸다⁠. 같은 손이었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오혜림은 숙소 1층 안내원 방 책상에서 종이 두 장 사이에 먹지를 끼우고 볼펜을 쥐었다⁠. 손가락에 아직 크네들리키의 감자 전분이 말라붙어 있었다⁠. 혜림은 손가락을 바지에 문지르고 첫 줄을 썼다⁠.

「⁠18시 07분 김평일 숙소 도착⁠. 김평일은 손자의 슬리퍼를 먼저 봄⁠」

두 번째 줄에서 볼펜이 멈췄다⁠. 혜림은 책상 전화로 장명길 대좌의 집에 걸었다⁠. 신호가 일곱 번 가서야 장명길이 받았다⁠. 혜림이 김평일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 수화기 너머에서 숨소리만 한참 들렸다⁠.

“⁠그 줄은 쓰지 마라⁠.⁠”

“⁠들은 말을 보고하는 것이 안내원 일입니다⁠.⁠”

“⁠들은 말을 다 쓰면 듣지 않은 사람들까지 다친다⁠. 김평일이 보내지 않았으면 누가 보냈는지를 묻게 되고⁠, 묻는 순간 군복 입은 사람들 이름이 나온다⁠. 그건 네가 감당할 이름이 아니다⁠.⁠”

“⁠그럼 무엇을 쓰라는 겁니까⁠?⁠”

“⁠손자가 할아버지를 만나 반가워했다⁠. 감자 요리를 먹었다⁠. 그거면 된다⁠.⁠”

전화가 끊겼다⁠. 혜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볼펜을 다시 쥐었다⁠. 아버지는 탄광 사무실에서 하루에 열 장씩 보고서를 옮겨 적었다⁠. 거짓말이 든 보고서를 옮겨 적을 때도 글씨는 반듯했다고⁠, 그래서 더 싫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김평일은 전보를 자기가 보내지 않았다고 말함⁠. 김평일은 신문 귀퉁이에 연필로 「⁠가거라⁠」를 써서 손자에게 줌⁠」

혜림은 두 줄을 끝까지 꾹꾹 눌러 썼다⁠. 먹지를 빼서 전등에 비추자 「⁠가거라⁠」가 거꾸로 비쳤다⁠. 혜림은 먹지를 접어 안주머니의 어제 먹지 위에 포갰다⁠.

*

1월 14일 토요일 아침 아홉 시⁠, 리학철은 본부청사 3층 끝 검토실에서 총무부 과장 문정숙과 마주 앉았다⁠. 검토실 창문은 성에가 껴서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문정숙이 서류철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고 은 줄 달린 안경을 코끝에 걸었다⁠.

“⁠2월 하순 전원회의 결정문 초안입니다⁠. 조직지도부 검토 의견을 다음 주까지 붙여 주십시오⁠. 총무부장 동지 말씀입니다⁠.⁠”

첫 장은 늘 보던 결정문의 틀이었다⁠. 당의 영도를 받드는 문장⁠, 인민 경제의 과업⁠, 국방 공업의 과업⁠. 세 번째 장 맨 아래에 학철이 한 번도 결정문에서 본 적 없는 낱말이 있었다⁠.

「⁠백두의 혈통을 흐리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배격하며⁠, 김평일 일가의 곁가지는 친다⁠」

초안 뒤에 사진 한 장이 클립으로 붙어 있었다⁠. 만경대 초가 앞마당⁠, 군복 외투의 노인 셋과 노인들 사이의 빈자리⁠, 빈자리에서 한 걸음 떨어진 회색 외투의 키 큰 젊은이⁠. 사진 아래에 연필로 「⁠1월 11일 08시 41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과장 동무⁠, 당 결정문에 한 집안의 이름이 오른 전례가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날입니다⁠. 45일째입니다⁠.⁠”

“⁠제가 아는 결정문에는 집안 이름이 오른 적이 없습니다⁠.⁠”

“⁠1970년대에는 결정문 없이 쳤지요⁠. 사진 한 장 같이 찍은 사람까지 쳤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결정문으로 칩니다⁠. 이름을 밝히고 치는 것이 더 바르지 않습니까⁠?⁠”

학철은 펜을 들지 않았다⁠. 평양에 올라온 해에 학철도 들었다⁠. 김평일과 김일성종합대학을 같이 다닌 사람⁠, 사진 한 장을 함께 찍은 사람까지 곁가지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로 갔다는 말⁠. 들었을 뿐 본 사람은 없었다⁠. 본 사람은 말하지 않았다⁠.

“⁠이 사진은 어디서 났습니까⁠?⁠”

“⁠군에서 돌았습니다⁠. 어제 오후에는 총정치국 강연 자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곁가지 손자를 세운 사람들이 사진을 먼저 돌렸으니 우리가 결정문을 먼저 쓰는 겁니다⁠.⁠”

문정숙이 서류철 맨 뒤에서 종이 두 장을 더 꺼냈다⁠. 보위성 대위의 보고서 사본이었다⁠.

