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17자)

서른 해 이장 월급 통장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모세담

2027년 11월 3일 수요일 아침 여덟 시⁠, 버드내 마을회관 지붕⁠. 확성기가 지직거리다가 길장수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군청에서 공문이 왔슈⁠. 배수로 사업 동의서가 잘못돼서⁠, 보조금 가운데 이천칠백만 원을 마을이 군에 돌려줘야 한대유⁠. 금요일까지 주민 삼분의 이 넘게 다시 동의서를 써 오면 안 돌려줘도 된대유⁠. 다시 쓸 때는 본인 손으로유⁠. 글 모르시는 분은 지장 찍으셔유⁠. 이상⁠.⁠”

한 박자 쉬고 확성기가 다시 켜졌다⁠.

“⁠아⁠, 덧붙여유⁠. 이천칠백이면 회관 보일러 열 번 갈아유⁠. 이상⁠.⁠”

상춘은 마당에서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장화를 신었다⁠. 옥련이 부엌에서 나와 인주 통 하나와 볼펜 두 자루를 내밀었다⁠. 공문 사본은 면 직원이 새벽에 회관 우편함에 넣고 갔다⁠. 이장 업무에서 빠진 해주 대신 처음 보는 젊은 직원이었다⁠.

옥련이 인주 뚜껑을 열어 엄지로 한 번 눌러 보았다⁠. 오래 안 쓴 인주가 말라서 손끝에 잘 묻지 않았다⁠. 옥련은 부엌으로 들어가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려 와서 다시 내밀었다⁠. 인주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금요일까지면 이틀이여⁠.⁠” 옥련이 말했다⁠.

“⁠마흔 집 돌면 돼⁠.⁠”

“⁠까닭은 말할 거여⁠?⁠”

상춘은 인주 통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대답이 없자 옥련은 볼펜 하나를 도로 가져갔다⁠.

“⁠한 자루면 되겄네⁠. 말 안 하면 써 줄 사람도 몇 없을 거여⁠.⁠”

*

덕님 할머니는 대문을 열자마자 동의서를 빼앗아 갔다⁠. 마루에 엎드려 볼펜을 쥐고 이름을 썼다⁠. 획 하나를 그을 때마다 할머니의 숨이 끊겼다가 이어졌다⁠. 맹⁠, 덕⁠, 님⁠. 세 글자를 쓰는 데 일 분이 넘게 들었다⁠. 글자가 서로 기대어 비틀거렸다⁠.

“⁠봐⁠. 아무도 못 따라 써⁠.⁠”

“⁠예⁠.⁠”

“⁠이장⁠, 2017년에 업어 준 건 고마워⁠. 근디 나는 이장이 왜 아랫들로 물길 냈는지 몰러⁠. 몰라도 써 주는 거여⁠. 다음엔 말혀⁠.⁠”

“⁠예⁠.⁠”

할머니가 볼펜을 돌려주며 상춘의 손등을 철썩 때렸다⁠.

“⁠예만 하지 말고⁠.⁠”

*

윗말 젊은 부부 집에서는 남편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마당까지 낮게 울렸다⁠. 남편은 동의서를 받아 들고 한참 읽었다⁠.

“⁠이장님⁠, 저희 할게요⁠. 아랫들로 왜 냈는지만 말씀해 주시면요⁠.⁠”

“⁠물이 그리 가니께⁠.⁠”

“⁠그 말씀은 토론회 때 들었어요⁠.⁠”

“⁠그럼 더 할 말 없어⁠.⁠”

남편이 동의서를 두 손으로 돌려주었다⁠.

“⁠그럼 저희도 못 해요⁠. 죄송해요⁠. 보일러는 정말 감사해요⁠.⁠”

상춘은 동의서를 받아 서류철에 끼웠다⁠. 대문을 나서는데 남편이 뒤에서 불렀다⁠.

“⁠이장님⁠, 마을이한테 하소연할 데가 없어져서요⁠, 저희 요새 저녁마다 둘이 얘기해요⁠. 그것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골목 중간 집 할아버지는 동의서를 보자마자 엄지에 인주를 묻혀 꾹 눌렀다⁠. 인주를 너무 많이 묻혀 엄지 지문이 붉은 동그라미로 번졌다⁠.

“⁠이장 일을 내가 왜 따져⁠. 서른 해 했으면 알아서 했겄지⁠.⁠”

“⁠어르신⁠, 그러지 말고 한번 따져 보셔유⁠.⁠”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이장이 따지라는 소리를 다 허네⁠. 노트북한테 배웠어⁠?⁠”

상춘은 대답 대신 번진 지장 옆에 날짜를 적어 넣었다⁠. 할아버지 같은 집이 몇 집만 더 있으면 삼분의 이는 금방이었다⁠. 그런데 동의서 칸이 하나씩 차오를수록 손이 무거워졌다⁠. 따지지 않고 찍어 주는 지장은 서른 해 동안 받아 온 박수와 모양이 똑같았다⁠.

