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515자)

바나나 한 개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세 번 뒤를 돌아보았다⁠. 말은 고개를 다 돌리지 않아도 뒤가 보인다⁠. 눈이 머리 옆에 붙어 있어서 고개를 반만 틀면 꼬리 너머까지 들어온다⁠. 첫 번째로 돌아봤을 때 늙은 암말은 울타리 앞에 서 있었다⁠. 두 번째에도 서 있었다⁠. 세 번째에는 등을 돌리고 물통 쪽으로 걷고 있었다⁠.

나는 흐흥 하고 낮게 울었다⁠. 이리 오라는 소리였다⁠. 암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리가 암말을 따라 물통으로 갔다⁠. 맨 끝에 서던 회색 거세마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끝자리가 비자 무리 전체가 한 걸음씩 짧아 보였다⁠.

조교사가 굴레 줄을 짧게 잡고 앞에서 걸었다⁠. 오늘은 오징어를 씹지 않았다⁠. 대신 껌을 씹었다⁠. 껌은 오징어보다 낫지만 달아서 자꾸 조교사 입 근처로 코가 갔다⁠. 조교사가 내 코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니 어제 밥 남긴 놈 맞나⁠? 하룻밤 자고 나니 또 먹보가⁠?⁠”

*

출전마 대기 마방은 경마장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경주 전날 정오까지 말들이 다 들어오면 문을 잠근다⁠. 문 앞에는 제복 입은 보안 요원이 있고⁠, 사람마다 목에 건 출입증을 기계에 대야 문이 열린다⁠. 마주도 조교사도 기수도 정해진 시간에만 들어온다⁠. 사람들 말로는 경주 전날 말에게 무슨 짓을 못 하게 하려고 그렇다⁠.

안은 언덕 마구간보다 밝고 깨끗했다⁠. 소독약 냄새가 짙어서 말 냄새가 묻혔다⁠. 칸막이는 아래가 판자⁠, 위가 쇠창살이라 옆 칸 말의 얼굴이 다 보였다⁠. 수의사가 내 목에서 피를 뽑았다⁠. 바늘은 따끔했지만 수의사의 손은 따뜻했다⁠. 수의사는 피가 든 작은 병에 무언가를 붙이고 조교사에게 말했다⁠. 경주 끝나고 한 번 더 뽑습니다⁠. 약을 쓴 말이 있나 보는 겁니다⁠.

내 칸에 들어가 보니 옆 칸이 회색 수말이었다⁠.

회색 수말은 쇠창살 너머에서 나를 보더니 귀를 눕혔다⁠. 나도 눕혔다⁠. 회색 수말이 콧김을 짧게 뱉었다⁠. 나는 길게 털었다⁠. 회색 수말이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나는 앞발로 벽을 찼다⁠. 조교사가 내 칸 문을 두드렸다⁠.

“⁠시끄럽다⁠. 하루만 참아라⁠. 내일이면 니가 이기든 쟈가 이기든 끝난다⁠.⁠”

회색 수말을 맡은 마필관리사가 들어왔다⁠. 어제 훈련로에서 트로트를 부르던 사내였다⁠. 사내는 오늘도 노래를 부르며 주머니에서 노란 것을 꺼냈다⁠. 껍질을 반쯤 벗기자 달고 물컹한 냄새가 마방 안에 퍼졌다⁠. 바나나였다⁠. 나는 바나나를 언덕에서 딱 한 번 먹어 봤다⁠. 덕춘이 생일이라며 들고 온 날이었다⁠.

사내가 바나나를 회색 수말의 입에 대 주었다⁠. 회색 수말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받아 물었다⁠. 천천히⁠. 회색 수말은 먹는 것까지 멋을 부린다⁠. 회색 수말이 반쯤 씹고 반쯤 입에 문 채 고개를 쳐드는 순간⁠, 나는 쇠창살 사이로 입술을 밀어 넣었다⁠. 창살 사이는 좁았지만 말의 윗입술은 생각보다 멀리 간다⁠. 회색 수말의 입에 물려 있던 바나나 끝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나는 물었다⁠. 당겼다⁠.

