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79자)

소득 증빙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아침 일곱 시 오십팔 분⁠, 단희가 교육장 문을 밀었을 때 민성은 벌써 앉아 있었다⁠. 노트북 옆에 편의점 삼각김밥 포장지가 두 장 접혀 있었다⁠. 민성은 손목시계도 없는 손목을 들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팔 시라면서요⁠.⁠”

“⁠팔 시 전이잖아요⁠.⁠”

“⁠이 분 전이요⁠.⁠”

단희는 가방에서 투명 파일을 꺼냈다⁠. 꼬박페이 신청 화면 다섯 장을 인쇄해 와서 화면마다 형광펜을 그어 놓은 것이었다⁠. 민성이 투명 파일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올렸다⁠.

“⁠이걸 뽑아 오셨어요⁠?⁠”

“⁠은행에선 다 뽑았어요⁠. 고객님 앞에 종이를 놓고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말해야 사람들이 믿어요⁠.⁠”

“⁠여기는 고객님 없어요⁠. 팀장님 노트북 있어요⁠.⁠”

둘은 각자 준비한 것을 꺼내 놓았다⁠. 민성의 화면에는 기종별 막대그래프가 있었다⁠. 오래된 휴대전화로 들어온 사람들이 두 번째 단계⁠, 본인인증 화면에서 빠져나갔다⁠. 인증 창이 늦게 떠서 사람들이 앱을 껐다⁠. 단희의 종이에는 세 번째 단계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었다⁠. 「⁠종합소득세 신고서를 올려 주세요⁠」

“⁠두 번째에서 빠지는 건 열에 하나예요⁠. 세 번째에선 넷이 나가요⁠.⁠”

“⁠세 번째는 서류 없는 사람이 나가는 거예요⁠. 원래 대출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이요⁠. 걸러지는 게 맞아요⁠.⁠”

“⁠시장 사장님들이 자격이 없어요⁠?⁠”

“⁠서류가 없으면요⁠.⁠”

“⁠서류가 없는 거랑 돈 갚을 힘이 없는 건 달라요⁠.⁠”

민성은 대답하지 않고 그래프 색을 바꿨다⁠. 둘은 아홉 시까지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대신 슬라이드 하나에 각자의 이름을 따로 적었다⁠.

*

아홉 시⁠, 3층 작은 회의실⁠. 길영두는 오늘도 새 운동화였다⁠. 어제와 색만 달랐다⁠. 실장 엄여란이 뒷줄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민성이 먼저 했다⁠. 기종별 이탈⁠, 인증 창이 뜨는 데 걸리는 시간⁠, 고치는 방법⁠. 깔끔했다⁠. 영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희가 이어받아 세 번째 화면을 띄우는 순간⁠, 책상 위에 놓은 손목에서 스마트워치가 부르르 떨었다⁠. 책상이 울려 소리가 컸다⁠. 「⁠6반 학부모 단톡방⁠: 휴지심 다섯 개 다들 보내셨나요⁠?⁠」 이어서 또 떨었다⁠. 「⁠저희 애는 휴지심이 없다고 울면서 갔어요ㅠㅠ⁠」

“⁠누구 폰이 진동이야⁠? 마흔 넘으면 진동도 커지나⁠?⁠”

영두가 웃었다⁠. 영두는 마흔하나였다⁠. 단희는 시계를 뒤집어 엎고 화면을 가리켰다⁠.

“⁠세 번째 단계에서 나간 사장님들이 이 화면에 평균 칠 분을 머물렀어요⁠. 다른 화면은 일 분도 안 돼요⁠. 칠 분이면 서랍을 뒤지는 시간이에요⁠. 하기 싫어서 나간 사람들이 아니에요⁠. 찾다가 못 찾아서 나간 거예요⁠.⁠”

“⁠감이잖아요⁠.⁠”

민성의 목소리가 회의실 공기를 잘랐다⁠.

