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52자)

구경은 갔다 오는 거여

세배 받는 청룡 · 소예찬

2월 9일 수요일⁠, 정월 대보름 아침이었다⁠. 연서가 마루로 나오자마자 부엌에서 고모가 불렀다⁠.

“⁠연서야⁠!⁠”

“⁠네⁠?⁠”

“⁠내 더위 사 가라⁠!⁠”

고모가 국자를 들고 깔깔 웃었다⁠. 대보름 아침에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부른 사람의 더위를 떠안는다는 풍습이었다⁠. 연서가 입을 막았지만 늦었다⁠. 큰삼촌이 마당에서 호두를 깨다가 고개를 들었다⁠. 연서는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용이 막 고개를 늘어뜨리며 입을 여는 참이었다⁠. 연서가 먼저 소리쳤다⁠.

“⁠용님⁠! 제 더위 사 가세요⁠!⁠”

용이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용은 더위를 타지 않는다⁠. 바다가 탈 뿐이다⁠.⁠”

“⁠그럼 바다한테 팔게요⁠.⁠”

“⁠바다는 이미 많이 샀다⁠.⁠”

연서는 웃다가 웃음을 멈췄다⁠. 마루 끝에서 할머니가 소주잔에 맑은 술을 반쯤 따라 연서에게 내밀었다⁠. 귀밝이술이었다⁠. 대보름 아침에 찬 술을 한 모금 마시면 한 해 동안 귀가 밝아진다고 했다⁠.

“⁠마셔라⁠. 귀 밝으라고⁠.⁠”

“⁠할머니⁠, 저 귀 너무 밝아서 탈이에요⁠.⁠”

“⁠그래도 마셔⁠. 오늘은 잘 들어야 쓴다⁠.⁠”

큰삼촌이 깐 호두를 손바닥에 모아 할머니 앞에 놓았다⁠. 부럼이었다⁠. 할머니는 이가 약해 호두를 깨지 못했다⁠. 큰삼촌이 하나 깨면 할머니가 하나 먹었다⁠. 용이 지붕에서 꼬리를 내려 큰삼촌 옆에 놓인 호두 자루를 통째로 감아 올리더니⁠, 자루째 입에 넣고 한 번 깨물었다⁠. 와작⁠, 하는 소리가 언덕 아래까지 내려갔다⁠. 용이 자루를 뱉었다⁠. 껍데기만 남은 자루가 마당에 떨어졌다⁠.

“⁠부럼은 원래 깨서 뱉는 거래요⁠.⁠” 연서가 말했다⁠.

“⁠알맹이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이냐⁠?⁠”

“⁠먹어도 돼요⁠. 껍데기를 뱉는 거예요⁠.⁠”

“⁠그럼 반대로 했구나⁠.⁠”

큰삼촌이 빈 자루를 내려다보다가 처음으로 지붕을 향해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간 웃음이었다⁠.

*

열 시⁠, 할머니는 연서와 함께 읍내 은행에 갔다⁠. 큰삼촌이 「⁠길가네 돼지국밥⁠」 승합차를 몰았다⁠. 할머니가 창구에서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표지가 닳아 하얗게 일어난 정기예금 통장이었다⁠.

“⁠이거 깨 주씨요⁠.⁠”

창구 직원이 화면을 보고 할머니를 보았다⁠.

“⁠어르신⁠, 만기가 내년인데요⁠. 지금 깨시면 이자가 거의 없으세요⁠.⁠”

“⁠알아⁠. 장례비로 모은 거여⁠. 청이가 안 데려가믄 장례는 나중 일이고⁠, 데려가믄 장례가 필요 없응께⁠. 어느 쪽이든 지금 깨도 돼⁠.⁠”

창구 직원이 연서를 보았다⁠.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예금이 삼천만 원이었다⁠. 고모가 여수에서 적금을 깨 보낸 천만 원이 연서 통장에 먼저 들어와 있었다⁠. 연서는 다음 주에 들어올 퇴직금 가운데 천만 원을 먼저 빌려 보탰다⁠. 일곱 해를 일한 돈이었다⁠. 남은 천만 원은 큰삼촌이 냈다⁠. 은행 앞 중고차 매매상에 승합차를 넘긴 돈이었다⁠.

