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431자)

철사 감은 박 바가지

목욕탕 남북 회담 · 모세담

12월 18일 월요일 새벽 다섯 시 반⁠, 정기 휴무일인데도 옥자는 보일러실 앞에 서 있었다⁠. 밸브는 돌리지 않았다⁠. 불을 붙이지 않은 보일러는 쇠 냄새만 냈다⁠. 1982년에 들인 보일러 옆구리에 시아버지가 붓으로 쓴 글씨가 아직 남아 있었다⁠. 「⁠불조심 — 물 먼저⁠」⁠. 물을 먼저 채우고 불을 붙이라는 말이었다⁠. 거꾸로 하면 보일러가 터졌다⁠.

옥자는 카운터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박 바가지와 접힌 종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종이를 펼쳤다⁠. 「⁠폐업 신고 접수증 — 목욕장업 통일탕 — 폐업 예정일 2028년 12월 31일⁠」⁠. 지난달 파주시청 민원실 창구에서 받은 종이였다⁠. 창구 직원은 도장을 찍으며 올해만 목욕탕 폐업이 이 시에서 세 번째라고 했다⁠. 전국에서 해마다 수백 곳씩 닫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옥자는 위로로 들었다⁠.

종이를 다시 접어 바가지 밑에 깔았다⁠. 바가지를 들어 철사 매듭을 엄지로 쓸었다⁠. 서툰 매듭이었다⁠. 쉰두 해는 할매 손이⁠, 스물다섯 해는 옥자 손이 쓸었는데도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

아홉 시⁠, 채은이 운동화를 신고 왔다⁠. 출입증도 정장도 없었다⁠. 오후에 세종 청사에 가서 경위서를 쓴다고 했다⁠. 채은은 휴게실 평상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귤을 깠다⁠. 지원단에서 빠진 주무관은 처음으로 할머니 목욕탕에서 일 없이 앉아 있었다⁠.

옥자는 카운터 서랍에서 박 바가지를 꺼내 채은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 알아⁠?⁠”

“⁠탕 옆 못에 걸려 있던 거잖아⁠. 어릴 때 만지면 할머니가 혼냈어⁠.⁠”

“⁠문산 할매 거야⁠. 너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어⁠. 1951년 봄부터 이 목욕탕에서 남의 등을 밀었어⁠. 그 전엔 문산탕⁠, 그 뒤엔 통일탕⁠. 쉰두 해⁠.⁠”

채은이 귤을 까던 손을 멈췄다⁠.

“⁠할매가 바가지를 깨뜨린 아들 얘기만 했어⁠. 강 건너 간 아들⁠. 할아버지 따라 집에 다시 갔다가 못 돌아온 일곱 살⁠.⁠”

채은의 눈이 바가지에서 할머니 얼굴로⁠, 할머니 얼굴에서 다시 바가지로 옮겨 갔다⁠. 옥자는 채은의 눈을 따라가지 않았다⁠. 손녀의 귀를 보았다⁠.

“⁠채은아⁠. 북측 단장 아버지 이름이 장수냐⁠?⁠”

“⁠할머니⁠, 나 그거 말 못 해⁠. 신상 자료는 대외비야⁠.⁠”

채은의 귀가 빨개졌다⁠. 귓불부터 귓바퀴 끝까지 차례로 빨개졌다⁠. 거짓말을 못 하는 아이는 말을 못 할 때 귀가 대신 말했다⁠. 다섯 살 때 꽃병을 깼을 때도 귀부터 빨개졌다⁠.

옥자는 대답을 다 들었다⁠.

“⁠말 안 해도 돼⁠. 귀가 다 했어⁠.⁠”

채은이 두 손으로 귀를 덮었다⁠. 덮은 손 사이로 울음 반 웃음 반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할머니⁠, 나 이러다 진짜 잘려⁠.⁠”

“⁠잘리면 할머니 탕에서 때밀이 해⁠. 장갑 하나 줄게⁠.⁠”

*

열한 시⁠, 회색 승용차가 골목에 급하게 멈췄다⁠. 재국이 내렸다⁠. 쉰 살⁠, 머리숱이 아버지를 닮아 정수리가 비었고⁠, 일산 아파트 대출 서류를 넣은 가방을 늘 들고 다녔다⁠. 채은이 전화했느냐고 옥자가 눈으로 묻자 채은이 고개를 저었다⁠. 뉴스를 보고 왔다고 했다⁠. 「⁠北⁠, 회담 장소 변경 검토⁠… 통일탕 폐업 소식 탓⁠」⁠.

