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87자)

연봉 부담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불펜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경첩이 끼익 울고 복도 불빛이 끊겼다⁠. 남은 빛은 외야 비상등 하나였다⁠. 세겸은 불펜 투수들이 앉는 긴 의자에 정장 윗도리를 내려놓았지만 자신은 앉지 않았다⁠. 바닷물이 방파제를 치는 소리가 사이사이 끼어들었다⁠.

“⁠위 코치님⁠, 노트북 덮으셔도 됩니다⁠. 안 뺏습니다⁠.⁠”

석배는 노트북을 덮지 않았다⁠. 품에 더 꽉 안았다⁠.

“⁠단장님이 바꾸신 거 맞습니까⁠?⁠”

우철이 불펜 마운드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세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꾸라고 했습니다⁠. 청람 기술자가 손을 댔고요⁠. 3월 28일 밤 열한 시 사십삼 분⁠. 기록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왜요⁠?⁠”

“⁠숫자로 말씀드릴까요⁠, 사람으로 말씀드릴까요⁠?⁠”

“⁠둘 다요⁠.⁠”

세겸이 휴대전화를 열었다⁠. 화면을 우철 쪽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가 보면서 읽었다⁠.

“⁠해무해운 빚이 육천억입니다⁠. 채권단은 9월 30일까지 절반을 갚으라고 합니다⁠. 못 갚으면 법원으로 갑니다⁠. 회사를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습니다⁠. 남은 게 배 열 척이랑 이 구단입니다⁠. 배는 지금 시세가 바닥이라 팔면 손해만 납니다⁠. 구단은 팔면 돈이 됩니다⁠. 청람이 사겠다고 했고요⁠.⁠”

“⁠그거랑 나이 보정이 무슨 상관입니까⁠?⁠”

“⁠청람의 조건이 둘입니다⁠. 하나⁠, 7월 31일까지 선수단 연봉 총액을 지금의 칠 할로⁠. 오늘이 7월 31일이었죠⁠. 방금 자정이 지났으니 어제가 됐네요⁠. 둘⁠, 시즌 뒤 이사회에서 AI 단독 지휘안이 통과되면 오백억 원을 얹어 준다⁠. 첫째 조건은 맞췄습니다⁠. 곰 선배님⁠, 2군 셋⁠, 그리고 배 선수님 빼고 몇 분 더요⁠. 둘째는 10월 2일 저녁에 정해집니다⁠.⁠”

석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냥 단장님이 자르시면 되잖아요⁠. 왜 항로를 건드려요⁠?⁠”

세겸이 석배를 보았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화를 낼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더 단단했다⁠.

“⁠위 코치님⁠. 제가 곰 선배님을 자르면⁠, 내일 연안부두 횟집 사장님들이 저한테 회를 안 팝니다⁠. 해무가 인천에서 서른 해 버틴 건 그런 사람들 때문입니다⁠. 근데 항로가 자르면요⁠, 사람들은 시대가 잘랐다고 합니다⁠. 시대한테는 아무도 화를 못 냅니다⁠.⁠”

“⁠그래서 숫자 뒤에 숨으셨다고요⁠.⁠”

우철이 말했다⁠. 세겸이 고개를 저었다⁠.

“⁠숨은 게 아니라 숨겨 드린 겁니다⁠. 곰 선배님 방출 기사에 ‘⁠구단이 버렸다⁠’ 대신 ‘⁠AI가 판단했다⁠’가 붙으면⁠, 곰 선배님은 다른 구단에 코치로 가실 수 있습니다⁠. 구단이 버린 사람은 아무도 안 받아요⁠.⁠”

불펜 비상등이 지지직 깜박였다⁠. 세겸이 우철을 똑바로 보았다⁠.

“⁠배 선수님⁠. 10월 2일 마지막 홈경기에서 마지막 타석 드리겠습니다⁠. 8회든 9회든⁠, 경기가 어떻든 대타로 한 번⁠. 탄우 군 시구도 같은 날로 잡겠습니다⁠. 은퇴하시면 중계 해설 삼 년 계약이고⁠, 계약금으로 배팅장 대출 정리하실 수 있습니다⁠. 위 코치님 성과급 조건에서 사람 카드 경기 빼는 것도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이 기록은 여기서 끝입니다⁠. 위 코치님 계정으로 보신 것도⁠, 추 총괄님 사진도요⁠.⁠”

“⁠우리가 싫다고 하면요⁠?⁠”

“⁠그럼 저는 오늘 밤 이 상자를 청람에 돌려보냅니다⁠. 청람 장비니까요⁠. 위 코치님이 장비에 허락 없이 들어간 건 계약 위반이고요⁠. 그다음부터는 변호사들이 이야기합니다⁠.⁠”

세겸이 정장 윗도리를 집어 들었다⁠.

“⁠리그 대타 통산 최다가 백네 개입니다⁠. 배 선수님은 백한 개고요⁠. 마지막 타석에서 치시면 백두 개⁠. 기록은 못 깨시겠지만⁠, 아드님 앞에서 치실 수는 있습니다⁠.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 단장실에 계시겠습니다⁠.⁠”

세겸이 불펜 문을 열었다⁠. 복도 불빛이 다시 길게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면서 사라졌다⁠.

