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614자)
쓰지 마시고요
AI 감독의 구단 라인업 · 여오령
화요일 밤 8회 초, 한 점 차로 지고 있었다. 해무 덕아웃 바닥에는 해바라기씨 껍질이 하나도 없었다. 경팔이 강화로 떠난 뒤 사흘째였다. 껍질 깨지는 소리가 빠진 덕아웃은 이상하게 넓었다. 우철은 벤치 끝에서 빈자리를 귀로 더듬다가, 대신 들어온 소리를 하나 찾았다. 석배가 뜯는 견과류 바 포장지 소리였다. 석배는 긴장하면 단것을 씹었다.
8회 말 해무 공격, 1사 1루에서 달구벌 버팔로즈가 왼손 투수를 올렸다. 화면이 깜박였다.
“대타, 도의찬. 기대 출루 0.31.”
의찬이 헬멧을 썼다. 이번에는 끈을 한 번에 맸다. 우철은 불펜에서 몸을 풀던 왼손 투수의 공 소리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다. 연습 투구 여덟 개 가운데 여섯 개가 바깥쪽 낮은 데로 갔고, 미트가 받는 소리가 매번 같았다. 같은 자리만 노리는 투수였다. 바깥쪽 공만 기다리면 됐다.
우철은 석배 옆으로 갔다. 석배는 태블릿 두 개를 무릎에 얹고, 빨간 카드는 조끼 안주머니에 넣어 지퍼까지 채워 두었다.
“석배야. 저 투수 바깥쪽만 던진다. 의찬이는 몸쪽을 잘 치는 애고.”
“알아요, 형. 항로도 알아요. 그래도 0.31이에요. 형은 0.09고.”
“지난주엔 0.11이었는데 더 내려갔네.”
“나이가 한 주 더 먹었잖아요.”
석배는 농담을 하고 나서 웃지 않았다. 의찬이 타석에 들어갔다. 초구는 바깥쪽 낮은 공, 의찬이 헛스윙했다. 두 번째도 바깥쪽 낮은 공, 또 헛스윙이었다. 세 번째 공에 배트가 반쯤 나가다 멈췄고 주심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삼진이었다.
해무는 2 대 3으로 졌다.
*
경기가 끝난 덕아웃에서 선수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화면이 경기 분석을 띄웠다. 「8회 대타 선택 적절 · 결과 불운」
“불운이래.”
우철이 화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석배가 견과류 바 포장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형, 진짜 몰라서 그래요? 이거 들면 저 끝이에요.”
석배가 조끼 지퍼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카드가 든 자리였다.
“와이프 칠 개월이에요. 계약서에 항로 승률 목표 넘기면 성과급이 연봉 두 배로 붙어요. 저 그거 받으려고 포수 그만두고 대학원 다닌 거예요. 형이 그 마음 알잖아요.”
“알지. 원정 가서 밤마다 논문 읽던 거 내가 다 봤지.”
“그럼 들라고 하지 마요.”
“들라고 안 했다. 저 투수 바깥쪽만 던진다고 했지.”
“그게 들라는 말이에요.”
석배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우철은 대답하지 않고 벤치 끝의 배트를 하나 뽑아 손잡이의 테이프를 엄지로 문질렀다. 테이프가 땀에 절어 끈적했다.
라커룸으로 가는 복도에서 의찬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가 화면을 우철에게 내밀었다. 해무 팬 단톡방 「연안부두 늙은 갈매기들」의 캡처였다. 누군가 퍼 와서 숏폼 댓글에 붙여 둔 것이었다.
「사람 카드 어디 갔냐」 「석배 코치 손에 본드 발랐냐」 「배우철 벤치에서 귀만 커지는 중」 「귀 커지는 건 나이 들어서 그래 형님」
“선배님, 귀 커지는 건 진짜예요? 나이 들면?”
“너도 커진다. 오래 살면.”
*
연안부두 상가 2층 한방 배팅장은 밤 열 시에도 기계 다섯 대가 다 돌았다. 철망 너머에서 공이 날아오는 소리, 배트에 맞는 소리, 빗맞은 공이 그물에 처박히는 소리가 뒤섞였다. 미강은 계산대 뒤에서 기계 공 바구니를 무릎으로 밀며 노트북의 대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자 납입일 4월 15일」
“왔어? 벤치 중인 남편.”
“벤치도 일이야.”
“일이면 월급이 나오지. 단장님이 그러더라. 은퇴하면 2군 타격 코치 삼 년, 배팅장 벽에 구단 광고 하나 달고 광고비 매달 준다고. 그게 다 일 아니야?”
