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93자)

1순위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8월 둘째 주 화요일⁠, 덕아웃 화면에 라인업이 올라왔을 때 맨 먼저 소리를 낸 것은 의찬이었다⁠.

“⁠어⁠? 어어⁠?⁠”

대타 후보 줄 맨 위에 우철의 이름이 있었다⁠.

「⁠1⁠. 배우철 · 기대 출루 0⁠.41 · 대타 권장⁠」 「⁠2⁠. 도의찬 · 기대 출루 0⁠.33⁠」

“⁠선배님⁠, 갑자기 회춘하셨어요⁠? 0⁠.08에서 0⁠.41이요⁠? 무슨 영양제 드세요⁠?⁠”

“⁠얼음⁠.⁠”

“⁠얼음이요⁠?⁠”

“⁠냉동실에 있는 거⁠.⁠”

고참들이 웃었다⁠. 고참 포수가 우철의 어깨를 주물렀다⁠. “⁠항로 형님이 드디어 철 들었네⁠.⁠” 덕아웃 분위기가 가벼웠다⁠. 우철만 웃음이 늦게 나왔다⁠. 화면 아래 접이식 의자에서 석배가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석배는 화면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태블릿만 보았다⁠.

7회 말⁠, 2 대 2 동점에 1사 2루⁠. 상대는 달구벌 버팔로즈였고⁠, 마운드에는 오른손 투수가 있었다⁠. 공이 빠르고 무거운 투수였다⁠. 화면이 깜박였다⁠.

“⁠대타⁠, 배우철⁠.⁠”

전광판에 이름이 뜨자 관중석이 일어났다⁠. 「⁠항로의 선택⁠」이라는 글자가 전광판 아래에 같이 떴다⁠. 청람이 넣게 한 글자였다⁠.

우철은 타석에 들어가 눈을 반쯤 감았다⁠. 미트 소리를 기다렸다⁠. 첫 공이 꽂혔다⁠. 탕⁠. 맑았다⁠. 투수는 지치지 않았다⁠. 두 번째 공도 탕⁠. 숨소리도⁠, 발 끄는 소리도 없었다⁠. 포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포수였다⁠. 우철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세 번째 공에 우철은 그냥 배트를 냈다⁠. 빠른 공이 오리라고 믿고 낸 배트였다⁠. 공은 빠른 공이었다⁠. 배트 끝에 빗맞은 공이 1루수 머리를 넘어 우익선 안쪽에 툭 떨어졌다⁠. 2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3 대 2⁠. 「⁠배우철 대타 통산 102호 안타⁠」

관중석이 터졌고 1루 위의 우철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우철은 헬멧을 벗어 관중석에 들어 보였다⁠. 오른쪽 팔꿈치 안쪽이 시큰했다⁠. 반만 휘둘렀는데도 시큰했다⁠. 헬멧을 든 손이 조금 떨렸다⁠. 덕아웃을 보니 화면에 짧은 글자가 떠 있었다⁠. 「⁠대타 결과 예측대로 · 항로 기여⁠」

해무가 3 대 2로 이겼다⁠. 경기 뒤 숏폼에 영상이 돌았다⁠. 제목은 「⁠항로가 또 골랐다⁠」였다⁠.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역시 AI⁠」⁠, 「⁠이 아재 요즘 폼 미쳤다⁠」⁠, 「⁠빗맞은 거 아님⁠?⁠」 우철은 마지막 댓글을 오래 보았다⁠.

*

수요일과 목요일에도 화면 맨 위는 우철이었다⁠. 수요일 8회에는 몸쪽 공에 배트가 밀려 2루 땅볼을 쳤고⁠, 목요일 9회에는 바깥쪽 슬라이더 셋에 삼진을 당했다⁠. 두 번 다 미트 소리가 맑았다⁠. 두 번 다 우철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화면은 두 번 다 같은 글자를 띄웠다⁠. 「⁠대타 선택 적절 · 결과 불운⁠」

