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51자)

같은 조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일곱 시 십 분⁠, 손목의 낡은 스마트워치가 세 번째로 떨었다⁠. 금 간 화면에 「⁠찬결 적응 기간 하원 12⁠:30⁠」이 떴다가 꺼졌다⁠. 금단희는 한 손으로 딸 해윤의 머리를 땋으면서 다른 손으로 아들 찬결의 양말 한 짝을 찾았다⁠. 냉장고 문에는 어젯밤 색연필로 그린 새 시간표가 자석 넷에 눌려 있었는데⁠, 빨강과 파랑과 초록과 노랑이 얽힌 선을 어느 방향으로 따라가도 아홉 시와 열두 시 반 사이에서 단희가 둘로 쪼개졌다⁠.

“⁠엄마⁠, 엄마도 오늘 학교 가⁠?⁠”

양말을 한 짝만 신은 찬결이 발을 흔들었다⁠.

“⁠엄마는 회사⁠.⁠”

“⁠회사에 미끄럼틀 있어⁠?⁠”

“⁠없을걸⁠.⁠”

“⁠그럼 왜 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해윤이 방에서 구슬 팔찌를 들고 나왔다⁠. 방과후 공예 시간에 꿴 것이라 했다⁠. 빨강⁠, 노랑⁠, 초록 구슬 사이에 알파벳 구슬 셋이 끼어 있었다⁠. 단희가 손목에 차고 보니 「⁠WOM⁠」이었다⁠.

“⁠엄마⁠, W 아니고 M이야⁠. 하나가 뒤집혔어⁠. 엄마가 거꾸로 보는 거야⁠.⁠”

“⁠엄마가 거꾸로 보는 거구나⁠.⁠”

“⁠응⁠. 회사 가서도 거꾸로 보지 마⁠.⁠”

남편 배경채는 일곱 시 이십 분에 넥타이를 매며 현관에서 물었다⁠. 하원은 누가 하느냐고⁠. 친정엄마가 오기로 했다고 하자 경채는 장모님 무릎은 괜찮으시냐고 물었고⁠, 단희는 괜찮다고 했다⁠. 엄마의 무릎은 지난주에도 계단 앞에서 멈췄다⁠.

*

서울 구로구의 사무실 빌딩이 빽빽한 구로디지털단지 한복판의 열다섯 층짜리 가람디지털센터는 아침 여덟 시 사십 분에 사람을 가장 많이 삼켰다⁠. 엘리베이터 문 위 화면에 뉴스 두 줄이 번갈아 지나갔다⁠. 「⁠정부⁠, 경력 단절 여성 고용 장려금 올해 늘린다⁠」와 「⁠얼어붙은 투자 시장⁠, 핀테크 스타트업 줄줄이 감원⁠」 단희는 두 줄 사이에 끼어 3층에서 내렸다⁠.

가게 사장님에게 소액을 빌려주고 그날그날 카드 매출에서 조금씩 떼어 갚게 하는 앱⁠, 꼬박페이를 만드는 회사 꼬박의 인턴 교육장이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봄 햇빛이 줄무늬로 들어와 흰 책상 위에 누웠다⁠. 단희는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를 반묶음으로 묶고⁠, 연노랑 카디건 안에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목에는 어제 받은 하늘색 「⁠인턴⁠」 출입증 줄이 있었다⁠. 열 해 만에 목에 거는 줄이었다⁠.

맨 앞자리의 청년이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회색 맨투맨이었다⁠.

“⁠사장님⁠, 대출 상담은 9층이에요⁠. 여기는 인턴 교육장인데요⁠.⁠”

단희는 목에 걸린 줄을 손가락으로 들어 보였다⁠. 청년은 출입증과 단희의 얼굴을 두 번 오갔다⁠.

