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09자)

빨간 카드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토요일 오후 세 시⁠, 덕아웃 화면은 꺼져 있었다⁠. 경기 전 점검 시간이라 팬 소리도 없었다⁠. 대신 바다에서 크레인 소리가 건너왔다⁠. 연안부두 부두에서 컨테이너를 내리는 소리였다⁠. 쇠가 쇠에 닿을 때마다 낮게 쿵 울렸다⁠.

석배는 화면 아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노트북⁠, 조끼 지퍼는 반쯤 열려 있었다⁠. 빨간 카드 모서리가 지퍼 사이로 보였다⁠. 우철이 계단을 내려오자 석배가 고개를 들었다⁠. 밤을 새운 얼굴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잔 얼굴이었다⁠.

“⁠형⁠, 와이프한테 말했어요⁠.⁠”

“⁠뭐래⁠?⁠”

“⁠안경 만지지 말고 하래요⁠. 만지면 지는 거래요⁠.⁠”

석배가 웃었다⁠. 우철도 웃었다⁠. 석배가 노트북을 열었다⁠. 메일 쓰는 화면이었다⁠. 받는 사람 칸에 해동리그 규정위원회 주소가 들어가 있었다⁠. 첨부 파일이 셋이었다⁠. 3월 28일 기록⁠, 8월 2일 기록⁠, 경팔의 사진⁠.

“⁠아직 안 보냈어요⁠. 형 보는 앞에서 보내려고요⁠.⁠”

계단 위에서 운동화 소리가 났다⁠. 빠르게 내려왔다⁠. 세겸이었다⁠.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었고⁠, 화면에 접속 알림이 떠 있었다⁠. 「⁠덕아웃 복구 장치 · 위석배 계정 · 기록 내보내기 시도⁠」

“⁠위 코치님⁠,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여기서 하세요⁠, 단장님⁠.⁠”

세겸이 우철을 한 번 보았다⁠. 우철은 벤치 끝 배트 걸이 옆에 앉았다⁠. 늘 앉는 자리였다⁠. 세겸은 덕아웃 한가운데⁠, 꺼진 화면 앞에 멈췄다⁠.

“⁠위 코치님⁠. 청람이 AI 분석 팀장을 찾습니다⁠. 선수 출신에⁠, 데이터 공부하신 분⁠. 위 코치님 같은 분이요⁠. 연봉은 지금의 세 배입니다⁠. 아기 태어나는 달부터 출근하시면 되고⁠, 출산 휴가 석 달도 넣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석배가 노트북 위에 손을 얹었다⁠. 세겸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이 메일 보내시면⁠, 청람은 위 코치님을 소송합니다⁠. 장비 무단 접근⁠, 영업 비밀 유출⁠. 해무는 위 코치님을 해고하고요⁠. 리그 조사는 몇 달 걸리고⁠, 그동안 위 코치님 이름이 기사에 나갑니다⁠. 데이터 코치가 회사 기밀을 빼냈다고요⁠. 다음 직장은 없습니다⁠.⁠”

“⁠다 아시네요⁠.⁠”

“⁠숫자는 다 기억합니다⁠.⁠”

“⁠단장님⁠.⁠”

석배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만지지 않았다⁠.

“⁠3월에 숫자 바꾸실 때 왜 저한테 안 시키셨어요⁠? 저 데이터 코치잖아요⁠. 제가 하면 기록에 단장실 말고 제 이름이 남았을 텐데요⁠.⁠”

세겸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크레인 소리가 한 번 쿵 울렸다⁠.

“⁠위 코치님은 하셨을 겁니다⁠. 시켰으면⁠. 성과급 때문에라도요⁠. 그래서 안 시켰습니다⁠.⁠”

“⁠왜요⁠?⁠”

“⁠하고 나서 위 코치님이 매일 밤 그 화면을 보실 테니까요⁠.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저 혼자 보면 되는 화면이었어요⁠.⁠”

석배가 한참 세겸을 보았다⁠. 그러고는 노트북 화면으로 눈을 내렸다⁠. 손가락이 마우스 패드 위로 갔다⁠. 보내기 단추를 눌렀다⁠. 딸깍⁠. 작은 소리였다⁠.

