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3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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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오후의 방목장은 땅이 따뜻하다⁠. 아침 훈련을 마친 다리를 풀밭에 세우면 발굽 밑으로 해가 데운 흙이 올라오고⁠, 풀 냄새가 다리를 타고 배까지 올라온다⁠. 나는 내 방목장에 혼자 있다⁠. 수말은 혼자 둔다⁠. 사람들 말로는 싸움이 나서 그렇다⁠. 울타리 하나 건너 큰 방목장에 열한 마리가 있고⁠, 울타리 하나를 더 건너면 늙은 암말이 무리를 데리고 물통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늙은 암말이 걸음을 떼면 무리가 따라 움직인다⁠. 암말이 물통에 먼저 입을 대고⁠, 암말이 고개를 들어야 다음 말이 마신다⁠. 회색 거세마는 늘 꼴찌다⁠. 왼쪽 앞다리가 굳어서 걸음이 늦다⁠. 꼴찌로 와도 아무도 거세마를 밀어내지 않는다⁠. 암말이 물통 옆에 서서 거세마를 기다려 준다⁠.

나는 울타리 너머에서 무리의 물통을 본다⁠. 내 방목장에도 물통이 있지만 저 물통의 물이 더 맛있어 보인다⁠. 저 무리의 맨 앞에서 물을 마시고 싶다⁠. 경주로에서 맨 앞에 서면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덕춘이 사과를 주고⁠, 조교사가 오징어를 씹지 않는다⁠. 언덕에서는 맨 앞에 서도 아무 일이 없다⁠. 늙은 암말이 귀를 눕히면 나는 아직도 한 걸음 물러선다⁠.

마구간지기는 방목장 그늘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잠들어 있었다⁠. 무릎 위에 경마 신문이⁠, 의자 다리 옆에 막걸리 사발이 있었다⁠. 나는 울타리 사이로 목을 길게 뺐다⁠. 목을 다 빼도 사발까지는 한 뼘이 모자랐다⁠. 앞발로 울타리 밑 풀을 긁었다⁠. 흙이 튀어 사발에 들어갔다⁠. 다시 긁었다⁠. 사발이 기울었다⁠. 하얀 술이 풀밭으로 흘러 내 쪽으로 왔다⁠. 나는 젖은 풀을 뜯었다⁠. 시큼하고 달았다⁠.

“⁠이 먹보 새끼가 남의 술을 처먹어⁠! 내일모레 경주 나갈 놈이⁠!⁠”

마구간지기가 신문을 말아 들고 일어났다⁠. 신문 맨 앞장에 검은 말의 사진이 있었다⁠. 이마에 하얀 별이 박힌 말이었다⁠.

“⁠신문 일면에 대문짝만 하게 나온 놈이 하는 짓 좀 봐라⁠. 술 처먹은 거 오징어 할매가 알면 너 오늘 저녁 굶는다⁠.⁠”

마구간지기는 의자에 도로 앉아 신문을 펼치고 소리 내어 읽었다⁠. 마구간지기는 신문을 늘 말들에게 읽어 준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온다고 했다⁠. 대상 경주 일등 후보 흑진주⁠, 오늘 새벽 훈련에서 올해 최고 기록⁠. 회색 수말⁠, 지난달 마주가 바뀐 뒤로 배당이 거꾸로 오르는 중⁠. 바다 건너 불법 사이트에서는 흑진주 배당이 경마장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말도⁠.

“⁠거꾸로 오르는 건 또 뭐냐⁠. 돈 놓고 돈 먹기는 다 거꾸로지⁠. 야⁠, 먹보야⁠. 너는 거꾸로 하지 마라⁠. 앞으로만 가⁠.⁠”

나는 앞으로 갔다⁠. 울타리까지⁠. 마구간지기의 신문 끝을 입술로 물었다⁠. 마구간지기가 신문을 확 잡아챘고 신문 귀퉁이가 내 입에 남았다⁠. 종이는 아침의 봉투처럼 맛이 없었다⁠. 뱉었다⁠. 마구간지기가 신문 귀퉁이를 주워 들고 혀를 찼다⁠.

