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64자)

친정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그믐밤 카드에는 소리가 있었다⁠. 서초동 정현빌딩 8층⁠, 탁은빈의 사무실 책상 위 노트북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은빈이 볼륨을 반쯤 올렸다⁠. 나는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면 남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릴 것 같아서였다⁠.

화면은 흑백이었다⁠. 운전석에 남편이⁠, 조수석에 내가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세 시간째였다⁠. 와이퍼가 진눈깨비를 밀어냈다⁠.

“⁠아버지 깨어나면 다음은 나야⁠.⁠”

화면 속 남편이 말했다⁠.

“⁠알아⁠? 다음은 나라고⁠. 동생 놈이 웃는 거 봤지⁠. 장례식장 자리 알아보는 얼굴이었어⁠. 너 웃어⁠. 내일부터 병원에서 계속 웃어⁠. 네가 웃어야 내가 산다⁠.⁠”

화면 속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앞을 보았다⁠. 남편이 오른손을 핸들에서 뗐다⁠. 화면이 흔들렸다⁠. 소리가 났다⁠. 짧고 납작한 소리였다⁠. 화면 속의 내 고개가 창 쪽으로 꺾였다⁠. 남편은 다시 핸들을 잡았다⁠. 와이퍼가 진눈깨비를 밀어냈다⁠.

“⁠웃으라고⁠.⁠”

은빈이 영상을 멈췄다⁠. 사무실이 조용했다⁠. 창밖의 법원 건물에 봄 햇빛이 비쳤다⁠. 나는 내 손을 보았다⁠. 무릎 위에서 손가락이 엉켜 있었다⁠. 은빈이 물을 한 잔 따라 내 앞에 놓았다⁠.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사모님⁠. 이거면 됩니다⁠.⁠”

은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느렸다⁠.

“⁠날짜⁠, 시각⁠, 목소리⁠, 소리⁠. 원본 카드⁠. 그리고 영종대교 영상⁠, 손목 사진⁠. 소장 쓸 수 있어요⁠. 오늘 쓰면 모레 들어가요⁠.⁠”

“⁠들어가면요⁠?⁠”

“⁠남편분께 송달돼요⁠. 그리고 시어머님이 아시겠죠⁠. 그다음은 저도 몰라요⁠. 대륭은 처음이에요⁠.⁠”

은빈은 펜을 쥐었다 놓았다⁠.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사모님⁠.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이 소송으로 제 사무실을 키우고 싶어요⁠. 대륭 장남 이혼 소송 이긴 변호사⁠. 그거면 여기 책상 두 개가 스무 개 돼요⁠. 그래서 이기고 싶어요⁠. 사모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나는 웃었다⁠. 화가 나서 웃은 것이 아니었다⁠.

“⁠변호사님⁠. 저는 친정 회사를 살리려고 결혼한 사람입니다⁠. 서로 괜찮습니다⁠.⁠”

*

지하 주차장에서 은하가 기다렸다⁠. 룸미러가 이미 위로 접혀 있었다⁠. 내가 타자 은하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쓰신대요⁠?⁠”

“⁠모레 들어간대요⁠.⁠”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주차장 출구로 올라갔다⁠. 출구 차단기 앞에서 은하가 멈췄다⁠. 차단기가 올라가는 동안 은하가 말했다⁠.

“⁠모레 아침에 제가 법원 앞까지 모실게요⁠. 행선지는 백화점으로 보고하고요⁠.⁠”

“⁠어머님이 위치를 보세요⁠.⁠”

“⁠법원 앞에 백화점 하나 있어요⁠. 지하로 연결돼요⁠. 백화점 주차장에 대고 지하로 걸어가시면 위치는 백화점이에요⁠.⁠”

“⁠그건 어떻게 알아요⁠?⁠”

“⁠어제 밤에 와 봤어요⁠. 걸어서⁠. 지하 통로 계단이 몇 개인지도 셌어요⁠. 마흔둘이요⁠. 사모님 다리로는 사 분이에요⁠.⁠”

나는 은하의 뒷머리를 보았다⁠. 짧게 자른 머리 아래 목덜미가 보였다⁠. 은하는 밤에 혼자 서초동 지하 통로를 걸었다⁠. 계단을 셌다⁠. 내 다리로 몇 분인지 재었다⁠. 나는 은하에게 계단을 세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었다⁠.

*

소장은 수요일 오전 열 시에 가정법원 민원실 창구로 들어갔다⁠. 나는 은빈 옆에 서 있었다⁠. 창구 직원이 서류를 받아 도장을 찍었다⁠. 도장 소리가 났다⁠. 작고 둔한 소리였다⁠. 여섯 해가 도장 소리 하나로 법원 안에 들어갔다⁠.

