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69자)

초가 앞마당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1월 11일 수요일 아침 여덟 시 반⁠, 김인철은 만경대 초가 앞마당의 눈을 털 슬리퍼가 아닌 구두로 밟았다⁠. 만경대는 김일성이 났다는 평양 시내 서남 끝의 초가 생가 터였다⁠. 초가지붕 위에 밤새 내린 눈이 한 뼘 두께로 얹혀 있었고⁠, 처마 끝 고드름이 아침 햇빛을 받아 가늘게 녹았다⁠. 마당 둘레 소나무 밑동마다 눈이 쌓여 있었다⁠. 인철은 소나무 밑을 들여다보다가 혜림과 눈이 마주쳤다⁠.

“⁠버섯 찾소⁠. 버릇이오⁠.⁠”

“⁠1월에는 어디에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버릇이오⁠.⁠”

마당 한가운데에 군복 외투를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털모자 아래 눈썹이 하얗게 셌고⁠, 장갑 낀 손을 뒷짐 지고 있었다⁠. 어젯밤 숙소 문을 두드린 김덕수 중좌가 노인 뒤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노인 양옆에는 별을 단 장령 둘이 서 있었다⁠.

“⁠김인철 동무요⁠? 박정천이오⁠.⁠”

혜림이 차 안에서 미리 일러 준 이름이었다⁠. 2026년 2월 9차 당대회 때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서 물러났다가 반년 만인 8월 말에 같은 자리로 돌아온 사람⁠. 같은 대회에서 최룡해와 리병철도 중앙위원 명단에서 빠졌지만 돌아온 사람은 박정천 하나였다고⁠, 혜림은 날씨를 말하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오⁠?⁠”

“⁠할아버지께서는 몸이 무거우시오⁠. 기다리라 하셨소⁠.⁠”

“⁠전보에는 보고 싶다고 쓰여 있었소⁠.⁠”

“⁠보고 싶으시니 기다리라 하신 거요⁠.⁠”

박정천은 장갑 낀 손으로 털모자의 눈을 털었다⁠. 장갑 손등의 가죽이 갈라져 있었다⁠.

“⁠동무가 평양에 온 지 하루요⁠. 하루 사이에 알아 둘 것이 하나 있소⁠. 지금 김정은 동지의 병실 문은 총무부장 동지가 쥐고 있소⁠. 문을 쥔 사람이 문서를 쥐고⁠, 문서를 쥔 사람이 나라를 쥐오⁠. 우리는 문 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늙은이들이오⁠.⁠”

“⁠나는 줄 서는 건 잘하오⁠. 프라하 사람은 빵집 앞에서도 줄을 서오⁠.⁠”

“⁠빵집 줄은 빵이 나오지만 이 줄은 아무것도 안 나오오⁠.⁠”

박정천은 초가를 턱으로 가리켰다⁠. 문지방이 낮은 방 세 칸⁠, 장독 몇 개⁠, 처마 밑에 매달린 옥수수 다발⁠. 인철은 문지방 앞에서 구두끈을 풀려고 몸을 숙였다⁠.

“⁠신을 벗어야 하오⁠?⁠”

“⁠마당이오⁠, 동무⁠. 들어가는 데가 아니오⁠.⁠”

장령 하나가 웃음을 참느라 기침을 했다⁠. 박정천은 웃지 않았다⁠.

“⁠동무 할아버지는 1970년대에 곁가지로 밀려났소⁠. 내가 그때를 다 아는 건 아니오⁠. 다만 하나는 아오⁠. 우리 공화국에서 녀자가 영도한 전례는 없소⁠. 백두의 피를 이은 사내가 앞에 서야 군이 따라 서오⁠.⁠”

“⁠백두의 피라면 직계가 있지 않소⁠?⁠”

“⁠직계 장손 집안은 2017년 쿠알라룸푸르 공항 사건 뒤로 나라 밖에 있소⁠. 그 집 아들은 영상 한 번 내고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오⁠. 평양에서 손에 쥘 수 있는 사내 핏줄은 지금 이 마당에 서 있소⁠.⁠”