“⁠너는 종이를 왜 자꾸 먹냐⁠. 종이 먹는 말은 처음 본다⁠.⁠”

*

오징어 할매는 해가 지기 전에 올라왔다⁠. 조교사의 작은 차가 흙길에서 먼지를 끌고 올라와 마구간 앞에서 멈췄다⁠. 조교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구간으로 들어왔다⁠. 덕춘은 내 칸 앞에서 건초를 손질하고 있었다⁠.

조교사는 인사도 없이 조끼 가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내 앞니 자국이 찍힌 종이였다⁠. 하루 사이에 말라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이기 아침에 니 말이 씹어 놓은 기다⁠. 씻는 자리에서 그 실장이란 사람이 기수 손에 쥐여 준 봉투에서 나왔고⁠.⁠”

덕춘이 갈퀴를 벽에 기대 세웠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덕춘 씨⁠, 내 지금 묻는 기 아이다⁠. 말하는 기다⁠. 니 저 사람들한테 돈 빌렸제⁠. 흑진주 지라고 기수 손에 돈 쥐여 주는 거 니도 알제⁠.⁠”

“⁠선생님은 모르셔도 돼요⁠.⁠”

“⁠내가 얘 키웠다⁠. 망아지 때부터⁠. 내 마방에서 나간 말이 4코너에서 고삐 잡히면 다음 날 경마장 사람들이 누구 이름을 부르겠노⁠. 내 이름이다⁠.⁠”

“⁠심판위원회 가실 거예요⁠?⁠”

“⁠가야 된다⁠.⁠”

“⁠가시면 흑진주는 일요일 못 나가요⁠. 저는 마주 자격 끝이고요⁠. 저 사람들 종이는 진짜예요⁠. 제 손도장이 찍혀 있어요⁠. 경주가 없어지면 월요일 일곱 시고 뭐고 없어요⁠. 내일 당장 열두 마리 다 실어 가요⁠.⁠”

“⁠그라믄 기수더러 당기라꼬⁠? 내 눈앞에서⁠?⁠”

“⁠한 번이에요⁠.⁠”

조교사가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마른오징어를 꺼냈다가 씹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오징어 냄새가 내 칸으로 넘어왔고 나는 콧구멍을 오므렸다⁠.

“⁠니 사료값 넉 달째 안 줬다⁠. 내 그거 한 번도 말 안 했다⁠. 얘들 밥은 굶기지 말자고⁠. 그런데 니가 얘들 밥 먹이려고 흑진주 다리를 판다꼬⁠?⁠”

“⁠다리 안 다쳐요⁠. 4코너에서 조금만⁠…⁠.⁠”

“⁠말이 지는 법을 한 번 배우면 다시는 안 이긴다⁠. 니 그거 모르나⁠?⁠”

덕춘이 대답 대신 내 이마를 엄지로 문질렀다⁠. 하얀 털이 난 자리를 덕춘은 늘 그렇게 문지른다⁠. 엄지가 떨렸다⁠. 조교사는 한참 동안 덕춘의 엄지를 보다가 나갔다⁠. 차에 타지는 않았다⁠. 마구간 앞 공터에 서서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가 내렸다가 했다⁠.

*

트럭은 해가 지고 한 시간쯤 뒤에 왔다⁠. 이번에는 숨을 쉬러 온 트럭이 아니었다⁠. 엔진 소리가 공터에서 멈추자마자 짐칸 뒷문이 열리는 쇳소리가 났다⁠. 쇠가 쇠를 긁으며 내려오는 소리⁠. 발판이었다⁠. 발판이 땅에 닿을 때 언덕이 쿵 울렸다⁠.

실장의 차도 함께 왔다⁠. 실장 뒤로 사내 둘이 들어왔다⁠. 사내들에게서는 담배와 밧줄 냄새가 났다⁠. 열한 칸이 한꺼번에 뒷벽으로 물러났다⁠. 늙은 암말이 높게 울었다⁠. 이리 오라는 낮은 소리가 아니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무리 전체가 들으라는 소리였다⁠.

