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82자)

새벽 다섯 시, 바가지 든 할머니들

목욕탕 남북 회담 · 모세담

12월 19일 화요일 밤 열 시⁠, 통일탕 카운터 위에 행사 계획서가 펼쳐졌다⁠. 두께가 정분의 목욕 바구니만 했다⁠. 남기오는 맨발로 카운터 앞에 서서 계획서를 한 장씩 넘겼다⁠. 사흘 동안 자지 못한 사람의 손가락이 종이 모서리를 정확히 맞췄다⁠.

“⁠사장님⁠, 경호처와 하루 종일 맞췄습니다⁠. 할머님들 목욕은 새벽 네 시부터 다섯 시 반까지 하시고⁠, 다섯 시 반에 건물을 비웁니다⁠. 그다음 마지막 검측을 하고 경호구역을 닫습니다⁠. 목욕날은 열리는 겁니다⁠. 통지문에 보낸 대로⁠.⁠”

“⁠네 시면 깜깜해⁠.⁠”

“⁠골목에 조명을 달겠습니다⁠.⁠”

“⁠12월 새벽 네 시에 골목 빙판이야⁠. 복녀 언니 여든아홉이야⁠. 정분 언니는 무릎이 양쪽 다 쇠고⁠.⁠”

“⁠차로 모시겠습니다⁠. 집집마다⁠.⁠”

“⁠차에서 내릴 때 넘어져⁠.⁠”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여섯 시부터 아홉 시가 목욕날이야⁠. 네 시는 목욕날이 아니야⁠. 시간을 옮기면 그건 목욕날이 아니고 비서관 날이지⁠.⁠”

기오가 계획서를 덮었다⁠. 덮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장님⁠,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옥자는 카운터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였다⁠. 맨 위에 「⁠통일탕 근무자⁠」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로 이름이 열한 줄⁠. 길정분⁠, 허복녀⁠, 마달순⁠, 그리고 여덟⁠. 이름 옆마다 하는 일이 적혀 있었다⁠. 「⁠수건 개기⁠」 「⁠바가지 엎기⁠」 「⁠탕 물 온도 보기⁠」 「⁠등 밀기⁠」⁠.

“⁠우리 언니들은 서른 해 동안 수건을 개고 바가지를 엎었어⁠. 공짜로⁠. 정분 언니는 목욕 끝나면 평상에서 수건을 스무 장씩 개고 갔어⁠. 복녀 언니는 탕 물 온도를 손으로 재⁠. 내 온도계보다 맞아⁠. 이 사람들이 통일탕 근무자야⁠. 행사 날에 근무자는 들어오잖아⁠. 곽 팀장이 그랬어⁠.⁠”

“⁠그건 편법입니다⁠.⁠”

“⁠편법이면 이 이름들이 다 거짓말이야⁠?⁠”

“⁠이름은 참말이지만 근무는 아닙니다⁠. 회담 날 남탕에서 수건을 개시겠다는 겁니까⁠?⁠”

“⁠남탕에서 수건 개고 서로 등 밀어⁠. 여탕 근처에는 안 가⁠. 칸막이 벽 너머에 있을 거야⁠.⁠”

기오는 안경을 벗었다⁠. 닦지 않고 손에 쥐었다⁠. 맨눈으로 옥자를 보았다⁠.

“⁠사장님⁠, 제가 무서운 것은 하나입니다⁠. 대통령께서 계신 건물에서 여든아홉 되신 분이 넘어지시면 구급차가 경호선을 뚫고 들어옵니다⁠. 회담 첫 사진이 구급차가 됩니다⁠. 북측은 그 사진을 보고 남측이 자기네 단장을 어떤 데로 불렀는지 묻게 됩니다⁠. 연락 채널은 다시 닫힙니다⁠.⁠”

“⁠넘어지는 건 비서관이 더 잘 넘어지더라⁠.⁠”

기오가 대답하지 못했다⁠. 첫날 젖은 타일에서 탁자를 안고 허리를 반으로 꺾던 제 모습이 기오의 얼굴을 한 번 지나갔다⁠.

