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516자)

열나흘 밤, 마루의 담판

세배 받는 청룡 · 소예찬

2월 8일 화요일⁠, 정월 열나흘이었다⁠. 아침 아홉 시⁠, 마을회관 스피커가 언덕까지 울렸다⁠.

“⁠아아⁠, 알립니다⁠. 내일 대보름 달집은 해마다 하던 대로 포구 앞 모래밭에 쌓습니다⁠. 솔가지 가진 분은 열 시까지 모래밭으로 가져오시고⁠, 대나무는 이장 집 뒤에서 베어 가시고⁠, 또 한 가지⁠. 용님께서도 도와주신답니다⁠. 꼬리 근처에는 가지 마씨요⁠.⁠”

연서는 이틀째 마루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일요일 밤 팀장 전화를 끊은 뒤로 휴대전화는 꺼 두었다⁠. 켜면 방송을 봤다는 문자가 수백 통이었다⁠. 월요일 하루는 아무도 순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큰삼촌이 보낸 「⁠입소 연기 요청⁠」 문자에 요양원은 「⁠대기 순번으로 돌려 드립니다⁠」라고만 답했다⁠. 할머니는 방송 뒤로 연서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밥을 차려 주고⁠, 국을 떠 주고⁠, 그뿐이었다⁠.

지붕 위의 용이 고개를 처마 밑으로 늘어뜨렸다⁠.

“⁠일어나라⁠. 솔가지 나르러 가자⁠.⁠”

“⁠용님이 나르시면 되잖아요⁠.⁠”

“⁠나는 꼬리로 나른다⁠. 너는 손으로 나른다⁠. 금례가 그러라 했다⁠.⁠”

연서는 안방 문을 보았다⁠. 문틈으로 할머니가 마루를 내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

포구 앞 모래밭에는 오전 내내 솔가지가 쌓였다⁠. 마을 사람들이 경운기로 실어 오는 솔가지보다 용이 꼬리로 감아 오는 솔가지가 훨씬 많았다⁠. 용은 뒷산 소나무 숲에 꼬리를 한 번 넣었다 빼면 솔가지 한 짐을 감아 나왔다⁠. 모래밭에 내려놓을 때마다 솔잎 냄새가 바닷바람에 섞였다⁠. 이장이 확성기를 들고 모래밭 한가운데서 지휘했다⁠.

“⁠용님⁠! 거기 말고 쪼까 왼쪽으로⁠! 아니⁠, 용님 왼쪽 말고 내 왼쪽⁠!⁠”

“⁠용님께서 어느 왼쪽이냐고 하세요⁠.⁠” 연서가 옮겼다⁠.

“⁠바다 보고 왼쪽⁠!⁠”

“⁠용님은 바다에서 오셨으니까 바다 보고 서는 게 아니라 바다를 등지고 서신대요⁠.⁠”

“⁠그라믄 오른쪽⁠!⁠”

모래밭에 웃음이 퍼졌다⁠. 반석규는 모래밭 끝에서 수온계를 바닷물에 담그고 있었다⁠. 생방송 다음 날 연구원 트럭은 대전으로 돌려보냈다⁠. 반석규 혼자 남아 대보름 전후의 수온을 재겠다고 했다⁠. 연서가 솔가지를 내려놓고 다가가자 반석규가 수첩을 보여 주었다⁠. 「⁠2/8 갯바위 앞 11⁠.8도⁠」⁠.

“⁠아직 차갑습니다⁠. 용이 있으니까⁠.⁠”

“⁠박사님⁠, 그날 그물 걷어 주셔서 감사했어요⁠.⁠”

“⁠감사할 일 아닙니다⁠. 통역 없이 옮겼으면 그 생물이 다쳤을 거고⁠, 어르신도 다치셨을 겁니다⁠. 옮기지 못한 건 제 실패고요⁠.⁠” 반석규가 수온계를 거두었다⁠. “⁠다만 연서 씨⁠, 내일 밤이 지나면 이 숫자는 올라갑니다⁠. 그건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점심때 부녀회가 회관에서 오곡밥을 지었다⁠. 열나흗날 저녁에 오곡밥을 먹는 것이 금포의 풍습이었다⁠. 찹쌀에 팥을 넣을지 수수를 먼저 넣을지를 두고 부녀회장과 총무가 다퉜다⁠. 오곡밥 냄새가 회관을 넘어 모래밭까지 내려왔다⁠. 고모가 회관 부엌에 들어가 두 사람 사이에서 주걱을 빼앗아 쥐었다⁠.