*

새벽 두 시⁠, 아파트 거실 불은 꺼져 있었다⁠. 우철은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다가 부엌 식탁 위의 작은 스탠드 불빛을 보았다⁠. 미강이 식탁에 앉아 배팅장 통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탄우는 방에서 자고 있었다⁠. 방문 너머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공짜 남편 왔어⁠?⁠”

“⁠안 잤어⁠?⁠”

“⁠이자 계산하느라⁠. 당신 공짜라는 기사 보니까 잠이 안 와⁠.⁠”

우철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오른팔을 식탁에 올리지 않고 무릎에 내려놓았다⁠. 미강의 눈이 식탁 아래로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단장이 거래하재⁠.⁠”

우철은 세겸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겼다⁠. 마지막 타석⁠, 탄우 시구⁠, 해설 삼 년⁠, 계약금⁠. 숫자 바뀐 기록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 듣고 나서 미강이 볼펜을 내려놓았다⁠.

“⁠받아⁠.⁠”

“⁠한 번은 생각해 봐야지⁠.⁠”

“⁠생각했어⁠. 당신이 말하는 동안⁠. 당신 말이 느리니까 생각할 시간이 넉넉하더라⁠.⁠”

“⁠대신 뭘 줘야 하는지는 안 물어봐⁠?⁠”

“⁠안 물어봐도 알아⁠. 당신 얼굴에 써 있어⁠. 입 다무는 거지⁠? 뭔지는 몰라도⁠.⁠”

우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강이 통장을 덮었다⁠.

“⁠당신 마지막 타석⁠. 탄우가 그거 보는 거⁠. 이자⁠. 해설 일 하면 팔 안 쓰고 말로 먹고사는 거⁠. 그게 다 들어 있잖아⁠. 다른 데서는 이거 한 개도 못 구해⁠.⁠”

“⁠곰 형은⁠? 2군 애들 셋은⁠?⁠”

“⁠그 사람들이 우리 이자 내 줘⁠?⁠”

미강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크지 않아서 더 또렷했다⁠. 우철은 식탁 모서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나무가 닳아 반들거렸다⁠.

“⁠당신 연애할 때는 남 걱정 같은 거 안 했잖아⁠. 마흔 돼서 왜 시작해⁠?⁠”

“⁠마흔 돼서 시작하면 안 돼⁠?⁠”

“⁠시작은 되는데 이자는 안 돼⁠.⁠”

우철이 웃었다⁠. 미강도 처음으로 웃었다⁠. 웃다가 미강이 일어나 냉동실 문을 열고 얼음 봉지를 꺼내 식탁에 던졌다⁠.

“⁠자기 전에 대⁠. 오른쪽⁠. 보호대 풀고⁠.⁠”

“⁠팔꿈치 괜찮아⁠.⁠”

“⁠나 바보 아니야⁠. 냉동실 얼음이 한 달에 두 봉지씩 없어져⁠. 탄우는 얼음 안 먹어⁠.⁠”

방문이 끼익 열렸다⁠. 탄우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반바지 차림에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반쯤 마시고 나서야 식탁의 아빠를 보았다⁠.

“⁠아빠⁠, 10월 2일에 나 시구해⁠?⁠”

우철은 미강을 보았다⁠. 미강이 어깨를 으쓱했다⁠.

“⁠단장님이 열두 시 반에 나한테도 전화했어⁠. 탄우가 화장실 가다 들었고⁠.⁠”

“⁠또 당신이 먼저야⁠?⁠”

“⁠당신은 늘 두 번째야⁠. 벤치에서도⁠.⁠”

탄우가 컵을 든 채 식탁 옆으로 왔다⁠.

“⁠시구하면 아빠가 받아⁠?⁠”

“⁠아빠는 포수 아니잖아⁠.⁠”

“⁠그럼 내가 던지고 아빠가 치면 안 돼⁠?⁠”

“⁠시구는 치는 거 아니야⁠. 치면 손님한테 실례야⁠.⁠”

탄우는 입을 삐죽 내밀고 컵을 싱크대에 넣었다⁠. 방으로 들어가다가 문틈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그럼 아빠는 그날 진짜로 쳐⁠. 시구 말고⁠.⁠”

방문이 닫혔다⁠. 우철은 닫힌 문을 보았다⁠. 문 아래 틈으로 새어 나오던 탄우 방의 작은 불빛이 꺼졌다⁠.

미강이 스탠드를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얼음 봉지가 식탁 위에서 조금씩 녹으며 비닐을 적셨다⁠.

*

새벽 다섯 시⁠, 우철은 잠을 포기하고 연안부두로 걸어 나갔다⁠. 바다 위로 하늘이 회색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어선 돛대 위에서 울었다⁠. 여객 터미널 앞에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버스 옆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현수막이 하나 펼쳐져 있었다⁠. 「⁠해무해운 싱가포르 선원 귀국을 환영합니다⁠」

버스 문이 열리고 햇볕에 그을린 남자들이 하나씩 내렸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도 있었다⁠. 가족들이 달려들었다⁠. 누가 울었고⁠, 누가 웃었고⁠, 아이 하나가 아빠 다리에 매달렸다⁠. 버스 엔진이 공회전하며 낮게 떨었다⁠.