우철은 계산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오른쪽 팔꿈치를 계산대에 올렸다가, 미강의 눈이 팔꿈치로 가자 슬그머니 내렸다.
“단장이 왜 당신한테 먼저 전화를 해?”
“당신이 안 받으니까. 당신 전화는 벤치에 엎어 놓잖아. 그것도 단장님이 아시더라.”
“다 아는 단장이네.”
“다 아는 단장님이 나한테 그러더라. 남편분 설득해 주시면 서로 좋다고. 서로 좋은 거, 나는 좋던데?”
“나는 안 좋은데.”
“당신은 안 좋은 게 아니라 안 끝난 거지.”
미강이 바구니를 탁 내려놓았다. 4번 타석에서 기계 공이 철망에 부딪혀 덜컹거렸다. 탄우가 포수 미트를 끼고 4번 기계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기계가 던지는 시속 80킬로미터짜리 공을 받아 바구니에 던져 넣고, 또 받아 던져 넣었다. 미트 소리가 탕, 탕, 맑았다.
“탄우가 금요일엔 아빠 나오냐고 물어보래. 나한테 시켜. 자기가 안 물어보고.”
“금요일은 몰라.”
“모르는 게 당신 대답이야. 개막전 끝나고 탄우가 반 애들한테 백 번째 안타 영상 스무 번 보여 줬대. 근데 그다음 날부터는 안 보여 준대. 왜냐고 물으니까 아빠가 또 나오면 그때 보여 준다고.”
우철은 4번 철망을 보았다. 탄우가 미트를 두 번 주먹으로 두드렸다. 공이 안 올 때 아이가 하는 버릇이었다. 우철도 리틀야구에서 포수를 하던 시절에 똑같은 버릇이 있었다.
“이자 날이 다음 주야.”
미강이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보여 주었다. 숫자가 둘 떠 있었다. 남은 원금과 이번 달 이자였다. 우철은 숫자를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올해까지만 치자.”
“당신 팔꿈치는 올해까지 칠 수 있대?”
미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우철은 웃었다. 웃음 주름이 눈가로 깊게 접혔다.
“팔꿈치가 나보다 고참이야. 지가 알아서 하겠지.”
*
목요일 경기도 한 점 차로 졌다. 9회 말 2사 만루에서 항로가 다시 의찬을 골랐고, 석배의 손이 조끼 지퍼까지 갔다가 내려왔다. 지퍼 고리가 짤랑, 하고 한 번 울렸다. 벤치 끝의 우철은 짤랑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의찬은 2루 땅볼을 쳤다.
덕아웃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뉴스가 돌았다. 「청람테크, AI 감독 바다 건너 리그 두 곳에 수출 협상」 자막 아래로 해무 성적이 지나갔다. 「해무 1승 3패, 1점 차 패배만 셋」 맨 밑에 경제 소식 한 줄이 붙었다. 「해무해운 선원 노조, 연안부두에서 임금 체불 집회」
구장 밖 연안부두에서 확성기 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왔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고, 북소리만 둥, 둥 들렸다.
*
금요일 아침, 단장실은 덕아웃 위층 맨 끝에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그라운드가 통째로 내려다보였다. 잔디 깎는 기계가 외야를 한 줄씩 밀고 다녔고, 깎인 풀 냄새가 환풍구로 올라왔다. 세겸은 커다란 책상 대신 창가의 높은 탁자에 서서 태블릿을 넘기고 있었다.
“앉으시죠, 배 선수님.”
“서 있겠습니다.”
“그럼 저도 서 있겠습니다.”
세겸이 태블릿을 탁자에 엎었다. 창밖을 등지고 우철을 보았다.
“일요일 경기 끝나면 1군에서 말소합니다. 강화로 내려가셔서 몸 만드시죠. 추 코치님이 계시니 외롭지는 않으실 겁니다.”
“이유가 뭡니까?”
“항로가 그렇게 말합니다. 4월 대타 기여도가 우리 선수단 맨 아래입니다.”
“개막전에 끝내기를 쳤는데요.”
“사람 카드로 나가서 치신 거죠. 항로는 그 타석을 우연으로 분류했습니다.”
“항로는 말을 안 합니다. 화면에 글자가 뜨는 거죠. 말은 단장님이 하시고요.”
세겸이 잠깐 웃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맞습니다. 말은 제가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방에 있습니다.”
책상 위에서 휴대전화가 길게 떨렸다. 세겸이 화면을 보고 우철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인 뒤 받았다.
“네, 한세겸입니다. 네. 9월 말이요. 압니다. 압니다. 네, 날짜는 안 바뀝니다.”
통화는 일 분도 안 돼 끝났다. 세겸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을 때 손가락 끝이 하얬다. 전화기를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어디서 온 전화입니까?”
