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84자)

경운기 확성기로 마을이가 외쳤다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모세담

2027년 11월 5일 금요일 오후 세 시⁠, 버드내 마을회관⁠. 새벽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았다⁠. 회관 처마 홈통이 넘쳐서 물이 계단 위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마지막 합동 유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장수가 아침 확성기로 유세 취소를 알렸고⁠, 회관 게시판의 벽보 두 장은 젖어서 나란히 배가 불룩해졌다⁠.

상춘은 오전에 옥련의 차를 타고 읍내 은행에 다녀왔다⁠. 「⁠이장 월급⁠」 통장에서 이천칠백만 원을 군 계좌로 보냈다⁠. 창구 직원이 금액을 두 번 읽어 주었고⁠, 상춘은 두 번 다 “⁠예⁠” 했다⁠. 옥련은 은행 의자에서 기다리다가 나올 때 우산을 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달천은 벌써 흙빛이었다⁠.

회관 노인회 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노트북이 다시 탁자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형식이 할머니들에게 한 분씩 물어 하소연 녹음은 끄고 재난 알림만 켜 두기로 한 지 이틀째였다⁠. 화면의 하늘색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입 모양이 평소보다 작았다⁠.

“⁠기상청 호우경보 받았슈⁠. 괴산댐 방류량 늘린다는 알림도 왔슈⁠. 예보로는 비가 가장 센 때가 밤 열한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유⁠. 아랫말 대피는 밤 아홉 시에 시작하면 돼유⁠.⁠”

“⁠지금 혀⁠.⁠” 상춘이 말했다⁠.

“⁠지금은 비가 시간당 이십 미리유⁠. 밤엔 오십 미리가 넘어유⁠. 지금 대피하시면 할머니들이 회관에서 열 시간 넘게 기다리셔야 혀유⁠.⁠”

“⁠해 떨어지면 할머니들 못 걸어⁠. 다섯 시에 혀⁠.⁠”

형식이 노트북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장인어른⁠, 근거가 있어요⁠. 2023년에도 댐 넘친 건 아침이었어요⁠. 예보가 밤이면 밤이에요⁠. 미리 나오셨다가 기다리다 지치시면 그게 더 위험해요⁠.⁠”

“⁠근거는 물 소리여⁠.⁠” 상춘이 창을 가리켰다⁠. 빗소리 사이로 달천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저 소리가 아침보다 한 음 낮어⁠. 물이 무거워진 거여⁠.⁠”

“⁠소리가 낮은 게 근거예요⁠?⁠”

“⁠2017년에도 그랬어⁠.⁠”

할머니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덕님 할머니가 보행기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

“⁠나는 이장 말대로 지금 갈래⁠. 밤엔 무릎이 안 펴져⁠.⁠”

“⁠나는 마을이 말대로 아홉 시에 갈 거여⁠. 저녁 해 먹고 가야지⁠.⁠” 다른 할머니가 말했다⁠.

장수가 확성기 마이크를 쥐고 둘을 보았다⁠.

“⁠그럼 나는 뭐라고 방송혀⁠? 다섯 시여⁠, 아홉 시여⁠?⁠”

“⁠다섯 시⁠!⁠”

“⁠아홉 시유⁠!⁠”

장수가 마이크를 쥔 채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마이크 단추를 눌렀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다섯 시에 나오실 분은 다섯 시에⁠, 아홉 시에 나오실 분은 아홉 시에 나오셔유⁠. 이상⁠.⁠”

“⁠형님⁠!⁠”

“⁠규약에 대피 시각은 안 써 있어⁠.⁠”

*

다섯 시 칠 분⁠, 회관 불이 꺼졌다⁠. 텔레비전과 보일러가 한꺼번에 멎었다⁠. 창밖 골목의 가로등도 꺼졌다⁠. 윗말 고갯길 전신주 하나가 비탈 흙과 함께 기울었다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다⁠. 방 안에 할머니들의 숨소리와 빗소리만 남았다⁠.

장수가 확성기 단추를 눌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확성기가 죽었어⁠.⁠”

노트북 화면만 환했다⁠. 하늘색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화면 위쪽에 작은 글씨가 떴다⁠. 「⁠인터넷 연결 끊김 — 회관용 작은 판으로 전환⁠」⁠.