윗말을 다 돌았을 때 서류철 안의 동의서는 일곱 장이었다⁠. 마흔 집에 사람은 예순여섯⁠, 삼분의 이면 마흔넷이었다⁠. 형식네 집은 대문이 잠겨 있었다⁠. 형식은 새벽 첫차로 서울에 갔다⁠.

*

오후 한 시 반⁠, 상춘은 아랫말 끝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대문이 열려 있었다⁠. 마당에서 해주가 오순 할머니의 고추를 멍석에 뒤집고 있었다⁠. 감사 기간에 출근하지 못하게 된 해주는 이틀 밤을 이 집에서 잤다⁠. 상춘이 서류철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해주가 고추를 쥔 손을 멈췄다⁠.

“⁠아버지⁠, 할머니한테 그거 내밀지 마세요⁠.⁠”

“⁠할머니가 직접 찍으시면 되잖여⁠. 이번엔 물어볼 거여⁠.⁠”

“⁠뭘 물어보실 건데요⁠? 까닭은 말 안 하시면서⁠.⁠”

“⁠동의하시냐고⁠.⁠”

“⁠뭐에 동의하시냐고요⁠?⁠” 해주가 멍석에서 일어났다⁠. 무릎에 붉은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가 까닭을 말 안 하시면⁠, 그건 동의서가 아니라 부탁서예요⁠. 서른 해 이장 부탁을 할머니가 어떻게 거절해요⁠.⁠”

마루 끝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방 안에서 오순 할머니의 목소리가 났다⁠.

“⁠나는 그런 거 몰러⁠.⁠”

“⁠아지매⁠, 지장 하나만 찍어 주셔유⁠.⁠”

“⁠몰러⁠. 이장이 알면 이장이 혀⁠.⁠”

방문이 닫혔다⁠. 해주가 아버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아버지⁠, 배추밭 왜 낮아요⁠? 저한테만이라도요⁠.⁠”

상춘은 서류철을 내려다보았다⁠. 일곱 장⁠. 마흔넷까지 서른일곱 장이 모자랐다⁠. 이틀 동안 서른일곱 집 대문 앞에서 같은 물음을 듣게 될 것이었다⁠. 상춘은 서류철을 덮었다⁠.

“⁠재동의 안 받을 거여⁠.⁠”

“⁠그럼 반환금은요⁠?⁠”

“⁠내가 낼 거여⁠.⁠”

해주가 아버지를 보았다⁠. 상춘은 딸의 눈을 피해 고추 멍석을 보았다⁠. 덜 마른 고추 몇 개가 뒤집히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상춘은 장화를 신은 채 멍석 가에 쪼그려 앉아 고추를 하나씩 뒤집었다⁠. 해주가 옆에 쪼그려 앉아 함께 뒤집었다⁠. 둘은 멍석 끝에 닿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오후 두 시⁠, 회관 노인회 방 텔레비전에 국회 토론회 생중계가 떴다⁠. 하소연 시간이 닫힌 뒤로 노트북은 덮인 채 탁자 구석에 있었다⁠. 할머니들과 길장수가 아랫목에 모여 앉았고⁠, 상춘은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국회 회의실 긴 탁자에 의원 둘과 들마루랩 이사⁠, 그리고 형식이 앉아 있었다⁠. 형식은 금요일 생방송 때와 같은 와이셔츠를 입었다⁠. 깃이 이번에는 젖어 있지 않았다⁠.

들마루랩 이사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매끈한 회색 정장이었다⁠.

“⁠버드내의 실험은 대한민국 마을 행정의 미래를 보여 줍니다⁠. 저희는 마을이를 전국 삼만여 마을에 보급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특히 버드내 어르신들과 나눈 삼 년 치 대화 자료는 다른 어디에도 없는 귀중한 학습 자원입니다⁠.⁠”

“⁠학습 자원이 뭐여⁠.⁠” 덕님 할머니가 물었다⁠.

“⁠우리 하소연이유⁠.⁠” 옥련이 대답했다⁠. 옥련은 언제 들어왔는지 방 구석에 앉아 있었다⁠.

진행하는 의원이 형식에게 발언을 넘겼다⁠. 형식이 마이크를 당겼다⁠. 손가락이 마이크 대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도형식입니다⁠. 마을이를 만들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형식이 이사를 보았다⁠. 이어서 카메라를 보았다⁠.

“⁠들마루랩의 투자는 받지 않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거절 메일을 보냈습니다⁠. 버드내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버드내 것입니다⁠. 하소연 녹음은 할머니들이 한 분씩 직접 들어 보시고⁠, 지울지 남길지 정하시게 하겠습니다⁠. 정하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못 엽니다⁠. 저도요⁠.⁠”

회관 안이 조용했다⁠. 텔레비전 속 국회 회의실도 조용했다⁠. 이사가 웃는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 했고⁠, 의원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법 얘기입니다⁠.⁠” 형식이 말을 이었다⁠. “⁠저는 이장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 오는 날 사람을 업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건 제 장인어른한테 배웠습니다⁠. 대신 이장이 못 들은 말을 듣는 도구는 있어야 합니다⁠. 서른 해 동안 아무도 안 들어 준 하소연이 버드내에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도 장인어른한테 배웠습니다⁠. 안 들어 주시는 걸 보고요⁠.⁠”

방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덕님 할머니가 보행기를 두드렸다⁠. 장수가 귀에 손을 대고 “⁠뭐랴⁠, 뭐랴⁠” 하고 물었다⁠. 상춘은 문지방에서 웃지 않았다⁠. 사위가 국회에서 장인 흉을 본 것인지 장인 편을 든 것인지 한참을 따져 보았다⁠. 따져 볼수록 둘 다였다⁠.