“⁠삼촌⁠, 차를요⁠?⁠”

“⁠식당 내놨다⁠. 순천 가게 권리금 받으믄 빚 절반은 갚는다⁠. 국밥 배달할 일 없으믄 차도 필요 없어⁠.⁠”

큰삼촌이 승합차 열쇠를 매매상 사장에게 건넸다⁠. 차 옆구리의 붉은 글씨가 햇빛을 받았다⁠. 「⁠포장 됩니다⁠」⁠. 매매상 사장이 글씨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지워야겠다고 했다⁠. 큰삼촌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세 사람은 군내버스를 타고 금포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버스 창밖으로 바다를 보며 육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든 봉투를 한복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었다⁠. 요양원 상자에서 도로 꺼낸 연보라 한복이었다⁠.

*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포구 앞 모래밭에 마을 사람들이 다 모였다⁠. 달집은 어제보다 더 높았다⁠. 솔가지 사이사이 대나무가 꽂혔고⁠, 꼭대기에 사람들이 소원을 적은 한지가 매달려 바람에 떨었다⁠. 해가 뒷산으로 넘어가는 사이 바다 끝에서 달이 올라왔다⁠. 크고 붉었다⁠. 올라올수록 하얘졌다⁠.

석재학이 와 있었다⁠. 반석규도⁠, 맹하라도 있었다⁠. 맹하라는 카메라 없이 빨간 롱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오늘은 그냥 보러 왔다고 했다⁠. 군청 주무관도 남색 점퍼를 입고 이장 옆에 서 있었다⁠. 용은 지붕에서 내려와 달집 둘레를 한 바퀴 감고 모래 위에 턱을 괴었다⁠.

할머니가 엎어 놓은 배 위에 앉았다⁠. 연서가 곁에서 지팡이를 받았다⁠. 모래밭이 조용해졌다⁠.

“⁠석 팀장⁠.⁠”

석재학이 앞으로 나왔다⁠. 할머니가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계약금 삼천만 원 두 배여⁠. 육천⁠. 계약 물린다⁠. 중도금 날 전이니께 되는 거 맞제⁠?⁠”

석재학이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 안을 확인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어르신⁠. 계약금의 두 배⁠, 받겠습니다⁠. 계약은 오늘로 해제됩니다⁠.⁠”

“⁠변전소는 어디로 가냐⁠?⁠”

“⁠다른 자리를 찾겠습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주민분들께 변전소라고 말씀드리고 찾겠습니다⁠.⁠” 석재학이 잠깐 말을 멈췄다⁠. “⁠금포에서 배웠습니다⁠. 숨긴 것은 비싸게 돌아온다는 걸요⁠. 사장님 자문료는 오늘 아침 천만 원 돌려받았고⁠, 나머지 천만 원은 가게 정리하시는 대로 천천히 받겠습니다⁠.⁠”

석재학은 지붕 대신 모래밭에 누운 용을 향해 마지막으로 절을 했다⁠. 용이 금빛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너는 발밑을 조심했구나⁠.⁠” 용이 말했다⁠.

“⁠팀장님이 발밑 조심 잘하셨대요⁠.⁠” 연서가 그대로 옮겼다⁠. 석재학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밭은⁠.⁠” 할머니가 이장을 보았다⁠. “⁠마을에 빌려준다⁠. 판수야⁠, 주민조합 만든다 했제⁠? 우리 밭에 마을이 태양광 깔아라⁠. 둑 안에만⁠, 바다 안 가리게 낮게⁠. 스무 해 빌려줄 테니께 세는 내 앞으로 내고⁠, 나 죽거든 춘배 빚 갚는 데 보태라⁠.⁠”

이장이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군청 주무관이 손을 들었다⁠.

“⁠어르신⁠, 주민조합 태양광은 계통 연결까지 몇 해 걸릴 수 있습니다⁠.⁠”

“⁠나 여든여덟이여⁠. 기다리는 건 잘한다⁠.⁠”

모래밭에 웃음이 났다⁠. 어촌계장이 이장 어깨를 쳤다⁠. 이장이 연서를 보았다⁠.