“⁠칠 분 머문 게 서랍 뒤지는 건지 드라마 보는 건지 어떻게 알아요⁠?⁠”

“⁠감 아니에요⁠. 열한 해 동안 창구에서 본 거예요⁠. 신고서 가져오라고 하면 사장님들은 그 자리에서 가방부터 뒤져요⁠. 없으면 세무사한테 전화하고⁠, 세무사가 안 받으면 그냥 일어나요⁠. 일어날 때 다들 칠 분쯤 앉아 있어요⁠.⁠”

“⁠그게 데이터예요⁠?⁠”

“⁠민성 씨 데이터예요⁠. 칠 분은 민성 씨 표에서 읽은 거예요⁠.⁠”

민성이 제 노트북 화면을 다시 보았다⁠. 머문 시간 열은 민성이 만들고 정렬도 안 한 채 넘긴 칸이었다⁠. 영두가 의자를 뒤로 젖혔다⁠.

“⁠둘이 반씩 맞았네⁠. 인증 창도 고쳐야 하고⁠, 서류 화면도 뭔가 해야 하고⁠. 근데 반쪽 둘을 붙이면 하나가 돼⁠? 안 되잖아⁠. 발표가 두 개였어⁠. 조는 하나인데⁠.⁠”

실장이 뒷줄에서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적었다⁠. 단희는 엎어 둔 스마트워치가 또 떠는 것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

수요일 밤⁠, 개봉동 아파트 거실 바닥에 휴지가 산처럼 쌓였다⁠. 경채가 휴지 다섯 롤을 한꺼번에 풀어 휴지심을 빼낸 것이었다⁠.

“⁠이걸 왜 다 풀어⁠?⁠”

“⁠휴지심 다섯 개 내일까지라며⁠.⁠”

“⁠한 롤 쓰고 하나 빼고⁠, 그렇게 모으는 거지⁠.⁠”

“⁠그럼 내일까지 다섯 롤을 어떻게 써⁠?⁠”

“⁠그러니까 미리 모았어야지⁠.⁠”

“⁠미리 말을 했어야지⁠.⁠”

“⁠단톡방에 있었어⁠.⁠”

“⁠나는 단톡방에 없잖아⁠.⁠”

“⁠그러니까 들어와⁠.⁠”

“⁠내가 들어가면 아빠가 나 하나야⁠.⁠”

해윤이 휴지 산 꼭대기에 올라앉아 엄마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내일 다시 할 발표 화면이었다⁠.

“⁠엄마⁠, 글씨 너무 많아⁠. 우리 선생님은 한 장에 다섯 글자래⁠. 글씨 많으면 아무도 안 읽는대⁠.⁠”

“⁠다섯 글자로 뭘 말해⁠?⁠”

“⁠‘⁠휴지심 다섯⁠.⁠’ 이런 거⁠.⁠”

단희는 화면의 문장 열 줄을 지우고 한 줄을 남겼다⁠. 「⁠칠 분⁠, 서랍을 뒤진다⁠」 다섯 글자는 넘었다⁠. 해윤은 봐준다고 했다⁠.

*

목요일 오후 세 시⁠, 교육장 창가 한구석에 흰 반사판이 펼쳐졌다⁠. 홍보팀 사진가가 단희에게 액자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 사진 넣어 오셨죠⁠? 이거 들고 창밖 보시면서⁠, 아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살짝 웃어 주세요⁠.⁠”

“⁠아이 사진은 안 가져왔어요⁠.⁠”

실장이 반사판 뒤에서 나왔다⁠. 목소리가 밝았다⁠.

“⁠휴대전화에 있는 걸로 하죠⁠. 얼굴은 흐리게 처리할게요⁠. 뒷모습이라도요⁠.⁠”

“⁠아이들 얼굴은 안 돼요⁠. 뒷모습도요⁠.⁠”

“⁠단희 님⁠, 엄마 이야기에 아이가 없으면 그림이 안 돼요⁠.⁠”

“⁠우리 애들은 회사 광고에 나오는 거 동의 안 했어요⁠. 걔들은 휴지심 담당이에요⁠.⁠”

사진가가 웃음을 참느라 반사판이 흔들렸다⁠. 실장은 웃지 않았다⁠. 몇 초 동안 실장은 단희의 얼굴이 아니라 손을 보았다⁠. 손목 보호대 위로 빨강⁠, 노랑⁠, 초록 구슬 팔찌가 얹혀 있었다⁠.