선원 하나가 해무 마린스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 챙이 바닷바람에 하얗게 바래 있었다⁠. 선원이 터미널 가로등 밑의 우철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배대타⁠! 배대타 맞죠⁠?⁠”

“⁠네⁠.⁠”

“⁠배에서 라디오로 들었어요⁠! 개막전⁠! 9회 말 끝내기⁠! 기관실에서 다 같이 소리 질렀어요⁠. 싱가포르항에서요⁠. 배는 못 움직이는데 라디오는 됐거든요⁠.⁠”

선원이 우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바닥이 거칠고 기름 냄새가 났다⁠.

“⁠배가 팔려서 집에 왔어요⁠. 회사가 배를 팔았대요⁠. 우리 배를요⁠. 이제 일자리가 없어요⁠. 그래도 집에 왔어요⁠.⁠”

선원은 웃었다⁠. 웃는데 눈가가 젖어 있었다⁠. 뒤에서 아내가 선원의 팔을 끌었다⁠. 선원이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올해 끝까지 치세요⁠! 다음 배 탈 때까지 라디오로 들을게요⁠!⁠”

우철은 가로등 밑에서 한참 버스를 보았다⁠. 선원 스물두 명이 하나씩 가족의 차에 올라 흩어졌다⁠. 버스가 떠났다⁠. 빈 터미널 앞에 현수막만 바람에 펄럭였다⁠. 우철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선원의 기름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바지에 문질러도 냄새는 손금 사이에 끼어 빠지지 않았다⁠.

남은 배 열 척에도 저런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세겸이 단장실 유리창 너머로 매일 아침 내려다보는 바다 어딘가에서였다⁠.

*

아침 여덟 시 오십 분⁠, 단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세겸은 창가 탁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밤을 새운 얼굴이었다⁠. 셔츠는 어제 그대로였고⁠, 넥타이는 여전히 없었다⁠.

“⁠일찍 오셨네요⁠.⁠”

“⁠새벽에 연안부두에 갔었습니다⁠. 선원들이 돌아왔더군요⁠.⁠”

세겸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잔 받침에 닿는 소리가 짧았다⁠.

“⁠싱가포르 배요⁠. 제가 팔았습니다⁠. 지난주에⁠. 시세 바닥에서요⁠.⁠”

“⁠그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다던데요⁠.⁠”

“⁠압니다⁠. 그래서 구단을 비싸게 팔아야 합니다⁠. 그 돈으로 남은 열 척을 지킵니다⁠.⁠”

우철은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오른쪽 팔꿈치가 밤새 얼음을 댄 탓에 감각이 무뎠다⁠.

“⁠10월 2일⁠. 마지막 타석⁠. 진짜로 주십니까⁠?⁠”

“⁠드립니다⁠. 약속은 숫자보다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저는 숫자를 다 기억하는 사람이고요⁠.⁠”

“⁠받겠습니다⁠.⁠”

세겸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우철이 세겸의 손을 잡았다⁠. 세겸의 손이 차가웠다⁠. 커피 잔을 쥐고 있던 손인데도 차가웠다⁠.

“⁠위 코치님은요⁠?⁠”

“⁠제가 말하겠습니다⁠.⁠”

*

오후 네 시⁠, 덕아웃에는 아직 선수들이 내려오지 않았다⁠. 석배는 화면 아래 접이식 의자에 앉아 무릎에 노트북을 얹고 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안경 너머 눈이 붉었다⁠. 노트북 화면에 수정 기록이 그대로 떠 있었다⁠.

“⁠형⁠. 아침에 단장실 갔다 왔다면서요⁠.⁠”

“⁠응⁠.⁠”

“⁠뭐라고 했어요⁠?⁠”

우철은 벤치 끝 배트 걸이 옆에 앉았다⁠. 늘 앉는 자리였다⁠. 화면 팬 소리가 낮게 돌았다⁠.

“⁠석배야⁠. 덮자⁠.⁠”

석배가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 팬 소리만 났다⁠. 석배의 손가락이 노트북 모서리를 쥐었다 놓았다⁠.

“⁠형이 그 말을 해요⁠? 형이⁠?⁠”

“⁠응⁠. 내가⁠.⁠”

“⁠어제 불펜에서 그 숫자 보고도요⁠? 개막전에 항로가 형 골랐던 거 보고도요⁠?⁠”

“⁠선원들이 돌아왔더라⁠. 배가 팔려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석배의 목소리가 덕아웃 지붕에 부딪혀 울렸다⁠. 그라운드에서 내야 흙을 고르던 직원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석배는 노트북을 탁 덮었다⁠. 덮는 소리가 화면 팬 소리를 한 번 끊었다⁠.

“⁠알았어요⁠. 덮을게요⁠. 형 말대로⁠.⁠”

석배가 일어났다⁠.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근데 형⁠. 덮는 건 제가 해도⁠, 아는 건 못 지워요⁠.⁠”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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