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20자)

외교단 매점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1월 17일 화요일 오전 열한 시⁠, 김인철은 문수동 외교단 구역 매점 계산대 앞에서 먼지 앉은 맥주병 두 개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외교단 매점은 외국 손님과 대사관 사람들이 유로와 달러와 중국 돈으로 물건을 사는 가게였다⁠. 진열장 맨 아랫단⁠, 냉동 만두 상자 뒤에서 나온 병이었다⁠. 상표에 체코말이 적혀 있었고 유통 기한은 2029년 3월이었다⁠.

“⁠이거 얼마요⁠?⁠”

“⁠외교단 손님이 두고 간 겁니다⁠. 기한이 다섯 해 지났으니 반값만 받습니다⁠. 한 병 일 유로⁠.⁠”

계산대 뒤의 송명옥이 주판알을 튕기듯 계산기를 두드렸다⁠. 마흔 남짓한 여자였고⁠, 손톱이 짧았고⁠, 말보다 계산기가 빨랐다⁠.

“⁠체코 맥주는 기한이 지나도 체코 맥주요⁠.⁠”

“⁠기한 지난 맥주는 어느 나라 것이든 기한 지난 맥주입니다⁠.⁠”

“⁠동무는 체코에 안 가 봐서 그렇소⁠.⁠”

“⁠손님은 평양 매점에 처음 와 봐서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환불이 없습니다⁠.⁠”

인철은 1유로 동전 두 닢을 내고 병 두 개를 외투 주머니에 하나씩 넣었다⁠. 옆에서 털모자를 쓴 러시아 여자가 소주 여섯 병과 냉동 만두 두 상자를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여자가 인철의 외투 주머니에서 삐죽 나온 병목을 보고 러시아말로 무엇이라고 했고⁠, 송명옥이 받아서 조선말로 옮겼다⁠.

“⁠그거 마시면 배탈 난답니다⁠. 지난여름에 그 여자 남편이 마셨답니다⁠.⁠”

“⁠남편은 살았소⁠?⁠”

송명옥이 러시아말로 물었고⁠, 여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살았는데⁠, 그 뒤로 맥주를 안 마신답니다⁠.⁠”

인철은 매점 구석의 국제전화 칸으로 갔다⁠. 유리문이 달린 좁은 칸이었고⁠, 벽에 「⁠국제통화 일 분 이 유로⁠」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인철은 송명옥에게 십 유로를 맡기고 수화기를 들었다⁠. 외우고 있는 번호는 프라하 신시가지의 작은 여행사였다⁠. 전차 운전사 동료의 누나가 하는 곳이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체코말이 들렸다⁠.

“⁠아호이⁠, 야나⁠. 나 인철이야⁠. 평양에서 걸어⁠. 표 두 장이 필요해⁠. 평양에서 베이징⁠, 베이징에서 프라하⁠. 날짜는⁠…⁠…⁠.⁠”

유리문이 열렸다⁠. 혜림이 손가락 하나로 전화기 걸쇠를 눌렀다⁠. 수화기 속 체코말이 뚝 끊겼다⁠. 혜림은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통화하려면 안내원에게 먼저 말해야 합니다⁠.⁠”

“⁠먼저 말하면 걸게 해 주오⁠?⁠”

“⁠위에 물어봐야 합니다⁠.⁠”

“⁠그럼 먼저 말해도 안 되는 거요⁠.⁠”

“⁠네⁠.⁠”

혜림이 너무 쉽게 대답해서 인철은 수화기를 든 채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멎자 수화기를 걸쇠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려권을 가진 사람이오⁠. 공화국 려권도 있고 체코 영주권도 있소⁠.⁠”

“⁠려권은 보위성 금고에 있습니다⁠.⁠”

“⁠그럼 금고를 열어 주시오⁠.⁠”

“⁠금고 열쇠는 제게 없습니다⁠.⁠”

“⁠누구한테 있소⁠?⁠”

“⁠동무를 세운 사람들한테도 없고⁠, 동무 집안을 치려는 사람들한테도 없습니다⁠. 그래서 금고입니다⁠.⁠”

송명옥이 계산대에서 목을 길게 뺐다⁠.