회색 수말이 비명을 질렀다⁠. 바나나의 반이 내 입에 있었다⁠. 회색 수말이 창살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쇠가 이빨에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 나는 바나나를 씹었다⁠. 껍질째였다⁠. 껍질은 쓰고 속은 달았다⁠.

마필관리사가 노래를 멈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 도둑놈아⁠! 남의 말 입에 든 걸 빼 먹냐⁠! 너 일등 후보라며⁠!⁠”

“⁠우리 애가 원래 그렇다⁠. 남이 먹는 기 더 맛있다⁠.⁠”

“⁠선생님 말은 오늘 밤에 밥 주지 마세요⁠. 우리 애 거 다 뺏어 먹겠네⁠.⁠”

마필관리사는 바나나를 하나 더 꺼내 회색 수말에게 주었다⁠. 이번에는 칸 반대편 구석에서 주었다⁠. 회색 수말은 바나나를 받으면서도 눈 한쪽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혀로 입술에 묻은 바나나를 핥으며 창살에 코를 붙이고 있었다⁠. 언덕을 떠난 뒤로 처음으로 배가 고팠다⁠.

*

오후에 통로 끝 문이 열리고 박하 냄새가 들어왔다⁠. 나는 바나나를 씹던 입을 멈췄다⁠. 실장이었다⁠. 실장 옆에 모자 쓴 노인이 하나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었고 담배를 오래 피운 사람의 냄새가 났다⁠. 실장은 노인의 팔을 공손히 붙잡고 걸었다⁠. 보안 요원이 실장의 목에 걸린 출입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이 녀석이 어르신 말입니다⁠. 내일 잘 뛸 겁니다⁠.⁠”

노인은 회색 수말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았다⁠. 회색 수말도 노인을 처음 맡는 말처럼 맡았다⁠. 실장이 노인의 손에 각설탕을 쥐여 주었고⁠, 노인이 회색 수말에게 내밀었다⁠. 회색 수말은 받아먹었다⁠. 각설탕 냄새에 내 입에 침이 고였다⁠.

조교사가 내 다리에 붕대를 감다가 일어섰다⁠. 실장이 조교사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또 뵙네요⁠.⁠”

“⁠남의 이름으로 말 들고 다니는 거⁠, 내 다 안다⁠.⁠”

“⁠어르신 이름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어르신이 마주시고요⁠. 저는 어르신 심부름합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각설탕을 하나 더 꺼내 회색 수말에게 주었다⁠. 실장이 조교사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내 귀는 낮은 소리를 더 잘 듣는다⁠.

“⁠사료값 넉 달 못 받으셨다면서요⁠.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 회색⁠, 다음 달부터 선생님 마방에 맡기면 어떨까 합니다⁠. 선금은 넉넉히 드리고요⁠. 선생님 손이 좋다는 건 경마장 사람이 다 압니다⁠.⁠”

“⁠내 손 좋은 거 알믄⁠, 내 손으로 키운 말 다리 붙들어 매는 짓은 안 시키겠제⁠.⁠”

“⁠흑진주 다리는 아무도 안 붙듭니다⁠. 고삐만 조금요⁠.⁠”

“⁠고삐가 다리다⁠. 니가 말을 모르는구나⁠.⁠”

“⁠제가 말을 몰라서 돈을 버는 겁니다⁠, 선생님⁠.⁠”

실장이 웃었다⁠. 노인의 팔을 다시 붙잡고 통로를 걸어 나갔다⁠. 나가면서 내 칸 앞에서 한 번 멈췄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을 내 코앞에 내밀었다⁠. 손바닥에서 각설탕 냄새가 났다⁠. 나는 혀를 내밀었다가⁠, 박하 밑에 숨어 있는 마른 피 냄새를 맡고 고개를 뺐다⁠. 실장이 손을 거두었다⁠.