“⁠연서야⁠, 조합 사무 볼 사람이 필요하다⁠. 말 옮기는 건 니가 잘하잖냐⁠.⁠”

“⁠이장님⁠, 저 이제 남의 말 안 옮겨요⁠.⁠”

“⁠그라믄 니 말을 해⁠. 월급은 쥐꼬리다⁠.⁠”

“⁠…⁠…생각해 볼게요⁠.⁠”

“⁠집은 내가 산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못 걷게 되믄 그때 내 발로 요양원 간다⁠. 고흥 읍에 바다 보이는 데로⁠. 춘배 니가 알아봐라⁠.⁠”

큰삼촌이 고개를 숙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오래 있었다⁠.

*

할머니가 엎어 놓은 배에서 일어나 용 앞으로 걸어갔다⁠. 달이 할머니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청아⁠.⁠”

용이 턱을 들었다⁠.

“⁠칠십 년 전에 내가 용궁 구경 한번 시켜 달라 했제⁠.⁠”

“⁠그랬다⁠.⁠”

연서가 옮겼다⁠. 고모가 큰삼촌 팔을 붙잡았다⁠. 할머니가 웃었다⁠.

“⁠구경은 갔다 오는 거여⁠.⁠”

용이 움직이지 않았다⁠. 연서는 옮기기 전에 숨을 한 번 쉬었다⁠.

“⁠용님⁠, 할머니가⁠…⁠… 구경은 갔다 오는 거래요⁠.⁠”

용이 할머니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수염이 바람에 흔들렸다⁠. 금빛 눈에 달이 두 개 들어 있었다⁠.

“⁠구경⁠…⁠… 갔다 오는 것이라⁠.⁠”

“⁠그라제⁠. 문 앞까지만 가 보자⁠. 달 한 바퀴 돌고 와⁠.⁠”

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칠십 년 동안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말을 처음으로 다르게 듣는 얼굴이었다⁠.

“⁠금례의 말이니⁠.⁠”

연서와 큰삼촌이 할머니를 양쪽에서 받쳐 용의 등에 올렸다⁠. 용이 몸을 낮춰 주었다⁠. 할머니는 흰 갈기를 두 손으로 쥐었다⁠. 연보라 치마가 하늘빛 비늘 위에 펼쳐졌다⁠. 연서는 할머니 손을 놓지 않으려다가 놓았다⁠. 손이 비었다⁠.

“⁠할머니⁠, 꼭 오세요⁠.⁠”

“⁠구경 갔다 오는 거라니께⁠.⁠”

용이 모래밭을 박차고 올랐다⁠. 모래가 확 흩어지고 달집 꼭대기 한지들이 일제히 날렸다⁠. 하늘빛 몸이 달 쪽으로 길게 펴지며 바다 위로 나아갔다⁠. 이장이 기다렸다는 듯 횃불을 달집에 댔다⁠. 솔가지에 불이 붙고⁠, 대나무가 탁탁 터지며 불길이 하늘로 솟았다⁠. 불티가 달을 향해 올라갔다⁠.

*

십 분이 지났다⁠. 이십 분이 지났다⁠. 바다 위에는 달만 있었다⁠. 용바위 쪽으로 하늘빛이 한 번 반짝이고는 보이지 않았다⁠. 달집 불길이 절반쯤 내려앉았다⁠. 고모가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볐다⁠. 반석규가 수온계를 바닷물에 넣었다가 꺼내 숫자를 보고 다시 넣었다⁠.

큰삼촌이 달집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다를 마주했다⁠. 한참 서 있다가 무릎을 꿇었다⁠. 모래에 두 손을 짚고 이마를 댔다⁠. 설날 아침에도⁠, 망둥어가 발등에 떨어진 저녁에도⁠, 사다리차가 돌아가던 날에도⁠, 끝까지 하지 않던 절이었다⁠.