인철은 프라하 아파트에서 읽던 유럽 신문들을 떠올렸다⁠. 2026년 2월⁠, 한국 국가정보원이 김주애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된 단계로 본다고 국회에 보고했다는 기사였다⁠. 기사 밑에 사진이 있었다⁠. 털깃 단 가죽코트를 입은 열세 살 소녀가 아버지 곁에 서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모시러 왔소⁠. 사진 찍으러 온 게 아니오⁠.⁠”

“⁠사진 한 장이 할아버지를 모시는 길이오⁠.⁠”

김덕수가 손짓하자 군 사진사가 사진기를 들고 마당 끝에서 다가왔다⁠. 장령 둘이 초가 앞에 자리를 잡았고⁠, 박정천이 두 사람 사이에 빈자리를 하나 남겼다⁠. 혜림이 인철 앞으로 나왔다⁠.

“⁠손님 사진은 보위성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대위 동무⁠, 이 마당에서 허락은 부위원장 동지가 하오⁠.⁠”

김덕수가 혜림과 사진기 사이에 몸을 넣었다⁠. 혜림은 물러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외투 자락이 맞닿았다⁠. 박정천이 인철을 보고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인철은 빈자리를 보았다⁠. 초가 처마의 고드름이 하나 떨어져 눈에 박혔다⁠. 인철은 한 걸음을 걸었다⁠. 걸음을 떼는 순간 사진기 셔터가 세 번 연달아 울렸다⁠. 인철은 빈자리까지 가지 않았고⁠, 사진기는 기다리지 않았다⁠.

*

같은 날 오후 한 시⁠, 오혜림은 국가보위성 청사 5층 복도 끝 방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대좌 장명길은 혜림이 아침 열한 시에 올린 보고서를 다 읽고 나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쉰다섯 살⁠, 이마가 넓고 손가락이 짧은 사람이었다⁠. 보고서 첫 장에는 혜림의 반듯한 글씨로 「⁠전차 운전사⁠. 프라하 22번⁠.⁠」이 적혀 있었다⁠.

“⁠사진은 군이 가져갔다⁠.⁠”

“⁠막지 못했습니다⁠.⁠”

“⁠막으라고 너를 보낸 게 아니다⁠. 사진이 어디로 가는지 보라고 보낸 거다⁠.⁠”

장명길은 보고서를 덮고 서랍에서 다른 서류를 꺼냈다⁠. 누런 표지 귀퉁이가 닳아 있었다⁠.

“⁠오늘부터 보고서는 두 부를 쓴다⁠. 한 부는 나한테⁠, 한 부는 총무부 문정숙 과장한테⁠.⁠”

“⁠대좌 동지⁠. 보위성 보고는 보위성 계통으로만 올라갑니다⁠. 총무부는 계통이 다릅니다⁠.⁠”

“⁠위에서 정한 일이다⁠.⁠”

“⁠위가 어디입니까⁠?⁠”

장명길이 혜림을 처음으로 똑바로 보았다⁠. 혜림은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장명길은 누런 서류를 혜림 앞으로 밀었다⁠.

「⁠오정식⁠. 1999년 1월 바르샤바 무역대표부 일꾼⁠. 설날 대사관 참사와 한 식탁에서 만두를 먹음⁠. 2000년 3월 함경북도 탄광 노동자로 보냄⁠」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혜림은 이 서류를 열 살 때 처음 보았다⁠. 아버지가 탄광 사무실에서 사본을 몰래 가져와 아궁이 앞에서 읽어 주었다⁠. 만두는 돼지고기 만두였고⁠, 참사는 당시 폴란드 주재 대사였던 김평일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대사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설날 만두 한 접시가 아버지를 탄광 갱도 앞으로 보냈고⁠, 혜림은 여섯 해 뒤 갱도 마을의 판잣집에서 났다⁠.

