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645자)

블랙박스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은하는 평창동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룸미러는 위로 접혀 있었다⁠. 북악 스카이웨이의 첫 커브에서 몸이 쏠렸다⁠. 은하의 차에서 처음으로 몸이 쏠렸다⁠. 은하가 핸들을 늦게 돌렸다⁠. 은하의 손이 화가 나 있었다⁠.

“⁠죄송해요⁠.⁠”

은하가 다음 커브에서 핸들을 먼저 돌렸다⁠. 몸이 다시 쏠리지 않았다⁠.

“⁠친정이 성수동이시죠⁠. 권씨 건설 사옥 뒤⁠.⁠”

“⁠네⁠.⁠”

“⁠가는 길에 십 분만 들를게요⁠. 백초 형 정비소요⁠. 친정에서 두 블록이에요⁠. 위치 추적기에는 친정 동네로 찍혀요⁠.⁠”

성수동 뒷골목에 「⁠백초 모터스⁠」라는 간판이 있었다⁠. 간판 글씨의 페인트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셔터가 반만 올라가 있었다⁠. 은하가 셔터 아래로 차를 밀어 넣었다⁠. 정비소 안에는 리프트 두 대와 엔진 냄새⁠, 그리고 벽 한쪽에 액자 하나가 붙어 있었다⁠. 경주차 옆에서 우승 트로피를 든 젊은 은하의 사진이었다⁠. 머리가 짧았고 웃고 있었다⁠.

정비소 안쪽에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마흔여덟쯤⁠, 기름 묻은 작업복⁠, 오른손에 렌치⁠. 남자는 나를 보고 렌치를 등 뒤로 감췄다⁠.

“⁠은하야⁠. 손님 데려온다는 말은 했는데 대륭 사모님인 줄은 몰랐다⁠.⁠”

“⁠형⁠. 노트북⁠.⁠”

“⁠인사는 하고⁠.⁠”

백초가 기름 묻은 손을 작업복에 문지르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백초는 내 긴소매와 내 걸음을 보았다⁠. 오래 보지 않았다⁠. 정비하는 사람은 고장 난 자리를 금방 알아보았다⁠.

*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는 손톱만 했다⁠. 은하가 운전석 위 블랙박스에서 카드를 빼 백초에게 건넸다⁠. 백초가 노트북에 카드를 꽂았다⁠. 파일이 날짜와 시각 순으로 줄지어 떴다⁠. 은하가 어젯밤 열한 시 사십 분 파일을 눌렀다⁠.

화면은 흑백이었다⁠. 실내 카메라는 밤에 적외선으로 찍었다⁠. 뒷자리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편과 나⁠. 소리는 없었다⁠. 은하가 소리를 꺼 두었다⁠.

화면 속에서 남편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입이 움직였다⁠. 병원 갔다며⁠. 나는 소리 없이도 남편의 입 모양을 알았다⁠. 여섯 해 동안 들은 말이었다⁠. 남편의 손이 내 손목으로 갔다⁠. 손가락이 하나씩 조여 들어갔다⁠. 화면 속의 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나는 화면 속의 나를 보았다⁠. 웃는 얼굴이었다⁠. 아픈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 화면을 보고 무엇을 볼까⁠. 손을 잡은 부부를 볼까⁠.

“⁠이거⁠, 손 잡은 걸로 보일까요⁠?⁠”

내가 물었다⁠. 백초가 화면을 멈췄다⁠. 남편의 손가락 마디를 크게 키웠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힘을 준 손이었다⁠. 내 손등의 핏줄이 부풀어 있었다⁠.

“⁠사모님⁠. 저는 스무 해 동안 남의 손을 봤어요⁠. 렌치를 쥔 손⁠, 핸들을 쥔 손⁠. 이건 쥐는 손이에요⁠. 잡는 손이 아니고⁠.⁠”

백초가 화면을 앞으로 돌렸다⁠. 영종대교 중간에서 차가 흔들렸다⁠. 은하가 차선을 바꾸던 자리였다⁠. 화면 위쪽 끝에 운전석 은하의 오른손이 보였다⁠. 깜빡이 손잡이를 두 번 툭툭 치는 손가락이었다⁠.