“⁠아⁠.⁠”

“⁠금단희예요⁠. 오늘부터 인턴이에요⁠.⁠”

“⁠차민성이요⁠.⁠”

민성은 다시 화면으로 눈을 내리다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사회 공헌 자리시구나⁠.⁠”

아홉 시 정각⁠, 인재문화실장 엄여란이 들어왔다⁠. 짧은 단발에 회색 정장⁠, 말은 빨랐고 웃음은 말보다 빨랐다⁠. 실장은 인턴 여덟 명을 한 번 둘러보고 화면에 숫자 하나를 띄웠다⁠. 「⁠1⁠」

“⁠석 달 뒤 이 방에서 한 분이 9층으로 올라갑니다⁠. 정규직으로요⁠. 일반 인턴이 여섯 분이시고⁠, 저희가 작년에 만든 다시봄 인턴이 두 분이세요⁠. 경력이 끊겼다가 다시 시작하시는 분들이죠⁠. 다 같은 출발선입니다⁠.⁠”

단희 말고 다시봄 인턴은 한 명 더 있었다⁠. 수학 학원 강사였다는 마흔여섯의 표 선생이 창가에서 손을 살짝 들었다⁠. 실장은 두 사람씩 짝을 불렀다⁠. 네 번째로 불린 것이 금단희와 차민성이었다⁠.

민성이 손을 들었다⁠.

“⁠짝을 정한 기준이 뭔가요⁠?⁠”

“⁠나이 차이가 제일 큰 두 분이에요⁠. 그림이 좋잖아요⁠.⁠”

교육장에 웃음이 퍼졌다⁠. 민성은 웃지 않았다⁠.

첫 과제는 오후 한 시 회의에서 받았다⁠. 개발팀장 길영두가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에 흰 한정판 운동화를 신고 3층까지 내려왔다⁠. 영두는 꼬박페이의 대출 신청 화면 다섯 단계를 띄우고 손바닥으로 탁자를 쳤다⁠.

“⁠사장님들이 신청하다가 중간에 다 나가 버려⁠. 어디서 왜 나가는지 내일 아홉 시까지 찾아 와⁠. 우리 MZ들은 이런 거 금방 하지⁠?⁠”

“⁠저 MZ 아닌데요⁠. 그냥 Z인데요⁠.⁠”

민성의 대답에 영두가 웃다가 단희를 보았다⁠. 단희는 무슨 알파벳이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손목을 보았다⁠. 열한 시 오십 분이었다⁠.

*

열두 시 오 분⁠, 단희는 민성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민성 씨⁠, 열두 시 십 분에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린이집이 이번 주 적응 기간이라 열두 시 반에 데리러 가야 해요⁠. 두 시 반엔 와요⁠.⁠”

“⁠회의 한 시예요⁠.⁠”

“⁠알아요⁠.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거예요⁠.⁠”

“⁠미리 말하면 회의가 두 시 반이 돼요⁠?⁠”

민성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단희가 다음 말을 고르는 동안⁠, 민성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저 이번이 다섯 번째 인턴이에요⁠. 앞에 네 번은 마지막 주에 다 떨어졌어요⁠. 이번엔 안 떨어질 거예요⁠. 사장님 사정 봐 드릴 여유가 없어요⁠.⁠”

“⁠사장님 아니고 금단희요⁠.⁠”

“⁠알아요⁠.⁠”

단희는 열두 시 십 분에 가방을 들었다⁠. 버스를 타는 동안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릎이 아파 계단을 못 내려가겠다고⁠, 미안하다고⁠. 단희는 괜찮다고 두 번 말하고 하원 도우미 앱 돌봄콜을 열었다⁠. 화면에 「⁠가장 빠른 매칭 오후 2⁠:00⁠」이 떴다⁠. 열두 시 반⁠, 아파트 상가 이층 어린이집 문 앞에서 찬결은 선생님 손을 놓자마자 단희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회사 끝났어⁠?⁠”

“⁠아니⁠. 엄마 회사 이제 막 시작했어⁠.⁠”

둘은 상가 앞 놀이터 벤치에서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 찬결은 미끄럼틀을 열한 번 탔고⁠, 단희는 휴대전화로 꼬박페이 화면을 열었다 닫았다⁠. 열두 시 오십팔 분⁠, 학부모 단톡방에 「⁠내일 준비물 휴지심 다섯 개 꼭 보내 주세요⁠」가 올라오고 「⁠넵⁠」이 스무 개쯤 따라 붙었다⁠. 단희도 「⁠넵⁠」을 쳤다⁠. 휴지심 다섯 개는 휴지를 다섯 롤 써야 나왔다⁠.