“⁠지 머리가 바다 건너랑 끊겼슈⁠.⁠” 마을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느렸다⁠. “⁠지금은 노트북 안에 있는 작은 머리로 말해유⁠. 날씨 예보는 더 못 받어유⁠. 대신 마을 사람 명단이랑 집 위치는 다 있슈⁠. 배터리는 세 시간이유⁠.⁠”

상춘은 창밖을 보았다⁠. 빗줄기 사이로 아랫말 집들의 창이 하나도 밝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을이⁠.⁠” 상춘이 노트북 앞으로 갔다⁠. “⁠아랫말에 혼자 사는 사람⁠, 못 걷는 사람⁠, 밤에 약 먹는 사람 다 대 봐⁠.⁠”

마을이가 대답하기 전에 잠깐 멈췄다⁠.

“⁠이장님이 지한테 물으신 거⁠, 처음이유⁠.⁠”

“⁠빨리 대⁠.⁠”

“⁠아랫말 열한 집⁠, 열여섯 분이유⁠. 혼자 사시는 분 다섯⁠, 보행기 쓰시는 분 셋⁠, 혈압약 저녁에 드시는 분 넷⁠. 그리고 아랫말 세 번째 골목 윤 씨 할아버지는 밤에 산소 발생기를 쓰셔유⁠. 전기 끊기면 한 시간 반이유⁠.⁠”

상춘의 등이 굳었다⁠. 세 번째 골목 할아버지가 밤에 기계를 쓴다는 것을 상춘은 몰랐다⁠. 서른 해 동안 윤 씨네 대문을 몇 번이나 두드렸는데 몰랐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알어⁠.⁠”

“⁠할아버지 따님이 서울에서 하소연하셨슈⁠. 아버지가 이장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대유⁠. 바쁜 사람 귀찮게 한다구유⁠. 녹음은 안 열었슈⁠. 지가 들은 걸 기억하는 거유⁠.⁠”

상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식이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 들고 상춘 곁으로 왔다⁠.

“⁠확성기가 없으면 집집이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열한 집을 다 돌기엔⁠…⁠…⁠”

“⁠경운기에 앰프 있어⁠.⁠” 상춘이 말했다⁠. “⁠배터리로 돌아⁠.⁠”

형식이 상춘을 보았다⁠. 둘이 동시에 노트북을 보았다⁠.

*

빗속에서 형식이 경운기 짐칸에 올라 앰프 뒤판을 열었다⁠. 상춘이 손전등을 비췄다⁠. 형식이 가방에서 선 하나를 꺼내 노트북과 앰프를 이었다⁠. 노트북은 비닐봉지 두 겹에 싸였다⁠. 상춘이 시동을 걸자 앰프에서 지직 소리가 나더니 트로트 반주가 쾅 터졌다⁠. USB가 아직 꽂혀 있었다⁠.

“⁠빼⁠! 빼⁠!⁠”

형식이 USB를 뽑았다⁠. 반주가 뚝 끊겼다⁠. 짐칸 비닐 속에서 마을이가 말했다⁠.

“⁠지 목소리로 바꿨슈⁠. 볼륨 올려 주셔유⁠.⁠”

상춘이 앰프 손잡이를 끝까지 돌렸다⁠. 경운기 나팔 스피커에서 마을이의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아랫말로 퍼졌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마을이유⁠. 아랫말 분들⁠, 지금 회관으로 오셔유⁠. 윤 씨 할아버지 댁⁠, 산소 발생기는 그대로 두시구 몸만 나오셔유⁠. 회관에 발전기 있슈⁠. 덕님이 할머니⁠, 혈압약 챙기셔유⁠. 지금 기온 8도⁠, 비 많이 와유⁠. 이건 말 안 해도 아시쥬⁠.⁠”

상춘은 경운기 핸들을 꺾어 아랫말로 내려갔다⁠. 장화 밑으로 골목 물이 발목까지 흘렀다⁠. 해주가 우비를 쓰고 손전등을 들고 경운기 옆을 따라 뛰었다⁠. 오순 할머니 집에서 나와 회관으로 오던 길이었다⁠.