마흔두 계단을 걸어 백화점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사 분이 걸렸다⁠. 은하가 운전석 문에 기대 서 있다가 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은하는 묻지 않았다⁠. 내 얼굴을 보고 뒷문을 열었다⁠. 나는 뒷문을 열어 둔 채 은하를 보았다⁠.

“⁠들어갔어요⁠.⁠”

“⁠네⁠.⁠”

“⁠도장 찍는 소리가 났어요⁠.⁠”

“⁠무슨 소리였어요⁠?⁠”

“⁠아주 작은 소리요⁠.⁠”

은하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정비소 벽의 사진 속 젊은 은하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사모님⁠. 큰 경기도 출발 신호는 작아요⁠. 불 하나 꺼지는 거예요⁠. 빨간 불 다섯 개가 하나씩 꺼지면 출발이에요⁠.⁠”

*

송달은 이틀 뒤에 남편의 회사로 갔다⁠. 대륭전자 본사 이십팔 층⁠, 부사장실⁠. 송달을 받은 밤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밤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흘째 밤 열한 시⁠, 내 휴대전화에 문자 한 줄이 왔다⁠.

「⁠돌아가면 보자⁠.⁠」

나는 문자를 지우지 않았다⁠. 은빈에게 보냈다⁠. 은빈이 곧바로 답장했다⁠. 「⁠저장하세요⁠. 접근 금지 신청 같이 넣을게요⁠.⁠」

사흘째 밤 열두 시⁠, 나는 차고로 내려갔다⁠. 새 블랙박스가 달린 차들이 어둠 속에 줄지어 있었다⁠. 새 블랙박스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기종이었다⁠. 은하는 내 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차고 문틈으로 내가 들어가자 은하가 룸미러를 위로 접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차가 서 있는 채로 뒷자리에 앉았다⁠.

“⁠어머님이 삼백 끊으셨어요⁠.⁠”

은하가 먼저 말했다⁠.

“⁠어제부터요⁠. 보고 문자도 그만 보내래요⁠. 이제 필요 없다고⁠. 대신 정비소 대출이 다음 달부터 이자가 두 배래요⁠. 대륭캐피털에서 문자 왔어요⁠.⁠”

“⁠은하 씨⁠.⁠”

“⁠그만두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은하가 핸들을 두 손으로 쥐었다⁠. 차는 서 있었다⁠. 시동도 꺼져 있었다⁠. 은하의 손은 달리는 차의 핸들을 쥐듯 단단했다⁠.

“⁠제가 그만두면 사모님 차 누가 몰아요⁠. 어머님이 새 기사 붙이실 거예요⁠. 그 사람은 사모님 다리로 마흔두 계단이 몇 분인지 몰라요⁠.⁠”

나는 은하의 뒷머리를 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는 자리였다⁠. 뒷자리와 운전석 사이는 한 뼘이었다⁠. 여섯 해 동안 나는 한 뼘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창문 버튼을 눌렀다⁠. 서 있는 차의 창문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려갔다⁠. 차고의 찬 공기가 들어왔다⁠.

은하가 거울 없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호를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오늘은 집에 가기 싫다⁠. 우리는 이미 집 안에 있었다⁠.

“⁠사모님⁠. 여기가 집이잖아요⁠.⁠”

“⁠알아요⁠. 그래도 싫어요⁠.⁠”

은하가 웃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우리는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삼십 분을 앉아 있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

나흘째 아침⁠, 노비호가 내 방 앞에 서 있었다⁠. 쟁반에 죽이 있었다⁠. 노비호는 쟁반을 화장대 위에 놓고 나가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

“⁠사모님⁠. 오늘 아침 신문은 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신문이 오늘 무겁습니다⁠. 무거운 신문은 아침에 보면 체합니다⁠.⁠”

노비호가 나간 뒤 나는 휴대전화로 신문을 열었다⁠. 경제면 맨 아래에 작은 기사가 있었다⁠. 「⁠대륭건설⁠, 하청 업체 권씨 건설과 계약 해지⁠… 품질 문제⁠」 기사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대륭캐피털⁠, 권씨 건설 대출 조기 회수 검토⁠」

권씨 건설⁠. 아버지의 회사였다⁠. 사원 삼백⁠, 하청까지 천 명⁠. 대륭건설 하청이 매출의 반이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지난주에 아버지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화장대 위에 엎어 놓았다⁠. 죽은 식어 있었다⁠.

*

시어머니는 아침 식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을 떠먹고⁠, 나물을 집고⁠, 신문을 넘겼다⁠. 경제면은 넘기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님⁠. 권씨 건설이요⁠.⁠”

“⁠품질 문제래⁠.⁠”

“⁠스무 해 동안 품질 문제가 없었던 회사입니다⁠.⁠”

“⁠그럼 이제 생긴 거지⁠.⁠”

시어머니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입가를 눌렀다⁠. 아주 천천히⁠.