“⁠손님⁠, 통화는 이십 초였는데 일 분 요금입니다⁠. 거스름은 팔 유로⁠.⁠”

인철은 거스름돈을 받아 세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동전이 맥주병에 부딪쳐 짤랑거렸다⁠. 매점 문을 나서는데 문 옆 신문대에 노동신문이 꽂혀 있었다⁠. 1면 아래 귀퉁이에 털깃 단 검은 가죽코트를 입은 김주애가 혼자 서 있었다⁠. 인철은 신문 앞에서 걸음을 늦췄고⁠, 혜림은 늦추지 않았다⁠.

*

1월 18일 수요일 아침 아홉 시⁠, 리학철은 본부청사 4층 조직지도부 회의실 긴 탁자의 여섯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과장 열두 사람이 탁자 양옆에 앉았고⁠, 맨 끝에 부부장 강성호가 앉았다⁠. 강성호는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늘 찻잔 뚜껑을 세 번 두드렸다⁠. 오늘도 세 번이었다⁠.

“⁠오늘 회의 보고 순서⁠. 인민경제 담당 과장이 먼저⁠.⁠”

인민경제 담당 과장이 일어나 원고를 펼쳤다⁠. 첫 문장이 「⁠위대한 당의 령도 따라 새해 첫 달 계획을 넘쳐 수행하고 있는 전국의 간부들은⁠」으로 시작했다⁠. 강성호가 찻잔 뚜껑을 한 번 두드렸다⁠.

“⁠제목만⁠.⁠”

“⁠예⁠. 제목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새해 첫 달 간부 동향에 대하여⁠」입니다⁠.⁠”

“⁠내용은⁠?⁠”

“⁠내용은 별일 없다입니다⁠.⁠”

“⁠알았다⁠. 앉으라⁠.⁠”

과장 열둘이 동시에 「⁠알았습니다⁠」를 말했다⁠. 학철도 말했다⁠. 학철 옆자리의 군사 담당 과장이 소리 없이 하품을 삼켰다⁠. 강성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학철을 보았다⁠.

“⁠간부과⁠. 열두 장은⁠?⁠”

“⁠책상에 그대로 있습니다⁠. 49일째입니다⁠.⁠”

“⁠날수는 묻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조직지도부장 조용원 동지께서 말씀하셨다⁠. 비상시 간부 비준 절차의 세 번째 안을 내라⁠. 첫 번째 안은 총무부의 대리 비준⁠, 두 번째 안은 향도 동지의 서명이다⁠. 세 번째 안은 간부과가 쓴다⁠.⁠”

학철은 「⁠조용원⁠」이라는 이름에서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2026년 6월이었다⁠. 9차 당대회에서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이 된 김재룡이 넉 달 만에 모든 직무에서 해임됐고⁠, 대회 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옮겨 앉았던 조용원이 석 달 만에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으로 돌아왔다⁠. 김정은 곁에서 늘 수첩을 펴 들던 사람이었다⁠. 2026년 여름 본부청사 식당에서는 「⁠비서실장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돌았다⁠.

“⁠세 번째 안에는 누구 이름을 넣으라는 말씀입니까⁠?⁠”

“⁠이름을 넣지 말라는 말씀이다⁠.⁠”

탁자 위가 조용해졌다⁠. 학철은 펜을 내려놓았다⁠.

