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616자)

룸미러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은하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휴대전화를 쥔 채였다⁠. 차고 형광등을 켜지 않았다⁠. 차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정원 조명만으로 은하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두 해요⁠.⁠”

은하가 말했다⁠.

“⁠사모님 오신 첫 주부터요⁠. 회장님 사모님이 직접 부르셨어요⁠. 한 달에 삼백⁠. 월급 말고 따로요⁠. 어디 가시는지⁠, 누구 만나시는지⁠, 몇 시에 나오시는지⁠.⁠”

“⁠왜요⁠?⁠”

내 목소리가 차고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존댓말이 돌아와 있었다⁠. 화가 나면 나는 더 정중해졌다⁠.

“⁠빚이요⁠.⁠”

은하가 휴대전화를 차 지붕 위에 내려놓았다⁠.

“⁠다섯 해 전에 경기하다 사고 냈어요⁠. 제 차가 미끄러져서 같은 팀 동료 차를 받았어요⁠. 동료가 척추를 다쳤어요⁠. 팀이 깨지고 스폰서가 빠지고⁠, 동료 치료비는 제가 대기로 했어요⁠. 그거 대느라 제 미캐닉 하던 형이 정비소를 담보로 잡혔고요⁠. 성수동에 있어요⁠. 백초 형 정비소⁠. 삼백이면 이자가 나와요⁠.⁠”

나는 은하를 보았다⁠. 서른넷이라고 했다⁠. 정원 조명 아래에서 은하는 더 늙어 보였다⁠.

“⁠오늘 건 안 보냈어요⁠.⁠”

은하가 휴대전화를 집어 화면을 내밀었다⁠. 쓰다 만 문자가 지워져 있었다⁠. 「⁠사모님 동선 보고드립니다⁠. 오늘 서초동은⁠」 대신 「⁠09⁠:52 출발⁠, 검진센터⁠. 공사로 우회⁠. 12⁠:45 귀가⁠」라고만 보내져 있었다⁠. 서초동은 없었다⁠. 시어머니의 답장이 와 있었다⁠. 「⁠알았다⁠.⁠」

“⁠그럼 어머님은 어떻게 서초동을 아셨어요⁠?⁠”

“⁠위치 추적기요⁠. 차에 달린 거⁠. 지하 주차장에선 안 잡히는데 들어가기 전까지는 잡혀요⁠. 저는 그거 피하려고 뒷길로 돈 건데⁠, 서초동 법원 앞에서 신호에 걸렸어요⁠. 거기서 오 분 섰어요⁠. 그거 보고 아신 거예요⁠.⁠”

은하가 차 지붕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제가 못 피했어요⁠. 서킷이었으면 안 걸렸어요⁠. 서울 신호는 제 실력 밖이에요⁠.⁠”

나는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는 자리가 아니었다⁠. 화가 나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우스워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왜 안 보냈어요⁠? 오늘 거⁠.⁠”

은하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차 지붕 위의 손바닥이 천천히 주먹이 되었다⁠.

“⁠주차장에서 칠 분 앉아 계셨잖아요⁠. 내릴까 말까⁠. 그 칠 분 보고하면 사람이 아니죠⁠.⁠”

*

이튿날 아침 아홉 시⁠, 나는 은하의 차 뒷자리에 앉았다⁠. 행선지는 백화점이었다⁠. 노비호에게 전날 밤 알렸다⁠. 백화점 7층 아동복 매장⁠. 시동생 부부의 아이 돌잔치 선물을 고른다고⁠.

차가 대문을 나서자 은하가 룸미러에 손을 댔다⁠. 거울을 위로 접어 천장 쪽으로 꺾었다⁠. 거울 속에 내 얼굴이 없어졌다⁠. 천장만 비쳤다⁠.