재국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벌써 목소리가 높았다⁠.

“⁠엄마⁠, 문 계속 연다는 말 하지 마⁠. 정부가 물어도 하지 마⁠.⁠”

“⁠아직 안 했어⁠.⁠”

“⁠하지 마⁠. 엄마 무릎에 쇠 들었어⁠. 보일러는 부속도 없고⁠. 지난번에 엄마 보일러실에서 미끄러졌을 때 내가 일산에서 한 시간 반 걸려 왔어⁠. 그날 엄마 혼자 사십 분 누워 있었어⁠.⁠”

옥자는 대답 대신 보일러실로 걸어갔다⁠. 재국이 따라왔다⁠. 좁은 보일러실에서 모자가 마주했다⁠. 불 꺼진 보일러가 둘 사이에서 차갑게 숨을 참고 있었다⁠.

“⁠엄마⁠, 요양원 적금 있잖아⁠. 그거 이 보일러에 넣으려는 거지⁠?⁠”

옥자는 놀라지 않았다⁠. 아들은 엄마 통장을 엄마보다 잘 알았다⁠.

“⁠얼마 남았는데⁠.⁠”

“⁠팔천삼백⁠. 엄마가 십오 년 부은 거야⁠. 엄마 거동 못 하면 그 돈으로 요양원 가기로 했잖아⁠. 내가 엄마 모실 형편이 안 되니까⁠. 그거 엄마도 알잖아⁠.⁠”

재국의 목소리가 마지막에서 갈라졌다⁠. 옥자는 아들 얼굴을 오래 보았다⁠. 아들은 화가 나서 소리친 것이 아니었다⁠. 못 모시는 아들이 모시지 못하는 이유를 입으로 말하기까지 쉰 해가 지났다⁠.

“⁠재국아⁠, 보일러 새로 들이는 데 삼천이래⁠. 나머지로 가스비 모자란 거 메우면 두 해는 가⁠.⁠”

“⁠두 해 뒤엔⁠?⁠”

“⁠두 해 뒤엔 두 해 뒤에 정해⁠.⁠”

“⁠회담 하나 때문에 엄마 노후를 다 넣어⁠?⁠”

“⁠회담 하나 때문이 아니야⁠.⁠”

옥자는 손에 든 박 바가지를 아들 앞에 내밀었다⁠. 재국이 바가지를 보았다⁠. 한참 보다가 표정이 바뀌었다⁠.

“⁠이거 문산 할머니 거잖아⁠. 나 어릴 때 사탕 주던⁠.⁠”

“⁠기억나⁠?⁠”

“⁠알사탕⁠. 등 밀고 나오면 꼭 하나씩 줬어⁠. 박하사탕은 안 주고 알사탕만⁠.⁠”

“⁠그 할매 아들이 일곱 살에 강 건너 갔어⁠. 할매는 쉰두 해 동안 여기서 남의 등을 밀면서 기다렸어⁠. 이 바가지로 손만 헹구면서⁠. 이번에 오는 북측 단장이 그 아들의 아들이야⁠.⁠”

보일러실이 조용해졌다⁠. 천장 환기구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났다⁠. 재국은 바가지를 받아 들지 않았다⁠. 손을 반쯤 내밀었다가 거두었다⁠.

“⁠엄마⁠, 그게 엄마 일이야⁠? 엄마가 그 할머니 딸도 아니잖아⁠.⁠”

“⁠딸은 아니지⁠. 등 미는 손을 물려받았어⁠.⁠”

옥자는 장갑 낀 손바닥을 아들에게 펴 보였다⁠. 초록 실이 닳아 손바닥 가운데만 반들반들했다⁠.