“⁠어제보다 똑똑해졌네⁠.⁠”

*

검사실 앞 복도에서 조교사가 남자 하나를 붙잡았다⁠. 남자는 넥타이를 맸고 가슴에 쇠붙이 배지를 달았다⁠. 조교사가 수의사의 검사를 마친 나를 끌고 나오던 길이었다⁠. 남자에게서는 종이와 복사기와 식은 커피 냄새가 났다⁠.

“⁠심판위원님⁠, 잠깐 시간 됩니꺼⁠.⁠”

“⁠조교사님⁠, 무슨 일이세요⁠? 흑진주 상태 좋다던데요⁠.⁠”

“⁠상태는 좋습니다⁠. 내일⁠, 4코너 화면을 좀 잘 봐 주이소⁠.⁠”

“⁠4코너는 늘 잘 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기⁠…⁠.⁠”

조교사의 손이 조끼 가슴 주머니로 갔다⁠. 주머니 속에 내 이빨 자국이 난 종이가 있었다⁠. 나는 냄새로 안다⁠. 내 침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조교사의 손가락이 주머니 단추에 닿았다⁠. 단추를 끄르지 않았다⁠.

조교사가 종이를 꺼내면 기수의 이름이 나온다⁠. 기수의 이름이 나오면 내일 경주가 없어진다⁠. 경주가 없어지면 계류장의 거세마는 월요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런 것을 모른다⁠. 조교사의 손이 단추 위에서 떨리는 것만 보았다⁠. 떨리다가 내려왔다⁠.

“⁠근거가 있으시면 서면으로 내 주세요⁠. 그래야 저희가 움직입니다⁠.⁠”

“⁠근거라꼬 할 것까지는 없고요⁠. 그냥 마음이 그래서요⁠.⁠”

“⁠조교사님 마음이 그러시면 저도 마음을 쓰겠습니다⁠. 내일 4코너 화면⁠,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심판위원이 갔다⁠. 조교사는 복도에 한참 서 있었다⁠. 내 굴레 줄을 쥔 손이 땀으로 젖었다⁠. 복도 끝 텔레비전에서 내일 대상 경주를 떠드는 소리가 났다⁠. 관중 몇 만이 들어오고 전국 장외 발매소가 아침부터 연다는 소리⁠, 일등 후보는 이마에 별이 박힌 검은 말이라는 소리⁠.

“⁠니는 좋겠다⁠. 아무것도 몰라서⁠.⁠”

조교사가 내 이마의 별을 엄지로 문질렀다⁠. 덕춘이 하는 그대로였다⁠. 나는 조교사의 조끼 주머니에 코를 박았다⁠. 종이가 있는 주머니였다⁠. 조교사가 내 코를 밀어냈다⁠.

“⁠이건 안 된다⁠. 이건 니 거 아이다⁠.⁠”

*

저녁 면회 시간에 덕춘이 왔다⁠. 사과는 하나뿐이었다⁠. 덕춘은 사과를 반으로 쪼개 반쪽을 내 입에 넣고⁠, 남은 반쪽은 손에 쥔 채 조교사와 통로에 섰다⁠. 조교사가 실장이 내민 선금 이야기를 했다⁠. 덕춘은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받으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받으셔도 돼요⁠. 제가 넉 달을 못 드렸는데⁠.⁠”

“⁠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가 그 돈 받으믄 내일 4코너에서 내도 한패다⁠.⁠”

“⁠한패 되시라는 게 아니고요⁠. 저 때문에 선생님 마방까지 굶을까 봐⁠…⁠.⁠”

“⁠내 마방 굶는 거는 내가 안다⁠. 니는 니 말들 걱정이나 해라⁠.⁠”

덕춘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저녁에 트럭 기사에게 겨우 전화가 닿았다고 했다⁠. 기사가 계류장 우리 앞에서 전화를 들고 있겠다고 했다고⁠. 덕춘이 화면을 몇 번 누르고 휴대전화를 내 귀에 댔다⁠. 차가운 판이 귀털에 닿았다⁠. 판 속에서 바람 소리가 났고⁠, 쇠문이 덜컹이는 소리가 났고⁠, 소들이 길게 우는 소리가 났다⁠. 소 울음 사이로 높고 갈라진 울음 하나가 끼어들었다⁠.