화면에 글자가 떴다⁠. 「⁠전송 완료⁠」

세겸은 「⁠전송 완료⁠」를 보고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경기는 하셔야죠⁠. 오늘은 아직 해무 코치시니까⁠.⁠”

세겸이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카드는 쓰지 마시고요⁠.⁠”

석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끼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

경기 전 라인업이 올라오자 덕아웃이 웅성거렸다⁠. 우철의 이름은 다시 맨 아래였다⁠. 「⁠9⁠. 배우철 · 기대 출루 0⁠.08⁠」 세겸이 말한 그대로였다⁠. 고참 포수가 화면을 보고 혀를 찼다⁠.

“⁠항로 형님이 또 철이 없어졌네⁠.⁠”

“⁠원래 철이 없었어요⁠. 철든 척하게 만든 거고요⁠.⁠”

석배가 말했다⁠. 덕아웃이 조용해졌다⁠. 고참들이 석배를 보았다⁠. 석배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화면 앞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강화의 경팔이었다⁠. 문자 한 줄이었다⁠.

「⁠위 병장 오늘 쏴라⁠」

석배가 화면을 우철에게 보여 주었다⁠.

“⁠저 병장 아닌데요⁠. 상병 제대했는데⁠.⁠”

“⁠총괄님 눈에는 다 병장이야⁠.⁠”

*

6회가 끝날 무렵 우철의 휴대전화에 사진 한 장이 왔다⁠. 미강이었다⁠. 3루 응원석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탄우가 리틀야구단 친구 둘과 스케치북을 펼쳐 들고 있었다⁠. 매직으로 큼직하게 쓴 글자였다⁠. 「⁠석배 삼촌 지퍼 열어⁠」

「⁠탄우가 쓴 거야⁠. 나는 말렸어⁠」 「⁠말렸는데 매직은 당신이 사 줬지⁠」 「⁠매직은 숙제용이야⁠」

미강이 한 줄을 더 보냈다⁠.

「⁠얼음 챙겼어⁠? 오늘 들면 당신 나가잖아⁠. 나가면 휘두르잖아⁠」

우철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챙겼어⁠」 거짓말이었다⁠. 미강은 읽음 표시만 남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의찬이었다⁠. 강화 2군 숙소 번호였다⁠.

「⁠선배님 저 강화에서 중계 봐요 휴대폰으로⁠」 「⁠석배 코치님 오늘 들어요⁠?⁠」 「⁠들면 저 여기서 소리 지를게요 논에 개구리들 다 깨게⁠」

우철은 「⁠개구리는 밤에 깨 있다⁠」라고 보냈다⁠. 의찬이 웃는 얼굴 그림을 다섯 개 보냈다⁠. 웃는 얼굴들 뒤로 한 줄이 더 왔다⁠.

「⁠선배님 화요일 그 안타 저 아직 못 믿어요⁠. 오늘은 듣고 쳐 주세요⁠」

우철은 휴대전화를 벤치에 엎지 않았다⁠. 화면이 꺼질 때까지 의찬의 문자를 보고 있었다⁠. 화면 아래 의자에서 석배가 조끼 지퍼 고리를 엄지로 굴리고 있었다⁠. 짤랑⁠, 짤랑⁠. 우철은 귀를 열어 둔 채 짤랑 소리를 들었다⁠.

*

8회 말⁠, 해무는 3 대 4로 지고 있었다⁠. 2사 만루였다⁠. 5위 무등 썬더스와는 반 경기 차였다⁠. 마운드에는 한양 블레이즈의 셋업맨이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투수⁠, 공 끝이 무거운 투수였다⁠.

화면이 깜박였다⁠.