나는 은하의 손가락을 오래 보았다⁠. 은하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정비소 벽의 젊은 은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백초가 노트북을 닫고 내게 커피를 내밀었다⁠. 종이컵에 믹스 커피였다⁠. 컵 가장자리에 기름 자국이 묻어 있었다⁠. 백초가 기름 자국을 보고 컵을 돌려 깨끗한 가장자리를 내게 대 주었다⁠.

“⁠사모님⁠, 은하가 사진 보고 있죠⁠. 저 사진 찍은 날이 세 번째 우승이에요⁠. 다음 시즌 개막전에서 사고가 났어요⁠. 비 오는 날이었어요⁠. 앞차가 미끄러졌고⁠, 은하가 피하다가 옆 차를 받았어요⁠. 옆 차가 같은 팀 동생이었어요⁠. 은하 잘못이 아니었어요⁠. 심사위원회도 그랬고요⁠.⁠”

“⁠형⁠.⁠”

은하가 백초를 불렀다⁠. 백초는 멈추지 않았다⁠.

“⁠근데 은하는 자기 잘못이래요⁠. 동생 치료비 다 대겠다고 했어요⁠. 오 년째요⁠. 동생은 이제 걸어요⁠. 지팡이 짚고⁠. 은하는 그 뒤로 서킷에 안 가요⁠. 운전대는 잡는데 경주는 안 해요⁠.⁠”

은하가 정비소 벽에서 눈을 떼고 백초를 보았다⁠.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짧게 말했다⁠.

“⁠형⁠, 브레이크 패드 갈 때 됐어⁠. 사모님 차⁠. 앞바퀴⁠.⁠”

“⁠말 돌리지 마⁠.⁠”

“⁠말 돌리는 거 아니야⁠. 진짜야⁠. 아까 커브에서 늦게 돌았잖아⁠.⁠”

백초가 웃었다⁠. 렌치를 들고 내 차 앞바퀴 쪽으로 갔다⁠. 갈면서 투덜거렸다⁠. 대륭 차 패드는 부품값이 우리 정비소 한 달 전기세라고⁠.

*

정비소 사무실 의자에 앉아 탁은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빈은 신호가 두 번 가기 전에 받았다⁠.

“⁠영상이요⁠? 차 안 블랙박스⁠? 소리는요⁠?⁠”

“⁠없어요⁠. 그림만요⁠.⁠”

“⁠날짜와 시각 찍혀 있죠⁠. 원본 카드가 어디 있어요⁠?⁠”

“⁠차에서 뺐어요⁠. 지금 노트북에 복사했어요⁠.⁠”

“⁠사본은 시어머님 변호사들이 편집됐다고 우길 거예요⁠. 원본 카드가 있어야 해요⁠. 차에 다시 꽂아 두면 지워지고요⁠. 그 카드를 사모님이 갖고 계세요⁠. 그리고 하나 더⁠. 소리가 있는 게 있으면 좋아요⁠. 그림만으로는 사이좋은 부부라고 우길 수 있어요⁠.⁠”

은빈은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끊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모님⁠, 손목 사진도 찍으세요⁠. 오늘이요⁠. 멍은 사흘이면 색이 변해요⁠.⁠”

나는 정비소 화장실에서 소매를 걷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손목을 찍었다⁠. 손목 안쪽⁠, 손가락 네 개 자리⁠. 손가락 자국이 푸르게 남아 있었다⁠. 사진을 찍는 손이 떨렸다⁠. 다섯 장을 찍었다⁠. 다섯 장 다 흔들렸다⁠. 여섯 번째에 은하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제가 찍어 드릴까요⁠?⁠”

나는 문을 열었다⁠. 은하가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내 손목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은하의 손바닥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핸들을 쥐어 온 손이었다⁠. 은하는 내 손목을 가만히 들고 셔터를 눌렀다⁠. 한 장⁠. 흔들리지 않았다⁠.

“⁠서킷에서 미캐닉이 사고 난 차 사진 찍을 때 이렇게 찍어요⁠. 손을 받쳐 줘야 안 흔들려요⁠.⁠”

은하가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손바닥이 내 손목에서 떨어지는 데 조금 오래 걸렸다⁠.