도우미는 두 시 오 분에 왔다⁠. 찬결은 처음 보는 아주머니 손을 잡고 뒤돌아 단희를 세 번 불렀다⁠. 단희는 세 번 손을 흔들고⁠, 네 번째는 못 흔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

한 시 정각⁠, 3층 작은 회의실에서 차민성은 의자 두 개 가운데 하나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빈 의자가 보이면 질문이 나왔다⁠. 질문이 나오면 대답을 해야 했고⁠, 대답을 하면 시간이 갔다⁠. 다섯 번째 인턴쯤 되면 시간이 어디서 새는지 알았다⁠.

길영두가 운동화 코를 닦으며 들어왔다⁠.

“⁠한 분은⁠?⁠”

“⁠개인 사정이요⁠.⁠”

“⁠첫날부터⁠? 와⁠, 갓생이다⁠.⁠”

갓생의 뜻을 바로잡아 주지는 않았다⁠. 민성은 밤새 짠 계획을 띄웠다⁠. 신청 화면 다섯 단계마다 머문 시간을 재고⁠, 나간 사람을 휴대전화 기종별로 나누고⁠, 인증 화면이 늦게 뜨는 기종을 찾는다⁠. 영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중간에 물었다⁠.

“⁠사장님들이 왜 나가는지는⁠?⁠”

“⁠숫자 보면 나와요⁠.⁠”

“⁠숫자가 왜를 말해 줘⁠?⁠”

민성은 대답 대신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회의실 유리문 밖으로 실장 엄여란이 지나가다 멈추었다⁠. 실장은 빈 의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한 번 보고⁠, 민성을 한 번 보고⁠, 아무 말 없이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적고 갔다⁠. 민성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조별 게시판을 열고 4조 칸에 제 이름을 넣었다⁠. 다른 이름을 넣을 자리에서 커서가 한참 깜박였다⁠. 민성은 엔터를 눌렀다⁠.

학자금 상환 알림이 휴대전화 위로 떴다가 내려갔다⁠. 「⁠이번 달 상환일까지 사흘 남았습니다⁠.⁠」 민성은 알림을 왼쪽으로 밀어 지웠다⁠.

*

두 시 사십 분⁠, 교육장 화면 한쪽에 조별 계획 게시판이 떠 있었다⁠. 1조⁠, 2조⁠, 3조에는 이름이 둘씩⁠, 4조에는 하나만 있었다⁠. 「⁠4조 계획 — 차민성⁠」

단희는 탕비실 커피 기계 앞에서 민성을 찾았다⁠. 민성은 종이컵에 믹스커피 두 봉을 한꺼번에 털어 넣고 있었다⁠.

“⁠계획서에 내 이름이 없던데요⁠.⁠”

“⁠회의에 안 계셨잖아요⁠.⁠”

“⁠말하고 나갔어요⁠.⁠”

“⁠말하고 나간 사람 이름은 올려요⁠? 그럼 저도 내일 말하고 나갈게요⁠.⁠”

물 끓는 소리가 둘 사이를 지나갔다⁠. 단희는 손목 보호대를 한 왼손으로 컵을 집었다⁠. 찬결을 업고 다닌 다섯 해가 손목 안쪽에 시큰하게 남아 있었다⁠.

“⁠같은 조면 이름은 같이 올리는 거예요⁠. 내 사정 봐 달라는 거 아니에요⁠.⁠”

“⁠같은 조요⁠?⁠”

민성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실장님이 그림 때문에 붙인 조예요⁠. 사장님은 그림이고⁠, 저는 점수예요⁠. 점수가 그림 기다려 주는 거 봤어요⁠?⁠”

단희는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달았다⁠. 민성의 컵이었다⁠.

“⁠내일 아홉 시 발표⁠, 내가 할게요⁠.⁠”

“⁠데이터 볼 줄 아세요⁠?⁠”

“⁠대출 받으러 온 사람 얼굴은 볼 줄 알아요⁠. 만 명쯤⁠.⁠”

민성은 단희가 손에 든 제 컵을 보았다가⁠, 새 컵을 꺼냈다⁠.