“⁠옛날에는 곁가지와 만난 사람을 따로 들여다보는 부서가 있었다⁠. 10호실이라고 했지⁠. 사진 한 장 같이 찍은 사람까지 끌려갔다고 들었다⁠.⁠”

장명길은 서류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곁가지 밥상에 앉았던 집의 딸이 곁가지 손자 곁에 붙는다⁠. 너를 고른 까닭이다⁠. 이 일을 끝까지 잘하면 이 서류는 덮인다⁠.⁠”

“⁠잘못하면 열립니까⁠?⁠”

“⁠열려 있는 걸 덮어 주는 거다⁠. 둘 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혜림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경례를 붙였다⁠. 복도로 나와서야 손가락이 저려 오는 것을 알았다⁠. 보고서 두 부를 쓰려면 먹지가 한 장 더 있어야 했다⁠.

저녁 여섯 시⁠, 혜림은 숙소 1층 안내원 방 책상에서 종이 두 장 사이에 먹지를 끼웠다⁠. 볼펜을 세게 눌러 아침의 만경대를 썼다⁠. 몇 시 몇 분에 누가 어디에 섰는지⁠, 셔터가 몇 번 울렸는지⁠, 인철이 빈자리까지 가지 않았다는 것까지⁠. 다 쓰고 나서 먹지를 빼 전등에 비추자 글자들이 거꾸로 남아 있었다⁠. 혜림은 먹지를 반으로 접어 군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가 탄광 사무실에서 가르친 버릇이었다⁠. 쓴 먹지는 버리지 마라⁠. 종이는 남이 고쳐 쓸 수 있어도 먹지는 고쳐 쓰지 못한다⁠.

*

같은 날 오후 네 시⁠, 리학철은 사무실 창가에서 42일째의 해가 본부청사 마당을 비스듬히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 아침에 다시 특각에 갔지만 앞방에는 문정숙만 있었다⁠. 총무부장 동지는 바쁘시니 문건은 과장 동지 책상에 두라는 말씀이라고 했다⁠. 언제까지 두는지 보시겠다고도 했다⁠. 학철은 열두 장을 다시 안고 돌아왔다⁠.

노크 소리와 함께 선전선동부 부부장 진경훈이 들어왔다⁠. 서른여섯 살⁠, 학철보다 열 살 어리고 직급은 한 계단 위였다⁠. 진경훈은 외투를 벗지 않고 학철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과장 동지⁠, 오늘 아침 만경대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군 원로들이 곁가지 손자를 세워 놓고 사진을 찍었다지요⁠.⁠”

“⁠듣지 못했습니다⁠.⁠”

“⁠점심때는 본부청사 식당이 그 말뿐이었습니다⁠.⁠”

진경훈이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임명 문건 비준란과 같은 모양의 네모가 인쇄돼 있었고⁠, 네모 안에 「⁠향도 김주애⁠」라는 글자가 들어 있었다⁠.

“⁠열두 장⁠, 향도 동지의 서명으로 내보내시면 됩니다⁠. 비준을 대신하는 게 아닙니다⁠. 이어받는 겁니다⁠.⁠”

“⁠향도 동지께서는 당 직책이 없으십니다⁠. 직책 없는 이름은 비준이 되지 못합니다⁠.⁠”

“⁠직책은 이름 뒤에 따라옵니다⁠.⁠”

“⁠알았습니다⁠. 따라온 뒤에 가져오십시오⁠.⁠”

진경훈은 웃었다⁠. 웃음 끝이 짧았다⁠.

“⁠과장 동지⁠. 인민은 사진을 봅니다⁠. 1면에 누가 어디 서 있는지를 봅니다⁠. 사진이 먼저고 직책은 나중입니다⁠. 평양산원 사진 보셨지요⁠? 그 귀퉁이 하나를 정하는 데 우리 부에서 사흘이 걸렸습니다⁠.⁠”

책상 전화가 울렸다⁠. 학철이 받자 양강도 국경 군단의 정치위원이 숨을 몰아쉬며 보고했다⁠. 압록강 경비대 소대장 둘이 혜산 맞은편에서 넘어온 옷 보따리를 받고 눈을 감았다는 것⁠, 군단장 없이 정치위원 혼자 경비대를 다잡기 어렵다는 것⁠. 학철은 수화기에 대고 알았습니다를 두 번 말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진경훈이 일어났다⁠.