*

친정에서는 십오 분을 머물렀다⁠. 아버지는 성수동 사옥 이 층 사장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혈압약을 받아 서랍에 넣고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얼굴 좋다⁠. 대륭 사람 다 됐구나⁠.⁠”

“⁠아버지⁠, 회사는 괜찮으세요⁠?⁠”

“⁠대륭 덕에 산다⁠. 올해 대륭건설 하청이 반이야⁠. 사돈 어른께 잘해라⁠. 회장님 병원에도 자주 가고⁠.⁠”

아버지의 책상 위에 액자가 있었다⁠. 내 결혼식 사진이었다⁠. 아버지가 대륭 회장과 악수하고 있었다⁠. 신부인 나는 사진 가장자리에서 웃고 있었다⁠. 나는 소매를 내리고 일어섰다⁠.

한 시간에서 칠 분이 남았다⁠. 은하는 북악 스카이웨이를 십 분 만에 올랐다⁠. 커브마다 몸이 쏠리지 않았다⁠.

*

오후 다섯 시⁠, 노비호가 차고에 기사 일곱을 불러 모았다⁠. 나는 이 층 창가에서 차고 앞을 내려다보았다⁠. 노비호가 수첩을 펴고 읽었다⁠.

“⁠사모님 지시입니다⁠. 저택 차 일곱 대 블랙박스를 전부 새 기종으로 바꿉니다⁠. 내일 새벽 다섯 시에 업체가 옵니다⁠. 지금 달린 카드는 업체가 수거해 폐기합니다⁠. 회장님 병환 중이라 집안 차의 영상이 밖으로 새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은하는 맨 끝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비호가 수첩을 덮고 은하에게 다가갔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층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차 기사⁠. 사모님께서 하나 더 전하라고 하셨어⁠.⁠”

“⁠말씀하세요⁠.⁠”

“⁠성수동 정비소⁠. 담보 대출 넘어간 데가 어딘지 아느냐고⁠. 대륭캐피털이래⁠. 지난달에 채권을 샀대⁠. 우리 계열사야⁠.⁠”

은하의 등이 굳었다⁠. 창문 위에서도 보였다⁠. 노비호가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엉뚱한 말을 했다⁠.

“⁠옛말에 남의 집 우물에 침 뱉으면 제 집 우물이 마른다고 했어⁠. 차 기사는 우물이 몇 개야⁠?⁠”

“⁠한 개요⁠.⁠”

“⁠그럼 아껴 써⁠.⁠”

*

저녁 아홉 시⁠, 시어머니가 나를 서재로 불렀다⁠. 서재에는 회장의 책상이 있었다⁠. 회장이 쓰러진 뒤로 아무도 앉지 않는 책상이었다⁠. 시어머니는 회장의 책상 맞은편 소파에 앉아 차를 따랐다⁠. 두 잔이었다⁠.

“⁠성수동 다녀왔다며⁠. 아버지는 잘 계시니⁠.⁠”

“⁠네⁠. 혈압약 드렸습니다⁠.⁠”

“⁠정비소도 들렀다면서⁠.⁠”

나는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따뜻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게 찻잔 받침까지 같이 들었다⁠.

“⁠차 기사가 브레이크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앞바퀴 패드요⁠.⁠”

“⁠그래⁠. 브레이크는 중요하지⁠. 서야 할 데서 서야 하니까⁠.⁠”

시어머니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고 내 손을 보았다⁠. 찻잔 받침을 쥔 손이었다⁠.

“⁠세린아⁠. 너 블랙박스 영상 본 적 있니⁠?⁠”

“⁠아니요⁠.⁠”

“⁠보지 마라⁠. 영상이란 게 이상해서⁠, 본 사람 마음대로 보인다⁠. 손을 잡은 부부가 싸우는 부부로도 보이고⁠, 싸우는 부부가 손을 잡은 부부로도 보여⁠.⁠”

시어머니가 웃었다⁠. 낮고 느린 웃음이었다⁠.