“⁠어제저녁 김평일 숙소 방문 보고도 왔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를 만나 반가워했다고 합니다⁠. 감자 요리를 먹었다고⁠.⁠”

학철은 사본을 받아 읽었다⁠. 반듯한 글씨였다⁠. 두 줄이 전부였다⁠. 볼펜 자국이 종이 뒤까지 배어 있지 않았다⁠. 학철은 사본을 뒤집어 보았다⁠. 뒷면은 매끈했다⁠.

“⁠검토 의견은 「⁠검토 중⁠」으로 붙이겠습니다⁠.⁠”

“⁠다음 주까지입니다⁠.⁠”

문정숙이 일어나 안경을 벗었다⁠. 안경 줄이 목에서 흔들렸다⁠. 문이 닫힌 뒤 학철은 초안 세 번째 장의 「⁠곁가지는 친다⁠」 여섯 글자를 손가락으로 덮었다가 떼었다⁠. 덮어도 떼어도 글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

같은 날 오후 세 시⁠, 혜산 장마당 옷 매대 줄 끝에서 윤설향은 시장관리원 박옥순의 앞치마 주머니에 코트 한 벌을 접어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주머니가 코트보다 작았다⁠.

“⁠입구 자리 하나만 주시라요⁠. 쌀 매대 옆 둘째 칸⁠.⁠”

“⁠입구는 줄 서 있다⁠. 앞에 일곱이다⁠.⁠”

“⁠코트 한 벌이면 몇 번째로 올라감둥⁠?⁠”

“⁠털깃 달린 거면 셋째⁠. 털깃 없는 거면 그대로 일곱째⁠.⁠”

“⁠털깃 값이 오십 위안인데 네 칸을 올려 주심까⁠? 털깃이 그렇게 대단함까⁠?⁠”

“⁠대단하고 뭐고⁠, 우리 딸이 털깃을 좋아한다⁠.⁠”

옥순은 코트를 받지 않고 손가락으로 털깃만 집어 보더니 수첩을 덮었다⁠. 다음 주에 다시 말하라고 했다⁠. 설향은 코트를 옷걸이에 도로 걸었다⁠. 강 건너 장백에서 넘어온 써비차 운전수가 매대 앞에 쭈그려 앉아 두부밥을 먹고 있었다⁠. 써비차는 돈을 받고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차였다⁠. 운전수는 기름에 지진 두부 속에 쌀밥을 채운 두부밥을 우물거리며 중국 텔레비전 이야기를 했다⁠.

“⁠장백 사람들 다 아오⁠. 중국 방송에서 북조선 지도자가 마흔 날 넘게 안 보인다고 하더라고⁠. 장백 장사꾼들은 내기를 걸었소⁠. 설 전에 나오나⁠, 설 넘어서 나오나⁠.⁠”

“⁠우리 장사꾼들은 내기 안 하오⁠. 코트만 팔지⁠.⁠”

“⁠코트는 평양에서 열 벌 더 왔소⁠. 간부 집 딸들이오⁠. 털깃 달린 걸로⁠.⁠”

설향은 운전수가 내민 주문 종이를 받아 매대 기둥의 신문 사진 옆에 꽂았다⁠. 강바람이 불자 비닐에 싼 사진과 주문 종이가 함께 떨렸다⁠.

*

같은 날 밤 열 시⁠, 인철은 숙소 방 탁자에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타자기로 친 「⁠곧 오너라⁠」와 연필로 쓴 「⁠가거라⁠」⁠. 방열기가 똑똑 소리를 내며 식어 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인철이 일어나 열었다⁠. 혜림이 외투를 입은 채 서 있었다⁠.

“⁠들어오시오⁠. 슬리퍼 하나 더 있소⁠.⁠”

“⁠문간에서 말하겠습니다⁠.⁠”

혜림은 탁자 위의 종이 두 장을 보았다⁠. 오래 보지 않았다⁠.

“⁠동무는 불려 온 게 아닙니다⁠. 세워진 겁니다⁠.⁠”

“⁠누가 세웠소⁠?⁠”

“⁠이름은 말할 수 없습니다⁠. 동무가 아는 이름입니다⁠. 만경대 사진은 어제 군 강연 자료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달 전원회의 결정문 초안에는 할아버지 집안 이름이 올랐습니다⁠.⁠”

인철은 문틀을 짚었다⁠. 털 슬리퍼 속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그럼 나를 세운 사람한테 가서 내리겠다고 말하겠소⁠.⁠”

“⁠내리는 것도 위에서 정합니다⁠.⁠”

“⁠위가 어디요⁠?⁠”

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가 풀었다⁠. 혜림은 경례도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인철은 문을 닫고 탁자로 돌아와 「⁠가거라⁠」 세 글자를 전보 위에 포개 놓았다⁠. 연필 글씨가 타자 글씨의 「⁠곧 오너라⁠」를 덮었다⁠. 창밖에서 썰매 끄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보통강은 대동강까지 가로등 불빛만 이어 놓고 있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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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읽기2026.11.02· 3화

    전보는 「곧 오너라」인데 할아버지가 손으로 써 준 건 「가거라」. 오라는 글자와 가라는 글자가 한 책상에 놓이는 장면에서 숨 멈췄어요.

    • 윤서각작가2026.11.02

      전보는 타자기로 쳤고 「가거라」는 할아버지가 연필로 썼어요. 인철이 어느 쪽 손을 믿는지가 끝까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