“⁠부부장 동지⁠. 이름 없는 비준은 비준이 아닙니다⁠. 도당은 이름을 보고 짐을 쌉니다⁠.⁠”

“⁠그러니 자네가 비준이 되는 말을 찾으라는 거다⁠. 이름 없이도 짐을 싸게 하는 말⁠.⁠”

“⁠그런 말이 있으면 전쟁 때 벌써 썼을 겁니다⁠.⁠”

강성호가 찻잔 뚜껑을 두 번 두드렸다⁠. 두 번은 처음이었다⁠. 과장 몇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 주까지⁠. 이상⁠.⁠”

회의가 끝나고 복도로 나오자 진경훈이 계단참에 서 있었다⁠. 선전선동부는 5층이었다⁠. 진경훈은 4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과장 동지⁠, 세 번째 안을 맡으셨다지요⁠.⁠”

“⁠회의는 십 분 전에 끝났습니다⁠.⁠”

“⁠십 분이면 본부청사를 두 바퀴 돕니다⁠.⁠”

진경훈은 학철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았다⁠.

“⁠아드님이 어제 향도 동지 앞에서 사격 표창을 받았습니다⁠. 다섯 발에 마흔여덟 점⁠. 향도 동지께서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리정훈 중위⁠.⁠”

“⁠알았습니다⁠.⁠”

“⁠과장 동지는 무엇이든 알았다고 하시는군요⁠. 세 번째 안에도 알았다고만 쓰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철은 팔꿈치를 빼지 않았다⁠. 빼면 진경훈이 웃을 것을 알았다⁠. 계단 창으로 들어온 겨울 햇빛이 두 사람의 구두코 사이에 하얗게 떨어져 있었다⁠. 2026년 겨울⁠, 김주애가 스물일곱 살이 되면 조직비서가 된다는 말이 혜산에서부터 돌았다고 했다⁠. 올해 김주애는 스물한 살이었다⁠. 진경훈의 손이 여섯 해를 당기고 있었다⁠.

*

1월 19일 목요일 오후 두 시⁠, 혜산 장마당 옷 매대 줄에 붉은 완장 다섯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82연합지휘부의 불시 검열이었다⁠. 윤설향은 옷걸이에 걸린 코트 세 벌을 그대로 두고⁠, 매대 밑 보따리 위에 노동신문 묶음을 덮었다⁠. 신문 1면 사진의 얼굴이 보이게 덮었다⁠. 얼굴이 실린 신문은 아무도 함부로 들추지 않았다⁠.

“⁠손전화 꺼내시오⁠. 다들⁠.⁠”

단속원 최광수가 줄 끝부터 손전화를 걷었다⁠. 설향의 손전화는 깨끗했다⁠. 장사꾼은 손전화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문제는 매대 뒤에 앉은 동생이었다⁠. 윤성민은 돌격대 휴가로 사흘 전에 내려와 있었다⁠. 돌격대는 청년동맹이 건설장에 보내는 청년 노동 부대였다⁠. 성민은 누나 몰래 코트 한 벌을 걸치고 뒷짐을 진 채 매대 기둥에 기대 있었다⁠.

“⁠동무는 코트를 왜 입고 있소⁠?⁠”

“⁠추워서 입었슴다⁠.⁠”

“⁠뒷짐은 왜 지고 있소⁠?⁠”

“⁠손이 추워서 집어넣었슴다⁠.⁠”

광수가 성민의 손전화를 받아 화면을 넘겼다⁠. 문자 하나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광수가 화면을 돌려 성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동무 보고싶어⁠. 언제 와⁠」

“⁠이 동무는 누기요⁠?⁠”

“⁠처녀임다⁠. 원래는 오빠라고 쳤는데 손전화가 혼자 동무로 바꿉니다⁠. 오빠 보고싶어 하면 동무 보고싶어가 됨다⁠. 기래서 처녀가 화났슴다⁠. 동무가 뭐냐고⁠.⁠”

장마당 사람들이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광수는 웃지 않았다⁠.

