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77자)

봉투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안장은 생각보다 가볍다⁠. 무거운 것은 안장 밑에 까는 깔개와 배를 두르는 뱃대끈이다⁠. 기수가 뱃대끈을 한 칸 조일 때마다 나는 배에 바람을 넣어 부풀린다⁠. 기수는 이 수를 안다⁠. 무릎으로 내 배를 툭 치고⁠, 내가 숨을 뱉는 순간 한 칸을 더 조인다⁠. 세 해 동안 한 번도 내가 이긴 적이 없다⁠.

“⁠흑진주⁠, 오늘은 착하게 가자⁠. 응⁠? 착하게⁠.⁠”

착하게라는 소리는 안다⁠. 착하지와 비슷한 소리라서 사과가 나올 줄 알았는데⁠, 사과는 나오지 않았다⁠. 기수가 등자에 발을 걸고 올라탔다⁠. 기수는 가볍다⁠. 덕춘의 절반쯤 된다⁠. 대신 앉지 않는다⁠. 등자를 짧게 올려 무릎을 접고⁠, 엉덩이를 안장에서 띄운 채 무릎과 발목으로 내 몸을 붙든다⁠. 그래서 기수의 무게는 등 한가운데가 아니라 어깨 뒤 양쪽에 두 점으로 내려앉는다⁠. 두 점이 고르게 누르면 기수는 편안한 것이다⁠. 오늘 새벽에는 왼쪽 점이 조금 더 무거웠다⁠. 기수는 왼쪽 무릎에 힘을 주는 버릇이 있는데⁠, 겁이 날수록 더 준다⁠.

언덕 흙길을 내려가는 동안 하늘은 아직 검었다⁠. 흙길 중간에 밤새 고인 물웅덩이가 있었다⁠. 나는 물웅덩이를 믿지 않는다⁠. 얼마나 깊은지 눈으로 알 수가 없다⁠. 말의 눈은 머리 양옆에 붙어 있어서 옆과 뒤는 넓게 보이지만 코앞 바닥은 잘 안 보인다⁠. 나는 웅덩이 앞에서 네 다리를 모아 뛰어올랐다⁠. 기수가 내 목에 매달렸다⁠.

“⁠손바닥만 한 물 가지고 이 난리야⁠! 너 대상 경주 일등 후보야⁠, 일등 후보⁠!⁠”

훈련로 쪽문 앞에서 마구간지기가 손전등을 흔들다가 웃었다⁠. 웃다가 기침을 했다⁠. 막걸리 냄새가 새벽바람을 타고 왔다⁠.

*

훈련로에는 조명이 켜져 있었다⁠. 흙은 밤새 써레로 고른 뒤라 발굽이 반 마디쯤 부드럽게 빠졌다⁠. 바깥 울타리에 조교사가 서 있었다⁠. 조교사는 언제나 두 가지를 손에 쥐고 있다⁠. 하나는 초시계다⁠. 다른 하나는 마른오징어다⁠.

나는 오징어 냄새를 싫어한다⁠. 바다 냄새에 불 냄새가 눌어붙은 냄새라 코가 간지럽다⁠. 조교사가 내 코앞에 얼굴을 대고 “⁠오늘 잘해래이⁠” 하자 오징어가 정면으로 들어왔다⁠. 나는 재채기를 했다⁠. 말의 재채기는 크다⁠. 조교사의 앞머리가 젖었다⁠.

“⁠이 자슥이⁠. 아침부터 세수를 시켜 주나⁠?⁠”

조교사는 소매로 얼굴을 닦고 오징어를 한 번 더 뜯었다⁠. 화가 나면 조교사는 더 세게 씹는다⁠. 이번에는 세게 씹지 않았다⁠. 기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조교사의 콧구멍이 넓어졌다⁠. 사람도 냄새를 맡는다⁠. 말만큼은 아니어도⁠. 기수의 목덜미에서 나는 어젯밤의 땀 냄새를 조교사도 맡았다⁠.