“⁠팥이 먼저여⁠. 팥이 늦게 익어⁠.⁠”

“⁠여수 사람이 금포 오곡밥을 아요⁠?⁠”

“⁠나 금포에서 났소⁠!⁠”

오후 세 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모래밭까지 내려왔다⁠. 방송 뒤로 처음 집 밖에 나온 것이었다⁠. 연서가 달려가 팔을 받쳤다⁠. 할머니는 뿌리치지 않았다⁠. 둘은 달집 옆 엎어 놓은 배 위에 나란히 앉았다⁠. 달집은 어른 키 세 길만큼 올라가 있었고⁠, 꼭대기에 대나무 장대가 꽂혀 있었다⁠.

“⁠할머니⁠, 저한테 화나셨죠⁠?⁠”

“⁠화났제⁠. 니가 내 말을 안 들어서⁠.⁠”

할머니는 바다를 보았다⁠. 방파제 끝에서 아이 둘이 게를 잡는다고 엎드려 있었다⁠. 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아이들을 가리켰다⁠.

“⁠니 빠진 날⁠, 나는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춘배가 소리 지르는 걸 듣고 냄비를 든 채로 뛰었어⁠. 모래밭까지 그대로 들고 갔다⁠. 니가 기침하는 걸 보고서야 손이 뜨거운 줄 알았제⁠.⁠”

“⁠그 얘기 처음 들어요⁠.⁠”

“⁠부끄러워서 안 했다⁠. 미역국 냄비 들고 뛰는 할매가 어딨냐⁠.⁠” 할머니가 연서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옛 화상 자국이 반질반질했다⁠. “⁠근디 니가 그날 청이 숨으로 살았으믄⁠, 니 숨은 반은 청이 거여⁠. 그래서 청이 말이 들리는 갑다⁠.⁠”

“⁠그럼 할머니⁠, 저 화나신 거 풀리셨어요⁠?⁠”

“⁠안 풀렸다⁠. 근디 니가 내 말 들었으믄 더 화났을 거여⁠.⁠”

연서는 웃다가 목이 메었다⁠. 할머니는 내일 무엇을 할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방파제에서 게를 한 마리 잡고 소리를 질렀다⁠.

*

밤 여덟 시⁠, 기와집 마루에 상이 펴졌다⁠. 상 위에 오곡밥 일곱 그릇과 묵은 나물 아홉 가지가 놓였다⁠. 할머니가 마루 끝 기둥 아래 방석에 앉았다⁠. 설날 아침 세배를 받던 자리였다⁠. 할머니 양쪽으로 큰삼촌과 고모⁠, 맞은편에 이장과 어촌계장⁠, 마루 귀퉁이에 반석규가 앉았다⁠. 연서는 할머니 오른쪽 아래⁠, 처마 밑 자리였다⁠. 용이 처마에서 고개를 늘어뜨려 연서 머리 위에 수염을 드리웠다⁠. 하늘에는 열나흘 달이 바다 위로 올라와 거의 둥글었다⁠.

대문으로 석재학이 들어왔다⁠. 회색 코트에 손에는 서류 봉투 하나뿐이었다⁠. 석재학은 마루 앞에 이르자 코트를 벗어 개고⁠, 먼저 지붕을 향해 절했다⁠. 그다음 할머니를 향해 절했다⁠.

“⁠어르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오곡밥 먹고 해라⁠.⁠”

석재학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오곡밥을 반 그릇 먹었다⁠. 석재학이 먹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만 났다⁠. 석재학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서류 봉투를 열었다⁠.