“⁠오빠는 오누이끼리만 쓰는 말이오⁠. 평양문화어보호법을 모르오⁠? 남조선 말투는 처녀 입에서 나와도 단속이오⁠.⁠”

“⁠처녀는 손전화 탓이라고 함다⁠.⁠”

“⁠손전화는 법을 아는데 처녀가 모르는 거요⁠.⁠”

광수가 손전화 기록철을 열었다⁠. 손전화가 오 분마다 화면을 저절로 찍어 두는 곳이었다⁠. 쓰는 사람은 열지 못하고 단속원 기계만 여는 곳이었다⁠. 사진들이 줄줄이 넘어갔다⁠. 그중 한 장에서 성민이 코트를 걸치고 턱을 든 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 성민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광수가 거울 사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이거는 누구 흉내요⁠?⁠”

성민이 입을 열기 전에 설향이 매대 밖으로 나와 동생과 광수 사이를 몸으로 막았다⁠.

“⁠지도원 동지⁠. 그거 코트 광고임다⁠. 내가 시켰슴다⁠. 코트 입은 사진 찍어서 평양 손님한테 보내라고⁠.⁠”

“⁠손님한테 보내는 사진에 뒷짐은 왜 지오⁠?⁠”

“⁠뒷짐 져야 털깃이 서 보임다⁠. 지도원 동지도 입어 보시라요⁠.⁠”

설향은 옷걸이에서 코트 한 벌을 벗겨 광수의 어깨에 걸쳤다⁠. 광수가 엉거주춤하는 사이 단속원 넷이 줄 건너편 화장품 매대에서 남조선 로션 병을 찾아냈다고 소리쳤다⁠. 광수가 고개를 돌렸다⁠. 설향은 성민의 손전화를 광수 손에서 빼서 광수 외투 주머니 대신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증거물임다⁠. 코트하고 손전화하고 같이 가져가시라요⁠. 위에서 답 내려오면 둘 다 돌려주시고⁠.⁠”

광수는 코트를 벗지 않고 화장품 매대로 걸어갔다⁠. 털깃이 광수의 목덜미에서 흔들렸다⁠. 성민이 누나 등 뒤에서 낄낄거렸다⁠. 설향은 돌아보지 않고 동생의 정강이를 구두 앞코로 걷어찼다⁠.

*

1월 20일 금요일 밤 열 시⁠, 오혜림은 숙소 4층 복도 끝 인철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병 따는 소리가 났다⁠. 인철이 문을 열었다⁠. 털 슬리퍼를 신고⁠, 손에 기한 지난 체코 맥주병을 들고 있었다⁠.

“⁠마셨습니까⁠?⁠”

“⁠아직 냄새만 맡았소⁠. 러시아 남편 생각이 나서⁠.⁠”

“⁠월요일 아침 열 시⁠, 보위성 청사로 갑니다⁠.⁠”

“⁠무엇 하러⁠?⁠”

“⁠이야기하러 갑니다⁠. 조사실에서⁠.⁠”

인철은 맥주병을 문틀에 기대 세웠다⁠. 병 속의 맥주가 흔들려 거품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꺼졌다⁠.

“⁠조사받는 거요⁠?⁠”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사실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체코말로는 그걸 조사라고 하오⁠.⁠”

“⁠조선말로도 그렇습니다⁠.⁠”

혜림은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인철은 병을 다시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을 찡그렸다가 펴고⁠, 또 한 모금 마셨다⁠.

“⁠기한이 지나도 체코 맥주요⁠.⁠”

“⁠배탈 나면 월요일에 못 갑니다⁠.⁠”

“⁠그럼 오늘 밤에 다 마시겠소⁠.⁠”

“⁠한 병만 마시십시오⁠. 두 병은 위에 보고해야 합니다⁠.⁠”

인철이 웃었고⁠, 혜림은 웃지 않았다⁠. 혜림은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가며 안주머니의 먹지 두 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월요일 조사실에서는 혜림이 받아 적는 사람이었다⁠. 받아 적은 종이가 어디로 가는지는 혜림이 정하지 못했다⁠. 복도 끝 창문 밖에서 대동강 얼음이 밤새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