“배 선수님 연봉을 주는 회사의 연봉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말이 어렵네요.”
“쉽게 하면 듣기 싫으실 겁니다.”
세겸이 창밖을 보았다. 연안부두에서 집회 북소리가 다시 둥, 둥 올라왔다.
“배 선수님, 저는 배 선수님 미워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2013년 6월에 그 2루타 보고 저 집에 가서 3루수 글러브 샀습니다. 근데 지금 저한테 배 선수님은 연봉 칠억 원짜리 대타입니다. 대타 한 타석에 얼마인지 제가 계산해 드릴까요?”
“됐습니다.”
“일요일입니다. 일요일 경기는 항로가 정하는 대로 하시고, 끝나면 짐 싸시면 됩니다. 은퇴식은 언제든 다시 잡아 드립니다.”
우철은 단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 끝 계단을 내려가는데 오른쪽 팔꿈치가 계단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시큰거렸다. 우철은 왼손으로 손잡이를 바꿔 잡았다.
*
금요일 오후, 라커룸에 청람 부사장이 왔다. 회색 운동화에 검은 정장 차림으로, 손에 리모컨을 쥐고 화면 앞에 서 있었다. 「항로와 함께하는 2032 · 선수단 설명회」라는 글자가 떴다. 선수들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와서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항로는 하루에 투구 오만 개를 다시 봅니다. 여러분이 잠든 사이에도 여러분을 공부합니다.”
“잠든 사이에 공부하면 저도 좀 해 주세요. 영어요.”
의찬의 말에 라커룸이 웃었다. 부사장도 따라 웃고 리모컨을 눌렀다. 공 속도, 회전, 타구 각도가 색색의 점으로 흩어졌다. 맨 뒷줄에서 열네 해째 해무 마운드를 지킨 왼손 고참 투수가 손을 들었다.
“항로가 제 공도 좋아합니까?”
“항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대할 뿐입니다.”
“우리 마누라랑 똑같네.”
다시 웃음이 터졌다. 우철은 웃지 않고 손을 들었다.
“항로는 소리를 듣습니까? 미트 소리, 투수 숨소리 같은 거요.”
부사장이 친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소리는 잡음입니다, 선수님. 구장마다, 관중마다 달라서 숫자로 못 씁니다. 항로는 잡음을 걸러 내고 신호만 봅니다.”
“그럼 저는 잡음이네요.”
라커룸이 조용해졌다. 부사장이 리모컨을 내리고 웃었다.
“선수님은 귀한 기록이시죠.”
설명회가 끝나고 선수들이 빠져나간 뒤에도 화면에는 색색의 점이 떠 있었다. 우철은 맨 앞자리에 남아 점을 보았다. 점들 사이로 라커룸 환풍기 소리가 지나갔다. 점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
토요일 밤, 배팅장 문을 닫고 미강과 탄우를 먼저 올려 보낸 뒤 우철은 계산대에 앉아 배트를 닦았다. 마른 수건으로 손잡이 테이프를 닦고, 배트 몸통의 공 자국을 하나씩 문질렀다. 개막전에 친 공 자국은 아직 하얗게 남아 있었다.
계단 아래 셔터를 누가 두드렸다. 석배였다. 편의점 봉지에 캔 맥주 둘과 견과류 바를 담아 왔다.
“형, 일요일 비 온대요.”
석배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날씨 앱에 파란 우산이 떠 있었다. 「일요일 인천 · 오후 비 80%」
“비 오면 취소냐?”
“늦게 오면 하다가 멈추겠죠. 형.”
“응.”
“저 일요일에도 못 들어요.”
석배가 캔을 땄다. 칙, 하고 거품이 넘쳤다. 우철은 배트를 무릎에 가로로 눕히고 석배를 보았다. 원정 숙소에서 여섯 해 동안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얼굴이었다. 숙소를 따로 쓴 뒤로 안경테만 두꺼워졌다.
“안 들어도 된다.”
“진짜요?”
“대신 내가 헬멧 쓰고 화면 앞에 앉아 있을 거다. 일요일 마지막 이닝까지. 네가 화면 볼 때 나도 볼 거고, 네가 카드 만질 때 나는 그 지퍼 소리 들을 거다.”
석배가 맥주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캔을 내려놓았다.
“형, 그게 더 무서워요.”
“알아.”
우철은 배트를 들고 일어났다. 4번 기계의 전원을 켜고 헬멧도 없이 타석에 들어갔다. 기계가 윙 소리를 내며 공을 물었다. 공이 날아왔다. 우철은 배트를 내지 않고 공이 그물에 꽂히는 소리를 들었다. 탕. 맑았다.