“⁠손목⁠. 손목 좋네요⁠. 아이가 꿴 팔찌죠⁠? 그거 노트북 위에 올려 주세요⁠. 키보드 치는 손으로⁠.⁠”

셔터가 스무 번쯤 울렸다⁠. 단희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아무 글자도 치지 않았다⁠. 사진가가 화면을 보여 주었다⁠. 「⁠WOM⁠」이 정면으로 잡혀 있었다⁠.

“⁠이거 뒤집힌 거죠⁠? 보정할게요⁠. MOM으로⁠.⁠”

“⁠두세요⁠. 딸이 꿴 그대로예요⁠.⁠”

실장이 촬영을 마치며 사진가에게 말하는 소리가 교육장 맨 앞자리까지 건너갔다⁠.

“⁠이번 기수 캠페인 이름은 「⁠엄마의 두 번째 출근⁠」으로 가요⁠. 손목 컷 첫 장으로 쓰고⁠.⁠”

맨 앞자리에서 민성의 키보드 소리가 잠깐 멈췄다⁠.

반사판이 접히고 단희가 자리로 돌아오자 민성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손목 모델 하셨네요⁠.⁠”

“⁠팔찌 모델이요⁠. 손목은 덤이에요⁠.⁠”

“⁠점수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캠페인 첫 장이시던데⁠.⁠”

“⁠민성 씨는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아니요⁠.⁠”

“⁠나도 안 좋아해요⁠. 우리 둘이 하나는 맞네요⁠.⁠”

민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단희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손목 보호대를 고쳐 맸다⁠. 사진 스무 장 동안 아무 글자도 치지 않은 손이 키보드 위에서 저려 왔다⁠. 단희는 그제야 메일함을 열었다⁠. 영두가 보낸 신청 기록 파일이 두 번째로 와 있었다⁠. 제목은 「⁠반쪽 둘이 보세요⁠」였다⁠.

*

금요일 아침⁠, 둘은 처음으로 한 화면을 같이 고쳤다⁠. 오래 가지 않았다⁠. 단희가 고친 슬라이드를 민성의 파일에 붙이자 글씨체가 굴림으로 바뀌고 제목에 형광 노랑 테두리가 생겼다⁠.

“⁠이거 무슨 2009년 은행 안내문이에요⁠?⁠”

“⁠2009년 은행 안내문은 다 읽혔어요⁠. 할머니들도 읽었어요⁠.⁠”

“⁠팀장님은 할머니가 아니잖아요⁠.⁠”

“⁠팀장님 운동화 봤어요⁠? 노란 형광이에요⁠.⁠”

민성이 웃음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단희가 물병을 밀어 주었다⁠. 민성은 물을 마시고 나서 형광 테두리를 지웠다⁠. 단희는 굴림을 그대로 두라고 했고⁠, 민성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둘이 한 화면에서 합의한 것은 칠 분이라는 숫자 하나였다⁠. 점심때 표 선생이 편의점 컵라면을 들고 와서 둘의 화면을 넘겨다보더니⁠, 수학 강사 목소리로 판정했다⁠.

“⁠둘이 싸우면서 답을 하나 냈네⁠. 우리 조는 싸우지도 않고 답도 없어요⁠.⁠”

*

금요일 다섯 시⁠, 사내 메신저의 안내 봇 꼬박이가 박수 치는 그림과 함께 첫 주 점수를 올렸다⁠. 「⁠1주 차 조별 점수가 나왔어요⁠! 다들 고생 많았어요⁠!⁠」 아래 줄에 4조가 맨 밑이었다⁠. 이유 칸에는 「⁠조 안 협업 부족⁠, 회의 불참 1회⁠」가 적혀 있었다⁠. 꼬박이는 덧붙였다⁠. 「⁠4주 차 끝에 꼴찌 조는 해체돼요⁠. 조원은 개인 과제로 돌아가요⁠. 파이팅⁠!⁠」

민성은 다섯 시 십 분에 3층 끝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실장은 노트북을 덮지 않고 손짓으로 들어오라 했다⁠.