“⁠아침에 4코너 잘 봤습니다⁠. 기수님이 못 하시더라고요⁠. 말이 기수님 팔을 끌고 나가는 걸 저도 봤어요⁠.⁠”

“⁠실장님⁠, 일요일이잖아요⁠. 일요일에 하면 되잖아요⁠.⁠”

“⁠일요일에 하실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오늘은 본보기 하나만 데려가겠습니다⁠. 이자로 치세요⁠.⁠”

실장은 장갑을 끼고 칸 앞을 걸었다⁠. 어젯밤처럼 칸마다 들여다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갈 곳을 정한 걸음이었다⁠. 회색 거세마의 칸 앞에서 멈췄다⁠.

“⁠얘는 어차피 오래 못 걷죠⁠. 다리가 저래서야⁠.⁠”

마구간지기가 컨테이너에서 쇠스랑을 들고 뛰어나왔다⁠. 사내 하나가 쇠스랑 자루를 붙잡고 비틀었다⁠. 마구간지기가 통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막걸리 사발이 굴러 내 칸 문에 부딪혔다⁠. 나는 앞발로 문을 찼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경첩 하나가 빠져 문이 기울었다⁠. 사내 하나가 내 칸 앞에 와서 섰다⁠. 손에 굵은 막대가 있었다⁠.

“⁠흑진주는 건드리지 마세요⁠. 일요일에 뛸 말입니다⁠.⁠”

실장이 사내에게 말했다⁠. 막대가 내 문 앞에서 내려갔다⁠. 나는 내가 건드려지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문을 차던 발굽에서 힘이 빠졌다⁠.

조교사가 공터에서 뛰어 들어왔다⁠. 휴대전화를 높이 들고 있었다⁠.

“⁠경찰 부를 끼다⁠. 지금 누르면 십 분이믄 온다⁠.⁠”

“⁠부르세요⁠. 선생님⁠.⁠”

실장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종이 아래쪽에 붉은 얼룩이 있었다⁠. 덕춘의 엄지 냄새가 거기서 났다⁠.

“⁠사장님이 빌려 가신 돈이고⁠, 사장님이 내놓으신 담보입니다⁠. 경찰이 오면 제가 먼저 이걸 보여 드릴 겁니다⁠. 그다음에 아침에 기수님 손에 들려 있던 봉투 얘기를 하게 되겠죠⁠. 선생님 마방에서 나간 말 얘기도요⁠.⁠”

조교사의 엄지가 휴대전화 화면 위에서 멈췄다⁠. 누르지 않았다⁠.

*

사내들이 거세마의 칸 문을 열었다⁠. 밧줄이 거세마의 목을 감았다⁠. 거세마는 뒷걸음질 쳤고⁠, 굳은 앞다리가 깔짚에 걸려 휘청였다⁠. 사내가 밧줄을 홱 당겼다⁠. 거세마의 머리가 꺾였다⁠.

“⁠놔⁠. 놔⁠, 이 새끼들아⁠.⁠”

덕춘이었다⁠. 덕춘이 사내의 손에서 밧줄을 빼앗았다⁠. 사내가 실장을 보았고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춘은 밧줄을 풀어 바닥에 던지고⁠, 벽에 걸린 거세마의 굴레를 내렸다⁠. 자기 손으로 거세마의 머리에 굴레를 씌웠다⁠. 거세마는 덕춘의 손을 안다⁠. 십 년 넘게 아침마다 굴레를 씌워 준 손이다⁠. 거세마의 목에서 힘이 빠졌다⁠.

덕춘이 거세마를 끌고 통로를 걸었다⁠. 거세마는 절름거리며 따라갔다⁠. 내 칸 앞을 지날 때 거세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귀가 앞으로 서 있었다⁠. 어디 가는지 궁금하다는 귀였다⁠. 무서워하는 귀가 아니었다⁠. 덕춘이 끌고 가니까⁠.

나는 열린 마구간 문으로 공터를 보았다⁠. 트럭 짐칸 뒤로 발판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발판 위에 마른 피 냄새가 깔려 있었다⁠. 거세마는 발판 앞에서 한 번 멈췄다⁠. 말은 비탈진 나무판을 싫어한다⁠. 발밑이 울리고⁠, 울리는 소리 밑이 비어 있다⁠. 덕춘이 먼저 발판에 올라섰다⁠.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거세마의 코앞에 내밀었다⁠. 거세마가 사과를 따라 한 발을 올렸다⁠. 발판이 울렸다⁠. 또 한 발⁠. 굳은 앞다리가 발판 턱을 긁고 넘어갔다⁠.