보급 법안을 준비한다는 다른 의원이 형식에게 물었다⁠.

“⁠투자를 거절하시면 마을이는 어떻게 운영합니까⁠? 서버 비용도 들 텐데요⁠.⁠”

“⁠버드내 사람들이 정하겠습니다⁠.⁠” 형식이 대답했다⁠. “⁠계속 두자고 하시면 회관 전기세처럼 마을 기금에서 내고⁠, 끄자고 하시면 끕니다⁠. 마을이는 버드내 회관 노트북입니다⁠. 국회에 올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장수가 이번에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국회에 올 물건이 아니었댜⁠. 맞는 말이여⁠. 노트북이 국회 가면 회관은 누가 지켜⁠.⁠”

텔레비전 화면 아래에 자막이 지나갔다⁠.

「⁠참고인 도형식 씨⁠, AI 회사 투자 공개 거절 … 고추 건조기 대출 상환 어쩌나⁠」

“⁠저 자막은 누가 쓴 거여⁠.⁠” 옥련이 말했다⁠. “⁠남의 집 대출을⁠.⁠”

*

밤 아홉 시⁠, 상춘이 마당 평상에서 공문을 다시 읽고 있었다⁠. 반환 기한⁠, 반환 계좌⁠, 반환 금액⁠. 옥련이 안방에서 나왔다⁠. 손에 비닐로 싼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옥련이 평상 위에 비닐을 내려놓고 풀었다⁠. 낡은 통장 묶음이 나왔다⁠. 맨 위 통장 겉장에 옥련의 글씨가 있었다⁠.

「⁠이장 월급⁠」

“⁠이게 뭐여⁠.⁠”

“⁠당신 수당⁠. 서른 해 치⁠.⁠”

상춘이 통장을 펼쳤다⁠. 첫 장 첫 줄이 1997년이었다⁠. 처음 몇 해는 한 달에 몇만 원이었다⁠. 해가 갈수록 줄의 숫자가 조금씩 커졌다⁠. 찾아 쓴 줄은 한 줄도 없었다⁠. 묶음 맨 아래 새 통장 마지막 줄에 이천구백만 원이 조금 넘는 잔액이 찍혀 있었다⁠.

“⁠당신이 이거 다 모았어⁠?⁠”

“⁠당신은 수당이 들어오는지도 몰랐잖여⁠. 남의 집 일 하고 받은 돈이라 나는 손 못 대겄더라⁠. 칠순에 제주도나 가려고 했지⁠.⁠”

“⁠그럼 칠순에 가⁠.⁠”

“⁠반환금 내⁠.⁠” 옥련이 통장을 상춘 쪽으로 밀었다⁠. “⁠당신 서른 해 품삯으로 당신 서른 해 일한 마을에 갚는 거여⁠. 남의 돈 아니니께 떳떳하잖여⁠.⁠”

상춘은 통장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종이가 얇고 부드러웠다⁠. 서른 해 동안 옥련이 장롱 깊은 곳에서 몇 번이나 꺼내 보았을지 상춘은 알 수 없었다⁠.

“⁠대신 하나만 혀⁠.⁠” 옥련이 말했다⁠. “⁠까닭 말혀⁠. 마을에 안 하면 나한테라도⁠.⁠”

상춘은 통장을 덮은 손을 오래 떼지 않았다⁠. 마당 너머로 아랫들이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2017년에 물이 아랫말로 들어온 길이 있어⁠.⁠” 상춘이 말했다⁠. “⁠회관 골목에서 내려와서 오순 아지매 집 담을 치고 들어왔어⁠. 그 길을 배수로로 막고 수문까지 끌어간 거여⁠. 달천이 불어서 수문을 닫으면 물이 갈 데가 없어⁠. 그럼 아랫들에서 제일 낮은 데로 가⁠. 내 배추밭이여⁠. 그래서 낮췄어⁠. 집 대신 밭이 받으라고⁠.⁠”

옥련은 놀라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말을 왜 안 혀⁠.⁠”

“⁠말하면 다들 고맙다고 할 거 아녀⁠. 고맙다는 소리 들으려고 낮춘 거 아녀⁠.⁠”

“⁠그게 당신 병이여⁠.⁠”

옥련이 평상에서 일어났다⁠. 안방 텔레비전에서 밤 뉴스의 날씨 예보가 들려왔다⁠.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마당까지 새어 나왔다⁠.

「⁠금요일 충청 내륙에 많은 비 예상 … 11월로는 이례적인 호우⁠, 하천 주변 주의⁠」

상춘은 통장 묶음을 비닐에 도로 싸서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손전등을 들고 아랫들로 내려갔다⁠. 수문 손잡이에는 오늘도 기름이 넉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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