“⁠할머니는⁠?⁠”

“⁠안 나오신대요⁠. 대문 잠그셨어요⁠.⁠”

“⁠먼저 윤 씨네부터⁠.⁠”

세 번째 골목에서 윤 씨 할아버지의 딸이 서울에서 전화로 알려 준 대로⁠, 할아버지는 이불을 쓰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코에 줄을 끼운 채였다⁠. 상춘이 줄을 빼고 할아버지를 업었다⁠. 형식이 산소 기계를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워서 형식이 휘청했다⁠.

“⁠그건 두고 와⁠. 회관에 발전기 있어⁠.⁠”

“⁠발전기에 꽂으려면 이게 있어야죠⁠.⁠”

형식은 기계를 품에 안고 빗속을 뛰었다⁠. 상춘은 할아버지를 경운기 짐칸에 앉히고 비닐을 씌웠다⁠. 마을이가 나팔로 다음 집 이름을 불렀다⁠. 상춘은 이름이 불리는 집으로 경운기를 몰았다⁠. 해주가 대문을 두드리고⁠, 형식이 짐을 들고⁠, 옥련이 회관 문간에서 사람을 받았다⁠. 한 시간 동안 경운기가 회관과 아랫말 사이를 여섯 번 오갔다⁠.

회관 뒤 창고에서는 장수가 발전기 줄을 당기고 있었다⁠. 2023년 물난리 뒤에 군에서 나눠 준 발전기였는데⁠, 두 해 동안 한 번도 시동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장수가 줄을 당길 때마다 발전기가 콜록거리다 멎었다⁠.

“⁠형님⁠, 초크 올려유⁠!⁠” 상춘이 짐칸에서 사람을 내리며 소리쳤다⁠.

“⁠초크가 뭐여⁠!⁠”

“⁠빨간 손잡이유⁠!⁠”

장수가 빨간 손잡이를 올리고 줄을 당겼다⁠. 발전기가 덜덜거리며 살아났다⁠. 회관 안에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며 켜졌다⁠. 할머니들이 박수를 쳤다⁠. 형식이 윤 씨 할아버지의 산소 기계를 발전기 선에 꽂았다⁠. 기계에서 낮게 바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옥련이 할아버지 코에 줄을 다시 끼워 주었다⁠.

“⁠이장보다 노트북이 먼저 알았네⁠.⁠” 윤 씨 할아버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지도 몰랐슈⁠.⁠” 상춘이 말했다⁠. “⁠어르신이 말을 안 허셨잖유⁠.⁠”

“⁠바쁜 사람한테 뭘 말혀⁠.⁠”

“⁠담엔 말허셔유⁠. 바빠도⁠.⁠”

상춘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경운기로 돌아갔다⁠. 등 뒤에서 할아버지가 “⁠저 사람이 말을 허라네⁠”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일곱 시 반⁠, 상춘은 혼자 경운기를 몰고 아랫들 둑으로 내려갔다⁠. 형식이 짐칸에서 뛰어내려 따라왔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달천이 둑 바로 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흙탕물이 둑 풀을 눕히며 흘렀다⁠. 둑 밑 수문 너머에서 강물이 거꾸로 밀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닫어야 혀⁠.⁠” 상춘이 수문 손잡이를 잡았다⁠. “⁠안 닫으면 달천이 배수로로 거꾸로 들어와⁠.⁠”

“⁠닫으면 배수로 물은요⁠? 회관 골목 물이 다 여기로 오잖아요⁠.⁠”

“⁠닫으면 알어⁠.⁠”

상춘이 손잡이를 돌렸다⁠. 기름칠을 해 둔 손잡이가 소리 없이 돌았다⁠. 쇠 수문이 내려가며 강물을 막았다⁠. 형식이 옆에서 손잡이를 같이 잡았다⁠. 마지막 반 바퀴는 둘이 함께 돌렸다⁠.