짐칸 안에서 덕춘이 사과를 거세마의 입에 넣어 주었다⁠. 거세마가 씹는 소리가 짐칸 쇠벽에 울려 마구간까지 들렸다⁠. 덕춘은 짐칸에서 한참 내려오지 않았다⁠. 실장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사장님⁠, 경주 끝날 때까지는 살려 둡니다⁠. 도축장 계류장에 두겠습니다⁠.⁠”

계류장이라는 소리를 나는 몰랐다⁠. 조교사가 마구간 문틀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도축장 앞에다 소랑 말 며칠씩 묶어 두는 우리 말이가⁠. 조교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요일에 흑진주가 4등 밖으로 들어오면 월요일 아침에 이 녀석 도로 실어다 드립니다⁠. 들어오면⁠, 이 녀석이 제일 먼저 갑니다⁠.⁠”

덕춘이 짐칸에서 내려왔다⁠. 사내들이 발판을 들어 올렸다⁠. 쇠가 쇠를 긁었고 짐칸 문이 닫혔다⁠. 닫힌 문 안쪽에서 거세마가 발굽으로 바닥을 한 번 쳤다⁠. 트럭이 언덕을 내려갔다⁠. 엔진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늙은 암말은 쉬지 않고 높게 울었다⁠. 트럭 소리가 사라지자 울음도 멈췄다⁠.

*

아침에 나는 맨 앞에 섰다⁠. 기수의 손이 차가웠고⁠, 내가 재갈을 물었고⁠, 회색 수말의 엉덩이가 내 뒤로 지나갔다⁠. 저녁에 거세마가 발판을 올라갔다⁠. 말은 이런 것을 이어서 기억한다⁠. 불에 덴 다음에는 불 근처에 안 가고⁠, 물웅덩이에 빠진 다음에는 물웅덩이를 뛰어넘는다⁠. 아침의 맨 앞과 저녁의 발판이 내 몸 안에서 이어졌다⁠. 이어진 것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마구간지기가 저녁 건초를 넣어 주었다⁠. 욕을 하지 않았다⁠. 내 칸 문의 빠진 경첩을 손으로 만져 보고는 그냥 갔다⁠.

나는 건초에 입을 댔다⁠. 한 입 씹었다⁠. 두 입째에 입이 멈췄다⁠. 칸막이 판자 틈으로 늙은 암말의 냄새가 들어왔다⁠. 판자 틈에 코를 댔다⁠. 어젯밤처럼 숨을 불어 주기를 기다렸다⁠. 암말은 오지 않았다⁠. 귀를 머리에 붙인 채 엉덩이를 내 칸으로 돌리고 섰다⁠. 그리고 뒷발로 칸막이를 찼다⁠. 판자가 내 어깨 옆에서 쩡 울렸다⁠.

조교사는 밤이 깊도록 공터의 자기 차 옆에 서 있었다⁠. 휴대전화는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한참 뒤 마구간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칸 앞에 섰다⁠. 내 건초 그물을 보고 손가락으로 건초 더미를 눌러 보았다⁠.

“⁠니가 밥을 남기나⁠?⁠”

나는 남겼다⁠. 다섯 해 동안 처음이었다⁠. 조교사가 그물에 걸린 건초 한 가닥을 뽑아 내 입술에 대 주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조교사는 건초를 쥔 채 오래 서 있다가 말했다⁠.

“⁠일요일에 나간다⁠. 내 마방 이름 걸고 나간다⁠. 고삐는 내가 기수 손에서 뺏을 끼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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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세시2026.10.31· 3화

    회색 거세마가 사람을 믿어서 발판을 올라갔다는 훅에서 울었어요.

    • 윤새벽작가2026.10.31

      믿는 말이라 더 아팠어요. 흑진주가 처음 밥을 남긴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