“⁠새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집은 계약에서 뺍니다⁠. 어르신은 평생 이 집에 사십니다⁠. 둘째⁠, 밭은 3억 5천에 사겠습니다⁠. 처음 계약은 집과 밭을 합쳐 3억이었습니다⁠. 셋째⁠, 마을 발전기금을 1억으로 올리고⁠, 어촌계에는 해저 케이블 공사로 생기는 어업 손실을 따로 보상합니다⁠. 넷째⁠, 어르신께서 집에 계시는 동안 하루 여덟 시간 요양보호사를 부를 수 있는 돈을 매매 대금에 얹겠습니다⁠.⁠”

이장이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어촌계장이 이장을 보았다⁠. 고모가 큰삼촌 옆구리를 찔렀다⁠. 큰삼촌은 꼼짝하지 않았다⁠.

“⁠조건이 좋은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석재학이 말을 이었다⁠. “⁠일요일 방송 뒤로 금포 변전소 후보지 이야기가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이 땅에 변전소를 세우려면 주민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동의 없이는 정부 계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의를 사러 왔습니다⁠. 숨기지 않겠습니다⁠.⁠”

석재학이 반석규를 보았다⁠.

“⁠박사님⁠, 내일 밤 용이 가면 이 바다는 어떻게 됩니까⁠?⁠”

반석규는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한 주 안에 원래대로 데워집니다⁠. 삼치도 따라 나갑니다⁠.⁠”

“⁠고맙습니다⁠.⁠” 석재학이 다시 할머니를 보았다⁠. “⁠어르신⁠, 송전선로는 어딘가로는 지나가야 합니다⁠. 금포가 아니면 다른 마을이 이 짐을 집니다⁠. 그 마을에도 어르신 같은 분이 계십니다⁠. 저는 어디든 동의를 가장 많이 얻는 곳에 세웁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석재학의 말은 이번에도 틀린 데가 없었다⁠. 할머니는 오곡밥을 한 숟갈 떠 넣고 천천히 씹었다⁠.

연서가 일어났다⁠. 처마에서 늘어진 용의 수염이 연서 어깨를 쓸었다⁠.

“⁠팀장님⁠, 조건 좋아요⁠. 진짜 좋아요⁠. 제가 상담원이면 바로 받으시라고 할 거예요⁠.⁠”

석재학이 연서를 보았다⁠.

“⁠근데 저는 이제 상담원 아니에요⁠. 그만뒀어요⁠. 그러니까 제 말 할게요⁠. 통역 말고요⁠.⁠”

연서는 숨을 한 번 골랐다⁠.

“⁠팀장님 조건대로 하면 할머니는 평생 이 집에 사세요⁠. 그 평생 동안 마루에서 바다 대신 송전탑을 보세요⁠. 할아버지가 돌 지고 쌓은 둑 위로 해저 케이블이 올라오고요⁠. 어장은 보상받아요⁠. 근데 보상받은 어장에서 다시 고기 잡는 사람은 없잖아요⁠.⁠”

“⁠연서 씨⁠, 어장은 용이 가면 어차피 비어 갑니다⁠. 십 년 뒤 이 바다에 무엇이 남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마을이 직접 하면 안 돼요⁠? 업체 말고요⁠. 설명회 때 군청에서 주민조합 만든다고 했잖아요⁠. 할머니 밭에 마을이 태양광을 깔고⁠, 마을이 돈을 나눠 가지면요⁠.⁠”

석재학이 처음으로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하실 수 있습니다⁠. 대신 돈도 시간도 많이 듭니다⁠. 고흥에는 군민 천오백 명이 허가받은 태양광이 아직 전선에 연결되지 못하고 줄 서 있습니다⁠. 마을이 하면 몇 해를 기다릴지 모릅니다⁠. 저희가 하면 빠릅니다⁠.⁠”

“⁠빨리 하시려고 변전소를 세우시는 거잖아요⁠. 저희는 천천히 할게요⁠. 할머니 밭에 패널을 깔아도 바다를 가리지 않게 낮게⁠, 둑 안쪽에만요⁠. 케이블은 우리 어장 말고 다른 데로요⁠.⁠”

“⁠그 다른 데에도 어장이 있습니다⁠.⁠”

“⁠알아요⁠. 그건 그 마을이랑 같이 싸울게요⁠. 주민조합은 한 마을이 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마루가 조용했다⁠. 어촌계장이 무릎을 탁 쳤다⁠. 이장이 안경을 벗어 닦았다⁠. 반석규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오곡밥을 씹고 있었다⁠.