목요일 경기 전에는 청람 부사장이 덕아웃에 내려왔다⁠. 회색 운동화 끈을 새것으로 바꿔 매고 있었다⁠. 부사장은 우철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선수님⁠, 요즘 너무 좋습니다⁠. 광고 2편 찍어야겠어요⁠. 이번엔 대사 없이 가죠⁠. 화면 한 번 올려다보고 웃기만 하시면 돼요⁠.⁠”

“⁠웃는 것도 대사입니다⁠.⁠”

“⁠하하⁠, 역시 말씀을 잘하셔⁠.⁠”

부사장이 화면 앞에서 휴대전화로 셀카를 찍었다⁠. 우철의 이름이 맨 위에 걸린 화면이 배경으로 들어가게 각도를 맞췄다⁠. 석배가 태블릿을 들고 부사장 뒤를 지나가다가 걸음을 늦췄다⁠. 부사장은 석배를 보지 못했다⁠.

목요일 밤 「⁠연안부두 늙은 갈매기들⁠」 단톡방은 조용했다⁠. 조용하다가 누가 한 줄을 올렸다⁠.

「⁠배대타 요즘 숫자만 1등⁠」

아래로 아무도 답을 달지 않았다⁠. 한참 뒤에 한 줄이 더 올라왔다⁠.

「⁠그래도 나가는 게 어디냐 작년엔 맨날 앉아만 있었는데⁠」

다시 한참 뒤에 한 줄⁠.

「⁠앉아 있을 때가 더 무서웠지 그 아재는⁠」

*

금요일 아침⁠, 부평의 작은 정형외과는 접수대 옆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우철은 모자를 눌러쓰고 구석 의자에 앉았다⁠. 구단 지정 병원이 아니라 지난겨울 혼자 찾아온 병원이었다⁠. 대기실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뉴스가 지나갔다⁠. 「⁠해무 배우철⁠, AI 선택에 응답 … 대타 통산 리그 최다까지 두 개⁠」

진료실 의사는 쉰 살쯤 된 여자였다⁠. 모니터에 흑백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띄웠다⁠. 지난겨울 사진과 오늘 아침 찍은 사진이었다⁠.

“⁠여기 하얀 줄 보이시죠⁠? 인대예요⁠. 겨울엔 반쯤 찢어져 있었고⁠, 지금은 실 몇 가닥으로 붙어 있어요⁠.⁠”

의사가 볼펜 끝으로 사진의 가는 줄을 짚었다⁠. 겨울 사진보다 줄이 가늘었다⁠.

“⁠화요일에 공 치셨죠⁠? 뉴스 봤어요⁠. 그런 거 계속하시면⁠, 끝까지 크게 한 번 휘두르시는 날 끊어져요⁠. 끊어지면 수술해도 공 던지기가 어려워요⁠. 아이랑 캐치볼도요⁠.⁠”

“⁠반만 휘두르면요⁠?⁠”

“⁠반만 휘두르는 타자가 있어요⁠?⁠”

우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의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사모님은 아세요⁠?⁠”

“⁠모릅니다⁠.⁠”

“⁠아셔야 돼요⁠. 끊어지는 날 응급실에서 아시면 안 돼요⁠.⁠”

진료실을 나오는데 접수대 직원이 수줍게 종이를 내밀었다⁠. 사인 한 장만 해 달라고 했다⁠. 아들이 리틀야구를 한다고 했다⁠. 우철은 오른손으로 펜을 쥐었다가 왼손으로 바꿨다⁠. 왼손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직원이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

금요일 오후 영상 분석실 에어컨은 여전히 너무 셌다⁠. 석배가 문을 잠그고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번처럼 바닥에 쪼그려 앉지 않고 모니터 앞 의자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형⁠, 덮었어요⁠. 형 말대로⁠. 그런데 덮개 안은 매일 밤 새로 채워져요⁠. 상자가 기록을 받아 오니까⁠. 저는 그냥 들여다만 봤어요⁠.⁠”

석배가 화면을 돌렸다⁠.