“⁠우리 언니들은 쉰 해를 이 타일에서 걸었어⁠. 넘어지는 건 처음 오는 사람이야⁠. 단장도 장관도 대통령도 다 처음 오지⁠. 언니들은 안 넘어져⁠.⁠”

*

카운터 위 시계가 열 시 사십 분을 가리켰다⁠. 기오는 계획서를 다시 열지 않았다⁠. 대신 서류철 맨 뒤 비닐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옥자의 종이 옆에 나란히 놓았다⁠.

대통령경호처 양식이었다⁠. 「⁠행사장 현장 근무자 명단 — 통일탕⁠」⁠. 이름이 열한 줄⁠. 길정분⁠, 허복녀⁠, 마달순⁠, 그리고 여덟⁠. 순서까지 옥자의 종이와 같았다⁠. 맨 아래에 제출 일시가 찍혀 있었다⁠. 「⁠2028⁠. 12⁠. 18⁠. 21⁠:40⁠」⁠.

옥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언제 넣었어⁠?⁠”

“⁠어제 밤입니다⁠. 근무자 명단은 행사 이틀 전까지 내야 합니다⁠. 오늘 내면 늦습니다⁠.⁠”

“⁠그럼 진작 말하지⁠.⁠”

“⁠쓰지 않으려고 넣어 둔 겁니다⁠. 새벽 네 시가 더 안전합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꺼내⁠?⁠”

기오는 두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볼펜 글씨와 인쇄 글씨에 같은 이름이 같은 순서로 적혀 있었다⁠.

“⁠사장님 종이에는 하는 일이 적혀 있어서요⁠. 제 종이에는 이름만 있었습니다⁠. 하는 일이 적힌 명단이 더 참말입니다⁠.⁠”

기오는 휴대전화를 꺼내 곽도식에게 걸었다⁠. 스피커를 켰다⁠. 곽도식은 첫 신호에 받았다⁠. 잠을 안 자는 사람은 둘이었다⁠.

“⁠곽 팀장님⁠, 근무자 명단 열한 명 그대로 갑니다⁠.⁠”

수화기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비표 목에 거실 것⁠. 금속 탐지기 지나실 것⁠. 휴대전화는 입구에서 맡기실 것⁠. 아홉 시 반부터 회담 끝날 때까지 남탕 밖으로 나오지 않으실 것⁠. 그리고 손에 근무 도구를 드실 것⁠.⁠”

“⁠근무 도구가 뭐야⁠?⁠”

옥자가 스피커에 대고 물었다⁠. 곽도식이 잠깐 말을 골랐다⁠.

“⁠근무자는 근무 중이라는 것이 보여야 합니다⁠. 빈손이면 경호관들이 손님으로 봅니다⁠.⁠”

옥자는 여탕 문 앞으로 걸어가 노란 바가지 열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바가지 들려 보낼게⁠.⁠”

“⁠…⁠…바가지면 됩니다⁠.⁠”

곽도식이 전화를 끊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규정을 말하던 목소리와 조금 달랐다⁠.

“⁠사장님⁠, 저희 아버지 다니던 목욕탕이 제가 중학교 때 닫았습니다⁠. 내일 어르신들 무릎은 제가 직접 훑겠습니다⁠.⁠”

기오는 전화를 끊고 넥타이를 고쳤다⁠. 고친 손으로 휴대전화에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옥자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봉채은 주무관⁠, 내일 오전 여섯 시 지원단 연락 담당으로 통일탕 현장 복귀⁠. 연락관 요청⁠. 남기오⁠」

“⁠연락관이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니라⁠.⁠”

“⁠비서관도 거짓말 못 하는구나⁠.⁠”

“⁠이번 주에 배웠습니다⁠.⁠”

*

12월 20일 수요일 새벽 네 시 오십 분⁠, 옥자는 보일러 밸브를 돌리기 전에 급수 밸브부터 열었다⁠. 물 먼저⁠. 시아버지 글씨대로였다⁠. 탕에 물이 차는 소리가 어두운 목욕탕을 채웠다⁠. 다섯 시 십 분⁠, 보일러가 두 번 기침을 하고 불을 붙였다⁠. 옥자는 보일러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 번 쳤다⁠. 오늘은 인사가 아니라 부탁이었다⁠.

남탕 물은 41도⁠, 여탕 물도 41도로 맞췄다⁠. 여탕 탕 옆 못에는 박 바가지가 매달려 있었다⁠. 노란 바가지 열두 개 가운데 하나만 여탕에 남기고⁠, 열한 개는 품에 안고 현관으로 나갔다⁠.

