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21자)

동점이면 나이 많은 사람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모세담

2027년 11월 5일 금요일 밤 여덟 시⁠, 버드내 아랫말 끝집 대문 앞⁠. 상춘은 대문에 손바닥을 댄 채 물에 잠긴 장화를 내려다보았다⁠. 문턱 밑의 물이 장화 목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뒤에서 해주가 다시 대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었고⁠, 상춘이 고개를 저었다⁠. 해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지매⁠.⁠”

대문 너머에서 대답이 없었다⁠.

“⁠아지매⁠, 지가 말 안 한 게 있슈⁠.⁠”

빗소리가 대문 판자를 두드렸다⁠. 상춘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2017년에 물이 회관 골목에서 내려와서 아지매 집 담을 치고 들어왔슈⁠. 그래서 배수로를 내서 물길을 아랫들로 돌렸슈⁠. 수문 닫으면 물이 지 배추밭으로 가게⁠, 밭을 낮췄슈⁠. 아지매 집 대신 지 밭이 받으라구유⁠. 그 얘기를 아무한테도 안 혔슈⁠. 아지매 이름 쓸 때도 안 혔슈⁠.⁠”

대문 너머에서 고무신 끄는 소리가 났다가 멎었다⁠.

“⁠근디 오늘은 배추밭이 다 찼슈⁠. 이제 물이 아지매 집으로 와유⁠. 그래서 물어보는 거유⁠.⁠”

상춘은 대문에서 손을 뗐다⁠.

“⁠업혀 주시겄슈⁠?⁠”

한동안 빗소리뿐이었다⁠. 형식이 손전등을 아래로 내렸다⁠. 해주는 우비 소매로 얼굴의 빗물을 닦았다⁠. 경운기 짐칸의 비닐 속에서 노트북 화면이 희미하게 빛났다⁠. 마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장 빠지는 소리가 났다⁠. 대문이 반쯤 열렸다⁠. 오순 할머니가 털 조끼 위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손에 휴대전화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물어보니께 업혀 주지⁠.⁠”

상춘이 등을 돌리고 쪼그려 앉았다⁠. 할머니가 상춘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가벼웠다⁠. 2017년보다 더 가벼웠다⁠. 상춘은 할머니를 업고 일어나 물을 헤치며 경운기로 걸었다⁠. 형식이 앞에서 손전등을 비췄고⁠, 해주가 할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들고 뒤따랐다⁠. 나머지 한 짝은 할머니 발에서 벗겨져 물에 떠내려갔다⁠.

“⁠니 등이 2017년보다 굽었다⁠.⁠” 할머니가 상춘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아지매도 가벼워지셨슈⁠.⁠”

“⁠니 거짓말도 늘었어⁠. 우리 아들이 김장 때 온다고 혔지⁠?⁠”

상춘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문자에 그런 말 없었지⁠?⁠”

“⁠…⁠…없었슈⁠.⁠”

“⁠알어⁠. 니 거짓말은 서른 해 들어서 알어⁠.⁠” 할머니가 상춘의 어깨를 꽉 쥐었다⁠. “⁠다음엔 있는 그대로 읽어⁠. 서운한 건 내가 서운혀⁠.⁠”

*

밤 열 시⁠, 회관은 발전기 소리와 코 고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순 할머니는 마른 내복으로 갈아입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해주가 할머니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마을이⁠, 우리 아들 문자 읽어 봐⁠. 있는 그대로⁠.⁠”

“⁠「⁠엄마 뉴스 봤어요⁠. 괜찮아요⁠? 내일 첫차 타고 갈게요⁠. 공장엔 말했어요⁠.⁠」 이게 다유⁠. 한 글자도 안 뺐슈⁠.⁠”

할머니가 휴대전화를 품에 넣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요를 턱 밑까지 끌어 올렸다⁠.

이불 사이를 지나가던 상춘을 덕님 할머니가 붙잡았다⁠. 할머니 셋이 이불 위에 나란히 앉아 상춘을 올려다보았다⁠.