“⁠짝을 바꿔 주세요⁠.⁠”

“⁠이유는요⁠?⁠”

“⁠회의에 안 오셨고⁠, 발표가 두 개였고⁠, 점수는 꼴찌예요⁠. 4주 차에 조가 해체되면 저는 개인 과제로 가요⁠. 개인 과제로 정규직 된 사람 없잖아요⁠.⁠”

“⁠없죠⁠.⁠”

실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노트북 화면을 민성 쪽으로 돌렸다⁠. 홍보팀 시안이었다⁠. 손목 사진 옆에 흐릿한 청년의 옆모습이 있었다⁠. 회색 맨투맨이었다⁠.

“⁠못 바꿔 드려요⁠. 두 사람은 같이 가요⁠. 그림이 좋거든요⁠.⁠”

“⁠제가 그림이에요⁠?⁠”

“⁠민성 님은 그림 속 젊은 동기예요⁠. 성실하고⁠, 날카롭고⁠, 조금 무례한⁠. 마흔셋 선배를 처음엔 무시하다가 나중엔 배우는 스물넷⁠.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해요⁠.⁠”

민성은 화면 속 제 옆모습을 보았다⁠. 사흘 전 회의실 유리문 밖에서 실장이 휴대전화에 적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럼 정규직은 누가 돼요⁠? 그림 속에서요⁠.⁠”

“⁠그림은 그림이고 정규직은 점수예요⁠.⁠”

“⁠점수는 꼴찌인데요⁠.⁠”

“⁠그러니까 같이 올리세요⁠.⁠”

실장이 웃었다⁠. 대화가 끝났다는 웃음이었다⁠.

상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화면에 꼬박페이 광고가 지나갔다⁠. 작년 광고였다⁠. 마흔쯤 된 여자가 노트북 앞에서 웃고⁠, 아래에 「⁠다시 시작하는 당신을 꼬박이 응원합니다⁠」가 떴다⁠. 민성은 앞의 네 회사를 떠올렸다⁠. 물류 회사에서는 엑셀 잘하는 막내였고⁠, 게임 회사에서는 밤샘 잘하는 막내였다⁠. 네 번 다 마지막 주에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민성 씨는 어디 가도 잘할 거야⁠. 어디 가도 잘할 사람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가 닫힐 때까지 민성은 타지 않았다⁠.

*

다섯 시 오십팔 분⁠, 교육장으로 돌아오자 단희는 가방을 메는 중이었다⁠. 여섯 시 반 연장반 하원 시간이었다⁠. 단희의 책상 위에 형광펜 투명 파일이 놓여 있었다⁠. 맨 뒷장 여백에 볼펜 글씨가 있었다⁠. 「⁠떡집 사장님 — 현금 봉투⁠, 카드 단말기 영수증 줄⁠, 하루 매출은 종이가 아니고 줄에 있다⁠」

“⁠민성 씨⁠, 월요일에 봬요⁠.⁠”

“⁠금단희 씨⁠.⁠”

민성이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단희가 돌아보았다⁠.

“⁠실장님한테 짝 바꿔 달라고 했어요⁠. 안 된대요⁠. 우리가 그림이 좋대요⁠. 저도 그림이래요⁠.⁠”

단희는 메던 가방을 내렸다⁠.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하원 18⁠:30⁠」을 알리며 떨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앞에 네 번도 그림이었던 것 같아요⁠. 다 잘한다고 했거든요⁠. 잘한다는 말 듣고 다 떨어졌어요⁠.⁠”

단희는 열한 해 동안 창구에서 같은 말을 많이 했다⁠. 고객님은 어디 가셔도 잘되실 거예요⁠. 대출을 거절하면서 하던 말이었다⁠.

“⁠이번엔 그림 말고 점수로 이길 거예요⁠. 사장님 메모 이거⁠, 월요일에 제 표랑 붙여 볼게요⁠.⁠”

민성이 투명 파일을 집어 제 가방에 넣었다⁠. 허락은 묻지 않았다⁠. 단희는 엘리베이터까지 뛰면서도 웃음이 나는 이유를 몰랐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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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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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마루2026.11.01· 2화

    「팔 시라면서요」 「팔 시 전이잖아요」 「이 분 전이요」 이 대화 너무 웃겨요. 둘이 은근 잘 맞아요.

    • 여시결작가2026.11.01

      민성 씨는 이 분을 세는 사람이고 단희 씨는 그 이 분을 아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꾸 부딪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