“⁠그래서 다 바꾸라고 했다⁠. 새 기종으로⁠. 소리는 안 나오게⁠. 집안 일은 집안에서 끝나야 해⁠. 회장님 쓰러지시고 나서 해외 신용평가사가 대륭을 들여다본다⁠. 승계가 흔들린다는 말 한 줄에 주가가 칠 퍼센트 빠진다⁠. 계열사 직원이 십이만이야⁠. 네 친정 회사 직원이 삼백이고⁠.⁠”

“⁠어머님⁠.⁠”

“⁠응⁠.⁠”

“⁠어머님도 블랙박스 영상 보신 적 있으세요⁠?⁠”

시어머니의 손이 찻잔 위에서 멈췄다⁠. 아주 짧게⁠. 다시 찻잔을 들었다⁠.

“⁠나는 블랙박스가 없던 때 시집왔다⁠.⁠”

시어머니는 차를 마저 마시고 일어났다⁠. 서재 문을 열다가 돌아보았다⁠.

“⁠일찍 자라⁠. 네 손목은 사흘이면 색이 변한다⁠.⁠”

*

밤 한 시⁠, 나는 정원 등나무 뒤에 서 있었다⁠. 노비호가 화분 뒤는 거름 냄새가 나니 등나무 뒤가 좋다고 했다⁠. 등나무 뒤에서는 차고 안이 다 보였다⁠. 3월 밤 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카디건을 여몄다⁠.

차고 문이 손바닥 하나만큼 열려 있었다⁠. 은하가 문틈으로 들어갔다⁠. 휴대전화 불빛 하나로 내 차의 운전석 문을 열었다⁠. 블랙박스에 손을 뻗었다⁠. 원본 카드를 빼서 자기 주머니에 넣고 새 카드를 꽂으려는 손이었다⁠. 새벽 다섯 시면 업체가 원본을 가져가 폐기할 것이었다⁠.

차고 안쪽에서 손전등이 켜졌다⁠. 은하의 얼굴이 하얗게 떴다⁠. 손전등을 든 사람은 노비호였다⁠.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치고 돋보기를 이마에 올리고 있었다⁠.

“⁠차 기사⁠. 배탈은 오늘도인가⁠.⁠”

은하는 카드를 쥔 손을 내리지 않았다⁠. 노비호를 마주 보았다⁠.

“⁠집사님⁠. 이거 하나만요⁠. 이거 없어지면 사모님은⁠.⁠”

“⁠알아⁠.⁠”

노비호가 손전등을 내렸다⁠. 차고 바닥에 둥근 빛이 떨어졌다⁠. 노비호가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비닐봉지였다⁠. 안에 메모리 카드 하나가 들어 있었다⁠. 손톱만 한 검은 카드⁠.

“⁠블랙박스 카드는 한 달에 한 번 내가 갈아 끼우지⁠. 서른 해 동안 그랬어⁠. 뺀 카드는 폐기하라고 하셨고⁠. 나는 폐기 안 했어⁠. 서른 해 동안 한 장도⁠.⁠”

은하가 노비호를 보았다⁠. 노비호가 비닐봉지를 들어 손전등 빛에 비쳤다⁠. 봉지에 매직으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12월 31일⁠.

“⁠그믐날 밤⁠. 회장님 쓰러지신 날이지⁠. 장남께서 손수 운전해서 사모님을 태우고 병원에서 돌아오셨어⁠. 차 기사는 그믐 휴가였고⁠. 차 기사가 블랙박스 소리를 끈 건 정월부터야⁠. 그믐날 밤에는 소리가 켜져 있었어⁠.⁠”

노비호는 은하에게 봉지를 건네지 않았다⁠. 손전등을 끄고 돋보기를 눈으로 내렸다⁠. 차고 문틈 쪽으로 걸어왔다⁠. 문틈을 지나 정원으로 나왔다⁠. 등나무 앞에서 멈췄다⁠.

“⁠사모님⁠. 등나무 뒤는 춥습니다⁠. 서른 해 전에 회장 사모님도 여기 서 계셨습니다⁠.⁠”

노비호가 비닐봉지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사모님 겁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창가자리2026.10.31· 3화

    위치 추적기에 친정 동네로 찍히게 정비소를 고르는 은하, 계획이 어디까지 있는 거예요?

    • 예솔아작가2026.10.31

      은하는 지도를 머리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어디까지인지는 블랙박스가 먼저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