“⁠형식이한테 다 들었어⁠. 배추밭 얘기⁠.⁠” 덕님 할머니가 말했다⁠. “⁠고맙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말 안 했다며⁠?⁠”

“⁠그런 거 아니유⁠.⁠”

“⁠그럼 받어⁠. 고마워⁠.⁠”

“⁠예⁠.⁠”

“⁠예 말고⁠. 받었다고 혀⁠.⁠”

상춘은 이불 끝에 선 채로 할머니들을 내려다보았다⁠. 서른 해 동안 받은 박수는 많았는데⁠, 고맙다는 말을 얼굴을 보고 받아 본 적은 없었다⁠. 받는 법을 몰라서 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고맙다는 말⁠, 고맙슈⁠.⁠”

할머니들이 이불을 두드리며 웃었다⁠. 옆에서 자던 할아버지 하나가 “⁠조용히 좀 혀⁠!⁠” 하고 돌아누웠다⁠.

*

이튿날 아침 아홉 시⁠, 버드내 마을회관⁠. 비는 새벽 네 시에 그쳤다⁠. 전기는 일곱 시에 다시 들어왔다⁠. 회관 노인회 방에는 밤새 대피한 사람들의 이불이 한쪽 벽에 개어져 있었고⁠, 부엌에서 옥련과 할머니들이 끓인 시래깃국 냄새가 났다⁠. 윤 씨 할아버지의 산소 기계가 구석에서 낮게 바람 소리를 냈다⁠.

여덟 시에 상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군 감사팀장이었다⁠.

“⁠어젯밤 소식 들었습니다⁠. 이장님⁠, 배추밭 높이⁠, 이제 의견서에 써도 되겠습니까⁠?⁠”

“⁠쓰셔유⁠. 이제 다 알어유⁠.⁠”

“⁠염 주무관님 일은 경위를 같이 적겠습니다⁠. 징계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요⁠.⁠”

“⁠그건 해주가 받을 거유⁠. 지가 대신 못 받어유⁠.⁠”

감사팀장이 잠깐 말이 없다가 전화를 끊었다⁠. 회관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나왔다⁠. 정전된 마을을 경운기 확성기로 돌며 주민을 모두 대피시켰다는 소식이었고⁠, 화면 아래로 외국 통신사 기사 제목을 옮긴 자막이 흘렀다⁠. 「⁠한국 산골 마을⁠, 인공지능 후보와 예순일곱 살 이장이 경운기 하나로 마을을 지켰다⁠」⁠.

“⁠예순일곱 살은 왜 넣어⁠.⁠” 상춘이 말했다⁠.

“⁠세 살은 안 넣었네⁠.⁠” 옥련이 말했다⁠.

방 한가운데에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빌려 온 투표함과 기표대가 놓였다⁠. 투표함은 은색 플라스틱이었고⁠, 앞면에 「⁠괴산군선거관리위원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장수가 투표함 앞에 앉아 돋보기를 걸쳤다⁠.

“⁠아아⁠, 지금부터 버드내 마을총회를 시작해유⁠. 투표 전에 후보 한 분씩 한마디만 허셔유⁠. 토마토는 없슈⁠. 어제 물에 떠내려갔슈⁠.⁠”

할머니들이 웃었다⁠. 마을이가 먼저였다⁠. 노트북 화면 가장자리에 마른 흙탕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호 2번 마을이유⁠. 지는 업지를 못 혀유⁠. 어제 그걸 알았슈⁠. 근디 누가 업혀야 하는지는 알어유⁠. 그것도 어제 알았슈⁠. 하소연은 계속 들을게유⁠. 녹음은 안 하구유⁠. 오늘 칠성면 맑음⁠, 최고 기온 14도⁠. 배추 말리기 좋은 날이유⁠.⁠”

“⁠배추는 다 잠겼어⁠.⁠” 덕님 할머니가 말했다⁠.