“⁠아드님이 향도 동지 곁에서 잘하고 있습니다⁠. 리정훈 중위⁠. 눈이 밝다고 다들 칭찬합니다⁠.⁠”

김여정이 어제 한 말과 같은 이름이었다⁠. 학철은 문건철 열두 개 위에 손을 얹었다⁠. 문건은 차가웠고⁠, 맨 위의 국경 군단장 문건이 손바닥 밑에서 조금 미끄러졌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혜림은 외교단 숙소 4층 인철의 방 탁자에 숙소 식당의 평양냉면 두 그릇을 내려놓았다⁠. 겨울 밤에 먹는 냉면이 제맛이라고 식당 아주머니가 그릇마다 무김치를 넉넉히 얹어 주었다⁠. 인철은 털 슬리퍼를 신고 앉아 두 손을 모았다⁠.

“⁠도브로우 후찌⁠.⁠”

“⁠무엇입니까⁠?⁠”

“⁠맛있게 드시라는 체코 인사요⁠. 먹기 전에 하오⁠. 안 하면 체코 할머니들이 숟가락을 빼앗소⁠.⁠”

혜림은 따라 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인철은 대동강맥주 병을 따서 잔 둘에 따르더니 하나를 혜림 앞으로 밀었다⁠.

“⁠나 즈드라비⁠. 건배요⁠. 잔을 부딪칠 때는 눈을 봐야 하오⁠. 안 보면 일곱 해 동안 재수가 없소⁠.⁠”

“⁠근무 중입니다⁠.⁠”

“⁠그럼 나 혼자 일곱 해 재수 없겠소⁠.⁠”

인철은 잔을 허공에 대고 혼자 부딪는 시늉을 했다⁠. 혜림은 입술을 안으로 물고 냉면 국물을 마셨다⁠. 육수가 차가워서 이가 시렸다⁠.

인철이 가방에서 전보를 꺼내 탁자에 폈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곧 오너라⁠. 김평일⁠」⁠. 혜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전보를 들어 불빛에 비춰 보았다⁠. 외무성 통신 도장⁠, 프라하 대사관 접수 번호⁠, 타자기로 친 글자⁠. 혜림은 종이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은 하얬다⁠.

“⁠할아버지 글씨를 보신 적 있습니까⁠?⁠”

“⁠열네 살 때 마지막으로 봤소⁠. 프라하 공항에서 내 공책 맨 뒷장에 써 주셨소⁠. 공부 잘하라고⁠.⁠”

“⁠그 뒤로는요⁠?⁠”

“⁠그 뒤로는 없소⁠. 편지가 한 통도 안 왔소⁠.⁠”

인철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혜림은 전보를 다시 접어 인철 앞에 놓았다⁠.

“⁠전보는 누구나 칠 수 있습니다⁠. 이름도 타자기로 칩니다⁠.⁠”

인철이 전보를 보다가 혜림을 보았다⁠. 무김치 한 조각이 젓가락 끝에서 떨어져 냉면 그릇 가장자리에 붙었다⁠. 혜림의 손전화가 울렸다⁠. 혜림은 일어나 창가에서 받았고⁠, 짧게 「⁠알았습니다⁠」를 두 번 했다⁠.

“⁠모레 저녁 여섯 시⁠, 할아버지 댁에 갑니다⁠. 위에서 허락이 났습니다⁠.⁠”

인철은 털 슬리퍼를 벗었다가 다시 신었다⁠. 창밖 대동강 얼음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누워 있었다⁠. 혜림은 의자에 걸어 둔 외투 주머니를 손으로 눌렀다⁠. 비닐봉지 속 버섯 칼의 솔이 손바닥에 까슬하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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