*

네 시⁠, 실장 엄여란이 단희를 3층 끝 상담실로 불렀다⁠. 실장은 서류철 대신 태블릿을 내밀었다⁠. 「⁠다시봄 인턴 인터뷰 및 사진 촬영 — 목요일 오후 세 시⁠」

“⁠단희 님 이야기가 좋아요⁠. 은행원으로 열한 해⁠, 아이 둘⁠, 열 해 쉬고 마흔셋에 다시⁠. 이런 이야기가 이 프로그램을 살려요⁠.⁠”

“⁠과제 때문에 바쁠 것 같은데요⁠.⁠”

“⁠점수 걱정은 마세요⁠.⁠”

실장이 웃었다⁠. 보조개가 없는 웃음이었다⁠.

“⁠단희 님은 다른 걸로 기여해 주시면 돼요⁠.⁠”

단희는 손목의 구슬을 엄지로 하나씩 밀었다⁠. 「⁠W⁠」가 손목 안쪽으로 굴러갔다⁠.

“⁠점수로 봐 주세요⁠. 다른 사람들처럼요⁠.⁠”

“⁠물론이죠⁠.⁠”

실장의 대답은 너무 빨리 왔다⁠.

상담실을 나오자 복도 정수기 앞에서 표 선생이 종이컵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표 선생은 단희의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을 흘끗 보더니 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같은 일정⁠, 같은 문구였다⁠.

“⁠목요일 세 시요⁠? 저는 네 시래요⁠. 우리 둘이 얼굴 담당인가 봐요⁠.⁠”

“⁠표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수학 강사 십오 년 했다고⁠, 사진보다 엑셀이 빠르다고 했죠⁠. 실장님이 웃던데요⁠. 그 웃음⁠, 학부모 상담 때 많이 봤어요⁠. 다 들었는데 하나도 안 바꾸는 웃음⁠.⁠”

*

밤 아홉 시⁠, 아이들을 재우고 나온 단희 앞에 경채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계산기 앱이었다⁠.

“⁠인턴 월급 이백삼십⁠. 도우미 하루 네 시간에 연장반⁠, 해윤이 피아노 하나 더 넣으면 이백사십⁠. 마이너스 십만 원이야⁠.⁠”

“⁠그래서⁠?⁠”

“⁠돈 내고 회사 다니는 거라고⁠.⁠”

“⁠그만두라는 거야⁠?⁠”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그만둬도 된다는 거지⁠.⁠”

“⁠그게 그거잖아⁠.⁠”

“⁠다르지⁠. 하나는 명령이고 하나는 배려고⁠.⁠”

“⁠배려를 계산기로 해⁠?⁠”

경채는 계산기 앱을 껐다가 다시 켰다⁠. 숫자는 그대로였다⁠.

“⁠장모님 무릎은 괜찮으시대⁠?⁠”

단희는 대답하지 않고 식탁에 노트북을 폈다⁠.

“⁠십만 원 내고 다닐게⁠. 석 달이면 삼십만 원이야⁠. 학원비보다 싸⁠.⁠”

밤 열한 시⁠, 집 안에서 냉장고 모터만 웅웅거렸다⁠. 단희는 영두가 보내 준 신청 기록 파일을 열었다⁠. 숫자는 밭고랑처럼 끝이 없었다⁠. 다섯 단계 가운데 세 번째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빠졌다⁠. 화면에는 「⁠종합소득세 신고서를 올려 주세요⁠」가 있었다⁠.

열한 해 전 남구로지점 창구 앞에 앉던 떡집 사장님이 떠올랐다⁠. 사장님은 신고서 대신 꼬깃한 현금 봉투를 들고 왔고⁠, 단희는 봉투를 받아 줄 칸이 없는 서식을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시장 사람들의 하루는 종이가 아니라 카드 단말기 영수증 줄에 남았다⁠.

단희는 민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발표는 둘이 합니다⁠. 여덟 시 반에 봬요⁠.⁠」

답은 일 분 만에 왔다⁠. 「⁠8시 15분⁠.⁠」

단희는 「⁠8시⁠.⁠」라고 쳤다⁠. 손목의 구슬 팔찌가 노트북 모서리에 닿아 딸깍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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