“⁠그래서 말리기 좋은 날이라구유⁠.⁠”

상춘이 일어났다⁠. 밀짚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밤새 젖었다 마른 모자 챙이 물결처럼 울었다⁠.

“⁠염상춘이유⁠. 배추밭 얘기는 어젯밤에 다들 보셨을 거유⁠. 서른 해 동안 말 안 하고 혼자 정했슈⁠. 그게 지 잘못이유⁠. 이번엔 말허고 찍으시라고 일어났슈⁠. 그게 다유⁠.⁠”

상춘이 앉았다⁠. 장수가 토마토 대신 손목시계를 보았다⁠.

“⁠일 분도 안 걸렸네⁠. 서른 해 만에 처음이여⁠.⁠”

*

예순여섯 명 가운데 예순네 명이 기표대에 들어갔다 나왔다⁠. 두 사람은 서울에 있었다⁠. 오순 할머니는 해주의 부축을 받아 기표대에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다⁠. 투표함 뚜껑이 열리고⁠, 장수가 한 장씩 꺼내 소리 내어 읽었다⁠. 해주와 형식이 나란히 앉아 바를 정 자를 그었다⁠. 형식이 해주의 손등에 묻은 인주를 엄지로 닦아 주었다⁠. 해주는 손을 빼지 않았다⁠.

“⁠기호 1번⁠. 기호 2번⁠. 기호 2번⁠. 기호 1번⁠…⁠…⁠”

방 안이 숨을 죽였다⁠. 바를 정 자가 양쪽으로 비슷하게 늘어났다⁠. 마지막 몇 장이 남았을 때 장수가 종이 하나를 들어 돋보기에 바싹 댔다⁠.

“⁠이건 무효여⁠. 동그라미 대신 경운기를 그렸어⁠.⁠”

방 안에 웃음이 터졌다⁠. 누가 그렸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장수가 다음 종이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것도 무효여⁠. 둘 다 찍었어⁠. 지장으로⁠.⁠”

방 한쪽에서 오순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그거 내 거여⁠.⁠”

“⁠아지매⁠, 하나만 찍어야 혀유⁠.⁠”

“⁠둘 다 쓸모 있어서 둘 다 찍었어⁠. 하나는 업고⁠, 하나는 들어 주고⁠. 그게 왜 무효여⁠?⁠”

장수가 대답을 못 하고 종이를 무효 더미에 내려놓았다⁠. 마지막 장을 읽었다⁠. 해주와 형식이 바를 정 자를 세었다⁠. 형식이 한 번 더 세었다⁠. 해주가 형식의 종이를 받아 다시 세었다⁠.

“⁠기호 1번 서른하나⁠. 기호 2번 서른하나⁠. 무효 둘⁠.⁠”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시래깃국 끓는 소리만 부엌에서 났다⁠. 장수가 누런 공책을 꺼내 펼쳤다⁠. 「⁠버드내 마을 규약 1994⁠」⁠.

“⁠규약 칠조⁠. 표가 같으면 나이 많은 사람으로 한다⁠.⁠”

“⁠기계 나이를 어떻게 세⁠?⁠” 문 앞의 할아버지가 물었다⁠.

모두가 형식을 보았다⁠. 형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주가 남편의 소매를 잡았다가 놓았다⁠.

“⁠회관에 들어온 날부터 세면 2024년 9월이에요⁠. 세 살이에요⁠.⁠” 형식이 말했다⁠. “⁠규약대로 하죠⁠. 장인어른이 이장이세요⁠.⁠”

“⁠도 서방⁠, 니가 그래도 돼⁠?⁠” 덕님 할머니가 물었다⁠. “⁠니 후보잖여⁠.⁠”

“⁠규약이 있으니까 규약대로 하자고 여기까지 왔어요⁠. 저한테 불리하다고 안 지키면⁠, 장인어른이 동의서 쓰신 거랑 똑같아져요⁠.⁠”

노트북에서 마을이가 말했다⁠.