「⁠수정 기록 · 2032년 8월 2일 오전 10⁠:12⁠」 「⁠수정자⁠: 단장실 계정⁠」 「⁠개별 보정 추가⁠: 배우철 · 대타 기대 출루 가산⁠」 「⁠적용 판⁠: 항로 3⁠.2⁠」

“⁠8월 2일 오전 열 시⁠. 형이 거래 받고 단장실 나온 지 한 시간 뒤예요⁠.⁠”

우철은 화면의 날짜를 보았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에어컨 바람이 닿자 금세 식었다⁠.

“⁠나만 올렸다고⁠?⁠”

“⁠형만요⁠. 다른 고참들은 그대로예요⁠. 나이 보정도 연봉 부담도 그대로 두고⁠, 형 이름 옆에만 숫자를 붙였어요⁠. 마지막 타석까지 형이 항로 선택으로 나가게요⁠. 그래야 청람 광고도 되고⁠, 이사회 구단주들한테도 ‘⁠봐라⁠, AI가 베테랑도 챙긴다⁠’가 되니까⁠.⁠”

석배가 한 줄을 더 띄웠다⁠. 오늘 오후에 생긴 기록이었다⁠.

「⁠1군 등록 조정 제안 · 항로 3⁠.2⁠」 「⁠도의찬 · 대타 역할 중복 · 2군 이동 권장⁠」

“⁠형이 1순위로 올라가니까 의찬이가 할 일이 없어진 거예요⁠. 항로는 같은 자리에 두 명 안 둬요⁠. 오늘 저녁에 통보한대요⁠.⁠”

우철은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오른손으로 잡았다가 팔꿈치가 찌릿해서 놓았다⁠.

“⁠화요일 그 안타⁠. 나 아무것도 못 들었다⁠. 그냥 냈어⁠.⁠”

“⁠알아요⁠. 형 어깨 보고 알았어요⁠. 듣고 칠 때는 어깨가 먼저 내려가거든요⁠. 화요일엔 안 내려갔어요⁠.⁠”

*

라커룸에서 의찬이 가방을 싸고 있었다⁠. 스파이크를 비닐봉지에 넣고⁠, 사물함 안쪽에 붙여 둔 사진을 떼고 있었다⁠. 의찬이 처음 1군에 올라온 날 덕아웃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귀퉁이에 우철의 어깨가 반쯤 찍혀 있었다⁠.

“⁠선배님⁠.⁠”

의찬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테이프를 떼는 소리가 찍⁠, 찍 났다⁠.

“⁠저 2군 간대요⁠. 열흘이래요⁠. 역할 중복이래요⁠.⁠”

“⁠들었다⁠.⁠”

“⁠선배님 때문에요⁠.⁠”

우철은 의찬의 사물함 옆으로 갔다⁠. 할 말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의찬이 사진을 다 떼어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제야 돌아보았다⁠. 눈이 빨갰지만 울지는 않았다⁠.

“⁠저 선배님한테 혀 차는 소리 배웠잖아요⁠. 부산에서요⁠. 그걸로 선배님 자리 뺏으면 안 되는 거예요⁠?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배운 사람이 자리 뺏는 거⁠.⁠”

“⁠원래 그런 거 맞다⁠.⁠”

“⁠근데 왜 제가 내려가요⁠? 선배님이 숫자가 올라서요⁠? 갑자기 0⁠.41이 돼서요⁠?⁠”

의찬이 가방 지퍼를 올렸다⁠. 지퍼가 중간에 걸려서 몇 번을 다시 당겼다⁠.

“⁠저 그 숫자 못 믿어요⁠, 선배님⁠. 화요일 그 안타 빗맞은 거 저 봤어요⁠. 선배님이 듣고 친 거면 저는 백 번이라도 내려가요⁠. 근데 화요일엔 아니었잖아요⁠.⁠”

의찬이 가방을 메고 라커룸을 나갔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틈으로 복도의 형광등 소리가 들어왔다가 끊겼다⁠.

*

단장실 유리창 너머로 해가 기울었다⁠. 그라운드에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세겸은 창가 탁자에서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빨랐다⁠.

“⁠제 숫자 올리셨죠⁠.⁠”

세겸이 펜을 멈추지 않았다⁠.