“⁠세린아⁠.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안 했다⁠. 법원에 소장을 넣은 것도 너고⁠, 대륭건설이 하청을 바꾼 것도 대륭건설이다⁠. 나는 그 회사 사장이 아니야⁠.⁠”

“⁠어머님이 시키신 거잖아요⁠.⁠”

“⁠증거 있니⁠?⁠”

시어머니가 웃었다⁠. 낮고 느린 웃음이었다⁠. 웃고 나서 찻잔을 들었다⁠.

“⁠아버지한테 가 봐라⁠. 아버지가 너보다 계산이 빠르시니까⁠.⁠”

*

은하가 성수동 뒷골목에 차를 댔다⁠. 내리기 전에 은하가 깜빡이 손잡이를 두 번 툭툭 쳤다⁠. 골목 입구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있었다⁠. 평창동에서부터 따라온 차였다⁠. 어머님의 사람이었다⁠. 은하는 떨궈 내지 않았다⁠. 오늘은 떨궈 낼 이유가 없었다⁠. 친정에 가는 며느리를 따라오는 차였다⁠.

권씨 건설 사옥은 오 층 건물이었다⁠. 이 층 사장실 유리벽 너머로 사무실이 보였다⁠. 직원들이 책상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전화가 너무 많이 울렸다⁠. 경리 과장이 수화기를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사탕을 주던 사람이었다⁠. 과장이 나를 보고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인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장실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공사장 크레인이 보였다⁠. 대륭건설이 짓는 성수동 아파트 단지였다⁠. 권씨 건설이 철근을 대던 현장이었다⁠. 크레인 꼭대기에 대륭 깃발이 펄럭였다⁠.

“⁠앉아라⁠.⁠”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앉지 않았다⁠.

“⁠아버지⁠. 이혼 소송 냈습니다⁠.⁠”

“⁠안다⁠. 사돈 어른이 전화하셨다⁠. 그제 밤에⁠.⁠”

아버지가 돌아섰다⁠. 예순넷이었다⁠. 지난주보다 늙어 보였다⁠. 책상 위에 혈압약 봉투가 열려 있었다⁠. 지난주 내가 가져다 드린 약이었다⁠. 반이 비어 있었다⁠. 한 주 만에 반을 드셨다⁠. 아버지는 책상 위의 결혼식 액자를 보았다⁠. 대륭 회장과 악수하는 자기 얼굴을 보았다⁠.

“⁠사돈 어른 말씀이 이랬다⁠. 며느리가 요즘 아프다고⁠. 셋째 해에도 아팠다고⁠. 병원 기록도 있다고⁠. 아픈 애가 무슨 판단을 하겠냐고⁠. 아버지가 데려가서 좀 쉬게 하라고⁠. 그럼 하청도 대출도 없던 일로 하겠다고⁠.⁠”

“⁠아버지⁠. 저 안 아픕니다⁠.⁠”

나는 소매를 걷었다⁠. 손목을 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사흘이 지나 멍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손가락 네 개의 자리⁠. 아버지가 내 손목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아버지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섯 해입니다⁠, 아버지⁠. 첫해 가을부터입니다⁠. 시아버님 칠순 잔치 날 밤부터⁠.⁠”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감은 채로 책상 모서리를 잡았다⁠. 손등의 핏줄이 돋았다⁠. 유리벽 너머에서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아버지가 눈을 떴다⁠. 내 손목을 보지 않았다⁠. 유리벽 너머의 사무실을 보았다⁠. 경리 과장을 보았다⁠. 전화를 받는 직원들을 보았다⁠.

“⁠세린아⁠. 저 사람들 보이냐⁠.⁠”

“⁠네⁠.⁠”

“⁠삼백이다⁠. 하청까지 천⁠. 저 과장은 스물두 해 다녔다⁠. 아들이 고 삼이야⁠. 저기 창가 대리는 다음 달에 결혼한다⁠. 저 사람들 월급이 다음 달 15일에 나가야 한다⁠. 대출이 회수되면 15일에 부도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네 엄마도 참았다⁠. 나한테⁠. 서른 해를⁠. 네가 모르는 줄 알았지⁠. 너는 알았지⁠. 알면서 참는 걸 배웠지⁠. 그거 내가 가르쳤다⁠. 미안하다⁠. 미안한데⁠.⁠”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소매를 내려 손목을 덮어 주었다⁠. 덮는 손이 떨렸다⁠.

“⁠소 거둬라⁠. 거두면 회사가 산다⁠. 안 거두면 15일에 삼백이 길에 나앉는다⁠. 나는 네 손목도 봤고 저 사람들도 봤다⁠. 둘 다 봤으니까 하는 말이다⁠.⁠”

유리벽 너머에서 경리 과장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과장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눈이었다⁠. 사탕을 주던 손이 책상 위에서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친정 ·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