“⁠이건 뭐예요⁠?⁠”

“⁠제가 사모님 얼굴 안 본다는 뜻이요⁠. 이거 접혀 있으면 아무 말이나 하셔도 돼요⁠. 저는 앞만 봐요⁠. 듣기만 하고⁠.⁠”

“⁠앞 블랙박스는요⁠? 실내도 찍잖아요⁠.⁠”

“⁠블랙박스는 소리 꺼 놨어요⁠. 그림만 찍혀요⁠. 사모님 입 모양 읽는 사람은 이 집에 없어요⁠. 노 집사님은 돋보기 써야 신문 봐요⁠.⁠”

나는 웃었다⁠. 접힌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여섯 해 동안 이 차 안에서 나는 늘 거울 속에 있었다⁠. 운전석에서 기사가 보고 있었고⁠, 기사의 눈 뒤에 시어머니가 있었다⁠.

“⁠그럼 신호를 더 정해요⁠.⁠”

“⁠신호요⁠?⁠”

“⁠뒤에 누가 붙으면요⁠. 어머님 사람이 따라오면⁠.⁠”

은하가 핸들 옆 깜빡이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 번 툭 쳤다⁠. 깜빡이는 켜지지 않았다⁠. 손잡이가 툭툭 소리만 냈다⁠.

“⁠이거요⁠. 깜빡이 안 켜고 두 번⁠. 뒤에 붙었다는 뜻이에요⁠. 그럼 사모님은 휴대전화 집어넣으시고 창밖 보세요⁠. 제가 떨궈 낼게요⁠.⁠”

“⁠떨궈 낼 수 있어요⁠?⁠”

“⁠사모님⁠. 저 투어링카 세 번 우승했어요⁠. 강변북로에서 그랜저 하나 못 떨궈 내면 그냥 은퇴해야죠⁠.⁠”

“⁠이미 은퇴했잖아요⁠.⁠”

“⁠그러니까요⁠. 은퇴한 사람도 떨궈 내요⁠.⁠”

나는 창문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창문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렸다⁠. 3월 바람이 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바람이었다⁠.

“⁠이건 제 신호예요⁠. 오늘은 집에 가기 싫다는 뜻⁠.⁠”

은하가 앞을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핸들이 아주 조금 오른쪽으로 돌았다⁠. 백화점이 아니라 강변북로로 가는 길이었다⁠.

“⁠한강 보고 백화점 가요⁠. 아동복은 이십 분이면 골라요⁠. 돌잔치 선물은 무조건 내복이에요⁠. 비싼 거 사면 시동생 사모님이 기분 나빠하세요⁠. 형님네가 돈 자랑한다고⁠.⁠”

“⁠그건 어떻게 알아요⁠?⁠”

“⁠두 해 동안 이 집 사람들 다 태웠어요⁠. 뒷자리에서 하는 말은 운전석에 다 들려요⁠.⁠”

*

오후 두 시⁠, 백화점에서 돌아오자 노비호가 차고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 작은 수첩을⁠, 한 손에 돋보기를 들고 있었다⁠. 노비호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은하에게 다가갔다⁠.

“⁠차 기사⁠. 잠깐 봅시다⁠.⁠”

나는 현관으로 들어가는 척 정원 화분 뒤에 섰다⁠. 노비호가 운전석 문을 열고 계기판을 들여다보았다⁠. 돋보기를 썼다⁠.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오늘 백화점 다녀왔다고⁠.⁠”

“⁠네⁠. 7층 아동복이요⁠. 내복 샀습니다⁠.⁠”

“⁠평창동에서 백화점까지 왕복 이십사 킬로⁠. 그런데 오늘 이 차가 서른여섯 킬로를 달렸어⁠. 어디서 열두 킬로가 생겼을까⁠.⁠”

은하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화분 뒤에서 숨을 멈췄다⁠. 노비호가 돋보기를 벗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사모님이 어제 저녁에 그러셨어⁠. 차 기사가 요즘 이상하다고⁠. 주행거리를 매일 적어서 올리라고⁠. 그래서 적었지⁠. 오늘부터⁠.⁠”

“⁠배탈이 나서요⁠. 화장실 찾느라 돌았습니다⁠.⁠”

“⁠어제도 배탈이었다지⁠.⁠”

“⁠이틀째입니다⁠.⁠”

노비호가 은하를 한참 보았다⁠. 그리고 수첩을 덮었다⁠. 덮으면서 엉뚱한 말을 했다⁠.