“⁠네⁠. 약속을 지키려면 숫자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타석까지 몇 번 더 나가셔야 하고⁠, 그게 다 항로가 고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청람도 좋고 이사회도 좋습니다⁠.⁠”

“⁠의찬이가 내려갔습니다⁠.⁠”

“⁠열흘입니다⁠. 9월 엔트리 늘어나면 올라옵니다⁠. 신인한테 열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찬이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던데요⁠.⁠”

세겸이 펜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우철을 올려다보았다⁠.

“⁠배 선수님⁠, 지난주에 거래하셨습니다⁠. 이게 거래의 모양입니다⁠. 누가 하나 올라가면 누가 하나 내려갑니다⁠. 선수님이 3루에서 대타로 내려갔을 때⁠, 누가 3루로 올라갔는지 기억하십니까⁠?⁠”

우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이 났다⁠. 스물세 살짜리 내야수였다⁠. 이름도 기억났다⁠. 지금은 다른 구단 2군 코치였다⁠.

“⁠저는 기억합니다⁠. 숫자는 다 기억하니까요⁠.⁠”

“⁠거래⁠, 무르겠습니다⁠.⁠”

세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르시면 10월 2일 타석은 없습니다⁠. 해설 계약도 없습니다⁠. 탄우 군 시구도 없던 일입니다⁠. 위 코치님은 청람 장비에 무단으로 들어간 계약 위반입니다⁠. 선수님 숫자는 오늘 밤 원래대로 내려갑니다⁠. 0⁠.08로요⁠.⁠”

“⁠알겠습니다⁠.⁠”

“⁠다 아시고 하는 말씀입니까⁠?⁠”

“⁠0⁠.08이 원래 제 숫자는 아니잖아요⁠. 원래 제 숫자는 단장님이 3월에 지우셨고요⁠.⁠”

세겸은 한참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조명탑에 내려앉으며 울었다⁠. 세겸이 펜을 다시 집었다⁠. 집기만 하고 쓰지 않았다⁠.

“⁠나가 보세요⁠.⁠”

*

밤 열 시⁠, 배팅장 문을 닫은 뒤 우철은 계산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었다⁠. 4번 기계 앞 바닥에 탄우가 흘린 기계 공 하나가 굴러다녔다⁠. 바닷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와 공을 조금씩 밀었다⁠.

석배는 신호가 한 번 가기도 전에 받았다⁠.

“⁠형⁠.⁠”

“⁠석배야⁠. 거래 물렀다⁠.⁠”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아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 작게 들렸다⁠. 석배 집 텔레비전 소리였다⁠.

“⁠그럼 단장님이 형 마지막 타석도⁠…⁠…⁠.⁠”

“⁠없대⁠. 다 없대⁠.⁠”

“⁠형⁠.⁠”

“⁠가져가⁠. 리그로⁠. 상자에 있는 거 전부⁠.⁠”

석배가 숨을 들이마셨다⁠. 길게⁠. 내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형⁠, 그거 넘기면 저 잘려요⁠. 청람이 소송 걸 거고요⁠. 와이프 다음 달이 예정일이에요⁠.⁠”

“⁠알아⁠.⁠”

“⁠아는데 저한테 시켜요⁠?⁠”

“⁠시키는 거 아니다⁠. 네가 고르는 거다⁠. 나는 내 거 골랐고⁠.⁠”

우철은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렸다⁠. 4번 기계 앞의 공이 바람에 밀려 계산대 밑까지 굴러왔다⁠. 우철은 허리를 숙여 왼손으로 공을 주웠다⁠. 실밥이 손가락에 닿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석배가 마침내 말했다⁠.

“⁠형⁠. 내일 경기 전에 덕아웃에서 봐요⁠. 카드 가지고 갈게요⁠.⁠”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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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묵현2026.11.01· 9화

    0.08에서 0.41로 오른 배우철 선수 숫자 보고 저도 「어어?」 했어요. AI가 왜 갑자기요?

    • 여오령작가2026.11.01

      숫자가 갑자기 오르면 누군가 손을 댄 거죠. 의찬 씨가 놀린 그 숫자가 이번 화부터 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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