“⁠대타⁠, 등번호 6⁠.⁠”

스피커가 백업 내야수의 등번호를 불렀다⁠. 스물아홉 살 백업 내야수가 헬멧을 집다가 석배를 보았다⁠. 덕아웃 전체가 석배를 보았다⁠. 석배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마운드를 보고 있었다⁠.

우철은 눈을 감았다⁠. 관중석 함성 밑으로 소리를 찾았다⁠. 셋업맨의 연습 투구가 미트에 꽂혔다⁠. 탕⁠. 다음 공도 탕⁠. 세 번째 공에서 소리가 달라졌다⁠. 투수가 공을 놓는 순간 짧게 으읍⁠, 하고 신음을 냈다⁠. 직구 때만 내는 소리였다⁠. 앞의 두 공은 소리가 없었고⁠, 둘 다 슬라이더였다⁠.

“⁠석배야⁠.⁠”

“⁠알아요⁠, 형⁠. 저도 들었어요⁠.⁠”

석배가 일어났다⁠. 조끼 안에서 빨간 카드를 꺼냈다⁠. 넉 달 동안 지퍼 안에 있던 카드는 모서리가 하나도 닳지 않았다⁠. 석배가 카드를 손에 쥐고 계단을 올라갔다⁠. 한 칸⁠, 두 칸⁠. 계단 끝에서 잠깐 멈췄다⁠. 뒷모습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숨을 들이마신 것이다⁠.

석배가 주심 앞에 카드를 들어 보였다⁠.

관중석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해무 마린스 사람 카드 사용 — 대타 배우철⁠」 넉 달 만에 처음 뜬 글자였다⁠. 3루 응원석이 일어났다⁠. 휴대전화 플래시가 하나둘 켜졌다⁠.

스피커가 말했다⁠.

“⁠사람 카드 사용이 확인되었습니다⁠. 기대 승리 확률 하락⁠.⁠”

우철은 헬멧을 썼다⁠. 배트 걸이에서 개막전 공 자국이 남은 배트를 뽑았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석배와 마주쳤다⁠. 석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형⁠, 못 치면 저 진짜 숫자도 사람도 다 틀린 사람이에요⁠.⁠”

“⁠치면⁠?⁠”

“⁠치면 사람만 맞은 사람이요⁠.⁠”

“⁠그거면 됐다⁠.⁠”

*

타석의 흙이 말라 있었다⁠. 8월 끝의 바닷바람은 습기가 적었다⁠. 스파이크 밑에서 흙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우철은 귀덮개를 손가락으로 한 번 눌렀다 뗐다⁠.

초구⁠. 투수가 공을 놓았다⁠. 소리가 없었다⁠. 슬라이더였다⁠. 우철은 보냈다⁠. 바깥으로 빠져 볼⁠.

두 번째 공⁠. 소리가 없었다⁠. 슬라이더가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우철은 엉덩이를 뒤로 빼며 보냈다⁠. 스트라이크⁠.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세 번째 공⁠.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면서 어깨를 크게 들어 올렸다⁠.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마운드에서 소리가 왔다⁠. 으읍⁠.

직구⁠.

우철은 왼발을 내디뎠다⁠. 오른쪽 팔꿈치가 뜨거운 실을 당겼다⁠. 반만 휘두르려고 했다⁠. 배트가 공을 만나는 순간 반으로는 모자랐다⁠. 팔이 조금 더 따라 나갔다⁠. 실 하나가 더 당겨졌다⁠.

딱⁠.

공이 2루수 옆을 빠져 중견수 앞으로 굴러갔다⁠. 3루 주자가 들어왔다⁠. 2루 주자가 3루를 돌았다⁠. 중견수의 송구가 홈으로 날아갔다⁠. 주자의 손이 먼저 홈 플레이트를 쓸었다⁠.

5 대 4⁠.