“⁠옛말에 배탈 난 말은 집으로 먼저 간다고 했어⁠. 차 기사 배도 다음부터는 집으로 먼저 가는 게 좋겠어⁠. 열두 킬로는 내가 적다가 틀렸다고 하지⁠. 돋보기를 안 써서⁠.⁠”

노비호는 수첩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현관 쪽으로 걸어왔다⁠. 화분 뒤를 지나며 나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고 말했다⁠.

“⁠사모님⁠. 화분 뒤는 거름 냄새가 납니다⁠. 다음에는 정원 등나무 뒤가 좋습니다⁠. 거기는 차고가 더 잘 보입니다⁠.⁠”

*

목요일 오후 세 시⁠, 압구정동 정신건강의학과 원장실은 넓었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원장은 예순쯤 되어 보였다⁠. 시어머니와 대학 동창이라고 했다⁠. 시어머니처럼 낮고 느리게 말했다⁠.

“⁠요즘 잠은 잘 자요⁠?⁠”

“⁠잘 잡니다⁠.⁠”

“⁠식사는요⁠?⁠”

“⁠잘 먹습니다⁠.⁠”

“⁠셋째 해에 다니던 병원 기록을 봤어요⁠. 그때 처방이 꽤 셌던데⁠. 지금은 약 안 드세요⁠?⁠”

나는 원장의 책상 위를 보았다⁠. 내 이름이 적힌 서류철이 있었다⁠. 셋째 해 겨울의 병원은 시어머니도 모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서류철은 두꺼웠다⁠.

“⁠안 먹습니다⁠. 좋아졌습니다⁠.⁠”

“⁠좋아진 분들이 갑자기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많아요⁠. 겉으로는 괜찮은데 속으로는 판단이 흐려진 거죠⁠. 그럴 땐 잠깐 쉬는 게 좋아요⁠. 집이 아니라 조용한 데서⁠. 우리 병원에 좋은 병동이 있어요⁠.⁠”

원장은 웃었다⁠. 내 손목을 보았다⁠. 긴소매 끝을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웃었다⁠. 웃으며 대답했다⁠. 정중하게⁠. 한 칸 더 정중하게⁠.

“⁠원장님⁠. 저는 판단이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 와서 판단이 더 맑아졌습니다⁠.⁠”

원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내가 웃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은하가 시동을 걸고 기다렸다⁠.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은하가 룸미러를 위로 접었다⁠.

나는 그제야 울었다⁠. 소리 없이⁠. 은하는 앞만 보았다⁠. 라디오를 켰다⁠. 국회에서 재벌 지배 구조 개편 법안을 두고 여야가 맞서고 있다는 뉴스가 흘렀다⁠. 가정 폭력 처벌을 강화하는 법 개정안은 이번 회기에도 상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은하가 라디오 소리를 조금 키웠다⁠. 내 울음소리가 차 밖으로 새지 않을 만큼⁠.

*

목요일 밤⁠, 시어머니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태빈이 하루 일찍 들어온다⁠. 밤 열한 시 비행기야⁠. 네가 공항에 나가⁠. 아내가 마중을 나가야지⁠. 차 기사한테 말해 놨다⁠.⁠”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남편은 웃으며 나왔다⁠. 수행 비서 둘이 짐을 밀었다⁠. 남편이 나를 안았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포옹이었다⁠. 남편의 손이 내 등에서 허리로 내려가 멈췄다⁠. 손가락 끝이 허리를 눌렀다⁠. 아팠다⁠. 나는 웃었다⁠.

비서들은 다른 차를 탔다⁠. 은하가 뒷문을 열었다⁠. 남편이 먼저 타고 내가 탔다⁠. 은하가 운전석에 올랐다⁠. 룸미러를 만졌다⁠. 접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은하의 눈이 한 번 내 눈과 마주쳤다가 길로 갔다⁠.