“⁠이 손으로 할매 마지막 겨울에 할매 등을 밀었어⁠. 할매가 장수야 물 뜨겁다고 소리칠 때⁠. 내가 할매 아들 대신 대답했어⁠. 응⁠, 엄마⁠, 천천히 들어갈게⁠. 그 말 한 번 해 준 게 다야⁠. 그 손자가 할매 탕에 와서 앉겠다는데⁠, 내가 그 탕을 보름도 안 돼서 잠가⁠?⁠”

재국은 대답하지 못했다⁠. 보일러 옆구리의 붓글씨를 보았다⁠. 「⁠불조심 — 물 먼저⁠」⁠. 할아버지 글씨였다⁠. 재국이 손가락으로 글씨를 한 번 쓸었다⁠.

“⁠엄마⁠, 그럼 두 해만이야⁠. 두 해 뒤엔 내 말 들어⁠.⁠”

“⁠두 해 뒤엔 네 말 들을게⁠.⁠”

“⁠거짓말⁠.⁠”

“⁠반은⁠.⁠”

재국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쉰 살 아들이 일곱 살처럼 눈을 비볐다⁠.

*

열두 시 반⁠, 옥자는 카운터 전화로 파주시청 위생과에 전화를 걸었다⁠. 신고한 폐업을 거두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담당자는 처음 듣는 질문이라는 듯 잠깐 말이 없다가⁠, 폐업 예정일 전이면 신고를 취하하면 된다고 했다⁠. 오늘 오후에 오시면 된다고 했다⁠. 옥자는 이어서 도시가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공급 해지 신청을 거두었다⁠. 상담원이 해지할 까닭이 없어졌느냐고 물었고⁠, 옥자는 손님이 와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 시 반⁠, 재국이 어머니를 태우고 파주시청에 갔다⁠. 지난달 폐업 신고를 받아 준 창구 직원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직원은 옥자가 내민 접수증을 보고 안경을 고쳐 썼다⁠. 취하서에 도장을 찍으며 직원이 말했다⁠. “⁠올해 목욕탕 폐업 취하는 처음입니다⁠.⁠” 옥자는 처음이라는 말을 이번에도 위로로 들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재국은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문산 들머리에서 신호에 멈췄을 때 재국이 앞만 보고 말했다⁠. “⁠엄마⁠, 보일러는 내가 알아볼게⁠. 엄마가 알아보면 비싼 거 사⁠.⁠”

전화를 끊고 옥자는 박 바가지를 들고 여탕으로 들어갔다⁠. 탕 옆 벽의 빈 못에 바가지를 다시 걸었다⁠. 철사 매듭이 못에 닿으며 딸깍 소리를 냈다⁠. 있는 그대로였다⁠.

*

오후 세 시⁠, 남기오가 통일탕에 왔다⁠. 마감 통화 한 시간 전이었다⁠. 넥타이는 매고 있었지만 매듭이 헐거웠다⁠. 기오는 현관에서 구두와 양말을 벗고 카운터 앞에서 옥자를 보았다⁠. 무엇을 물으러 왔는지 둘 다 알았다⁠.

“⁠계속 열어⁠. 내 돈으로⁠.⁠”

기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안경을 벗지도 않았다⁠. 옥자의 얼굴을 보다가 탕 쪽 벽을 보았다⁠. 못에 박 바가지가 돌아와 있었다⁠.

“⁠얼마나 여실 겁니까⁠?⁠”

“⁠회담이 이어지는 동안⁠. 그다음은 그다음에⁠.⁠”

“⁠정부 지원은⁠…⁠…⁠.⁠”

“⁠안 받아⁠. 받으면 정부 목욕탕이야⁠. 대신 하나 부탁할게⁠.⁠”

옥자는 기오를 여탕 문 앞으로 데려갔다⁠. 김 없는 빈 탕 옆에서 박 바가지를 가리켰다⁠. 그리고 윤달님 이야기를 했다⁠. 1951년 1월⁠, 일곱 살 장수⁠, 강 건너 간 아들⁠, 쉰두 해⁠, 철사 세 바퀴⁠, 마지막 겨울의 「⁠장수야⁠, 물 뜨겁다⁠」⁠. 기오는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듣는 동안 한 번도 적지 않았다⁠.