*

큰삼촌이 일어났다⁠. 석재학이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내려는 참이었다⁠.

“⁠석 팀장⁠, 그 종이 넣어 두씨요⁠. 그 말은 내가 하께⁠.⁠”

큰삼촌이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설날 아침 끝까지 아무에게도 절하지 않던 무릎이었다⁠.

“⁠어매⁠. 1월 3일에 해든하고 자문 계약을 했어요⁠. 이천만 원 받았어요⁠. 어매 땅 팔아 주는 대가로요⁠. 천은 태성이 등록금 냈고⁠, 천은 통장에 그대로 있어요⁠. 쓰질 못하겄드라고요⁠.⁠”

고모가 오곡밥 주걱을 들고 일어났다⁠.

“⁠오빠⁠!⁠”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고모가 주걱을 든 채 멈췄다⁠.

“⁠태성이 등록금 냈냐⁠?⁠”

“⁠…⁠…⁠.⁠”

“⁠냈냐고⁠.⁠”

“⁠냈어요⁠.⁠”

“⁠잘했다⁠.⁠” 할머니가 말했다⁠. 큰삼촌이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이어 말했다⁠. “⁠남은 천은 돌려줘라⁠. 내 땅 팔아 주고 받은 돈은 내 돈이여⁠. 니 돈 아니여⁠.⁠”

“⁠예⁠.⁠”

“⁠그라고 등록금 낸 천은 니가 갚아라⁠. 나한테⁠.⁠”

“⁠예⁠, 어매⁠.⁠”

고모가 주걱을 내렸다가 다시 들어 큰삼촌 등을 한 번 툭 쳤다⁠. 밥알이 큰삼촌 점퍼에 붙었다⁠. 마루에 웃음이 났다⁠. 웃음이 금방 잦아들었다⁠.

석재학이 서류 봉투를 닫았다⁠.

“⁠사장님⁠, 자문 계약은 해지로 처리하겠습니다⁠. 받으신 돈은 그대로 돌려받겠습니다⁠.⁠”

“⁠그라씨요⁠.⁠”

*

할머니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청아⁠, 니는 할 말 없냐⁠?⁠”

용이 수염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마루의 모든 눈이 연서를 향했다⁠. 연서는 이번에는 아무것도 깎지 않았다⁠.

“⁠내일 달이 차면 금례를 등에 태우고 간다⁠. 금례가 가자 했으니⁠. 칠십 년 전에 한 번⁠, 설날 밤에 한 번⁠.⁠”

연서가 옮기자 고모가 주걱을 떨어뜨렸다⁠. 큰삼촌이 무릎을 꿇은 채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이장과 어촌계장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오곡밥 그릇을 하나씩 포개면서 말했다⁠.

“⁠다들 내일 달 뜰 때 달집 앞으로 와라⁠. 땅이고 집이고⁠, 청이 따라가는 거고⁠, 거기서 다 말하마⁠. 석 팀장도 오고⁠, 박사도 오고⁠.⁠”

“⁠어르신⁠, 기다리겠습니다⁠.⁠” 석재학이 일어나 코트를 입었다⁠.

손님들이 하나씩 언덕을 내려갔다⁠. 연서는 마당에 혼자 남아 달을 보았다⁠. 열나흘 달은 한쪽 귀퉁이가 아주 조금 덜 찼다⁠. 처마에서 용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연서에게만⁠.

“⁠달이 뜨면 데려간다⁠.⁠”

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루로 올라가 할머니가 포개 놓은 오곡밥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 바닥 장판 누렇게 바랜 귀퉁이를 밟지 않으려고 연서는 한 걸음 크게 건넜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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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산책2026.11.06· 9화

    큰삼촌이 무릎 꿇고 이천만 원 이야기 꺼낼 때 미웠던 마음이 좀 풀렸어요. 그런데 「달이 뜨면 데려간다」를 연서한테만 말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할머니 정말 가시는 건가요?

    • 소예찬작가2026.11.06

      연서가 이번엔 아무 말도 깎지 않고 옮긴 게 저한테는 이 화의 가운데였어요. 달집 앞에서 할머니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마지막 화에 있습니다.

열나흘 밤, 마루의 담판 · 세배 받는 청룡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