“⁠지는 세 살 맞슈⁠. 축하드려유⁠, 염상춘 이장님⁠. 그리고 오늘 처음 졌으니께⁠, 이것도 지가 다 들었슈⁠.⁠”

*

박수가 나오기 전에 상춘이 다시 일어났다⁠.

“⁠하나만 정하고 박수 쳐유⁠.⁠”

사람들이 손을 내렸다⁠.

“⁠아랫들 지 배추밭⁠, 마을 물받이로 내놓을까 허는디유⁠. 군에 정식으로 사업 신청해서 둑도 높이고⁠, 수문도 하나 더 달고⁠. 대신 이번엔 지 혼자 안 정해유⁠. 다음 주 토요일 총회에서 다들 정해 주셔유⁠. 까닭은 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할 거유⁠. 시간 오래 걸려유⁠. 토마토 사 와유⁠, 형님⁠.⁠”

장수가 돋보기를 벗었다⁠.

“⁠토마토 두 개 사 올게⁠.⁠”

박수가 터졌다⁠. 덕님 할머니가 보행기를 두드렸고⁠, 윤 씨 할아버지가 산소 줄을 낀 채 손뼉을 쳤다⁠. 오순 할머니는 손뼉을 치지 않고 상춘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옥련이 부엌 문간에서 국자를 든 채 서 있다가 상춘과 눈이 마주치자 돌아서서 국을 저었다⁠.

사람들이 흩어질 때 해주가 아버지 앞으로 왔다⁠. 손등에 아직 인주가 조금 남아 있었다⁠.

“⁠아버지⁠, 저 징계 끝나면 이장 업무 다시 맡겠다고 할 거예요⁠. 버드내 서류는 제가 제일 깐깐하게 볼 거예요⁠. 동의서는 한 장씩 할머니들 앞에서 받을 거고요⁠.⁠”

“⁠그려⁠.⁠” 상춘이 말했다⁠. “⁠장하다⁠.⁠”

해주가 웃었다⁠. 생방송 뒤로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웃다가 아버지 조끼의 해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고⁠, 다음 달 월급날에는 진짜로 새 조끼를 입히겠다고 말했다⁠.

*

정오가 지나 상춘은 경운기를 몰고 아랫들로 내려갔다⁠. 형식이 짐칸에 타고 있었다⁠. 짐칸 볏짚 위에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형식이 물이 빠지는 높이를 마을이에게 재게 해서 군에 낼 자료로 쓰자고 했고⁠, 상춘은 처음으로 그러자고 했다⁠.

“⁠장인어른⁠.⁠” 형식이 짐칸에서 말했다⁠. “⁠점심은 저희 집에서 드세요⁠. 된장찌개요⁠. 지난번엔 못 드셨잖아요⁠.⁠”

“⁠니가 끓여⁠?⁠”

“⁠해주가 끓이면 짜요⁠.⁠”

“⁠그건 니 장모 닮은 거여⁠.⁠”

둑에 경운기를 세웠다⁠. 배추밭은 흙탕물이 무릎 높이로 고여 있었다⁠. 김장 배추 삼천 포기가 퍼런 잎을 물 위로 내밀고 있었고⁠, 몇 포기는 뿌리째 뽑혀 물에 둥둥 떠 있었다⁠. 아랫말 집들 담장 밑은 말라 있었다⁠.

상춘은 밀짚모자를 고쳐 쓰고 장화를 신은 채 배추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흙탕물이 장화 목을 넘어 차갑게 스며들었다⁠. 떠다니는 배추 한 포기를 건져 둑 위로 던졌다⁠. 형식이 받았다⁠. 다음 포기를 던지고⁠, 형식이 받았다⁠. 짐칸의 노트북 화면에서 하늘색 얼굴이 물 높이를 재며 숫자를 불렀고⁠, 숫자 끝마다 오늘 날씨가 좋다는 말을 붙였다⁠. 회관 지붕에서 확성기가 지직거렸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장수의 목소리가 젖은 들판 위로 길게 깔렸고⁠, 상춘은 다음 배추를 건지려고 허리를 굽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