“⁠이 얘기는 통지문으로 보내지 마⁠. 기자들한테도 하지 마⁠. 단장한테는 내가 직접 할 거야⁠. 탕에서⁠.⁠”

기오는 오래 생각했다⁠. 의전하는 사람의 머리가 바쁘게 돌았다⁠. 이 이야기 하나면 회담 장소는 확실해진다⁠. 이 이야기가 기사로 나가면 회담은 이산가족 사연 행사가 되고⁠, 북측은 단장 개인사가 남측 홍보에 쓰였다고 여길 수 있다⁠. 기오는 둘 다 알았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통지문에는 사실만 넣겠습니다⁠. 통일탕은 계속 연다⁠, 목욕날은 회담 날에도 열린다⁠. 그 두 줄만⁠.⁠”

“⁠두 번째 줄도 넣어⁠?⁠”

“⁠봉 주무관이 이미 보낸 줄입니다⁠. 남측은 사실만 전한다고요⁠. 제가 거기에 맞추겠습니다⁠.⁠”

옥자는 기오를 다시 보았다⁠. 이틀 전에 손녀를 지원단에서 뺀 비서관이 손녀의 문장에 제 문장을 맞추겠다고 했다⁠.

*

오후 네 시 이십 분⁠, 기오의 휴대전화가 카운터 위에서 울렸다⁠. 기오는 스피커를 켜지 않고 귀에 댄 채 듣다가⁠, 전화를 끊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넥타이 매듭을 천천히 다시 조였다⁠.

“⁠북측 답입니다⁠. 회담은 20일 통일탕에서 예정대로 한다⁠.⁠”

옥자는 장갑 낀 손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몸뻬 주머니 속에서 고지서가 바스락거렸다⁠.

“⁠그럼 다 된 거야⁠?⁠”

“⁠하나 남았습니다⁠.⁠”

현관 유리문이 열리고 곽도식이 들어왔다⁠. 구두를 벗는 데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곽도식은 카운터 앞에 와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통지문에 목욕날이 들어간 것은 압니다⁠. 그래도 경호 규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회담 날 대통령께서 오시는 건물에 민간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어르신들이 오시면 경호선에서 돌려보내겠습니다⁠.⁠”

“⁠북에서 목욕날 그대로 하라고 했잖아⁠.⁠”

“⁠북측은 북측 단장을 지킵니다⁠. 저는 대통령을 지킵니다⁠.⁠”

곽도식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규정을 다 말하는 고개였다⁠. 기오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수첩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사장님⁠, 내일 밤까지 방법을 찾겠습니다⁠.⁠”

*

밤 열 시⁠, 옥자는 뒤채 방에서 휴대전화를 들었다⁠. 단톡방 「⁠통일탕 수요반⁠」을 열었다⁠. 서른 해 동안 읽기만 하던 방에 옥자는 처음으로 글을 썼다⁠. 장갑을 벗은 맨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한 글자씩 천천히 움직였다⁠.

「⁠통일탕 문 안 닫음⁠. 목욕날 그대로⁠. 사천 원⁠. 20일 수요일도 함⁠」

일 분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 분째에 정분이 답했다⁠.

「⁠계란은⁠」

옥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혼자 웃다가 답을 썼다⁠.

「⁠계란 내가 삶음⁠. 세 개⁠」

엄지손가락이 달렸다⁠. 하나⁠, 둘⁠, 다섯⁠, 아홉⁠. 반찬 가게 할머니가 하트를 눌렀고⁠, 달순이 생일 케이크를 눌렀다⁠. 열 번째 반응이 떴다⁠. 복녀였다⁠. 서른 해 동안 한 번도 쓰지 않던 복녀가 글자를 썼다⁠.

「⁠6시⁠」

옥자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대고 불 꺼진 천장을 보았다⁠. 목욕탕 쪽 벽 너머에서 보일러가 잠잠했다⁠. 내일 새벽에는 물부터 먼저 채워야 했다⁠. 시아버지 글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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