“⁠청아⁠.⁠” 큰삼촌이 모래에 이마를 댄 채 말했다⁠. “⁠스물네 해 전에 우리 연서 건져 줘서 고맙다⁠. 우리 어매 살려 줘서 고맙고⁠. 그라니께 우리 어매 데려와라⁠. 구경만 시키고⁠.⁠”

연서는 큰삼촌의 등을 보았다⁠. 점퍼 등판에 아직 오곡밥 밥알 하나가 말라붙어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났을 때 바다 끝에서 하늘빛이 다시 나타났다⁠. 점점 커졌다⁠. 용이 수면을 스치며 날아왔다⁠. 물보라가 달빛에 하얗게 부서졌다⁠. 용은 모래밭에 내려앉으며 몸을 최대한 낮췄다⁠. 등 위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연보라 치마 끝이 젖어 짙은 보라가 되어 있었고⁠, 흰머리에 미역 한 가닥이 걸쳐 있었다⁠.

“⁠어매⁠!⁠”

큰삼촌이 모래를 차고 달려갔다⁠. 고모가 따라 뛰었다⁠. 연서는 발이 움직이지 않아 선 자리에서 할머니만 보았다⁠. 큰삼촌이 할머니를 안아 내렸다⁠. 할머니가 머리에서 미역을 떼어 큰삼촌 손에 쥐여 주었다⁠.

“⁠용궁 문 앞에 가 봤다⁠.⁠”

“⁠어땠어요⁠?⁠” 고모가 물었다⁠.

“⁠문이 생각보다 작드라⁠. 우리 집 대문만 해⁠.⁠” 할머니가 숨을 고르며 웃었다⁠. “⁠문 앞에 조기가 줄을 서 있드라⁠. 거기도 세배 받는 갑다⁠.⁠”

모래밭에 웃음이 터졌다⁠. 울던 고모도 웃었다⁠. 어촌계장이 조기라는 말에 바다를 돌아보았다⁠.

*

용이 할머니 앞에서 몸을 낮췄다⁠. 더 낮췄다⁠. 앞발 두 개를 모래 위에 포개고⁠, 앞발 위에 머리를 내렸다⁠. 사슴뿔 끝이 모래에 닿았다⁠. 흰 수염이 할머니 발등을 덮었다⁠. 이마가 모래에 붙었다⁠.

절이었다⁠. 설날 아침 세뱃상 상석에 앉아 절을 받던 용이⁠, 천네 해 만에 처음으로 사람에게 하는 절이었다⁠.

모래밭의 누구도 연서를 보지 않았다⁠. 옮길 말이 없었다⁠. 다들 알아들었다⁠.

할머니가 지팡이를 연서에게 맡기고 허리를 굽혀 용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칠십 년 전 치마에 싸 안았던 손가락 굵기의 이마였다⁠.

“⁠잘 커서 왔다⁠. 이제 가라⁠.⁠”

용이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연서를 보았다⁠. 연서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숨은 두고 간다⁠. 네 말을 하렷다⁠.⁠”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옮기지 않았다⁠.

용이 몸을 일으켜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늘빛 등이 물결 위로 한 번 솟았다가 잠기고⁠, 용바위 앞에서 한 번 더 솟았다가 잠겼다⁠. 달이 물 위에 길게 낸 길을 따라 하늘빛이 멀어졌다⁠. 반석규가 수온계를 꺼내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수첩에 숫자 하나를 적었다⁠. 어촌계장이 바다를 보며 모자를 벗었다⁠.

“⁠보름 동안 잘 묵었소⁠, 용님⁠.⁠”

달집이 무너지며 마지막 불티를 하늘로 올렸다⁠. 할머니는 엎어 놓은 배에 앉아 젖은 치마 끝을 짜고 있었고⁠, 큰삼촌은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주머니에 남은 호두 하나를 손바닥으로 눌러 깨고 있었다⁠. 껍데기가 갈라지는 소리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연서는 할머니 다른 쪽 옆에 앉았다⁠. 바다 위로 달이 높이 떠올라 있었고⁠, 갯바위 앞 물결마다 달빛이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구경은 갔다 오는 거여 · 세배 받는 청룡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