영종대교를 건너는 동안 남편은 휴대전화를 보았다⁠. 다리 중간쯤에서 남편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병원 갔다며⁠.⁠”

“⁠네⁠.⁠”

“⁠원장님이 뭐래⁠.⁠”

“⁠잘 지낸다고 하셨습니다⁠.⁠”

“⁠변호사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편의 손이 내 왼쪽 손목을 쥐었다⁠. 긴소매 위로⁠. 처음에는 손을 잡는 줄 알았다⁠. 손가락이 하나씩 조여 들어왔다⁠. 뼈가 눌렸다⁠. 나는 창밖을 보았다⁠. 다리 아래 바다가 검었다⁠. 남편은 앞을 보며 웃었다⁠. 웃는 얼굴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차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은하가 차선을 바꾸었다⁠.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 깜빡이 손잡이가 두 번 툭툭 소리를 냈다⁠. 뒤에 누가 붙었다는 신호였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툭툭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들었다⁠. 은하가 지금 여기 있다는 소리였다⁠.

청운당 현관문이 닫혔다⁠. 문이 닫힌 뒤의 일을 나는 여기 적지 않는다⁠.

*

금요일 아침 일곱 시⁠, 식탁에는 시어머니 혼자 앉아 있었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었다⁠. 노비호가 내 앞에 죽 그릇을 놓았다⁠. 평소에는 밥이었다⁠. 오늘은 전복죽이었다⁠. 노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숟가락을 죽 그릇 오른쪽에 놓았다⁠. 왼손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다⁠.

시어머니가 신문을 넘기다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을 보고⁠, 두꺼운 화장을 보고⁠, 숟가락을 쥔 오른손을 보았다⁠. 무릎 위에 내려놓은 왼손은 보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조금 돌렸다⁠. 나는 알았다⁠. 보지 않으려는 사람의 고갯짓이었다⁠.

“⁠태빈이가 피곤했나 보다⁠. 출장이 길었지⁠.⁠”

“⁠네⁠, 어머님⁠.⁠”

“⁠오늘은 집에 있어라⁠. 나가지 말고⁠.⁠”

시어머니가 신문을 접었다⁠. 접은 신문 1면에 대륭전자 해외 공장 인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남편의 사진이 크게 웃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신문을 식탁 끝으로 밀었다⁠. 남편의 웃는 얼굴이 나를 보았다⁠.

“⁠어머님⁠. 오늘 아침에 친정 아버지 약을 가져다드리기로 했습니다⁠. 차 기사와 다녀오겠습니다⁠.⁠”

시어머니가 잠깐 나를 보았다⁠. 그리고 찻잔을 들었다⁠.

“⁠한 시간⁠.⁠”

“⁠네⁠.⁠”

“⁠한 시간 넘으면 보고가 온다⁠.⁠”

노비호가 시어머니의 찻잔에 차를 더 따랐다⁠. 따르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모님⁠, 오늘 아침 까치가 세 번 울었습니다⁠. 까치가 세 번 울면 손님이 나간다고 합니다⁠.⁠”

“⁠들어온다겠지⁠.⁠”

“⁠제 고향에서는 나간다고 했습니다⁠.⁠”

*

금요일 아침 여덟 시⁠,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칸씩⁠. 난간을 잡았다⁠. 오른쪽 다리를 먼저 딛고 왼쪽을 끌어 붙였다⁠. 긴소매에 긴 치마를 입었다⁠. 화장을 평소보다 두껍게 했다⁠.

현관 앞에 차가 서 있었다⁠. 은하가 뒷문을 열고 기다렸다⁠. 은하의 눈이 내 얼굴로 오지 않았다⁠. 내 발로 갔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 한 칸에 두 번씩 딛는 발⁠.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뒷자리에 앉자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랐다⁠. 룸미러를 위로 접었다⁠. 시동을 걸지 않았다⁠. 핸들을 두 손으로 쥐고 앞만 보았다⁠. 핸들을 쥔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사모님⁠.⁠”

“⁠네⁠.⁠”

“⁠어젯밤 영종대교요⁠. 실내 블랙박스⁠, 아직 안 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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