골목 입구 경호선에 조명이 켜져 있었다⁠. 하얀 불빛 아래로 입김이 줄지어 올라갔다⁠. 털모자를 쓴 할머니 열한 명이 한 줄로 서 있었다⁠. 맨 앞이 정분⁠, 맨 끝이 복녀였다⁠. 할머니들 목마다 비표가 늘어져 있었다⁠. 「⁠근무자⁠」 글자 밑에 이름과 사진⁠. 사진은 어제 경호처 요원이 집집마다 찾아가 찍은 것이었다⁠. 정분 사진만 눈을 감았다⁠.

옥자는 할머니들 손에 노란 바가지를 하나씩 쥐여 주었다⁠. 할머니들은 바가지를 받아 들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새벽 다섯 시 빙판 골목에 노란 바가지가 열한 개 떴다⁠.

“⁠이게 근무 도구야⁠?⁠”

“⁠응⁠. 오늘 언니들은 통일탕 직원이야⁠.⁠”

“⁠월급은⁠?⁠”

“⁠계란 세 개⁠.⁠”

곽도식이 경호선 안쪽에 서 있었다⁠. 손에 막대형 탐지기를 들고 있었다⁠. 팀장이 직접 들고 있었다⁠. 곽도식은 명단을 보며 한 사람씩 불렀다⁠.

“⁠길정분 어르신⁠.⁠”

정분이 앞으로 나왔다⁠. 휴대전화를 바구니에 넣어 요원에게 맡기는 손이 떨렸다⁠. 단톡방 방장이 단톡방을 맡기는 순간이었다⁠. 곽도식이 탐지기를 머리부터 내렸다⁠. 왼쪽 무릎에서 삐⁠, 오른쪽 무릎에서 삐⁠.

“⁠양쪽 무릎 인공관절⁠, 등록 확인했습니다⁠.⁠”

“⁠총각⁠, 나 기억해⁠?⁠”

“⁠금반지 어르신이십니다⁠.⁠”

정분이 바가지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다음은 달순이었다⁠. 오른쪽 무릎에서 삐⁠. 다음은 반찬 가게 할머니⁠, 왼쪽 무릎에서 삐⁠. 구둣방 할머니는 무릎은 조용한데 허리에서 길게 삐이 소리가 났다⁠. 척추에 나사가 넷이라고 했다⁠. 곽도식이 명단에 「⁠허리 — 나사⁠」라고 적었다⁠. 삐⁠, 삐삐⁠, 삐⁠, 삐⁠. 새벽 골목에 탐지기 소리가 박자를 맞춰 울렸다⁠. 경호선 바깥 사다리 위에서 밤을 새운 기자 하나가 탐지기 박자를 녹음했다⁠.

맨 끝은 복녀였다⁠. 복녀는 바가지를 두 손으로 앞에 들고 있었다⁠. 곽도식이 탐지기를 내리는 동안 복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무릎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든아홉 해를 제 무릎으로 걸어온 사람이었다⁠. 가슴께에서 짧게 삐 소리가 났다⁠.

“⁠어르신⁠, 가슴에 뭐가 있으십니까⁠?⁠”

복녀는 외투 단추를 하나 풀었다⁠. 목에 실로 꿴 작은 쇠붙이 하나가 나왔다⁠. 녹슨 은가락지였다⁠.

“⁠엄마 거야⁠. 강 건너올 때 엄마가 내 목에 걸어 줬어⁠. 동생 목에도 하나⁠.⁠”

곽도식이 탐지기를 내렸다⁠. 명단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복녀를 통과시켰다⁠. 복녀는 노란 바가지를 들고 경호선을 넘었다⁠. 옥자는 복녀 뒤를 따라가며 복녀의 굽은 등을 보았다⁠. 오늘 아침 저 등을 미는 동안 목에 건 가락지를 피해서 밀어야 했다⁠.

*

여섯 시⁠, 남탕 탕 안에 할머니 열한 명이 둘러앉았다⁠. 칸막이 벽 너머 여탕은 비어 있었다⁠. 천장까지 닿지 않는 벽 위로 두 탕의 김이 섞여 천창으로 올라갔다⁠. 옥자는 장갑을 끼고 정분부터 밀었다⁠. 세 번 쓸고⁠, 두 번 두드렸다⁠. 정분이 이번에는 등을 내주었다⁠.