“⁠니 잠 못 잤나⁠?⁠”

“⁠아뇨⁠, 잤어요⁠.⁠”

“⁠거짓말할 때 니 귀 빨개지는 거 아나⁠?⁠”

훈련로 맞은편에서 회색 수말 하나가 몸을 풀고 있었다⁠. 키가 나보다 손 하나만큼 컸고⁠, 갈기를 짧게 땋아 올렸고⁠, 꼬리를 쳐들고 걸었다⁠. 내 갈기는 길게 늘어져 목을 덮는데⁠, 회색 수말의 목은 땋은 매듭으로 오돌토돌했다⁠. 사람들은 저런 걸음을 멋있다고 한다⁠. 내 눈에는 자기가 무리의 우두머리인 줄 아는 걸음이었다⁠. 회색 수말을 끄는 마필관리사는 노래를 불렀다⁠. 트로트였다⁠. 회색 수말은 노래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저 회색⁠, 마주가 바뀌었다더라⁠. 지난달에⁠.⁠”

조교사가 오징어를 씹으며 말했다⁠.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수의 왼쪽 무릎이 내 어깨를 꽉 조였다⁠.

“⁠오늘 천육백 미터⁠, 저 회색이랑 나란히⁠. 3코너까지 붙어 가다가 4코너에서 풀어라⁠. 끝까지 밀고⁠. 시간 볼 끼다⁠.⁠”

*

출발은 느리게 했다⁠. 회색 수말이 오른편에 붙었다⁠. 회색 수말의 숨소리는 고르고 깊었다⁠. 잘 달리는 말의 숨이다⁠. 나는 회색 수말의 귀를 보았다⁠. 귀가 나를 향해 돌아와 있었다⁠. 말끼리 나란히 달릴 때 귀가 옆 말을 향해 있으면 너를 보고 있다는 소리다⁠. 나는 귀를 뒤로 눕혔다⁠. 비키라는 소리였다⁠. 회색 수말은 비키지 않았다⁠.

3코너를 도는 동안 기수의 손은 따뜻했다⁠. 고삐 두 줄이 내 입 속 재갈 양 끝을 고르게 잡고 있었고⁠, 손이 따뜻하면 재갈도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논다⁠. 몸은 기억한다⁠. 4코너가 오면 기수의 손이 앞으로 밀리고⁠, 고삐가 느슨해지고⁠, 앞이 열린다⁠. 3코너가 끝나 가는 순간 내 다리가 먼저 알고 박자를 바꿨다⁠.

기수가 중얼거렸다⁠.

“⁠4코너⁠.⁠”

손이 앞으로 밀리지 않았다⁠. 뒤로 왔다⁠. 고삐가 팽팽해지면서 재갈이 내 입꼬리를 뒤로 끌었다⁠. 차가웠다⁠. 쇠붙이는 원래 차갑지만 기수의 손이 오래 쥐고 있으면 데워진다⁠. 이번에는 고삐 끝에서부터 찬 것이 내려왔다⁠. 기수의 무릎이 내 어깨를 조였고⁠, 엉덩이가 안장 쪽으로 내려앉았다⁠. 서라는 몸이었다⁠.

회색 수말이 앞으로 나갔다⁠. 회색 엉덩이가 내 눈앞에 들어왔다⁠. 꼬리가 내 코앞에서 흔들렸다⁠.

나는 참지 못한다⁠. 앞에 다른 말의 엉덩이가 있으면 다리가 저절로 땅을 더 세게 찬다⁠. 무리의 맨 앞은 말 하나만 설 수 있는 자리다⁠. 나는 재갈을 어금니 사이로 끌어당겨 물었다⁠. 재갈을 이빨로 물면 입꼬리가 아프지 않다⁠. 대신 기수의 팔이 앞으로 끌려 나온다⁠. 기수가 한 번 더 당겼다⁠. 나는 목을 길게 뺐다⁠. 기수의 팔이 내 목을 따라 앞으로 쭉 펴졌다⁠.

회색 엉덩이가 옆으로 왔다⁠. 회색 어깨가 옆으로 왔다⁠. 회색 머리가 내 뒤로 지나갔다⁠.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조명 불빛과 흙과 끝이 보이지 않는 울타리만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귀를 앞으로 세웠다⁠. 등 위에서 기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내쉴 때 기수의 손이 풀렸다⁠. 손이 풀린 자리로 따뜻한 것이 돌아왔다⁠.