1루를 밟은 우철은 숨을 몰아쉬었다⁠. 오른팔을 내려뜨린 채 1루 코치의 장갑에 왼손을 맞부딪쳤다⁠. 오른손은 들지 않았다⁠. 덕아웃을 보았다⁠. 석배가 계단 위에서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안경이 코끝까지 흘러내려 있었는데 올리지 않았다⁠.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배우철 대타 통산 103호 안타 · 리그 최다까지 하나⁠」

해무는 9회를 막고 5 대 4로 이겼다⁠. 5위와 승차가 없어졌다⁠.

*

경기 뒤 휴대전화가 줄줄이 울렸다⁠. 「⁠연안부두 늙은 갈매기들⁠」 단톡방에 글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석배가 들었다⁠!⁠!⁠!⁠!⁠」 「⁠넉 달 만에 지퍼 열림⁠」 「⁠석배 안경 흘러내린 거 봤냐 ㅋㅋㅋ⁠」 「⁠오늘부터 석배 코치 형님이라 부른다⁠」

단톡방 위로 기사 알림이 하나 떴다⁠. 「⁠[속보] 해동리그⁠, 해무 마린스 ‘⁠AI 감독 숫자 조작⁠’ 의혹 조사 착수⁠」 기사 아래에 한 줄이 붙어 있었다⁠. 「⁠청람테크 “⁠구단 운영 방침을 입력했을 뿐⁠, 조작 아니다⁠”⁠」

덕아웃 텔레비전에 같은 자막이 떴다⁠. 경기 하이라이트 대신 뉴스 화면이었다⁠. 3월 28일 밤 단장실 창의 불빛 사진이 흐리게 처리되어 나왔다⁠. 경팔의 사진이었다⁠.

선수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고참 포수가 리모컨을 들고 소리를 키웠다⁠. 앵커의 목소리가 덕아웃에 퍼졌다⁠. 「⁠구단이 AI 감독의 계산에 베테랑 선수의 나이와 연봉을 불리하게 반영하도록 숫자를 바꿨다는 의혹으로⁠…⁠」

계단 위에서 운동화 소리가 내려왔다⁠. 세겸이었다⁠. 이번에는 운영팀장과 경호원 둘이 같이 내려왔다⁠. 선수들이 텔레비전에서 고개를 돌렸다⁠.

세겸은 석배 앞으로 걸어갔다⁠. 석배는 화면 아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위석배 코치님⁠. 구단 장비 무단 접근과 기밀 유출로 오늘부로 해고합니다⁠. 청람은 내일 손해배상 소송을 냅니다⁠. 개인 물품은 운영팀이 내일 댁으로 보내 드립니다⁠.⁠”

덕아웃이 얼어붙었다⁠. 고참 포수가 벤치에서 반쯤 일어났다⁠. 우철이 고참 포수의 팔을 잡았다⁠.

“⁠카드 주시죠⁠.⁠”

세겸이 손을 내밀었다⁠. 석배는 조끼 주머니에서 빨간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세겸의 손에 올리지 않고 화면 아래 접이식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넉 달 전 경팔이 그랬던 것처럼⁠.

세겸이 카드를 집어 투수 코치에게 건넸다⁠. 투수 코치는 받아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내일부터는 투수 코치님이 덕아웃의 사람입니다⁠.⁠”

투수 코치가 카드를 들고 우물쭈물했다⁠.

“⁠단장님⁠, 저는 카드 쓰는 법을 모르는데요⁠.⁠”

“⁠그래서 맡깁니다⁠.⁠”

석배가 노트북 가방을 멨다⁠. 덕아웃 계단으로 가다가 화면을 돌아보았다⁠. 경기가 끝난 화면에 오늘 경기 분석이 떠 있었다⁠.

「⁠경기 결과 분석 · 사람 카드 사용 1회 · 결과 기여⁠: 우연⁠」

석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덕아웃 지붕이 울릴 만큼 크게 웃었다⁠. 웃다가 안경을 벗어 눈가를 닦고⁠, 다시 쓰고⁠, 계단을 올라갔다⁠. 우철은 벤치 끝에서 석배의 운동화 소리를 마지막 계단까지 들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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