“⁠오늘은 살살 밀어⁠.⁠”

“⁠오늘은 계란 몫 아니야⁠.⁠”

여섯 시 반에 채은이 출입증을 목에 걸고 현관으로 들어왔다⁠. 할머니에게 고개만 꾸벅하고 휴게실 평상에 노트북을 폈다⁠. 귀가 조금 빨갰다⁠. 이번에는 거짓말 때문이 아니었다⁠.

여덟 시⁠, 골목 바깥 경호선에 기자들이 몰렸다⁠. 아홉 시⁠, 통일부 장관이 승용차에서 내려 현관에서 구두를 벗었다⁠. 기오가 옆에서 양말까지 벗으시라고 낮게 말했고⁠, 장관은 영문을 모른 채 양말을 벗었다⁠. 장관의 발가락이 타일에 닿자마자 오므라들었다⁠. 아홉 시 반⁠, 곽도식이 남탕 문 앞에 요원 하나를 세웠다⁠. 할머니들은 근무를 시작했다⁠. 정분이 평상에서 수건을 개고⁠, 복녀가 탕 물에 손을 넣어 온도를 쟀다⁠.

“⁠41도⁠.⁠”

“⁠언니⁠, 온도계도 41도래⁠.⁠”

“⁠나는 손이 온도계야⁠.⁠”

*

오전 열 시 정각⁠, 골목 입구에 검은 차량 행렬이 들어왔다⁠.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북측 대표단이었다⁠. 사다리 위 렌즈 마흔 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경호선 안 골목은 조용했다⁠. 순대국집 학봉이 반쯤 올린 셔터 밑에 쪼그려 앉아 내다보았다⁠. 앞치마에 「⁠회담 공식 음식 아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두 번째 차에서 남자 하나가 내렸다⁠. 예순하나⁠, 크고 마른 몸에 짧게 깎은 흰머리⁠, 검은 외투⁠. 리영식이었다⁠. 영식은 골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사다리도 기자도 보지 않았다⁠. 담벼락과 처마와 굴뚝을 보았다⁠. 오래된 것만 골라서 보는 눈이었다⁠.

옥자는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분홍 고무장화⁠, 꽃무늬 몸뻬⁠, 어깨에 흰 수건⁠, 손에 초록 때밀이 장갑⁠. 기오가 옥자 옆에 맨발로 서 있었다⁠. 방태건이 영식 뒤에서 걸어왔다⁠.

영식은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허리를 굽혀 구두끈을 풀었다⁠. 구두를 벗어 현관 매트 옆에 가지런히 놓고⁠, 양말 바닥으로 젖은 타일을 밟았다⁠. 미끄러지지 않았다⁠.

영식이 옥자를 내려다보았다⁠. 옥자는 영식을 올려다보았다⁠. 옥자가 장갑 낀 손을 허리에서 내렸다⁠.

“⁠주인 선생이십니까⁠?⁠”

“⁠봉옥자예요⁠.⁠”

“⁠우리 아버지가 일곱 살에 이 문으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영식의 목소리는 낮고 반듯했다⁠. 말끝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아주 오래 연습한 목소리였다⁠. 옥자는 영식의 맨 목덜미를 보았다⁠. 일흔일곱 해 전 일곱 살 사내아이의 목덜미가 저만 했을 리 없었다⁠. 옥자는 그래도 저 목덜미를 알았다⁠. 세 번 쓸고 두 번 두드리면 될 목덜미였다⁠.

“⁠들어와요⁠. 물 받아 놨어요⁠. 41도⁠.⁠”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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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서담2026.11.06· 9화

    노란 바가지 든 할머니 열한 명이 새벽 다섯 시에 경호선 넘는 장면에서 박수 쳤어요. 그리고 마지막 「물 받아 놨어요. 41도.」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세 번 쓸고 두 번 두드리면 될 목덜미라니요.

    • 모세담작가2026.11.06

      옥자는 문산 할매에게 그 손을 배웠어요. 탕 안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는 장면은 마지막 화에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 바가지 든 할머니들 · 목욕탕 남북 회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