결승 기둥을 지나 한참을 더 가서야 나는 멈췄다⁠. 뒤에서 회색 수말의 기수가 소리쳤다⁠. 같이 붙어 가자며⁠! 같이 가자며 이게 뭐야⁠! 회색 수말은 콧김을 짧게 끊어 뱉었다⁠. 화가 났다는 소리였다⁠. 나는 길게 털었다⁠. 괜찮다는 소리⁠. 회색 수말이 들으라고 일부러 길게 털었다⁠.

*

울타리로 돌아오자 조교사가 초시계를 내밀었다⁠. 숫자가 떠 있었다⁠. 나는 숫자를 모르지만 조교사의 얼굴은 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오징어를 씹지 않고 있었다⁠.

“⁠올해 이 훈련로에서 제일 빠르다⁠. 일요일 이대로만 가믄 된다⁠.⁠”

조교사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근데 니⁠, 4코너에서 와 당겼노⁠?⁠”

“⁠다리 아끼려고요⁠. 일요일 전에 무리하면⁠…⁠.⁠”

“⁠내가 언제 다리 아끼라 했노⁠. 풀라 했제⁠. 니 4코너에서 고삐 당기는 거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얘가 재갈 물고 니 팔 끌고 나가는 것도 봤고⁠.⁠”

“⁠흑진주가 너무 일찍 나가서요⁠.⁠”

“⁠세 해를 타 놓고 지금 와서 얘가 일찍 나가는 걸 처음 알았나⁠?⁠”

기수가 내 목을 두드렸다⁠. 손바닥이 다시 차가워져 있었다⁠. 조교사는 기수의 손을 보았다⁠. 조교사는 말의 다리를 만져 열을 재는 사람이다⁠. 사람 손이 차가운 것도 볼 줄 안다⁠.

“⁠씻기고 와라⁠. 얘기는 나중에 하자⁠.⁠”

*

씻는 자리는 마방 뒤편에 있다⁠. 시멘트 바닥이 비스듬히 기울어 물이 한쪽 도랑으로 흐르고⁠, 벽에는 고무호스가 감겨 있다⁠. 기수가 호스를 틀었다⁠. 미지근한 물이 다리부터 올라왔다⁠. 나는 물웅덩이는 싫어해도 호스는 좋아한다⁠. 물이 등에 닿으면 근육이 하나씩 풀린다⁠. 다리에서 김이 났다⁠.

마방 사무실 텔레비전 소리가 열린 창으로 흘러나왔다⁠. 바다 건너에 서버를 둔 불법 경마 사이트⁠, 전국에서 단속⁠, 대상 경주를 앞두고⁠. 기수가 안경에 튄 물을 셔츠 자락으로 닦고⁠, 호스를 쥔 채 텔레비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도 귀를 기울일 때는 고개가 한쪽으로 기운다⁠.

박하 냄새가 먼저 왔다⁠. 다음에 가죽 장갑⁠, 다음에 수많은 마구간⁠. 나는 고개를 홱 들었다⁠. 실장이 씻는 자리 입구에 서 있었다⁠. 오늘은 흰 셔츠에 선글라스를 이마에 걸쳤다⁠. 장갑은 끼지 않았다⁠. 대신 손에 누런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기수님⁠, 아침에 잘 봤습니다⁠. 4코너에서 당기시는 거⁠, 연습이셨죠⁠? 끝까지는 안 되던데요⁠.⁠”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저도 마주입니다⁠. 회색 녀석 보러 왔어요⁠. 지난달부터 제 겁니다⁠. 이름은 다른 분 이름으로 올라가 있지만요⁠.⁠”

기수의 호스 끝이 흔들려 물줄기가 벽을 때렸다⁠. 실장이 봉투를 내밀었다⁠. 기수는 받지 않았다⁠. 실장은 봉투를 든 채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기수 앞에 대 보였다⁠. 내 자리에서 화면 속 그림이 비스듬히 보였다⁠. 가게 앞에 셔터가 내려와 있었고⁠, 셔터 앞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어머님 가게 셔터 새로 다셨던데요⁠. 색이 곱습니다⁠. 일요일 4코너만 생각하세요⁠. 이건 아침 연습비입니다⁠.⁠”

“⁠가져가세요⁠.⁠”

“⁠받으셔야 제가 편합니다⁠.⁠”

실장이 봉투를 기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기수의 손이 봉투를 잡았다⁠. 놓지도 쥐지도 못하고 손끝에 걸린 채였다⁠.