회색 거세마였다⁠. 망아지 때부터 아침마다 내 맞은편 칸에서 들은 목소리였다⁠. 거세마는 우는 끝을 늘 한 번 꺾는다⁠. 꺾는 소리까지 같았다⁠.

나는 대답했다⁠. 있는 힘껏 울었다⁠. 대기 마방의 쇠창살이 울렸다⁠. 회색 수말이 놀라 따라 울었고⁠, 건너편 칸의 낯선 말들이 다 따라 울었다⁠. 열 마리가 넘는 말이 한꺼번에 우는 소리에 보안 요원이 통로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불났어요⁠?⁠”

“⁠아입니더⁠, 아입니더⁠. 전화 한 통 했습니더⁠.⁠”

조교사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덕춘은 휴대전화를 내 귀에 댄 채 놓지 않았다⁠. 판 속의 거세마가 한 번 더 울었다⁠. 이번에는 끝을 꺾지 않았다⁠. 트럭 기사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이제 끊어요⁠. 실장님 아시면 저도 곤란합니다⁠. 판이 조용해졌다⁠. 덕춘은 꺼진 휴대전화를 한참 내 귀에 대고 있었다⁠.

*

대기 마방의 밤은 조용하지 않다⁠. 낯선 말들이 낯선 칸에서 밤새 벽을 차고⁠, 서로 부르고⁠, 대답하지 않는 말을 또 부른다⁠. 나는 언덕의 늙은 암말을 부르지 않았다⁠. 불러도 여기까지 들리지 않는다⁠. 옆 칸 회색 수말은 바나나 껍질을 깔짚 속에 묻어 두고 묻은 자리 위에 서서 잤다⁠. 다시는 안 빼앗기겠다는 자세였다⁠.

자정 무렵 통로 끝 문이 열렸다⁠. 출입증을 기계에 대는 소리가 났다⁠. 귤 냄새가 들어왔다⁠. 기수였다⁠. 기수는 내 칸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불을 켜지 않았다⁠. 안경을 벗어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안경을 벗은 기수의 얼굴은 낯설다⁠. 눈이 작아지고 눈 밑이 젖어 있다⁠.

기수가 내 옆구리에 붙어 섰다⁠. 이마를 내 등에 댔다⁠. 안장이 놓이는 자리⁠, 기수의 무릎이 닿는 바로 위였다⁠. 이마가 뜨거웠다⁠. 이마는 뜨거운데 내 목을 쓸어내리는 손은 차가웠다⁠. 사람의 몸에서 위와 아래가 이렇게 다른 온도를 내는 것을 나는 기수에게서 처음 느꼈다⁠.

“⁠흑진주야⁠. 착하지⁠. 착하지⁠.⁠”

기수가 노래를 불렀다⁠. 경주 전날이면 늘 부르는 노래다⁠. 음이 다 틀린다⁠. 기수는 노래를 부르다가 멈췄다⁠. 이마가 내 등에서 조금 떨어졌다가 도로 붙었다⁠. 등 위로 따뜻한 물기가 번졌다⁠.

“⁠봄에 말이야⁠. 봄에⁠…⁠.⁠”

기수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손이 내 목에서 내려와 내 앞다리를 쓸었다⁠. 무릎에서 발목까지⁠. 조교사가 열을 잴 때 하는 손이었다⁠. 기수의 손은 열을 재지 않았다⁠. 내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내일 4코너에서 내가 어떻게 할지⁠, 나도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돌려 기수의 점퍼 주머니를 맡았다⁠. 귤 껍질과 안경⁠, 맨 밑에 젖은 종이가 한 장 더 있었다⁠. 박하 냄새가 나는 종이였다⁠.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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