수문이 닫히자 배수로를 타고 내려온 물이 갈 데를 잃었다⁠. 물은 배수로 턱을 넘어 옆으로 흘러넘쳤다⁠. 넘친 물이 향한 곳은 배추밭이었다⁠. 형식이 손전등을 들었다⁠. 불빛 속에서 김장 배추 삼천 포기가 고랑부터 잠겨 갔다⁠. 퍼런 잎들이 흙탕물 위로 하나씩 떠올랐다⁠. 아랫말 집들 담장 밑은 마른 채였다⁠.

형식은 한참 동안 손전등을 내리지 못했다⁠.

“⁠이거였어요⁠?⁠”

상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빗물이 밀짚모자 챙에서 끊이지 않고 떨어졌다⁠.

“⁠배추밭을 낮추신 게⁠. 배수로를 장인어른 밭 옆으로 내신 게⁠. 집 대신 밭이 물을 받으라고요⁠?⁠”

“⁠말하지 마⁠.⁠”

“⁠왜 말을 안 하셨어요⁠? 이걸 말씀하셨으면 아무도 의심 안 했어요⁠. 동의서 열한 장도⁠, 반환금도⁠…⁠…⁠”

“⁠말하면 다 내 밭 보러 왔을 거여⁠.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배추값 물어 준다고⁠.⁠” 상춘이 손전등 불빛 밖 어둠을 보았다⁠. “⁠그거 받으려고 한 거 아녀⁠.⁠”

형식이 손전등을 내렸다⁠. 둘 사이로 빗소리가 가득 찼다⁠.

“⁠장인어른⁠, 그게 혼자 정하신 거예요⁠.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할머니들이 할지 말지 정할 일이에요⁠. 장인어른이 대신 정하신 거예요⁠.⁠”

상춘은 사위를 보았다⁠. 손전등 빛이 아래로 떨어져 있어서 형식의 얼굴은 반만 보였다⁠. 빗물에 젖은 얼굴이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니 말이 맞어⁠.⁠”

형식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경운기 앰프에서 마을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짐칸 비닐 속에서 화면이 번쩍였다⁠.

“⁠이장님⁠! 배추밭이 다 찼슈⁠. 물이 아랫말 끝집 담 밑으로 붙어유⁠. 탁오순 할머니 댁이유⁠. 할머니는 아직 집에 계셔유⁠.⁠”

*

끝집 대문 앞에 경운기를 댔을 때 물은 대문 문턱 밑까지 차 있었다⁠. 해주가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비 모자가 벗겨져 머리가 다 젖어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문 여세요⁠!⁠”

안에서 고무신 끄는 소리가 났다⁠. 대문 너머에서 오순 할머니의 목소리가 났다⁠.

“⁠나 안 나가⁠. 2017년에도 업혀 나갔어⁠. 이번엔 내 집에 있을 거여⁠.⁠”

“⁠할머니⁠, 물이 들어와요⁠!⁠”

“⁠들어오라고 혀⁠.⁠”

상춘이 경운기에서 내려 대문 앞으로 갔다⁠. 장화가 물에 잠겼다⁠. 상춘이 대문에 손바닥을 댔다⁠. 나무 대문이 빗물에 불어 차갑고 무거웠다⁠. 서른 해 동안 상춘은 이 대문을 몇 번이나 어깨로 밀고 들어갔다⁠. 2017년 아침에도 그렇게 들어가 할머니를 업고 나왔다⁠.

상춘은 대문을 밀지 않았다⁠. 손바닥을 댄 채로 서 있었다⁠. 뒤에서 형식이 손전등을 비추고⁠, 해주가 숨을 몰아쉬고⁠, 경운기 앰프에서 마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문 너머에서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문턱 밑의 물이 한 뼘 더 올라왔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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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지후2026.11.06· 9화

    정전된 마을에서 노트북을 경운기 나팔에 잇는 장면에서 소름 돋았어요. 이장이 몰고 AI가 외친다니. 오순 할머니 대문 앞에서 상춘이 문을 밀지 않고 손만 대고 있는 데서 숨을 참았습니다.

    • 모세담작가2026.11.06

      2017년에는 상춘이 그 대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갔었죠. 오순 할머니 이야기와 투표 결과는 마지막 화에서 이어집니다.

경운기 확성기로 마을이가 외쳤다 ·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