봉투에서는 냄새가 났다⁠. 종이 냄새 밑에 잉크가 있었고⁠, 잉크 밑에 수많은 사람의 손이 있었다⁠. 땀과 동전과 담배와 핸드크림⁠. 맨 위에는 박하⁠. 사람이 손에 쥐고 내 쪽으로 가져오는 것은 지금까지 다 먹는 것이었다⁠. 당근이 그랬고 사과가 그랬고 각설탕이 그랬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봉투 끝을 앞니로 물었다⁠.

“⁠어⁠, 어⁠, 흑진주⁠!⁠”

기수가 봉투를 잡아당겼다⁠. 나도 당겼다⁠. 사람의 손은 말의 이빨을 못 이긴다⁠. 봉투가 기수의 손에서 빠져나왔고⁠, 나는 어금니로 두어 번 씹었다⁠. 맛이 없었다⁠. 종이는 혀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흔들어 뱉었다⁠. 봉투가 찢어지면서 속에 든 것이 쏟아졌다⁠. 빳빳한 종이가 수십 장⁠, 시멘트 바닥 위로 흩어졌다⁠. 물이 도랑을 향해 흘렀고 종이들도 물을 따라 미끄러졌다⁠.

기수가 무릎을 꿇고 종이를 그러모았다⁠. 실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이마에서 내려 쓰고⁠,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났다⁠.

“⁠말이 먹을 줄 알았으면 사과로 드릴걸 그랬네요⁠.⁠”

나는 도랑으로 흘러가는 종이 한 장을 앞발로 밟았다⁠. 밟은 줄도 몰랐다⁠. 발굽 밑에서 종이가 물을 먹었다⁠.

*

조교사가 씻는 자리로 들어왔다⁠. 실장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조교사는 인사를 받지 않고 실장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실장의 차가 마방 앞길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소리 없는 차였다⁠. 어젯밤 언덕에 올라왔던 차와 같은 바퀴 소리였다⁠.

기수는 젖은 종이를 점퍼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조교사가 다가와 내 발굽을 들었다⁠. 조교사는 말의 발을 들 때 늘 같은 순서로 든다⁠. 왼쪽 앞⁠, 왼쪽 뒤⁠, 오른쪽 뒤⁠, 오른쪽 앞⁠. 이번에는 오른쪽 앞발 하나만 들었다⁠. 발굽 밑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조교사가 종이를 떼어 냈다⁠. 종이 한가운데에 내 앞니 자국이 반달 모양으로 두 개 찍혀 있었고⁠, 가장자리가 침에 젖어 너덜너덜했다⁠. 조교사는 종이를 불빛에 비춰 보고⁠, 기수를 보았다⁠. 오징어를 씹던 입이 멈춰 있었다⁠.

“⁠이기 누구 돈이고⁠?⁠”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스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기수의 운동화를 적셨다⁠. 조교사가 종이를 접어 자기 조끼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에 4코너⁠, 니가 당기고 싶어서 당긴 거 아니제⁠.⁠”

기수의 손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찼다⁠. 아침보다 더 찼다⁠. 나는 기수의 점퍼 앞자락에 코를 대고 맡았다⁠. 젖은 종이에서는 이제 박하보다 내 침 냄새가 더 짙었다⁠. 기수가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선생님⁠, 오늘 밤에 언덕에 올라가지 마세요⁠.⁠”

“⁠와⁠?⁠”

“⁠실장님이 아까 그랬어요⁠. 아침에 4코너에서 제가 못 한 거⁠, 오늘 밤에 언덕에서 받아 가겠다고요⁠.⁠”

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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